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마디로 인간이란 존재를 ‘짬뽕’이라고 정의하겠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지성과 무식, 평화와 폭력, 이기심과 희생심 그리고 맵고 짜고 쓴 맛과 단 맛 등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유리병 속에 기묘하게 뒤섞여 있다가 때와 장소에 따라 이리저리 분출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나는 많이 배우고 성공한 사람들 속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해왔고, 내 수준을 넘는 친구들도 여럿 사귀었으며, 하다못해 골프조차도 가장 성공한 부류들과 어울려 쳐왔다. 도덕적으로 최상위일 것이 기대되고 또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여러 종교의 수행자들과 지도자들도 오랜 세월 알아봤고 만나봤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 중에서 특출하게 뛰어나서 나를 감탄하게 하고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한 그리고 드러낸 학위, 돈 , 직위와 상관없는 수준의 언행을 보였으며, 일부는 그야말로 못된 철부지 아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사람들도 ‘그들의 자리’에서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관료, 학자, 사업가, 의사들일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병 위에 고여있던 향기로운 올리브 기름이 분출되다가, 다른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병 아래 고여있던 (올리브 기름이 덮고 있던) 악취나는 오물이 분출 되는 꼴이 우리 인간의 진면목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증거들이 하도 많아서, 사람들이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대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신기하고 의아하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만큼 (의도적이건 아니건) 속고 속이고, 또 이렇게 이중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묘미가 있고 또 끝없는 도전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차차 깨닫게 된다. 이전에는 이런 인간의 진면목을 단지 혐오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묘미와 도전 그리고 발전에 한가지 조건이 붙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도 나도 ‘짬뽕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조심해야 하겠지 언제 어디서 너와 나의 오물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모르기에. 또 기대도 낮추어 살아야 하겠지. 이런 나를 받아들이듯 그런 너를 또한 받아들여야 하니. 짬뽕이 짬뽕과 뒤섞이는 왕짬뽕 세상이로구나 🙂
밀양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때 뜬금없이 밀양을 찾았다. 영화 ‘밀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중 하나인, 밀양역전에서 교회사람들과 어색하게 어울려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남자주인공 생각이 나서였다. 가는 길에, 밀양역전에 가면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그 찬송가를 부르겠노라 공언하였지만, 정작 찬송가를 기억해 내지 못하여 노래는 못불렀다. 하지만 밀양역과 그 주변을 한동안 함께 걸으며, 이 뛰어난 영화가 내게 던졌던 매시지가 지난 십수년 동안 내 삶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반영이 되고 또 의미가 되어왔던지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 훌륭한 영화를 만든 감독과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 덕분에 ‘밀양’이 나와 인연이 되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찾게되니, 이것도 일종의 코미디랄까 웃기는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번 방문때는 그 중국집 ‘다래현’을 찾아볼 생각이다 🙂
이창동 감독의 수작들인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등은, 1994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수작 ‘포레스트 검프’처럼, 어른이 되고나서 누구나 그리워는 하지만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 좋았던 그때를 주제로 하고 있다. 옛 친구들을 만나며 새삼 깨닫게 되었지만, 나도 그들도 모두 많이 변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때마다, 막연히 그 좋았던 시절을 그리는 마음과 더불어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를 아쉬워 하는 마음도 든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내게 그런 그리움과 아쉬움도 떠올리게 하지만 더불어 인간의 구원 이라는 주제를 함께 다룬 영화다. 인간의 구원. 절망에 처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무었을 통하여 어떻게 몸부림치며 그 절망을 벗어나는가를 (어떻게 dealing하는가를) 잘 그리고 있다.
좋은 영화를 발견하면, 오랜 세월 두고두고 (몇년마다) 다시 보는데 그때마다 나의 해석과 반응 그리고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영화를 여태까지 봤을 때는,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슬픔) 앞에 종교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근본적인) 구원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어젯밤에는 이런 내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30년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또 드물게 내가 존경하게 된 성직자 친구분께서는, 모친 생전에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어머니께 말씀해 주셨는데, 매우 건방지고 웃기는 이야기지만, 어제 나는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도 (그리고 다른 세간의 종교를 통해서도)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 또 표나게 믿는다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거룩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그야말로 (선악의) 짬뽕이며 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잠시 반짝? 가능하다. 주변에 있다. 늘 번쩍?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 없다. 잠시 반짝 했던 것으로 마치 늘 번쩍인 것처럼 ‘척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 인생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만가지 더럽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제 밤 혼자 영화에 몰입하여, 주인공 여자가 절망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으며 찬송가를 부를때 같이 손뼉을 치며 그 교회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도 놀랐다. 미쳤나봐 🙂
이은상 시인이 오래 전에 남긴 ‘가고파’라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덧붙인다.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4절을 가장 먼저 지으셨다는 설도 있다.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어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일하여 시름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니아 깨끗이도 깨끗이
인간과 시간
인간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한가지를 꼽으라면 무었일까? 어떤 뛰어난 사람이 ‘시간’이라고 하던데 나도 동감한다.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좋은 영화들이 여러편 있는데, 오늘은 ‘About Time’이라는 영국영화를 보았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상영되었다고 한다.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매세지는, (영화속 주인공처럼) 설령 타임머신을 타고 마음대로 과거로 되돌아가 자신의 (그리고 자신과 관계된) 과거를 무한정 바꿀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참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보고 나면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별 의미도 없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그리고 주변의) 행복을 증대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바로 지금, 오늘, 현재’에 딱 한 번만 가능한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제목을 잊었는데 언젠가 꽤 재미있게 보았던,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를 다룬 또 다른 영화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천국에 있던 사람들이 결국은 자발적으로 평화로운 종말을 (죽음을)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유머러스하게 그렇지만 정확히 설명하였다. 흔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천국의 모습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 영화가 잘 (그리고 과학적으로) 묘사한데로, (예를들어)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전부 다 여러차례 읽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곳을 수차례 여행하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통달하여 올림픽 금매달을 모조리 따고 나서도, 그 ‘영원’이라는 시간의 극히 일부도 사용하지 못한 꼴이니, 나중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게 되어 결국은 천국이 처음 생각하던 그 천국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며, 이것을 깨닫게 된 천국 입주자들은 결국에는 스스로의 종말을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발적이며 평화롭고 좋은 죽음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들 인생인데…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던지는 매세지를 무시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볼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짐작하건데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좀 다른 (좀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2023년을 시작하며 ‘인간과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적절하다 싶다.
