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시뇰 그리고 결혼계약

‘몬시뇰’은 우리에게 슈퍼맨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1982년도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리고 ‘결혼계약’은 2016년에 방영된 티비 주말드라마입니다. 보았고 또 어쩌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몬시뇰은 언젠가 한번은 글을 올려보겠노라고 이야기 했던 영화입니다. 세상에는 훌륭하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영화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이 영화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영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IMDB에서 서양사람들이 (아마도 미국인들이) 매긴 점수가 10점 만점에 5점 정도로 그야말로 형편없는 어쩌면 중간도 못되는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는 내가 미친 것일까요 🙂 여하튼 내가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것은 부정할 수가 없겠네요.

인터넷 관련 기술의 발달로 옛날에는 가능하지 않았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싸게 가능해진 것들이 있지요? 지나간 티비 드라마를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일것 같네요. 일년에 한 두번 한국 드라마를 볼까말까한 우리부부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여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만큼 감동적으로 보았던 ‘어른들의 동화’ 같은 드라마가 바로 이 드라마 ‘결혼계약’입니다. 물론 ‘묜시뇰’ 보다는 훨씬 한국에 더 알려진, 감수성 있는 어른들이 많이 좋아했다던 통속적인 소재의 티비 드라마 입니다. 이런 통속적인 프리티우먼 백설공주 신데렐라 이야기를, 훌륭한 대본과 연기 그리고 연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요.

묜시뇰과 결혼계약은 만들어진 시기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른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화와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개의 어른 동화에서 크나큰 공통점을 봅니다. 이 두개의 족보가 전혀 다른 드라마들이 인간에게 극히 공통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게 됩니다.

1960년대 혹은 1970년대 미국에 유학했던 우리 선대들이 남긴 이야기들 중에서 한두가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학 식당에서 식판 위에 건드리지도 않은 그 크고 맛있는 오렌지가 식사 후에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의 놀람과 더불어 미국 남녀 대학생들이 한 방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만날때면 방문을 열어 두었다던 이야기 입니다. 그때 당시 그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한국 유학생의 시각은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시각과 다르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이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마치 조선시대에나 일어났을 그런 풍습을 유지했던 것은 문화적 시각적 차이를 떠나 사실로 여겨집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신을 숭배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그 당시 미국인들을 지배했던 삶의 방식이었어요. 물론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보고 듣고 알게된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면들이 있어요.

그저께 우연히 독일국영방송 DW에서 만든 ‘미국의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에 관한 도큐맨터리를 잠시 보다가 무척 놀랐어요. 일대일로 대응하는 한국말이 없어보여서 그냥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라고 했는데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신앙’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요? 침례교냐 장로교냐 이런 종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주어 해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전세계에서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도큐맨터리에 어떤 미국 중산층 가정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러한 삶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십대 중반의 두 딸들은 우리가 아는 통속적인 21세기 미국인들과 한참 거리가 멀어 보었어요. 침대옆 서랍에서 오래된 낡은 책을 보여주는데요 아주 어릴때부터 닳토록 읽어 그야말로 닳고 닳은 성경이었어요. 그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하다못해 아빠가 학교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도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매일 새벽기도를 몇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던 사람들이 문득 떠올랐어요. 어떤 특정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근본주의?) 매우 훌륭한 신자일 그런 사람들과 만약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램 관련 사태들이나 혹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을까요? 아까 이야기한 도큐맨터리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많은 어른들과 학생들이 켄터키 어디에 있다는 노아의 방주를 방문해요. 미국답게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 박물관이에요. 그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언제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역사에 언제 어떻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는지 배우고 또 기억합니다. 참 인간이란 안타까운 존재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실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결과가 ‘비정상’ (?) 이라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묜시뇰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미국의 한 젊고 멋진 천주교 사제가 이차대전을 참전한 후에 로마에 남아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며) 카톨릭 최고 권력에 (?) 다가가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희노애락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이 주어진 어떤 상황 혹은 사회적 구조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친구와 적을 만들고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좌절하며 또한 천주교회 재건을 위하여 교황의 암묵적 동의하에 마피아와 손잡고 아슬아슬한 사업을 벌이며 일어나는, 거룩한 천주교 의복 뒤에 감추어진 정말 있을 법한 인간들의 진면목을 담은 영화입니다. 왜 10점만점에 5점일까요? 그것은 흡사 우리가 어릴때, 부모님의 섹스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부끄럽고 괴로워했던 그런 상황이, 종교와 현실이라는 상황에도 일어난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른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나아가 걸프렌드와 섹스를 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케하는 (?) 자식을 둔 나이가 되고보니,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사랑을 나누셨다는 것에 조금도 거부감이 생기거나 이상하거나 하지 않게 되었어요. 마치 식사를 하셨고 화장실을 가셨었다는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와 마주치게 될때 그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신도들’ 그리고 지금도 미국 어디선가 아마도 ‘방문을 열어두고 남녀가 이야기를 나눌 그 에반젤리컬 크리스쳔들’에게는 큰 혼란과 부끄러움 그리고 괴로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상황을, 어릴때는 그냥 괴로워 했겠지만 어른이 되고 힘이 생기고 나면 그냥 괴로워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넘들의 가짜 진리’를 막으려고 하겠지요. 바로 이 결과가 묜시뇰이라는 탁월한 영화가 IMDB에서 10점 만점에 5점을 받은 이유지 싶네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신도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들이 자유로우며 그들이 사랑으로 자신과 타인들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실까요?

