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본, 1부 ‘똥과의 전쟁’ 그리고 3부 ‘이산화탄소와의 전쟁’에 이어서 오늘은 2부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보았어요. 영화 ‘포레스트검프’ 기억나세요? 주인공 포레스트가 어렸을때 다리에 쇠로 만든 보조장치를 하고서 바보처럼 걷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당시 미국에서도 있었던 소아마비 (폴리오 바이러스 감염) 때문이었지요. 내가 어렸을때도 동네나 학교에 몇 명씩 그런 보조장치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빌 게이츠와 부인 멜린다는 많은 질병중에 왜 하필이면 소아마비를 박멸시키려고 그렇게 많은 돈과 정력을 투자했을까요? 왜냐하면, 주로 가난하고 (백신을 맞지 못하는) 더러운 환경에서 (폴리오 바이러스 전염이 쉬운) 사는 어린 아이들이 소아마비에 걸리는데요, 사지가 멀쩡해도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운 그런 곳에서, 소아마비의 결과로 하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앉은뱅이 혹은 절름발이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라는 것을 이분들이 가슴 깊이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88올림픽이 열렸던 시기에, 세계적으로 약 40만명의 운명을 그토록 가혹하게 바꾸었던 이 소아마비라는 질병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더불어 빌 게이츠 재단의 헌신적이고 (돈만 쏟아 부은 것이 아니예요) 천문학적인 투자의 결과로 작년에는 약 30명 세계적으로 발병했다고 해요. 도큐멘트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서는 많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병이 발견되었는데요, 빌 게이츠는 그의 두뇌와 간절함 (마음씀)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합니다.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나이지리아 각 지역으로 보내서 백신을 맞히는데요, 그들이 사용했던 유일한 지도는 1940년대 영국인들이 만든것이었다고 해요. 그 부정확성으로 인하여 지역의 경계에 있는 마을들에 (이 지역에 속하는지 저 지역에 속하는지 모호한 마을들) 백신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고 해요. 마치 아주 좋은 총은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타겟이 흐릿한 상황과 비슷한 것이랄까요. 아무리 총의 성능이 좋아도 아무리 많은 탄환을 쏟아부어도 명중시킬 수 없습니다. 빌 게이츠는 위성사진과 첨단 컴퓨팅을 결합하여 (엄청난 돈이 들었겠지요) 정확한 나이지리아 지도를 만들어 냅니다. 이 지도를 활용하여 그 취약한 지역들을 찾아내어 정확하게 작살(?) 냅니다.
이 사람, 자신도 인정하듯이 젊은 시절에 잘못했던 일들도 있었어요. 삼성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어떻게 항상 100% 합법적이고 윤리적으로’만’ 경영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적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이런 일을 해내는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존경심이 생겼어요. 그냥 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의 삶을 바치고 있어요. 아무도 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또 극히 어렵고 힘든 일들을 사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 다시 꺼내서 미안한데요 어떤 사람은 노년에 집으로 창녀들이나 불러들여 추잡한 짓이나 하고, 또 그 부인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위해서 유명한 사찰에 가서 중들에게 돈을 주고 큰 행사를 하며 복을 빈다는 것을 뉴스에서 들었어요. 지금은 그 사람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는지 모르지만, 이 부부는 과연 서로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할까요? 빌 게이츠가 ‘지금 버스에 치여 죽는다면 한가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이 무었인가’ 묻는 질문에 거의 울먹이면서 ‘아내에게 고맙다고 한번 더 말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것 같다’라고 대답하던데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은 과연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요? 왜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사람들이, 사는 수준은 이렇게 상이한지 나는 정말 궁금하고 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금 내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돌대가리’라는 것인데요,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이 돌대가리가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나도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진짜 돌대가리’가 분명할테니까요 🙂
1960년대 미국은 자신에 차 있었다고 해요. 곧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질병들을 지구상에서 ‘박멸’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하네요. 지금 들으면 참 기가 막힌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소아마비를 박멸하면 그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더이상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될까요? 또 빌 게이츠 아니었으면 걸렸을지도 모를 소아마비를 걸리지 않게 되었다고 알아주고 또 고마워하며 잘 살까요? 아니겠지요. 그런 일은 우리 인간세계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것을 모를까요? 물론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 왜?