몬시뇰 그리고 결혼계약
‘몬시뇰’은 우리에게 슈퍼맨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1982년도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리고 ‘결혼계약’은 2016년에 방영된 티비 주말드라마입니다. 보았고 또 어쩌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몬시뇰은 언젠가 한번은 글을 올려보겠노라고 이야기 했던 영화입니다. 세상에는 훌륭하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영화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이 영화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영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IMDB에서 서양사람들이 (아마도 미국인들이) 매긴 점수가 10점 만점에 5점 정도로 그야말로 형편없는 어쩌면 중간도 못되는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는 내가 미친 것일까요 🙂 여하튼 내가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것은 부정할 수가 없겠네요.
인터넷 관련 기술의 발달로 옛날에는 가능하지 않았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싸게 가능해진 것들이 있지요? 지나간 티비 드라마를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일것 같네요. 일년에 한 두번 한국 드라마를 볼까말까한 우리부부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여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만큼 감동적으로 보았던 ‘어른들의 동화’ 같은 드라마가 바로 이 드라마 ‘결혼계약’입니다. 물론 ‘묜시뇰’ 보다는 훨씬 한국에 더 알려진, 감수성 있는 어른들이 많이 좋아했다던 통속적인 소재의 티비 드라마 입니다. 이런 통속적인 프리티우먼 백설공주 신데렐라 이야기를, 훌륭한 대본과 연기 그리고 연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요.
묜시뇰과 결혼계약은 만들어진 시기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른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화와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개의 어른 동화에서 크나큰 공통점을 봅니다. 이 두개의 족보가 전혀 다른 드라마들이 인간에게 극히 공통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게 됩니다.
1960년대 혹은 1970년대 미국에 유학했던 우리 선대들이 남긴 이야기들 중에서 한두가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학 식당에서 식판 위에 건드리지도 않은 그 크고 맛있는 오렌지가 식사 후에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의 놀람과 더불어 미국 남녀 대학생들이 한 방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만날때면 방문을 열어 두었다던 이야기 입니다. 그때 당시 그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한국 유학생의 시각은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시각과 다르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이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마치 조선시대에나 일어났을 그런 풍습을 유지했던 것은 문화적 시각적 차이를 떠나 사실로 여겨집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신을 숭배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그 당시 미국인들을 지배했던 삶의 방식이었어요. 물론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보고 듣고 알게된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면들이 있어요.