묜시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무었을 만들어 어떤 매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명백히 알고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대본을 (혹은 원작 소설을) 쓴 분 그리고 영화를 만든 분들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이야기를 이미 알았었고 생각했었고 또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었던 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나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40년이 지나서 내 블로그를 통해서 반복하는 것이지 싶네요.

나는 ‘결혼계약’ 드라마를 보고선 그 극본을 쓰신 분의 뒷조사를 (?)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위에서 묜시뇰 영화의 대본을 쓴 분이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분도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분이 미디어에 인터뷰하는 (결혼계약 드라마에 대해서) 것도 읽어 보았어요. 이분이 크리스쳔인지 아닌지 나는 알길이 없지만, 이분은 인터뷰 끝에, 어떤 철학 혹은 믿음이 결혼계약 극본 바탕에 깔려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하셨어요. 누군가 내게, 이 결혼계약이라는 드라마를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 반복 시청하고선 도대체 무었을 보았던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이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에서 해탈을 얻는 과정을 그린 (붓다의 가르침을 표현한) 위대한 현대판 경전이다’ 🙂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교니 사랑이니 붓다의 가르침이니 해탈이니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어요. 그리스도교도 사랑이라는 의미도 또 붓다의 가르침도 해탈이라는 표현도, 우리 인간의 삶이 먼저 있고 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들 인간의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인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먼 미래에도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조건들 속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램도, 사랑을 주고 받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도, 그리고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도 변치 않고 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임에 분명해요.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붓다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은 인간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시고 내 놓으신 일종의 해결책들이 (?)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본질이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엄마와 둘이 사는 7살 은성이도,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멀리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동시에 엄마를 몹시 사랑하며 그 엄마의 행복을 깊이 바랍니다. 은성이는 결국 이 두가지 커다란 마음의 갈등을 이겨내고 스스로 해결하여 해탈에 도달합니다. 엄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닥쳐온 상황을 더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 냅니다. 그 싫어하던 아저씨를 받아들이며 결국은 새 아빠로 삼고 가장 아름다운 부녀의 관계로 발전시킵니다. 한 인간의 해탈을 이렇게 마음에 와닿도록 훌륭하게 표현한 것을 나는 일찌기 보았던 적이 없어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도대체 (현실 속의) 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연기를 극도로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하고 또 뛰어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스래 느낍니다.

