교통사고의 어떤 결말

양로원 앞에서 길을 건너던 할머니를 치여 숨지게 한 트럭 운전자가 5천불의 배상금을 물다.

트럭에 치여 숨진 그 할머니의 유가족들은 그 운전자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을 나서서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알프레드 프라이스’라는 그 트럭 운전자는, 어쨋던, 자기 트럭에 치인 마가렛 스튜어트 할머니가 뉴질랜드 해밀턴시의 한 도로에서 사망하던 순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프라이스씨는 트레일러가 달린 큰 트럭을 운전하여 배달장소에 도착한 후에 입구를 찾는 중에 잠시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91세의 스튜어트 할머니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프라이스씨가 정신을 차려 횡단보도를 보았을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할머니는 트럭에 치인 후였습니다.

프라이스씨는 지난 목요일 해밀턴법원에서 과실치사에 대한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케시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에게, 할머니 유족들에게 5천불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언도 했습니다.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의 변호사가 제출한, 운전면허 유지를 위한 청원서를 받아 들여 허가 했습니다. 프라이스씨는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에 일어났던 이 사고는 그 트럭 전방에 설치된 카메라에 녹화되었습니다. 그 영상에 따르면 프라이스씨는 시속 약 30킬로미터로 서행하고 있었으며, 또한 경찰도 밝히기를, 초록색 신호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트럭을 운전했었던 것으로 영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라이스씨와 그의 부인은, 지난 5월, 법무부가 마련한 만남의 장소에서,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의 가족들과 만났습니다. 그는 유가족들에게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주저없이 돌아가신 분과 나의 자리를 바꾸겠다’고 하며 사죄하였습니다. 프라이스씨가 써 온 편지를 돌아가신 할머니의 조카딸이, 할머니의 오빠, 즉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 읽어 주었습니다.

경찰은 운전면허취소를 하지 않겠다면 징역형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법원에 권고하였지만, 윌슨판사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윌슨판사는, 운전자 프라이스씨의 무과실 운전경력, 사람들이 증언하는 그의 인간됨, 그가 처음부터 유죄를 주저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지난 5월에 있었던 스튜어트 할머니 유가족과의 만남의 결과를 모두 고려하였습니다.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는 면허정지 처벌을 받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사고로 크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가족은 물론 유가족까지도 당신을 돕고 싶어 합니다. 어쩔수 없는 사고였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사고는 그 62세의 트럭운전자에게 처음있는 사고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 가족들과 프라이스씨 가족이 서로 알게 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두 가족들은 법정에 나란히 앉아서 판사의 선고를 기다렸습니다. 유가족들은 (할머니의 오빠, 시누이 그리고 두 조카) 판사에게 운전자 프라이스씨가 운전면허를 정지 당하거나 감옥에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법정을 빠져 나오니, 프라이스씨가 밖에 주차해 둔 자신의 차에서 가족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유가족들도 기꺼이 동의했다고 합니다.

‘우린 그를 용서했어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한 조카가 말합니다. ‘그가 잘못했던 것이 아니예요. 내가 바로 지금 차를 주차하다가도 이런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또 다른 조카의 말입니다. ‘할머니는 체구가 조그만, 우리에게는 소중한 분이었어요.’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는 미혼에 자식도 없었다고 합니다. 늙은 부친을 돌아가실 때까지 뒷바라지 했었던 딸이었다고 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을 가지고도, 그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했었고 또한 그들은, 돌아가신 할머니도 기꺼이 받아 들이실 훌륭한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그런식으로 일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물론 않으셨겠지만, 어쩌면 사랑하는 남은 가족들과 또한 다른 한 가족의 가장이기도 할 그 가해자가,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받아들이고 잘 마무리 하기를 바라셨으리라 짐작해요.

그 할머니의 바램을, 남은 사람들이 (피해자, 가해자, 그 가족들, 법원 그리고 경찰까지도) 훌륭한 방식으로 실행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었더라면 무슨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두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이미 지나버린 그리고 아무도 되돌릴 수 없는 그 과거의 일에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의 무덤을 찾을때마다 사람들은 원망과 비통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겠지요. 자주 찾기도 어려워질 것이고요. 그리고 감옥을 나온 그 운전자는 더 이상 직장을 구할 수도 없고, 어쩌면 흠뻑 뒤집어 썻던 그 차가운 원망과 비난의 소나기 속에서 술이나 마시다가 뒤늦게 이혼 당하고 쓸쓸히 병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할머니가 기뻐했을까요?

그 벌금으로 유가족들은 아마도 할머니의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드렸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자주 찾아가서 꽃을 놓으며 할머니의 예뻣던 과거의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떠올리며 ‘아! 그 운전자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싶어요. 이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또 조금만 지나면 까맣게 잊혀질 이 사람들이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있지 싶어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이 우리가 익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어쩌면 지난 과거에 어떤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있지 않겠어요?