그저께 우연히 독일국영방송 DW에서 만든 ‘미국의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에 관한 도큐맨터리를 잠시 보다가 무척 놀랐어요. 일대일로 대응하는 한국말이 없어보여서 그냥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라고 했는데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신앙’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요? 침례교냐 장로교냐 이런 종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주어 해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전세계에서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도큐맨터리에 어떤 미국 중산층 가정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러한 삶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십대 중반의 두 딸들은 우리가 아는 통속적인 21세기 미국인들과 한참 거리가 멀어 보었어요. 침대옆 서랍에서 오래된 낡은 책을 보여주는데요 아주 어릴때부터 닳토록 읽어 그야말로 닳고 닳은 성경이었어요. 그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하다못해 아빠가 학교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도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매일 새벽기도를 몇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던 사람들이 문득 떠올랐어요. 어떤 특정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근본주의?) 매우 훌륭한 신자일 그런 사람들과 만약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램 관련 사태들이나 혹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을까요? 아까 이야기한 도큐맨터리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많은 어른들과 학생들이 켄터키 어디에 있다는 노아의 방주를 방문해요. 미국답게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 박물관이에요. 그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언제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역사에 언제 어떻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는지 배우고 또 기억합니다. 참 인간이란 안타까운 존재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실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결과가 ‘비정상’ (?) 이라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묜시뇰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미국의 한 젊고 멋진 천주교 사제가 이차대전을 참전한 후에 로마에 남아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며) 카톨릭 최고 권력에 (?) 다가가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희노애락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이 주어진 어떤 상황 혹은 사회적 구조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친구와 적을 만들고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좌절하며 또한 천주교회 재건을 위하여 교황의 암묵적 동의하에 마피아와 손잡고 아슬아슬한 사업을 벌이며 일어나는, 거룩한 천주교 의복 뒤에 감추어진 정말 있을 법한 인간들의 진면목을 담은 영화입니다. 왜 10점만점에 5점일까요? 그것은 흡사 우리가 어릴때, 부모님의 섹스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부끄럽고 괴로워했던 그런 상황이, 종교와 현실이라는 상황에도 일어난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른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나아가 걸프렌드와 섹스를 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케하는 (?) 자식을 둔 나이가 되고보니,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사랑을 나누셨다는 것에 조금도 거부감이 생기거나 이상하거나 하지 않게 되었어요. 마치 식사를 하셨고 화장실을 가셨었다는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와 마주치게 될때 그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신도들’ 그리고 지금도 미국 어디선가 아마도 ‘방문을 열어두고 남녀가 이야기를 나눌 그 에반젤리컬 크리스쳔들’에게는 큰 혼란과 부끄러움 그리고 괴로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상황을, 어릴때는 그냥 괴로워 했겠지만 어른이 되고 힘이 생기고 나면 그냥 괴로워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넘들의 가짜 진리’를 막으려고 하겠지요. 바로 이 결과가 묜시뇰이라는 탁월한 영화가 IMDB에서 10점 만점에 5점을 받은 이유지 싶네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신도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들이 자유로우며 그들이 사랑으로 자신과 타인들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실까요?
묜시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무었을 만들어 어떤 매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명백히 알고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대본을 (혹은 원작 소설을) 쓴 분 그리고 영화를 만든 분들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이야기를 이미 알았었고 생각했었고 또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었던 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나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40년이 지나서 내 블로그를 통해서 반복하는 것이지 싶네요.
나는 ‘결혼계약’ 드라마를 보고선 그 극본을 쓰신 분의 뒷조사를 (?)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위에서 묜시뇰 영화의 대본을 쓴 분이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분도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분이 미디어에 인터뷰하는 (결혼계약 드라마에 대해서) 것도 읽어 보았어요. 이분이 크리스쳔인지 아닌지 나는 알길이 없지만, 이분은 인터뷰 끝에, 어떤 철학 혹은 믿음이 결혼계약 극본 바탕에 깔려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하셨어요. 누군가 내게, 이 결혼계약이라는 드라마를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 반복 시청하고선 도대체 무었을 보았던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이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에서 해탈을 얻는 과정을 그린 (붓다의 가르침을 표현한) 위대한 현대판 경전이다’ 🙂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교니 사랑이니 붓다의 가르침이니 해탈이니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어요. 그리스도교도 사랑이라는 의미도 또 붓다의 가르침도 해탈이라는 표현도, 우리 인간의 삶이 먼저 있고 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들 인간의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인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먼 미래에도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조건들 속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램도, 사랑을 주고 받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도, 그리고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도 변치 않고 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임에 분명해요.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붓다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은 인간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시고 내 놓으신 일종의 해결책들이 (?)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본질이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엄마와 둘이 사는 7살 은성이도,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멀리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동시에 엄마를 몹시 사랑하며 그 엄마의 행복을 깊이 바랍니다. 은성이는 결국 이 두가지 커다란 마음의 갈등을 이겨내고 스스로 해결하여 해탈에 도달합니다. 엄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닥쳐온 상황을 더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 냅니다. 그 싫어하던 아저씨를 받아들이며 결국은 새 아빠로 삼고 가장 아름다운 부녀의 관계로 발전시킵니다. 한 인간의 해탈을 이렇게 마음에 와닿도록 훌륭하게 표현한 것을 나는 일찌기 보았던 적이 없어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도대체 (현실 속의) 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연기를 극도로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하고 또 뛰어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스래 느낍니다.