남자 주인공 지훈씨의 친모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사람도 아니고 마음이 제대로 밖인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들의 사랑으로 결국은 마음을 비워내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아들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며 기생하고 나아가 자기의 생존을 도모하는 삶의 방식을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참으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해요 (비록 내 몸은 병들어 죽지만) ‘나는 너 덕분에 살게 되었다’. 훌륭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보고 또 그의 대사를 들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밤에 이룬 해탈이 아침에 얼마나 힘이 없는지’ 나는 또한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블로그에 골프 이야기를 몇차례 쓴 적이 있었는데요. 골프 자체가 주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골프의 속성이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것이 주제였던 적이 많았어요. 유튜브 골프 레슨을 보거나, 잠시 연습을 하거나 혹은 새 골프채를 손에 쥐게 되면 골프가 ‘이렇게 하면 되지 싶다’는 일종의 깨달음 혹은 해탈을 (?) 하게 되요. 그런데 그런 해탈이 얼마나 힘이 없고 현실에서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지를 온몸으로 뼈져리게 깨닫는데 필요한 시간을 별로 길지 않아요. 마치 밤에 얻은 깨달음이 다음 날 아침에 (마주치는 현실속에서) 산산조각 나듯이, 다음 라운드를 나가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 (현실자각타임) 속에서 더욱 더 괴로워 지게 되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남자 주인공 멋진 지훈씨는 여자 주인공이 (서로 지극히 사랑함에도 시한부 생명의 짐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지 않으려고) 자신을 밀쳐내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살렸으니 이제 너도 한번 살아봐. 내가 살릴께’ 이렇게 말합니다. 제벌 2세로 제멋대로 살아온 지훈씨. 가난하고 평범하지만 정말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심성을 가진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만나 차차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지훈씨는 주변 모두가 놀라자빠질 자신만의 해탈을 이루어 냅니다. 인생에서 무었이 중요하고 그 중요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힘을 주는지 재대로 맛본 다음부터 이 인간말종은 완전히 변화합니다. 한 인간을 참으로 존경하게 되면서 싹튼 사랑은 세상 그 무었도 막을 수가 없고 그 어떤 손해도 감수합니다. 이전에도 수차례 말했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고,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극작가가 배우의 입을 통해 이야기 하듯이) ‘돈으로 막으려면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해탈하고 나면, 그래서 돈을 진심으로 포기하고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보려는 시도를 진정으로 그만두게 되면, 상대방은 신기하게도 저절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결코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 보지 않아요. 우리 삶의 큰 진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주인공 혜수씨. 신데릴라 입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 시한부 생명. 어린 딸을 위해 모든 것 무슨 짓이던 하고선 세상을 뜰 훌륭한 엄마입니다. 난 남자 주인공 지훈씨가 쓰레기짓을 할때 ‘아 저런 것들을 사람들이 쓰레기 짓이라고 하는구나’ 배운 것이 많아요 🙂 그리고 동시에 ‘어 나도 보통 저렇게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적이 (때로 훌륭한 일이라고 조차 생각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렇게 좀 놀라게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미남에 금수저라는 것만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 지훈씨와 내가 닮은 점이 꽤 많았어요. 그래서 정말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이토록 끌렸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동시에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훈씨와 닮은 점이 많듯이 아내는 혜수씨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혜수씨가 지훈씨를 ‘살게 해 주었듯이’ 어쩌면 아내도 나를 살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러번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산다는 것이 무었일까요? 지훈씨가 혜수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했고, 또 지훈씨 엄마가 아들 지훈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 했는데요, 도대체 이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까 위에서 비유로 말했던, 매일 새벽 기도를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다는 그리스도교인과 내가 마주 앉아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 다난한 일들에 대한 견해를 서로 밝히고선, 전 세계에서 뽑은 수 많은 배운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누구의 견해가 보다 균형 잡혀 있는가 묻는다면, 건방진 말이 되겠지만, 나의 견해가 좀 더 균형 잡히게 들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 사람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또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언행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두 개의 상반된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기울이며 여태껏 살아 왔어요. 이미 말했듯이 인간의 안타까움은 (수십년 매일 새벽기도 같은) 그런 노력과 성취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변화하며 나아가 그런 변화의 영향을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있지 않은가 싶어요. 이처럼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 인생이라, 아마 붓다께서는 ‘삶은 두카’ (불완전, 불만족, 괴로움) 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다시 되돌아가서 ‘살게 해주었다’ 혹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몽고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야생 늑대는 경외의 대상이자 또한 최약의 적이기도 하다고 해요.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추적하여 죽이고 때때로 새끼들을 발견하기도 한다는데요, 태어난지 몇주만 지나도 늑대 새끼들은 절대로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태어난지 며칠이 되지 않은 핏덩이 새끼들을 데려다가 사람들과 가축들 사이에서 기르기도 한다는데요, 한살 정도가 되고 나면 (그동안 그렇게 같이 잘 놀고 좋았던 그 녀석이) 야성을 결코 감출 수가 없어 사람과 가축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가 되어 결국 죽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녀석과의 우정은 (?) 한장의 늑대 가죽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숙명이라네요. 늑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물려받은 DNA가 합쳐서 빚어낸 삶을 살겠지요. 그 드라마에서는 혜수씨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훈씨가 알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그의 형을 그 자리에 대입한다고 똑같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다만 웃음꺼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공평하기도 하지 싶네요. 서론이 길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산다’는 의미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그리고 물려 받은 DNA에 지배되는 그 작은 세계, 좁은 믿음 그리고 굳어진 가치관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세상에 산재하는 다른 환경들 그리고 과거에 살다간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와 믿음 그리고 가치관을 (최소한) ‘볼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무언가 작은 것들이라도 배워서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결과적으로 덜 다투고 더 사랑하고 더 가볍게 왔다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그리고 묜시뇰 영화에서도 많은 등장 인물들이 바로 이렇게 ‘살게 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뛰어나게 그리고 있어요.

