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듣는 이야기겠지만 ‘와인은 음식의 일부다. 그리고 식사는 시간의 일부다.’ 내가 만든 말인데, 오늘 이 글의 주제다.
일이천개 와인병을 열어 본 사람으로서 (‘열어서 보기만’ 했다) 30-50달러대의 와인들이 가격대비 맛이 가장 좋다는 ‘정직한 전문가’들의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한국에 수입되고 나서 형성되는 가격대는 모른다). 그 정도 가격대라면 80점을 웃도는 상당히 좋은 와인일 가능성이 높다. 레드와인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장기보관의 가능성이 있다. 아무 와인이나 사다가 지하실에 오래 놓아 둔다고 맛이 숙성되거나 나아지지는 않는다. 와인은 만들어질 때부터 족보가 좀 있다.
그런데 이 좋은 80점대의 와인에 만족하지 못하고 90점이 넘는 와인을 찾기 시작하면 가격이 그 10점 차이 만큼에 비례해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몇백퍼센트는 쉽게 오른다 (몇배의 가격). 그리고 95점을 넘는 와인을 마셔야 되겠다는 발상을 하기 시작하면, 그 데미지는 (당신 지갑에) 열배 스무배 혹은 그 이상으로 커지게 된다.
한국에서도 그런 듯 한데, 일부 영어권 소믈리에들도 (와인감정가) 와인을 평가할때 흔히 무슨 열매맛, 무슨 과일맛, 무슨 나무향, 무슨 후추맛 하다못해 가죽향등등의 표현들을 하는데, 나는 딱 질색이다. 그런 표현을 주로 하는 자들은 그대로 패스다.
최근 K푸드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으며, 서구의 음식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는데, 이런 상황에 관한 뛰어난 분석을 근래에 본 적이 있다. 해외에서 오래 살며 비슷한 경험을 해 본 나로서도 100% 동의했던 딱 한 줄의 통찰이었다. ‘그들은 음식을 (K푸드) 먹고 어떤 객관적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유행을 따라서 적절한 말을 할 뿐’ 이라는 것이다. 즉 서구인들은 K푸드를 먹는다기 보다는 ‘유행을 먹는다’는 의미였다. 삼십여년 전에는 이곳에서도 예외없이, 한국산 가전제품은 한쪽 구석에서 싸구려 취급, 한국음식은 ‘그런 괴이한 것들을 먹다니, 이상한 종족들인가?’ 그런 대접을 받았었다. 내 첫 직장 매니져도, 내가, 아내가 아이를 낳고나서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고 했을때 갑자기 입을 막으며 구역질을 참는 모습을 보였었는데 (미역은, 이곳에서는 마치 잔디나 잡초처럼 그 누구도 먹으려는 상상도 하지 않기 때문) 그땐 크게 상처 받았지만 (이곳에 살면서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젠 지난 일이고 그도 이미 죽었다. 명복을 빈다. 담배 대신에 미역을 좀 먹었었더라면 🙂
부대찌게나 해물탕이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다고 가정해 보자 (수십년간 다양한 계층의 서양인들에게 한국음식을 대접해 본 경험에 의하면, 실제 그리되긴 어렵지 싶다). 그것을 서양 음식평론가들이 호평을 하면서 ‘아! 이 부대찌게에 사용한 햄은 2024년산 무슨무슨 제품 같고요, 면은 굵기나 쫀득함을 볼때 아마 무슨무슨 브랜드가 아닌가 싶고요’ 하고, 또 해물탕은 ‘아! 여기에 사용한 쭈꾸미는 아무래도 맛과 씹히는 감촉을 볼때 전라도쪽 보다는 동해안 쪽에서 온 것 같고요, 고추가루는 4-5년 숙성된 무슨무슨 지역의 것이 아닌가 해요.’ 이런 말들을 한다면, 그대와 나는 처음에는 좀 신기해 하다가 차차 ‘이 자가 좀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리라. 우리는 (너무나 당연히) 부대찌게나 해물탕을 먹고 평가하지, 그 속에 든 햄이나, 면 혹은 조개나 고추가루를 개별적으로 감상 혹은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나에게는, 훌륭한 와인을 마시는 것과 맛있는 부대찌게나 해물탕을 먹는 것이 별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와인을 감정하면서 무슨무슨 과일향이니 무슨무슨 나무 열매맛이니 떠드는 것은, 앞서 말한 (가상의 예로 들어 본) 부대찌게나 해물탕을 먹으면서 이상한 평가를 하는 서양의 음식평론가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앞에서 내가 뭐랬더라? 똑 같은 K푸드를 가지고, 그때는 구역질 지금은 판타스틱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한다고? ‘유행을 먹고 유행을 말할 뿐’이라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다.