남자 주인공 지훈씨의 친모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사람도 아니고 마음이 제대로 밖인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들의 사랑으로 결국은 마음을 비워내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아들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며 기생하고 나아가 자기의 생존을 도모하는 삶의 방식을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참으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해요 (비록 내 몸은 병들어 죽지만) ‘나는 너 덕분에 살게 되었다’. 훌륭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보고 또 그의 대사를 들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밤에 이룬 해탈이 아침에 얼마나 힘이 없는지’ 나는 또한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블로그에 골프 이야기를 몇차례 쓴 적이 있었는데요. 골프 자체가 주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골프의 속성이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것이 주제였던 적이 많았어요. 유튜브 골프 레슨을 보거나, 잠시 연습을 하거나 혹은 새 골프채를 손에 쥐게 되면 골프가 ‘이렇게 하면 되지 싶다’는 일종의 깨달음 혹은 해탈을 (?) 하게 되요. 그런데 그런 해탈이 얼마나 힘이 없고 현실에서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지를 온몸으로 뼈져리게 깨닫는데 필요한 시간을 별로 길지 않아요. 마치 밤에 얻은 깨달음이 다음 날 아침에 (마주치는 현실속에서) 산산조각 나듯이, 다음 라운드를 나가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 (현실자각타임) 속에서 더욱 더 괴로워 지게 되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남자 주인공 멋진 지훈씨는 여자 주인공이 (서로 지극히 사랑함에도 시한부 생명의 짐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지 않으려고) 자신을 밀쳐내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살렸으니 이제 너도 한번 살아봐. 내가 살릴께’ 이렇게 말합니다. 제벌 2세로 제멋대로 살아온 지훈씨. 가난하고 평범하지만 정말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심성을 가진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만나 차차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지훈씨는 주변 모두가 놀라자빠질 자신만의 해탈을 이루어 냅니다. 인생에서 무었이 중요하고 그 중요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힘을 주는지 재대로 맛본 다음부터 이 인간말종은 완전히 변화합니다. 한 인간을 참으로 존경하게 되면서 싹튼 사랑은 세상 그 무었도 막을 수가 없고 그 어떤 손해도 감수합니다. 이전에도 수차례 말했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고,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극작가가 배우의 입을 통해 이야기 하듯이) ‘돈으로 막으려면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해탈하고 나면, 그래서 돈을 진심으로 포기하고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보려는 시도를 진정으로 그만두게 되면, 상대방은 신기하게도 저절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결코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 보지 않아요. 우리 삶의 큰 진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주인공 혜수씨. 신데릴라 입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 시한부 생명. 어린 딸을 위해 모든 것 무슨 짓이던 하고선 세상을 뜰 훌륭한 엄마입니다. 난 남자 주인공 지훈씨가 쓰레기짓을 할때 ‘아 저런 것들을 사람들이 쓰레기 짓이라고 하는구나’ 배운 것이 많아요 🙂 그리고 동시에 ‘어 나도 보통 저렇게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적이 (때로 훌륭한 일이라고 조차 생각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렇게 좀 놀라게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미남에 금수저라는 것만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 지훈씨와 내가 닮은 점이 꽤 많았어요. 그래서 정말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이토록 끌렸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동시에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훈씨와 닮은 점이 많듯이 아내는 혜수씨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혜수씨가 지훈씨를 ‘살게 해 주었듯이’ 어쩌면 아내도 나를 살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러번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산다는 것이 무었일까요? 지훈씨가 혜수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했고, 또 지훈씨 엄마가 아들 지훈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 했는데요, 도대체 이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까 위에서 비유로 말했던, 매일 새벽 기도를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다는 그리스도교인과 내가 마주 앉아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 다난한 일들에 대한 견해를 서로 밝히고선, 전 세계에서 뽑은 수 많은 배운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누구의 견해가 보다 균형 잡혀 있는가 묻는다면, 건방진 말이 되겠지만, 나의 견해가 좀 더 균형 잡히게 들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 사람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또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언행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두 개의 상반된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기울이며 여태껏 살아 왔어요. 이미 말했듯이 인간의 안타까움은 (수십년 매일 새벽기도 같은) 그런 노력과 성취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변화하며 나아가 그런 변화의 영향을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있지 않은가 싶어요. 이처럼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 인생이라, 아마 붓다께서는 ‘삶은 두카’ (불완전, 불만족, 괴로움) 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다시 되돌아가서 ‘살게 해주었다’ 혹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몽고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야생 늑대는 경외의 대상이자 또한 최약의 적이기도 하다고 해요.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추적하여 죽이고 때때로 새끼들을 발견하기도 한다는데요, 태어난지 몇주만 지나도 늑대 새끼들은 절대로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태어난지 며칠이 되지 않은 핏덩이 새끼들을 데려다가 사람들과 가축들 사이에서 기르기도 한다는데요, 한살 정도가 되고 나면 (그동안 그렇게 같이 잘 놀고 좋았던 그 녀석이) 야성을 결코 감출 수가 없어 사람과 가축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가 되어 결국 죽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녀석과의 우정은 (?) 한장의 늑대 가죽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숙명이라네요. 늑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물려받은 DNA가 합쳐서 빚어낸 삶을 살겠지요. 그 드라마에서는 혜수씨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훈씨가 알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그의 형을 그 자리에 대입한다고 똑같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다만 웃음꺼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공평하기도 하지 싶네요. 서론이 길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산다’는 의미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그리고 물려 받은 DNA에 지배되는 그 작은 세계, 좁은 믿음 그리고 굳어진 가치관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세상에 산재하는 다른 환경들 그리고 과거에 살다간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와 믿음 그리고 가치관을 (최소한) ‘볼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무언가 작은 것들이라도 배워서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결과적으로 덜 다투고 더 사랑하고 더 가볍게 왔다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그리고 묜시뇰 영화에서도 많은 등장 인물들이 바로 이렇게 ‘살게 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뛰어나게 그리고 있어요.