그에 대한 일부의 대답이 이곳에 있어요. 어떤 훌륭한 분이 이렇게 말하고 있군요. ‘우리도 새발의 피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번에 한 사람씩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내가 덧붙이고 있네요. ‘보살은, 오늘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의심없이 최선을 다하지만, 덧없는 삶의 본질을 꽤뚫어 보기에, 최종적으로는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적선 이야기 2 – 빌 게이츠
인류역사상 가장 부자였으며 가장 많은 적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빌 게이츠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지금 컴퓨터로 지금 읽고 있다면 이 사람이 만든 윈도우즈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겠네요. 나도 이 사람 덕분에 직장도 있고 봉급도 받으며 산지가 오래 됬네요. 개인적으로도 고마운 사람입니다. 오늘은 Inside Bill’s Brain: Decoding Bill Gates 라는 도큐멘터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3부작인데요, 그중에서 1부 ‘똥과의 전쟁’ 그리고 3부 ‘이산화탄소와의 전쟁’편을 보았어요. 불과 2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어요. 똥과의 전쟁도 그렇고 이산화탄소와의 전쟁도 (원래 제목은 다른데요, 더 정확하고 좋은 제목으로 내가 바꾸었어요??) 그 규모와 중요성이 (인류전체에 끼치는) 참으로 어마어마하네요. 이분은 그 좋은 머리와 세계최고부자의 재력으로 사실상 그대와 나를 대신하여 이 엄청난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랍니다. 몰랐지요 🙂
도큐멘터리 거의 마지막에 빌 게이츠에게 물어요. ‘만일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해서 지금 당장 죽게 된다면 가장 아쉽거나 안타깝게 생각하며 눈을 감을 것은 무었인가요?’ ‘아내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깝지 싶네요’. 너무 허무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나요? 그럼 도큐멘터리를 장식하는 이 마지막 말은 어때요? 읽어보면 마치, 어제 이야기한 붓다의 적선에 관한 가르침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Each one of us has to start out with developing his or her own definition of success, and when we have these expectations of ourselves, we are more likely to live up to them, ultimately its not what you get or even what you give, its what you become.’
‘우리들 각자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 무었인지를 찾아내고 계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준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산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될 가능성이 훨씬 커집니다. 궁극적으로 (성공이란) 얼마나 가지는가가 아니며, 나아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는가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 혹은 ‘내가 진정 원하는 사람으로 사는가’가 궁극적인 인생의 성공입니다.
적선 이야기 1
어떤 사람이 도사를 찾아가서 물었어요. ‘윗층에서 뛰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운데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도사가 대답했어요. ‘놀이터에서 만나거든 이름도 물어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친해지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도사가 다시 대답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좀 덜 귀에 거슬리고 당신께 좀 덜 괴로울꺼요.’