두가지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며 오늘 이 길었던 두 편의 드라마 이야기, 내가 생각컨데 가히 최고의 드라마의 이야기를 마칠까해요. 먼저, 위에서 비유로 들었던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 드라마를 보고선 아내에게 비유로 말했어요. 평생 권투를 한 사람의 주먹은 부드러울 수가 없다. 샌드백을 때린 정권과 손에 베인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심신도 다르지 않다. 권투선수에게 부드러운 손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새벽기도 평생한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고 부드럽기를 기대하기 어려움과 같다. 그리고 두번째는, 밤에 얻은 해탈이 아침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나면, 다시 말해 비록 다음날 아침에 산산조각 나는 해탈이나마 하고 또 하면서 시간이 지나노라면,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덜 나든지, 산산조각이 나도 덜 괴롭든지 아니면 산산조각 자체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되든지 하면서 우리도 한 걸음 한 걸음 해탈에 가깝게 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에베레스트 산을 목숨을 걸고 오르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웃기는 존재 입니다. 그 등반을 이 세상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목숨걸고 그 힘들고 위험한 짓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론 그래도 할 사람이 소수는 있겠지요). 어떤 면에서는 해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우리 모두 각자 각자 어떤 시간이 오면 홀로 세상과 작별해야 합니다. 해탈? 그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좋아하는 당신이나 가지세요 🙂

채운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다

살다보니 채우는 것과 쌓이는 것은 별개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직도 청춘이지만, 더 어렸던(?) 시절에는 그저 남들따라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 얻고 줏고 벌고 빼았아(?) 채우기만 하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준이나 인생의 승패는 그렇게 채우는 능력으로 매겨지는 줄 알았었다.

살다보니 채우는 능력과 쌓이는 결과가 딴판인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채우는 재주야 부모를 잘 만났거나 책상에 오래 앉았던 사람들이 당연히 더 있겠지. 그런데 채운것들이 쌓이려면 그릇이 번듯하게 크기도 좀 있고 또 깨지거나 구멍이 뚫리지 않아야 되는데, 이 그릇의 크기와 온전함은 부모 주머니에서 떨어진 돈이나 공부 머리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말미암아 달라지기도 어려운 것임을 보게 된다.

채우는 재주는 큰데 그릇이 작거나 깨져 있으면 밖으로 흘러 넘치고 줄줄 새게 된다. 흘러 넘치는 것이 돈이면 돈지랄하는 인간말종이 되고, 줄줄 새는 것이 권력이면 사람들 못살게 하는 미친개가 되고, 흘러 넘치는 것이 정력이면(?) 가정파탄 아니면 감옥행. 줄줄 새는 것이 지식이면 사람들이 면전에서 다투지는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가까이 하려하지 않는 외로운 늙은이로 종치게 되겠고 또 흘러 넘치는 것이 ego 라면 해탈 열반이나 천국행은 날샛겠지 🙂

인생 초기 대량 실점한 삶을 살아온 내가 대량 득점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그리고 가까이서 또 멀리서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세상 참 공평하다’ 그리고 ‘행복은 얼마나 채우는가 보다는 얼마나 쌓이는가에 있다’.