수많은 와인 전문가들이 이러니저러니 말들과 의견들이 끝이 없는 줄 알지만 (아무도 모를 미래에 대한 ‘점쟁이들의 말’ 그리고 누구나 일가견이 있는 ‘골프 이야기’등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와인에도 있는 듯) 그중에서 한 사람, 내가 ‘이 양반 정말 와인을 아는 분이네’ 했던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수십년 산 사람인데 (유학 및 대학강의. 와인과는 관련은 없는 분야로 기억) 개인적으로 와인에 아주 조예가 깊은 분으로 소개되었다. 이 양반이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무슨무슨 과일향 그런 헛소리 대신에 한마디 먼저 던지더라 ‘(프랑스에서) 와인은 음식의 일부, 즉 식사의 일부로 취급된다’ (따라서 와인만을 즐겨 마시지도 않으며, 와인 자체만을 그리 왈가왈부 하지도 않는다). 내가 여태껏 느끼고 생각해 온 바를 딱 한마디로 표현하는 분을 그때 내가 처음으로 만났다.
내 경험에 따르면 그리고 그 경험에서 생겨난 내 의견에 따르면, (서두에서 밝혔듯) 와인은 음식의 일부이기에 그리고 식사는 시간의 일부이기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사랑과 기술로 만들어낸 음식과 더불어 마시는, 내가 고른 80점대 와인들은 (사랑하는 이들이 없는 시간에 기술로만 만들어진 음식과 같이 마시는) 어떤 95점대 아니 99점대의 와인들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호화보트 위에서 선남선녀들에 둘러싸여 일급요리사가 만든 음식과 수백만원 하는 와인을 마신들, 우리들 모두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똑같은 인간의 조건을 (생로병사, 오감의 한계, 정신적, 심리적, 영적 갈구등) 공유하는 존재들임에, 비싼 와인 그 자체가 더 큰 만족과 행복을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무지와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의 참된 JOY 그리고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결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또한 금전적인 우열에만 좌우되지도 않는다. 나아가 인생이라는 긴 시간 안에서, 참된 가치들은, 남들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 저절로 드러나고 매겨지게 되어 있다.
오늘 한 수 배웠나? 하지만 날뛰지 마라. 잘 난 사람들이 모여서, 90점 혹은 95점 되는 고가의 와인을, 거룩한 표정으로 마시면서, 이 빈티지는 무슨무슨 과일향이 어쩌구저쩌구 하고 있는데서, 해물탕 혹은 K푸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그대는 미친X 취급을 당할 것이다. 애꾸눈들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조심해야 한다 🙂
스키 ski
2025년 8월
2025년 8월
2026년 1월
배 boat
- 1. 배.
2. 배를 유지관리 하고, 바다로 호수로 자유자재로 몰고 다니는 기술.
3. 배를 가지고, 온 가족이 함께 놀러 다닐 수 있는 여유와 화목함.이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어렵고 오래 걸릴까?
이 중에서 어느 것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전부 다? 🙂배만 생기면, 기술도 그리고 여유와 화목도 저절로 생길 것 같지?
완전히 반대 순서던데, 내 경험에 따르면.아내와 이 나라에 이민 온 첫째 주에, 아무것도 모르고 오클랜드 하버브리지를 걸어서 건너려다가, 경찰이 ‘고속도로를 걸어서는 갈 수 없어요’해서 되돌아 왔던 기억이 난다.
다가올 여름 휴가에는, 아이들이 모는 이 배 위에서, 그 하버브리지를 보며 건배를 하게 되지 싶다. 사시미 칼도 갈아 놓았고, 포도주도 무르 익었다 🙂
두개의 인생 레슨
알다시피, 인간의 삶이란 (따지고 보면, 결국은) 타고난 유전자와 주어진 환경이 빚어낸 결과물 아니겠나. 주어진 환경에는 가족환경도 있지만 교육환경 그리고 사회환경도 있다. 개미군락의 각각의 개미들처럼, 인간도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최적화된 구성원들을 생산해 내는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나라와 사회가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강도와 방향은 다르다. 한국처럼 (개인에게 미치는) 사회적 압력과 조직의 영향력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현저히 높은 사회에서는 더욱 더 ‘만들어진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손꼽히는 덴마크도, 사회적 압력과 조직의 영향력이 한국과 못지않아 보이더라. 어떤 도큐멘트리에서 덴마크 젊은이들에게, 이런 세계 최고 수준의 행복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는가 물었더니, ‘(사회적) 단일성에서 온다’고 하더라. 나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도 사는 방식도 같다는 의미다. 한국과 덴마크를,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비교해서는 안된다만.