완전한 해법이나 완벽한 솔루션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 열반을 통하여, 인생의 완전한 해법 완벽한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좋은 ‘원’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티라다모 큰스님등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님들께서는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해탈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보를 가면 오십보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고 백보를 가면 또 그 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를 수행한 나조차도 해탈 열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해서 뭐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도 내 처지에서 어떤 수준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렇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 현실적이고 진실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극소수는 성공하여 구름을 타고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여 아무런 발전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낙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류의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흑백논리를 나는 매우 경계하며 마음속에서 한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께 티라다모 큰스님의 ‘적선’에 관한 설법을 들으면서 배운것이 있어요. 언젠가 전체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언가를 베풀어서 상대나 상황이 변하고 그 결과 혹은 댓가로 내가 복을 받거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에게 베푼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 혹은 행위의 결과로 당신의 삶 자체가 점점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당신을 해탈과 열반에 다다르게 돕기 때문에, 적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위에서 언급했던 그 도사의 솔루션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관심을 가지고 친하게 되면서 만약 ‘아이가 고마워하면서 좀 덜 뛰고 조용해져서 내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장차 더욱 더 괴롭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선은 상대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지요? 내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먹는 습관이 자연스레 좋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적선의 가장 큰 보상(?) 입니다. 아이가 달라지기를, 혹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부모가 감동해서 아이 단속을 더 잘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내 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자유를 좀 덜 빼앗기면서 이웃들과 원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럴것 같으면 뭣하러 사주나 그냥 서로 모른채 지내지? 이미 그 대답을 했지 싶네요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라고요? 때로는 그렇게 부스럼도 만들어서 괴로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더만요. 지혜롭게 능력껏 피할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그런 괴로움을 알고서도 적선을 베풀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길게보면) 우리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일이라고 나도 동의합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0 아니면 100처럼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흑백논리를 쫓지말고, ‘현실속에 실재하는’ 60이나 30 혹은 하다못해 5라도 내버리지 말고, 인정하고 또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또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지혜로운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가까운 친구가, 아파트 아래층 노인과 커다란 갈등을 겪는 바로 그자리에 나도 우연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한지가 오래되어, 내가 목격한 그 상황은 정말 폭력적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쌍방에게 주는 비극적인 (그리고 일촉직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후 이 친구는 상당한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었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던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그렇게 따지기는, 이미 쌍방이 이성을 잃어 이만큼까지 오고 나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기에 불길을 진화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이사를 갈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이전에 미리 알고서 집을 내놓았었으면 나았겠지요. 그전에 고기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서로 대화를 좀 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문제 자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 집을 당장 내놓아야겠다’라든가 혹은 무었인가 내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미리 좀 파악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겠지요. 그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났기를 바라지만, 다시 유사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번에는 더 잘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는,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는 현실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때 그 사람과 내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갈 수 밖에는 없었던가?’ ‘단지 그 사람이 미친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전에 혹시 내가 마음을 쓰거나 반응하는 어떤 기전에 (mechanism)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좀 되돌아 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후자를 강조하셨고 또 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적선’ 괜히 그냥 말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깔려 있는 깊은 가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실천한다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때, 현실적으로 얻은 경험과 더불어 이러한 지혜가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찰을 찾아가 중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제발 이런 미친넘들을 좀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며 어떤 신통력도 우리에게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일개 중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붓다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진짜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밑천삼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여 ‘살아서 누리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는 적선의 단계를 옮기면서 이글을 마무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면 (음식을 주거나 어떤 도움을 주면) 10배의 (무형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비구(스님)에게 적선을 하면 1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요, 비구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사찰을 지어주면 10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계를 실천한다면 그 보상은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것의 10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 그대가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면,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보상의 100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전에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 차차 이 말씀이 진심이며, 또한 왜 그런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인경씨
인경씨는 서른이 넘은 프로골퍼예요. 전에 세계에서 유일한 도마 (뜀틀) 기술인 ‘양1’을 창조했다고 소개했던 체조선수 양학선 선수처럼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인경씨는 키도 작고 얼굴도 평범하며 또 나이도 많은 축에 속하는 골퍼예요. 온갖 스폰서들의 이름이 붙은 옷을 잘 차려입고서 섹시하게 배꼽을 드러내며 스윙을 날리는 상품성(?) 있는 골퍼는 아니랍니다. 인경씨 보면, 다른 골퍼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한복을 잘 차려 입은 북조선 미녀를 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 인경씨는 언제나 열심히 스스로 훈련을 하는 골퍼였고 또 재능도 있었어요. 그래서 한 5년쯤 전에 미국에서 열린 아주 큰 경기에서 (‘매이저’라고 해요)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었어요. 얼마나 가까이 두고 있었던가 하면 30센티 앞에 두고 있었어요. 이것을 굴려서 넣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못 넣었답니다. 결과적으로 연장전이 벌어졌고, 그렇게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어떻게 잘 칠 수가 있었겠어요? 졌답니다. 유튜브에, 골프 최악의 순간, 비운의 골퍼 이런 종류의 영상에 나오게 되는 치욕과 수모를 당하게 되었어요. 다시 마음을 추스려 잘 해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다음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우승은 커녕 상위권에도 들지 못하며 점점 잊혀졌답니다. 아래 사진은 그때 그 30센티 퍼팅을 실패한 직후의 모습입니다. 차마 인경씨 얼굴을 보기가 어렵내요.