삽질의 기록 – 드라이버 장타 (3)

오늘은 세번째로 ‘지나간 삽질의 기록’이다. 그땐 지금보다 더 초보골퍼 그리고 더 어리석은 군상이었기에, 나도 단기간에 얻을 수 있는 어떤 비법을 찾으려 시도 했었다. 내가 무슨 잭 니클라우스라고,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아무도 없는 코스에서 미친듯이 안되는 클럽을 가지고 연습을 하기도 했었고, 또 몇주 기간 동안 무슨 밤샘 시험공부를 하듯 온몸이 골병이 들어서 뻣어 일어날수 없을 때까지 미친듯이 연습을 했던 적도 몇차례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시도들은 나의 KO패로 끝이 났었다 당연하게도. 골프가 그런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그때 나는 병이 나서 끙끙 앓으면서도 잘 깨닫지 못했었다.

차고에 그물망과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매일 저녁 공을 쳤었다. 때때로 잘못 맞아서 튄 드라이버샷이 그물을 벗어나 아찔하게 차고의 벽과 지붕에 구멍을 냈다. 그리고 그때 이웃들은 밤마다 옆집에서 들리던 따악~ 따악~ 그 소음을 어떻게 군말없이 참아 주었던가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고 고맙다. 보기플레이어 수준인 주제에 드라이버를 멀리 보내기만 하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양 드로샷을 수개월간 연습하였다. 결과적으로 드로샷을 칠 능력이 생겼고, 그런 나의 드로샷들이 한여름의 굳어진 페어웨이와 죽이 맞으면 250미터씩을, 무슨 전진회전 먹인 당구공처럼, 때굴때굴 굴러서 갈때도 자주 있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대다수의 보통수준 골퍼들은 셋업 얼라인먼트의 미숙함으로 목표보다 실제로 훨씬 오른쪽을 겨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잘못된 조준이, 공의 5시 지점을 보통 노려서 치는 드로샷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어지는 구질) 우연히 어울려 그럭저럭 거리와 방향성을 얻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래위에 쌓은 성이었으니 이내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골퍼들이 훅보다는 슬라이스성 구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골프 코스는 많은 경우 슬라이스에 관대하게 설계되어 있다. 공이 페어웨이 오른쪽으로 향할때 탈이 덜 나도록 오른쪽에 넉넉한 공간이 있는 경우가 많다. 바꾸어 말하자면, 공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어지는 악성 훅 구질이 나기 시작하면 많은 경우 그대로 오비가 나거나 이상하게(?) 왼쪽편에만 주로 있는 하천 절벽 혹은 기타 접근불가능 지역으로 드라이버샷이 영영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확율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조금만 타이밍을 놓치거나 긴장하면 나의 드로샷은 쉽게 악성 훅으로 변질되어 라운드를 망쳐 놓기 시작하였다. 함께 백라운드 이상을 치면서도 ‘굿샷’ 이외에는 결코 어떤 말도 조언도 하지 않았던 그 아들이 딱 한번 안타까운 마음에 ‘드라이버 스윙궤도를 가파르게 만들어서 페이드를 치면 어떨까’ 제안하였다. 탁구로 치자면 우회전 전진샷을 좌회전 컷트샷으로 바꾸는 것이랄까. 연습하여 그렇게 되게 하였다. 원래부터 별 볼일 없던 드라이버샷이었지만 이제 때굴때굴 구르는 것을 거의 안하게 되니, 내가 이런저런 드라이버 클럽으로 온갖 짓을 해보아도 줄어든 거리는 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의 몸부림은 서서히 막을 내렸고 또 골프도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욕심대로 안되니까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몇해가 훌쩍 지났다.

그저께 턱걸이를 14개 하면서 올해초에 세웠던 내 기록을 하나 늘였다. 집 마당에 설치된 철봉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혹은 무슨 일로라도 마당에 나가기만 하면 매달려서 한번에 5개 정도씩 턱걸이를 해온지가 오래 되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오가면서 한번에 10개씩을 꾸준히 하게 되었다. 일회 20개를 이루고서 향후 20년을 유지하는 것이 내 희망이다. 년전에 내가 드로샷이니 뭐니 지랄을 떨때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턱걸이고 또 갯수다. 물론 턱걸이와 더불어 산을 뛰는 하체운동도 해온지가 수년이 되었다. 직장 근처 산을 400회 이상 뛰어 올랐는데 1,000회를 채우는 것이 목표다. 이제 장타에 대한 접근이 조금씩 달라지는 기분이다. 이렇게 근력이 강화되어 건강하고 활기찬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면 그래서 내 삶이 행복하다면 그깟 골프 장타가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하는 건방진(?)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 콧대 높고 변심을 밥먹듯이 한다는 골프란 뇬은 어쩌면 똑같이 콧대 높고 건방진(?) 넘에게는 조금 마음을 열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상상을 해본다. 김헌선생이 말했던 ‘독보다 커야 독이 보인다’는 말씀이 어쩌면 이런 뜻인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또 다른 골프고수가 말했던 ‘간절히 원하지만 그 마음을 감추고, 그저 좀 비슷하게라도 되면 감사하겠다’ 정도로만 바라라던 그 말도 또 ‘너무 표적을 뚫어지게 보면서 조준하지 말고 좀 주변을 흐릿하게 보면서 조준하는 것이 좋다’던 말도 이제 조금씩 의미를 알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또다른 착각인가?