나이가 들면, 이 진실을 알아채고 깨달아야 한다. 다시말해, 내 자신은 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집단의 영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차차 남들이 만들어낸 내가 아닌, 참된 내가 있는가 알아보고 찾아보면서, 어느듯 철이 들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사회화, 주조 혹은 빚어진 것들을 풀어내고 그 힘과 영향력을 빼면서, 자유롭고 시근있는 어른이 된다.
우리를 만들어낸 나라와 사회 그리고 조직은, 이런 진실을 말해줄 의사도 능력도 없다. 그리고 당신 옆 사람들도 마찬가지. 절대로 힌트를 주거나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갑자기 조용기의 빤질빤질 대머리가 떠오르네. 수십년 열성적으로 믿어보고 또 떠들어 보고나니, 결국은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을 자신이 깨달은 후에도, 신도들에게 절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 제 자식들에겐 행동으로 힌트를 주었지 싶다만. 그자는 ‘결국은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을 자기 노년의 삶에서 명백하게 드러내고선 갔다. 이것을 알아채면 더 이상 속지 않을텐데, 그러지를 못하니 오늘도 그곳에 가서 그 넘 자리를 물려 받은 또 다른 대머리를 우러러보면서 주님주님 하며 산다 (개신교등 종교에 반감도 관심도 없음, 그냥 그넘 대머리 생각이 갑자기 나길래 해본 이야기).
이 진실을 알아채고 깨닫지 못하면, 그냥 남들이 만든대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다가 떠나게 된다. 그저 주변 사람들보다 한끝 위로 올라가려고 아우성치고 박터지다가 정신없이 간다. 우리들처럼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AI 세대가, 100년전 혹은 1,000년전 조상들과, 외향은 달라보여도 본질은 똑같은 삶을 살다가 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두번째는, ‘인간이란 정말로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짬뽕’이라는 것이다. ‘I didn’t have sex with her (루윈스키)’ 라고 청문회에서 거짓말 했던 클린튼은, 개인차원에서는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아무데나 쑤쎠대는 수케였던 것 같지만 (백악관에 있을때 힐러리가 던진 재떨이에 얻어맞아 안면에서 피를 질질 흘리기도 했고, 자주 쫒겨나서 소파에서 자곤 했었다는 설이 있다) 이 양반이, 목욕탕 수건 뒤집어 쓴 팔레스타인 지도자와 (아라파트), 훗날 이것 때문에 암살 당한 이스라엘 총리를 (라빈) 쑤쎠서 (일맥상통 하는구나) 만들어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2-state solution (두 나라로 공존하자는 해법)’ 은 결국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돕게 되지 싶다. 지금은 매우 나쁘고 시끄러운 상황이지만 길게 보면 결국은 그리 되리라. 또 다른 예로, 이곳 5선의원 법무장관 출신의 유명인과 우연히 몇번 골프를 치면서, 그자의 언행을 보고선 뭐 이런 철부지 무개념한 넘이 다 있는가 싶어서 가족들에게 여러번 욕을 퍼부었는데 (이곳은 빈자리있으면 아무하고나 같이 칠 수 있다. 몇 번 치고선 밥 맛 떨어져 다시는 안친다), 오늘 티비에 나와서, 이곳 집권당에서 원주민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법안을 발의하는데 대하여, 법무장관 시절 관련 법안을 만든 사람으로서, 고강도의 비판을 가하며 원주민들의 권리를 진심 지키려는 것을 우연히 보고서는 새삼 이 양반이 달리 보이더라. 아내도, 유아교육과 관련하여 원주민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의 권리를 위해 큰 일을 한 이자의 이름이 반드시 등장한다고 하더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아니다. 그리고 밖에서는 (진심) 민주주의 외치고 집에 와서는 (다른 방법을 모르다 보니?) 마누라 줘패는 것도 보통이다. 내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강조할려고 유명인들 이야기를 먼저 했지만, 그대들과 나를 포함한 99.99999%의 인간들은, 그야말로 알고도 짬뽕 (이익좇아 의도적으로) 모르고도 짬뽕 (무식하고 무지해서) 이다. 예외없다. 잘못된 사회화의 결과인지, 나는 어릴때부터 이런 부조리 혹은 불균형 (discrepancy)을 못견뎌 했고 비정상으로 여기며 살았었다. 그래서 삶이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엄청 힘들뻔 했었는데, 다행히 일찌기 혹성탈출에 성공하는 바람에 부작용을 최소화 하면서 살고 있다 🙂