오늘 그대와 나는 어떤 선택의 상황에 놓여질까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 운전자가 그리고 유가족들이, 그 사고 전에, 아무렇게나 트럭을 몰며 또 서로 함부로 다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이었었다면, 그 할머니의 바램을, 듣지도 또 실행할 힘도 능력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오늘,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 선택을 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이미 쌓여 있는 과거의 카르마를 조금이라도 줄일 선택을 하세요. 그래야 가볍게 왔다가 가볍게 갈 수가 있을꺼예요. 길가에 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처럼…

스톡홀름 마라톤

아를란다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정오가 좀 지났다. 시간을 10시간 뒤로 돌릴 만큼 길고 힘든 여행이었다. 아내도 일단 안심할 것이다. 참으로 오고 싶어 했던 곳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마음속에서 간직하며 그리워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늘 흥미로워 하였다. 지금은 없어진 그 멋진 SAAB 자동차도 그 대학도시들도 또 영화들도. 어린시절 나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그 예뻣던 스웨덴 소녀는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만나지 않는 것이 낫겠지만 이곳은 늘 생각하면 즐거운 내 마음의 작은 사치라 할 수 있다.

나는 작은 백팩을 매고 흡사 늘 그랬었던 것처럼 시내로 들어 가는 기차를 탄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와 일상이 마치 내가 전에 일부였었기라도 한 듯 익숙하다. 고색창연한 중앙역 건물을 빠져 나와 호텔 방향의 출구를 따라 거리로 나온다. 21세기 인터넷 기술의 도움으로 수만리 밖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걸어 보았던 익숙한 거리다. 곧바로 호텔을 찾아 들어 간다. 4명의 아가씨들이 리셉션 데스크에서 반겨 주는데 ‘이것이 스웨덴에서 방문객을 환영하는 방식인가요?’ 농담을 하니 모두들 활짝 웃는다. 나를 도와주는 스웨덴 아가씨는, 내가 좋아하는 ‘잉리드 베리만’ 이라는 이름의 장미꽃처럼 참으로 아름답다.

이제 이 도시의 거리들을 내 발로 뛰어 보게 되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며 오래전 읽었던 최인호작가의 ‘깊고 푸른밤’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남자는 차를 몰고 미국을 횡단하며 작은 도시들을 지나며 생각한다. 지금 이 거리를 지나는 저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같은 모습으로 주차를 하고 햄버거를 사며 맥주를 마시고 아이를 낳고 웃고 울다가 죽게 되겠지. 내가 자기들의 삶을 지금 차창밖으로 바라 보는 줄 상상도 하지 못하며 말이다.

어제는 내가 어떤 거리 어떤 일상의 일부였는데 오늘은 어떤 거리 어떤 일상을 바라보는 이방인이 되어 여기에 있다.

이제 출발선에 섰다. 이만명의 다른 사람들도 같은 기대와 희망으로 함께 섰다. 말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고 온 곳도 다르고 갈 곳도 다르다. 이 넓은 우주 그리고 그 끝없는 시간속에서 그야말로 우연히도 잠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속에 서 있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 무슨 기록도 다짐도 목표도 이제 더 이상 없다. 내가 사랑하게 되었던 그 가파른 산길도 끝없이 발랐던 선크림도 또 *을 쌋던 그 길가의 숲도. 난 이 시간을 위해 그것들을 잠시 빌렸을 뿐이었다. 출발전 가슴 두근거리는 작은 흥분…

이 아름다운 도시를 달리고 달려 이제 백년 전 올림픽이 열렸었던 그 스타디움으로 뛰어 들어 온다. 그때 그 올림픽의 함성은 어디로 갔고 또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백년이 지난 오늘 어떤 우연과 또 의지로 내가 이 곳에 오게 되었다. 또 다른 백년이 지난 후에도 또 다른 사람들과 함성들이 이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때 그 함성의 주인들은, 백년 전 오늘 이 순간의 나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삶과 인연이 이렇게 지나가고 또 오가는지… 나의 마라톤은 끝이 났고 나는 절룩거리며 그 공원 옆 호텔로 되돌아 왔다. 파란색 기념 티셔츠를 입고 기념 메달을 목에 걸고서.

유람선을 탄다. 이 바다 그리고 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도시와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낸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내가 아직도 가끔 부르는 동요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그리고 Carola가 부르는 이 아름다운 노래 ‘Song to the North’. 그때 그 펜팔 친구도 지금은 이 가수와 비슷한 중년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대는 잊은지 오래겠지만 난 그 인연으로 이렇게 세월이 흐른 지금 여기에 와 있다네. 그대에게 감사하노라. 행복하시오.