턱걸이에 필요한 반복된 연습과 결과적으로 변화된 신체는 어떤 묘수나 비법으로도 갈음되어질 수가 없다. 20년을 하고자 하는데. 어떤 다이어트도 신발도 심신이 변화되고 준비되지 않은 당신을 그 산위로 데려다 줄 수가 없다. 1,000번을 오르고자 하는데. 골프가 턱걸이나 달리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차차 체득하고 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고 시간이 걸리며 그 접근방식을 착각하면 안된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여자탈의실과 골프이론은 기웃거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훌륭한 말도 최근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

내가 턱걸이를 20개 한들 그리고 그 산을 지금보다 훨씬 빨리 뛰건말건 세상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속한 클럽에는 소위 말하는 싱글핸디가 회원의 15%다. 발에 채이는 것이 싱글이다. 내가 220미터 드라이버를 치건말건 싱글핸디가 되건말건 세상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누구도, 하다못해 클럽멤버들조차도 아무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턱걸이를 하고 산을 뛰며 드라이버 장타를 추구한다. 이렇게 사는 것 아닌가 우리?

적선 이야기 3 – 빌 게이츠

어제 본, 1부 ‘똥과의 전쟁’ 그리고 3부 ‘이산화탄소와의 전쟁’에 이어서 오늘은 2부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보았어요. 영화 ‘포레스트검프’ 기억나세요? 주인공 포레스트가 어렸을때 다리에 쇠로 만든 보조장치를 하고서 바보처럼 걷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당시 미국에서도 있었던 소아마비 (폴리오 바이러스 감염) 때문이었지요. 내가 어렸을때도 동네나 학교에 몇 명씩 그런 보조장치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빌 게이츠와 부인 멜린다는 많은 질병중에 왜 하필이면 소아마비를 박멸시키려고 그렇게 많은 돈과 정력을 투자했을까요? 왜냐하면, 주로 가난하고 (백신을 맞지 못하는) 더러운 환경에서 (폴리오 바이러스 전염이 쉬운) 사는 어린 아이들이 소아마비에 걸리는데요, 사지가 멀쩡해도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운 그런 곳에서, 소아마비의 결과로 하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앉은뱅이 혹은 절름발이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라는 것을 이분들이 가슴 깊이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88올림픽이 열렸던 시기에, 세계적으로 약 40만명의 운명을 그토록 가혹하게 바꾸었던 이 소아마비라는 질병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더불어 빌 게이츠 재단의 헌신적이고 (돈만 쏟아 부은 것이 아니예요) 천문학적인 투자의 결과로 작년에는 약 30명 세계적으로 발병했다고 해요. 도큐멘트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서는 많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병이 발견되었는데요, 빌 게이츠는 그의 두뇌와 간절함 (마음씀)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합니다.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나이지리아 각 지역으로 보내서 백신을 맞히는데요, 그들이 사용했던 유일한 지도는 1940년대 영국인들이 만든것이었다고 해요. 그 부정확성으로 인하여 지역의 경계에 있는 마을들에 (이 지역에 속하는지 저 지역에 속하는지 모호한 마을들) 백신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고 해요. 마치 아주 좋은 총은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타겟이 흐릿한 상황과 비슷한 것이랄까요. 아무리 총의 성능이 좋아도 아무리 많은 탄환을 쏟아부어도 명중시킬 수 없습니다. 빌 게이츠는 위성사진과 첨단 컴퓨팅을 결합하여 (엄청난 돈이 들었겠지요) 정확한 나이지리아 지도를 만들어 냅니다. 이 지도를 활용하여 그 취약한 지역들을 찾아내어 정확하게 작살(?) 냅니다.