일본의 한 유명 여가수가, 전용 버스를 오래 운전해 준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때 이나라에서 매우 유명했던 장관도 남편이 노가다 출신이었다. 이나라에서는 무언가를 결정할때, 내가 좋은가 싫은가를 앞세우지, 타인들이 어떻게 보는가 또 주변에서 어떤 압력을 가하는가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니, 중요하고 말고 그런 생각이 별로 없다. 사실 애초부터 타인들의 삶에 관심이 크게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어떤 사회 혹은 나라를 만드는가의 관점에서, 한국과 비교할때 결정적인 차이가 아닌가 싶다 (다음 글에서 더 이야기 하기로 하자). 반면에 한국은 ‘자기 생각’ 그리고 ‘자기 결정’ 등이 어렵고 드문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어떤 상을 (이데아 / 에이도스 혹은 image)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고 그것을 서로에게 강요한다. 입시건 결혼이건 아파트건 자동차건 죽는과정이건 구두모양이건 간에.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원하건 말건 간에 어쨌던 ‘완벽해야 된다’ 아니 ‘완벽하게 보여야 한다’. 따라서 (타인들의) 짬뽕스러움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배척된다. 그리고 (자신의) 짬뽕스러움은 절대로 드러나서는 안되고 철저히 감추어진다.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움과 추함이, 수성과 신성이 (짐승스러움과 영적임이), 입으로 들어간 것들과 항문으로 나오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짬뽕 자체인데, 그렇게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것을 만들어 내어 서로를 못살게 괴롭히며 또 자신도 괴롭게 산다는 말인가? 나도 진단은 하는데 처방이 없다.
그대들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 하나 하자. 이곳에서는 로우라이프들 (무식한 하류 인생, 막가는 인생) 포함하여 모든 운전자들이 99% 횡단보도에서 정차하여 보행자를 지나가게 한다. 경찰이나 CCTV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보고도 무시하며 그냥 지나가는 넘은 정말 몇년에 한번 볼까말까다. 반면에 한국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운전자들이 그 크고 거룩해 보이는 차를 모시면서도 99% 횡단보도에서 정차하지 않는다더라. 무었이 이런 괴상한 상황을 만들었을까? 어떻게 설명하지? 수십년 전, 진즉에 내가 낌새를 채고 혹성탈출을 감행 할 무렵, 어떤 티비 프로그램에서, 한 일본 지식인에게 (아마 친한파였던듯), 한국이 장차 선진국이 되려면 무었이 필요할까요 물었더니, 이 양반이 뜬금없이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마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엄마들이 통제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강산이 여러번 바뀌어 한국인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지만, 그 이외 다른 것들은?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졌나?
이렇게 진단하는 나도 product of Korea 이다보니 아직도 이런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product of Korea 인 덕분에 버벅거리는 영어로 이곳에서 그나마 밥이라도 벌어 먹고 사는 면도 있다. 마치 K-문화니 하면서 외국에서는 열광하는데 (잘 팔리는데), 정작 그 문화의 원인이자 결과인 한국인 개개인은 그리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실상은 별로인), 또다른 한국적 짬뽕스러움이라고나 할까.
인생이 짬뽕임을, 자신이 짬뽕임을, 그리고 타인들도 짬뽕임을 보고 받아들이고 또 어느 정도는 드러내게 되면 삶이 나아진다. 더 자유로워지고 무었보다도 더 자연스러워 진다. 쓰고 나니 첫번째와 두번째가 결국은 하나였구나 깨닫게 된다.
정미조 클래식
당신은 나를 몰랐습니다
나도 당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없이 떠났습니다
그 후에 나는 알았습니다
그 후에 당신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세월이 너무 길었습니다머나먼 타국에 계신것도 아니건만
당신과 나 사이가 너무도 멀어
다시는 만날수 없었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사랑하면서
이 슬픔 그대는 모르리
돌아서는 내 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