두가지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며 오늘 이 길었던 두 편의 드라마 이야기, 내가 생각컨데 가히 최고의 드라마의 이야기를 마칠까해요. 먼저, 위에서 비유로 들었던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 드라마를 보고선 아내에게 비유로 말했어요. 평생 권투를 한 사람의 주먹은 부드러울 수가 없다. 샌드백을 때린 정권과 손에 베인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심신도 다르지 않다. 권투선수에게 부드러운 손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새벽기도 평생한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고 부드럽기를 기대하기 어려움과 같다. 그리고 두번째는, 밤에 얻은 해탈이 아침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나면, 다시 말해 비록 다음날 아침에 산산조각 나는 해탈이나마 하고 또 하면서 시간이 지나노라면,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덜 나든지, 산산조각이 나도 덜 괴롭든지 아니면 산산조각 자체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되든지 하면서 우리도 한 걸음 한 걸음 해탈에 가깝게 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에베레스트 산을 목숨을 걸고 오르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웃기는 존재 입니다. 그 등반을 이 세상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목숨걸고 그 힘들고 위험한 짓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론 그래도 할 사람이 소수는 있겠지요). 어떤 면에서는 해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우리 모두 각자 각자 어떤 시간이 오면 홀로 세상과 작별해야 합니다. 해탈? 그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좋아하는 당신이나 가지세요 🙂
2022 새해 방담
오랜만에 여름다운 여름이 한번 제대로 온듯 연일 폭염에 그 흔하던 바람조차 별로없어 그야말로 환상적인 한여름 날씨가 계속되네요. 이렇게 한여름에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으며 (긴 휴가를 보내면서) 살아온 햇수가 어느듯 한겨울에 그랫던 햇수와 맞먹게 되었어요. 이번 휴가중에는 몇차례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했고 또 초대받아 가기도 하면서 연말 연시를 보냈는데요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저 먹고 마시고 떠들며 취했던 과거와는 달리 무언가를 배우고 또 느끼는 기회가 되는 것 같네요. 더운 여름에 힘들게 음식을 준비했던 아내도 비슷한 생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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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와 제이브는 클럽 챔피언 골퍼 부부입니다. 아름답고 늘씬한 부인은 정말 멋있게 차려입고 왔는데, 저녁도 한접시 맛있게 들고는 금새 포크와 나이프를 딱 내려 놓습니다. 이 사람에게 내가 지어준 별명이 ‘500’ 인데요 여태껏 골프 레슨을 500회 이상 받았다고 해요. 그리고 연습을 거의 매일 한다고 해요 물론 풀타임 직업이 있어요. 아마 챔피언 골퍼로서의 프라이드가 남달라서 그런지 이야기를 나눌때도 상당한 컨피던스를 (자신감) 가지고 하네요. 그런데 막상 실제로 인게이지는 (정말 대화나 관계에 깊게 참여)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무슨 일은 하는가 아내가 물으니 회사 이야기를 먼저 길게 하고선 마지막에 살짝 사장 비서라는 말을 붙여요. 우린 보통 내가 무슨일을 하는지를 길게 먼저 이야기하고선 어디에서 일하는가를 덧붙이지 않나요? 아름다움도 그렇지만 쳄피언이다 최고다 하는 그런 의식도 사람에게 일종의 부자연스러움을 주어 때로 자유를 빼앗는 듯 해요.
이 사람들과 함께 라운드를 하면, 내가 처음 만나는 4번째 동반자에게 나를 ‘아주 훌륭한 골퍼’라고 자주 소개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뜸 핸디가 얼마인데요? 이렇게 물어요. 요샌 사람들이 내 대답을 듣고선 실망하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쳐서 먼저 말을 해줘요. ‘고작 보기플레이어 인데요 이 사람들이 나를 과대 과장 광고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러면 남편이 말해요,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는데, 나는 이사람이 골프를 대하는 평온하고 기쁜 마음을 배운다’ 이렇게 말이에요. 언젠가 크게 망한 샷을 치고선 내가 웃으면서 ‘당신은 이런샷을 하지도 않지만 만약에 한다면 연습장으로 달려 가겠지만, 나는 집에 가서 명상을 하면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인다’ 농담을 했기 때문인가 싶네요. 사실 나는 퍼팅을 하고선 (들어가라고) 몸을 배배 꼬지도 않고 또 황당무계한 샷이 나와도 너무 화를 내거나 괴로워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물론 아무렇게나 치지는 않아요. 남편 제이브는 명랑하고 즐거운 성격이라, 그날 저녁시간에 가장 말을 많이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내가 틀렸어요. 적당한 타이밍에 좋은 질문들을 (한국과 우리 내외에 관련된) 진짜 흥미를 가지고 하면서 아내와 내 말을 경청했는데요, 여태껏 내가 만났던 사람들중에서 가장 흥미로워하고 경청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내가 좀 많이 떠들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많이 놀랐어요. 나이가 들면 ‘아내에게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하던데 단지 아내에게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나이가 들면서 입을 더 다물고 귀를 더 쫑긋이 세울수가 있다면 정말 도인 계열에 속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러면 진심으로 존경받고 사랑받지 싶어요, 내가 제이브를 그날 저녁 이후에 더 존중하고 좋아하게 되었듯이. 하지만 쉽고도 어려운 것이 바로 이런 사소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는 되지 않아요, 마치 골프와 같습니다. 