인경씨는 순례여행도 홀로 다녀 보고 또 법륜스님이 계시는 정토회에도 나가서 수행도 하고 명상도 하면서 그때 그 고통을 딪고 일어나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칠흑같이 깜깜한 절망의 밤이 아마도 한 3-4년은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포기했지 싶어요. 그렇지만 인경씨는 포기하지 않고, 그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아 볼려고 열심히 노력을 계속 했대요.30센티 퍼팅을 실패했던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났어요. 인경씨는 영국에서 벌어진, 가장 권위있다는 브리티쉬오픈에서 (‘매이저’ 입니다) 우승을 하게 됩니다. 참 잘했어요. 그야말로 골퍼의 해탈 열반이 아니겠어요? 부활한 인경씨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에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훨훨 날고 있군요 🙂
인경씨는 이제 서른이 갓 넘었는데요. 앞으로도 오래 선수생활을 하길 바라지만 또 장차 은퇴를 하더라도 참 행복하게 살지 싶어요. 한 훌륭한 인간으로, 좋은 배우자 좋은 엄마 노릇을 하며, 인생의 많은 행복을 누릴 조건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녀가 벌어들인 돈때문이 물론 아니예요.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또 어떤 사람도 대신 찾아 줄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을, 행복의 열쇄를, 인경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찾은 것 같은 느낌이 그녀를 볼때면 들어요. 그 길고 절망적이었던 어둠을 인내와 노력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빛으로 다시 채운 인경씨. 한 인간이 이런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무르익고 여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참 훌륭하고 또 존경스럽습니다.누가 내게 ‘어떤 프로선수와 한라운드를 함께 해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섹시한 미녀골퍼도 또 300미터 티샷 날리는 괴물골퍼도 아니고, 물론 인경씨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겠지요.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인경씨와 한 라운드를 함께 한다면, 그녀가 부러진 날개로 더 높이 나르게 된 그 힘들고 외로웠던 과정을, 그리고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겸손하게 사는 그녀의 품위 있는 삶을 이야기 듣고 싶어요.
인경씨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지 싶네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 ‘더 로즈’ 베티 미들러가 불러요. 그리고 내 나름대로 번역을 덧붙였어요.
The Rose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And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어떤 이는,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익사 시키는 강물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이 그대의 영혼을 피흘리게 하는 면도날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사랑이 끝없이 아픈 갈망이며 굶주림이라고도 말하는데
나는, 사랑은 꽃이며 당신은 그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하고 싶어요.상처 받기 두려워 하는 마음이 결코 춤을 새로 배우지 못하게 막고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무언가를 결코 시도하지 못하게 막아요.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베풀지 못하는 법이며
죽는것을 두려워 하는 영혼은 정말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요.밤이 너무 외롭고 또 갈 길은 너무 멀 때
사랑이란 운이 좋은 사람들이나 성공한 사람들만의 것인가 당신은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한겨울 차가운 눈 아래 묻혀 있는 그 씨앗이
봄이 오면 따스한 햇님의 사랑으로 장미로 피어나리라는 것을.
JW
밤새 두꺼운 서리가 내려 흡사 눈처럼 온 세상을 뒤덥은 겨울의 이른 아침. 출근길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늘 그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오늘도 본다. JW (Jehovah’s Witnesses) 팻말 아래로 Watch Tower라고 쓰인 책들이 보인다. 아! 정말 춥겠다. 나도 군대서 보초를 많이 서봐서 아는데 겨울에 해뜨기 직전이 정말 쥐약이다. 추워서 죽음이다. 이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고 또 그 책은, 그 옛날 그 시절 파수대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출간되던 책이다.