이 사람, 자신도 인정하듯이 젊은 시절에 잘못했던 일들도 있었어요. 삼성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어떻게 항상 100% 합법적이고 윤리적으로’만’ 경영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적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이런 일을 해내는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존경심이 생겼어요. 그냥 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의 삶을 바치고 있어요. 아무도 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또 극히 어렵고 힘든 일들을 사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 다시 꺼내서 미안한데요 어떤 사람은 노년에 집으로 창녀들이나 불러들여 추잡한 짓이나 하고, 또 그 부인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위해서 유명한 사찰에 가서 중들에게 돈을 주고 큰 행사를 하며 복을 빈다는 것을 뉴스에서 들었어요. 지금은 그 사람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는지 모르지만, 이 부부는 과연 서로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할까요? 빌 게이츠가 ‘지금 버스에 치여 죽는다면 한가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이 무었인가’ 묻는 질문에 거의 울먹이면서 ‘아내에게 고맙다고 한번 더 말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것 같다’라고 대답하던데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은 과연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요? 왜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사람들이, 사는 수준은 이렇게 상이한지 나는 정말 궁금하고 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금 내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돌대가리’라는 것인데요,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이 돌대가리가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나도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진짜 돌대가리’가 분명할테니까요 🙂

1960년대 미국은 자신에 차 있었다고 해요. 곧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질병들을 지구상에서 ‘박멸’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하네요. 지금 들으면 참 기가 막힌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소아마비를 박멸하면 그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더이상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될까요? 또 빌 게이츠 아니었으면 걸렸을지도 모를 소아마비를 걸리지 않게 되었다고 알아주고 또 고마워하며 잘 살까요? 아니겠지요. 그런 일은 우리 인간세계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것을 모를까요? 물론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 왜?

그에 대한 일부의 대답이 이곳에 있어요. 어떤 훌륭한 분이 이렇게 말하고 있군요. ‘우리도 새발의 피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번에 한 사람씩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내가 덧붙이고 있네요. ‘보살은, 오늘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의심없이 최선을 다하지만, 덧없는 삶의 본질을 꽤뚫어 보기에, 최종적으로는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적선 이야기 2 – 빌 게이츠

인류역사상 가장 부자였으며 가장 많은 적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빌 게이츠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지금 컴퓨터로 지금 읽고 있다면 이 사람이 만든 윈도우즈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겠네요. 나도 이 사람 덕분에 직장도 있고 봉급도 받으며 산지가 오래 됬네요. 개인적으로도 고마운 사람입니다. 오늘은 Inside Bill’s Brain: Decoding Bill Gates 라는 도큐멘터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3부작인데요, 그중에서 1부 ‘똥과의 전쟁’ 그리고 3부 ‘이산화탄소와의 전쟁’편을 보았어요. 불과 2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어요. 똥과의 전쟁도 그렇고 이산화탄소와의 전쟁도 (원래 제목은 다른데요, 더 정확하고 좋은 제목으로 내가 바꾸었어요??) 그 규모와 중요성이 (인류전체에 끼치는) 참으로 어마어마하네요. 이분은 그 좋은 머리와 세계최고부자의 재력으로 사실상 그대와 나를 대신하여 이 엄청난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랍니다. 몰랐지요 🙂

도큐멘터리 거의 마지막에 빌 게이츠에게 물어요. ‘만일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해서 지금 당장 죽게 된다면 가장 아쉽거나 안타깝게 생각하며 눈을 감을 것은 무었인가요?’ ‘아내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깝지 싶네요’. 너무 허무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나요? 그럼 도큐멘터리를 장식하는 이 마지막 말은 어때요? 읽어보면 마치, 어제 이야기한 붓다의 적선에 관한 가르침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Each one of us has to start out with developing his or her own definition of success, and when we have these expectations of ourselves, we are more likely to live up to them, ultimately its not what you get or even what you give, its what you become.’

‘우리들 각자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 무었인지를 찾아내고 계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준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산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될 가능성이 훨씬 커집니다. 궁극적으로 (성공이란) 얼마나 가지는가가 아니며, 나아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는가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 혹은 ‘내가 진정 원하는 사람으로 사는가’가 궁극적인 인생의 성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