최소한 이런 진실을 이론으로나마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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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구 신부님은 이제 팔순이 훨씬 넘어, 올해 초에야 비로소 은퇴를 (?) 하시게 되었다고 기뻐하셨어요. 우리가 이민초기에 인연이 되어 친구로 오고간지도 이제 몇십년이 되었어요. 나는 그동안 2분의 추기경을 직접 만나 보았고 (그냥 악수하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며 인간적인 면을 한 이틀 가까이서 본 적도 있었어요) 주교나 다른 높은 지위에 있는 성직자들 그리고 세상에 알려진 이름난 성직자들을 삶을 직간접적으로 듣고 보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성인에 (혹은 도인에) 가장 가까운 성직자를 꼽는다면 우리 친구 신부님을 꼽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겠어요. 이분은 젊은 시절에는 (천주교 계열) 중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오래하셨지만 중년이 넘어서는 라쉬 커뮤니티를 이곳에도 세우고 직접 몸으로 수십년을 봉사하신, 내가 아는 현존한 사람들 중에서 성자에 근접한 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라쉬 커뮤니티는 정신박약등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독립된 가옥에서 지원자들이 함께 (가정을 이루어) 살면서 도와주고 돌보아주는, 캐나다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에 퍼진 (정신지체인을 위한) 박애운동 입니다. 한방을 노리거나 한번의 도움으로 극대화된 최대의 결과를 추구하는 나 같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수년에서 수십년을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일상속에서 가족처럼 그들을 돌본다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비효율적이며 하찮은 (?) 목표를 지향하는 일종의 낭비처럼 (?) 처음에는 느껴졌는데요, 세월이 지나면서 차차 깨닫게 되었어요.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를 박멸하는 빌 게이츠도 (큰 돈을 조직적으로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는 것도) 몹시 존경스럽지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스스로의 삶을 (시간을) 나누어 주며, 연연을 맺은 보잘것 없는 장애자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우리 친구 신부님도 (라쉬 커뮤니티도) 아주 존경스럽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결국 이 세상을 사는 인간들의 괴로움은 끝이 없으며 (예를들어 말라리아로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생즉고해가 아닐수가 없겠지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과 그리고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함께 무난하게 잘 사는 것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바로 그 자리에 우리 친구 신부님과 라쉬 커뮤니티가 무언의 가르침을 주면서 조용히 있는 것 같아요. 나는 큰 명예와 높은 지위 그리고 많은 학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이리저리 옅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무거운 계급장이나 긴 가방끈 그리고 커다란 모자에 걸맞는 인격을 가지고 또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이 보지 못했어요. 결국은 배움도 성취도 성공도 다 행복하자고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택했던 방법들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주객이 전도된 경우를 많이 보았어요. 인간이란 제 스스로 이룬 성취에 휘둘려 본질을 망각하는 어리석고 약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 내 관찰의 결론입니다. 나야 성취가 없으니 휘둘릴 것도 별로 없는 좀 이상하지만 안전한 경우가 아닌가 싶네요 🙂
기골이 장대하던 우리 친구 신부님은 이제 키도 작아지고 체중도 많이 줄어든 조그마한 할아버지가 되셨는데요, 수십년 즐겨오신 아내의 한국음식을 아직도 2회 이상 거뜬히 비우시고 와인도 한잔 하셨어요. 오고 갈때는 (처음으로) 내가 모셔오고 모셔다 드렸어요. 평생 운전을 하신 분에게는 쉽지 않은 양보 (혹은 결정) 이기도 하지요. 다행히 우리집과 가까운 성직자 커뮤니티에 살고 계세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신 우리 친구 신부님은 내가 여태껏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한 손가락에 꼽을 만큼 머리가 명석하고 지혜로운 분이기도 한데요 아직도 머리가 녹슬지 않았어요. 부모가 자식들에 남기는 마지막 선물은 죽음의 과정을 자식에게 보여주면서 자식들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고 또 준비하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작년에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 친구 신부님도 나와 아내에게, 노화의 과정과 노년의 삶을 몸소 무언으로 보여 주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내일을 생각하며 ‘자연스럽지만 힘껏’ 사는 삶을 실천 하심으로써 우리가 주머니에 넣어 드리는 작은 선물의 수백배 수천배 가치의 레슨을 이번에도 저희에게 주고 가셨어요. 언젠가 우리도 헤어질 날이 오겠지만, 이렇게 이역만리에서 인연으로 만나 뿌리와 삶이 전혀 다른 우리가 맺은 우정은, 서로가 서로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영원히 남을 것이라 믿어요. 삶과 죽음 그리고 시작과 끝은 다만 물리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어요. 우리가 맺은 인연과 함께 했던 시간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주었던 좋은 영향들은 물리적인 종말과는 상관없이 남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것이에요. 때로는 대를 이어 전달이 되기도 하겠지요.