수십 년 전 한때 유학을 꿈꾸었던 그 대학. 일요일의 고요한 캠퍼스를 찾아와 조용히 걸어 본다. 그 단과대학 건물 앞에 섰다. 내가 공부했었었을지도 몰랐던… 지난 수십 년 간 나는 지금 내눈에 보이는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 왔다. 내가 그때 만약 이곳에 왔었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와 나의 인연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인간의 삶은 일부의 숙명과 그 안에서 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부의 작위가 어울려 서서히 무르익으며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우연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되돌아 오는 길에 공원벤치에 앉아 이 이야기를 전부 아는 아내와 문자를 주고 받으며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 나의 삶 나의 인연에 대한 큰 고마움과 더불어,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그 길을 뒤늦게 보게 되면서 생기는 감상적인 아쉬움 때문이리라.

하지만 삶의 본질은 내가 어떤 길을 선택했어도 달라질 수가 없으며,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단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임을 나는 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물어 보았지만 부자건 성직자건 늙은이건 그 누구도 ‘되돌아 가고 싶다’ 라고 대답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어떤 조건속에 던져져 시작 된 우리의 삶. 다만 그 조건속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이나마 인간의 길을 찾고 걷다가 떠나기를 나는 희망할 뿐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오르며 그저께 내가 실로 온 몸으로 그 인연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이 아름다운 도시를 뒤로 한다. 이 사람들은 내일 또 출근을 하고 가구를 만들며 여름휴가를 계획할 것이다. 이곳에는 여름이 깊어가고 또 내가 사는 곳에는 겨울이 깊어가고… 내가 다시 이 여름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운 공원 그 벤치에 다시 앉을 수 있을까? 인연이 허락 하면…

일상의 제자리로 되돌아 오고 나니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던 것 같고 또 내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육개월 전의 내가 아니다. 며칠전 그 이벤트 때문이 아니다. 인연을 따라 내가 그 목표를 ‘선택’ 했었고 또 그것을 내 삶의 중요한 의미로 삼아 노력했었던 그 시간이 나를 변하게 했고 내 삶을 조금은 바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뀌어진 삶은 장차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선택, 어쩌면 더 나은 선택을 허락 할 것이다. 추수 뒤에는 새 봄이 오고 그때 농부는 또 다시 씨를 뿌린다. 세상은 추수에 맞추어 돌아가지만 내 삶은 씨뿌리는 봄 그리고 땀흘리는 여름이 하이라이트. 추수는 선택의 시간이 아니고 지나간 선택의 결과일 뿐. 나는 봄 그리고 여름에 이미 행복을 맛보았다. 그리고 내가 씨뿌리고 땀흘리는 한, 내 여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구두를 닦는다.

아내의 구두를 닦는다. 매일 밤 닦는다.

내일 출근 하면서 신을 신발. 돈도 벌어와서 좋지만, 또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이리저리 뛰어 다닐때 신고 있을 그 신발을. 광내는 기준은 그 옛날 군대서 배운대로, 예쁜 여자를 면회소로 안내하면서 군화를 슬쩍 치마 밑에 넣었을때 그것 색깔 구분이 가능해야…

지금 누워 있다는 그자는 사업의 세계에서는 무하마드알리나 황영조였다. 링위에서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존경 드리고 또 드려도 부족할 분이었다. 그리고 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구두를 사다가 배우자에게 선물할 능력도 있었고. 하지만 이자는 배우자의 구두를 닦으며 느끼는 그런 행복을 아마 느껴 본적도 또 결코 느껴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행복이라고 했다. 구두를 액면 그대로 닦으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자의 지금 상태를 비웃는 것도 아니다.

돈으로 모든 것들을 살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오직 스스로만 할 수 있는, 자기자신을 갈고 닦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사노라면,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점점 잃게 되고 죽기 훨씬 이전에 이미 0점을 기록하게 된다. 보다시피.

그자는 그 천문학적인 돈을 선용해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들을 불러들여 돈버는 틈틈히 참된 행복의 비밀을 알아내기 보다는, 여러명의 창녀들을 돈으로 사고 불러들여 배우자 몰래 노욕을 채우는 삶을 선택 했었다. 그런 선택을 하면서 살면, 어떤 돈으로 무슨 짓을 해도 그런 사랑과 존경을 경험할 수가 없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그 돈으로 속이고 꾸미고 겁박할 수는 있어도 딱 한사람에게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죽었다가 깨어나도 아내의 구두를 닦아 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이러한 가치들과는 정반대 쪽에 설 수 밖에 없게 된다. 그것도 무지 강경한 태도로.

이자보다도 돈이 많은 사람이 세상에 극히 드물지만 있기는 있다. 그들 중 두세명이 말했다. ‘행복과 성공의 가장 중요한 비결은 금슬이라고.’

오늘부터 구두 한번 닦아 보시지. 구두코로 빤스 색깔 구별 못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니.

선택

삶은 끝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하루에도 알게 모르게 수많은 선택을 한다. 어제의 선택이 오늘의 선택을 만들고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선택을 만든다. 그것이 지속된 결과가 나의 모습이며 나의 삶이다.

때로 내게 주어진 것들이 내가 만든 것도 또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은 여전히 내 몫이며 그 결과로 내 삶이 변화하게 된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나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선택에 대해서 생각하고 배우고 또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