이십대 초반, 휴학 후 입대를 기다리던 동안 나도 한때 이 사람들과 어울렸던 적이 있었다. 참 좋은 사람들이었지. 아! 그때 내게 교리를 가르친 그 아가씨 선생님,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그넘의 책에 자꾸 등장하던 ‘할례’가 무었인가 재차 뭇는 내게 (오~ 븅신) 차마 대답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 아가씨. 지금 돌이켜 보아도 괜찮은 여자였다. 인간적으로 존경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지.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금방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땐 인터넷은 커녕 피시도 거의 없었다. 어떻게 처녀가 총각 앞에서 일대일로 그것이 무었인지를 설명하겠나 🙂
그녀와 주변의 좋은 사람들. ‘입영거부’ 아무도 내색조차 하지 않았지만 나를 받아들여주고 또 나에게 그들을 알고 이해할 기회를 주었던 진실했던 사람들. 입대를 위해 떠날때가 왔고 그녀와 마지막 세션 (공부)을 마치던 그날, 우리는 작은 선물을 주고 받으며 악수를 하고 작별하였다. 아마 만년필이었던가를 내가 주었던지 받았던지 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 함께 모여서 그렇게 가드를 내리고 서로를 잘 대해주면, 사람들이 그렇게 진실하고 착할 수가 없더라. 비록 그들의 믿음을 나는 함께하지는 않지만, 내가 만났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한결같이 괜찮은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만큼 하기도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면서, ‘지금 뭐하는 짓인가’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이렇게 힐난할 만큼 대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에 이사람들에게 커피라도 한잔씩 사주고 싶지만, 내 마음에서 종교라는 것이 너무나 멀어졌고 또 그 사람들이 내 호의를 오해할까도 두려워 못 본척 지나쳤다.
입대후 나는 81130 특기를(?) 받고 기지교도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날 새로운 죄수들이(?) 들어 왔다. 문서를 보니 총기수령거부. 아! 이 사람은 여호아의 증인이었던 것이다. 기지교도소에서 육군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얼마간을 이 사람과 나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함께 보냈다. 아마 밤에 시간을 내어 위로도 하고 또 아무도 보지 않으면 잘 대해 주었었지 싶다. 차마 내입으로, 나도 한때 당신들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었던 적이 있었으나, 당신과 같은 믿음과 용기가 없어서 지금 철창 반대쪽에 서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었다. 어느날 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더라. ‘우리 지역 회중에서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하다가 입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때 그는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군인이 바로 그 사람임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믿기에, 그 처녀 선생님과 다른 사람들은 나를 위해, 그들의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했었을 것이다. 나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 주었을 것이다. 내가 군대에서 ‘그때 그자리에 있었더라면 백발백중 인생 종칠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운좋게 제대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다가 이곳에 와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모두 우연이거나 혹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기도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베풀어준 좋은 인연 카르마의 결과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왜 눈물이 나는지… 아마 그 사람들의 인간적인 노력과 희생을 보았고 (설령 세상이 그것을 비웃는다 할지라도) 또 지금도 그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리라. 그저 돈따라 이익따라 부초처럼 이리갔다 저리갔다 사는 세상에서, 한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따뜻하고 또 굳게 잡아주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진심으로 노력하던 그 사람들을 떠올리면 안타깝고 또 존경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굳이 덧붙이자면, 내가 지금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결국은 지푸라기임을 나는 점점 깨닫게 되기에. 우리 모두를 향한 눈물 방울…
종교와 믿음을 떠나서, 내 자식이 진실한 여호와의 증인과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지 싶다. 세상에 그만큼 하기도 정말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내가 너무나 잘 깨닫게 되었기에. 다른 믿음을 가지고 서로 다투지 않아도 되고 또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살기에. 그리고 우리가 존경하는 친구 노(老)신부님께서 어머니께 말씀하셨듯이 ‘어떤 종교를 가지던 진실하고 훌륭한 삶을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나도 그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응원해주고 싶기에. 아름답고 품위있고 착했던 그녀. 지금도 훌륭한 여호와의 증인으로 잘 살고 계시길 그리고 행복하시길 기원한다. 고마웠어요. 그리고 그런 것 물으면서 븅신짓해서 미안했어요. 지금도 종류는 다를지 몰라도 여전히 그 지랄하며 살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