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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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와 데이비드는 내게 매주말 함께 라운드를 할 기회를 준 고맙고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IT 관련 일을 하는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인데요 세 사람이 함께 라운드를 하면서 요즘 세상에 우리들 만큼 오래 결혼 생활을 유지 하고 있는 3명이 한자리에 모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농담을 합니다. 마음이 선하고 social IQ 가 높은 사람들이니 배우자에게도 잘 하면서 오랜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온 것이 아닌가 싶네요. 물론 나는 예외로 배우자의 마음이 선하고 social IQ 가 ‘극히’ 높기 때문에 원만한 결혼 생활이 가능했겠지요 :)이곳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서 저녁을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를 보통 ‘small talk’ 이라고 해요. 잡담 정도의 뜻이겠지요. 이 사람들의 부인들이 바로 이런 small talk 을 많이 했는데요, 우리 내외와 케이스 데이비드도 장단을 맞추어 주면서 좋은 저녁 시간을 보냈지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긴 했어요. 대화란 핑퐁처럼 (탁구) 왔다갔다 하면서 가지를 치고 새로운 주제로 변화하고 하는 것이지 싶은데요, 이 두 중년부인들은 핑퐁을 아주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어요. 전혀 그들을 나무래는 마음은 없지만, 그들이 ‘미친듯이’ 🙂 아내가 마련한 저녁과 케잌을 맛있게 잘 먹고 되돌아 가고 나서 우리 내외는 공감했어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외모 (몸매) 관리에 못지 않게 마음을 (정신) 잘 관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외모는 겉으로 드러나고 눈에 보이기에 오히려 관리가 수월한 면도 있지만 마음은 잘 드러나 보이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그 관리의 주체와 객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정말 자신을 잘 되돌아보고 reflect 하지 않으면 금새 중년의 뱃살이나 기름낀 혈관처럼 (마음이나 정신이) 퇴락하여 아름다움과 건강함을 잃게 된다.’ 골프를 해본 분들은 이해가 되겠지만, 작심하고 연습했던 (특정 트러블) 상황에서 정신을 100% 차려서 (상황을 명백히 자각하고 전후를 생각하면서) 샷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전에 망쳤던 샷들과 다름없이 물속이나 수풀로 공이 날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신을 똑똑히 차린다고 몸이 (혹은 결과가) 늘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나는 자주 받는데요, 정신마저 차리지 않으면 (길게 보아) 어떤 꼴이 될지 정말 아찔하고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케이스와 데이비드와 함께 라운드를 하다가 벙커샷을 하면 늘 한 사람이 따라와서 곁에 서 있다가 대신 모래를 정리해 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해줍니다. 아마추어 골프 최고수들과 수많은 라운드를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나는 함께 저녁을 먹으며, 어린 시절 들었던 지옥과 천국의 이야기를 다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사람들이 같은 크기의 테이블에서 같은 수준의 음식을 같은 모양의 수저로 먹기는 하는데, 다만 수저의 길이가 1미터쯤 된다. 지옥에서는 남의 접시의 음식을 (수저가 길기 때문에) 퍼다가 제 입에 쑤써 넣을려고 난리를 치면서 온 테이블과 음식이 난장판이 되는데 반하여, 천국에서는 서로가 웃으면서 상대방의 입에 음식을 친절히 넣어주니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만족하며 아무런 다툼이 없다.’ 이런 어린시절의 이야기 인데요, 너무나 적나라한 인생의 진실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 싶네요. 절대적인 빈곤으로 먹을 것이 없어 괴로운 나라들도 물론 있지만, 어떤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부유함에도 만족이나 행복 그리고 질서가 부족한 경우를 봅니다. 남의 접시의 음식을 마음대로 퍼다가 긴 수저로 제 입에 쑤써 넣으려고 해서 생기는 결과가 아닌가 싶네요. 이렇게 (당하게) 되면 어지간히 마음이 굳은 사람들도 (자기 접시에 음식을 이미 빼았기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의 접시에서 음식을 빼앗지 않을 수가 없게 되겠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이라 여겨며 사는 그들의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내가 벙커샷을 할때면 헤븐을 떠올리게 도와주는 이 동반자들과 오래오래 라운드를 하기를 기원합니다. 나이 80 넘어도 걸어서 18홀을 도는 사람들도 있어요. 핸디캡 얼마가 목표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내 목표입니다. 그러면 핸디캡은 내 능력과 투자만큼 저절로 따르겠지요. 이것이 골퍼의 순리가 아닌가 그리고 또 좋은 목표가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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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원장으로 일하는 공립 유치원에 처음으로 한국 아이들이 왔어요. 아이들 하면 무질서와 카오스를 떠올리는 나로서는, 이 아이들을 그리 밉상으로 보지 않는 내 자신에게 좀 놀랐습니다. 엄마 아빠도 요즘 사람들 (?) 같지 않게 좋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아내에게 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음식 솜씨가 좋은 부인의 초대로 저녁을 얻어 먹었어요. 집이 마침 옛날에 내가 골프를 쳤던 그 클럽 바로 근처인데요, 마당에서 앞을 보니 내가 한 2백번은 서 있었을 그 15번 홀의 그린이 정면에 보였어요. 수년전 그때 (자주) 어처구니 없는 퍼팅을 하고선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의 마음을 (?) 삼키며 바라보던 그 앞쪽의 집들에 (그중의 하나에) 오늘 내가 인연이 되어 이번에는 반대쪽 그린을 바라보고 있네요 🙂 인생이란 이런 면이 많은 것 같아요. 이미 지난 일들이 내 삶의 변화에 따라 달라 보이고 재해석 되는 경우 말이에요. 인간만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지요? 나는 그것에 덧붙여 인간만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재해석하는 존재라고도 말하고 싶어요. 과거를 ‘기억’ 하는 것은 죽은 우리 버둑이도 했어요. 강아지때, 개용 발톱깍이로 발톱을 깍아주다가 한개를 살짝 들여다 깍아서 피가 약간 났어요. 우리 버둑이는 죽을때까지 내가 제 발을 쥐면 싫어 했었어요 🙂 여자가 거룩하게 되는 때는 어머니일 때가 아닌가 싶고, 인간이 거룩하게 되는 때는 과거를 기억하고 재해석하여 그 깨달은 바를 진심으로 표현할 때가 아닌가 싶네요.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들의 장래에 큰 기대가 있을 이 부부에게 나는 말했어요. ‘나는 과거 어린 자식에게 어리석은 짓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어떤 시기와 상황에서 그 지나간 과거가 표면에 떠올랐을때 나의 잘못을 인정했고 장성한 자식에게 되풀이 하여 용서를 빌었다. 나의 어리석음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무난히 사회생활을 하며 화목한 가족의 일부로 아직도 (?) 잘 지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내게 이러한 antidote가 (항독성물질?)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공간적으로만 입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15번 홀 그린을 반대쪽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시간적으로도 입장이 바뀐다는 것을 이번에 또한 깨달았어요. 어린 나이에 이민온 우리 내외는 (이민 초기에) 10-30세 연배가 높은 분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그저께 이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어느듯 시간이 흘러 바뀌어 버린 나의 입장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괜찮았어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지만 인생은 다만 그 길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 흘러갈 뿐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기억하려 합니다.
나는 운이 좋게도 2개의 전혀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되어 내 자신과 소속된 사회를 좀 더 비교하고 또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 싶은데요, 마찬가지로 인간 이외의 유인원들을 연구한 학자들의 도큐멘터리나 책에 관심이 있는 편이에요. 인간의 폭력성이나 (양면성) 우리가 인간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그냥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근원이 있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우리 조상과 가까운 유인원들의 (침팬지 고릴라등) 삶을 관찰 연구한 내용들에 관심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유명한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침팬지를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 관찰 연구한 내용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침팬지 대가족의 일부가 우연히 분가하여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재정착을 하고 난 이후에 바로 이 ‘거리’가 장차 두 침팬지 무리들이 벌이는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평화롭고 사랑스럽던 침팬지들이 어느날 서로의 무리를 (이전까지 가족이었던) 계획적이고 폭력적으로 공격하여 죽이고 또 잡아온 침팬지를 나눠 먹는 모습을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목격하면서 무었을 깨달았을까요? 우리 인간도 이러한 본능과 자연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침팬지들도 어떤 무리들은 개미를 간식으로 잘도 먹는데 멀리 떨어진 어떤 무리들은 전혀 먹지 않는다지요. 집단 교육의 결과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신체의 변화, 아마도 호르몬 변화에서 기인된 심리적 변화와 사고 전반에 걸친 변화 또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만 는다고 (신체만 변화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피부의 주름보다는 머리와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우리들의 삶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어요? 나는 마흔쯤에 큰 변화를 경험했어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호르몬의 변화와 그에 따른 심리적 사고적 변화였지 싶네요. 아이들 아빠 엄마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이런 시기에 다다랐을 가능성이 있으니 서로 대화하면서 이런 시기를 함께 잘 넘겨야 한다고 했어요. 위에서 말했던 그 골프 트러블 샷은 뻔히 눈뜨고도 망치긴 하지만 그래도 알고 망치기를 반복 하노라면 차차 나아지고 또 데미지도 덜 한것 같아요. 사랑스런 아이들을 위해서 엄마 아빠가 앞으로 최소한 십년 정도는 stable 한 가정을 잘 유지하면서 서로의 사랑이 (인간적인 연민과 감사를 바탕으로 하는)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한국도 그렇지만 이곳도 봄이면 바람이 거세게 불며 소나무의 분진이 온 천지를 뒤덮습니다. 소나무의 집단 짝짓기 입니다. 소나무가 때를 맞출까요 바람이 때를 맞출까요? 물론 소나무가 때를 맞추며 진화 했겠지요. 우리도 이런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것을 알고 또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고 낫지 않겠어요? 신년 방담이었어요. 올해는 더 규칙적으로 이야기 나누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