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

출근길 버스, 막 떠나려는 참에 어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아주 힘겹게 버스에 천천히 오른다. 반신을 잘 쓰지 못하는 듯. 빈의자에도 간신히 걸터 앉는다. 허름한 옷차림에 가방을 등에 맨 흰머리 흰수염이 더부룩한 상늙은이…

가만있자 저 사람 혹시 노엘이 아닌가? 뒤쪽에 앉아 있던 내가 자세히 보니 맞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두세 정거장 가서 시내에 내린다. 이번에도 힘겹게 버턴을 누르고 겨우겨우 걸음을 옮겨 앞문으로 내렸는데, 내리고서도 빨리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좀 엉거주춤 서 있다. 운전수는 친절하게 기다렸다가 버스를 서서히 출발시킨다.

이 시간에 이곳에서 내리는 것을 보면 그는 놀러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런 몸과 행색으로 이 사람은 지금 무었을 하는 것일까? 그때 내가 그곳을 떠나면서 본것이 마지막이었으니 15년 세월이 흘렀다. 출근후 자리에 앉자말자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비록 오래전의 일이었으나 나는 그때의 에피소드를 생생히 기억할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성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단번에 찾을 수가 있다. 아! 한국으로 치면 국회사무처 비슷한 국회 지원 기관에서 매니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내가 좀 정신이 멍하고 충격을 받아서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같은 정부기관에서 일했던 그 당시에 그는 그곳에서 최고위급 매니져였었다. 그리고 그 당시 (죽었다 살아난) 뇌졸증의 여파로 반신이 불구가 되어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다녔으니, 지난 15년 이상을 이런 몸으로 계속 풀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오십이 넘었었지 싶고 또 머리가 하옛었다. 15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말할것도 없고.

내가 상당한 근거로 짐작컨데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람 어쩌면 의지의 사나이 조용한 인간승리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라면 그런 몸상태로 수많은 크고 작은 어려움들과 도전들에 직면할때 노엘처럼 꾿꾿히 견디며 가혹한 운명에 대응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동안 그를 잊지 않았으며 때때로 기억했었는데 앞으로는 힘겹게 버스를 타고 내리던 그의 모습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내 삶에서 내가 직면해 있는 어려움과 도전들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한때 나는 어려움에 빠진 그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져 이유없는 호의를 베풀었었다. 그는 그때 멋지게 그것을 되갚았을뿐만 아니라, 이토록 세월이 흐른 후에 자신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더 많은 호의를 다시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인연이 흘러가는 모습이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때 한순간 그런 자비의 마음을 내지 않았었더라면 그와 나는 아무런 인연없이 헤어졌을 것이고 아무것도 서로 주고 받지도 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작은 자비가 15년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내게로 되돌아 온다. 신기하기도 하고 또 좀 무섭기도 한것이 인연 카르마가 아닌가 싶다.

오늘 아침 비가 오는 바람에 버스를 타게 되었다. 막 버스에 오르려는데 줄 반대쪽에 어떤 사람이 기다리고 서있길래 손짓으로 먼저 타라고 하였다. 괜찮다며 사양하는 사람과 문득 눈이 마주쳤는데 노엘이었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듯 하였다. 혹은 기억하지 못하는체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뒤쪽 자리에 앉아 내릴때까지 그를 물끄럼히 바라보면서 그의 삶에 행복과 기쁨을 기원하였다.

가혹한 시련이 지난날 이유없이 그를 덥쳤었다. 비록 그는 쓰러졌었지만 다시 일어났다. 하루하루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는 집에서 안락하게 서서히 죽어가는 삶보다는, 일어나서 쪽팔리고 힘이 들지만 정상적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였고 15년이 지난 오늘도 그렇게 살고 있다. 확실히. 나의 존경과 감사를 전하며 그의 건투를 빈다.

내가 나의 작고 가벼운 십자가마저도 불평하며 원망하는 마음이 들때 나는 그를 기억하리라. 힘들게 지팡이를 짚고서 천천히 버스를 오르내리던 그의 모습을 잊지 않으리라.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많은 제약회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미친듯이 개발하고 있어요. 상업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거대 제약회사로서 인류에 대한 책무를 다한다는 측면도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전 글에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인 빌 게이츠가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자선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이분도 빨리 효과적인 백신이 만들어져서 싼값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도 공급될 수가 있도록, 큰 돈을 기부하여 백신을 몇천원 수준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분이 지난 몇달간 효과적인 백신을 가장 빨리 만들어낼 가능성이 큰 제약회사로 지속적으로 언급해 온 회사는 우리도 들어본 ‘화이자’라는 제약회사 입니다.

오늘 이 화이자 제약회사에서, 90%에 가까운 매우 놀라운 효과를 보이는 백신이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는 발표를 했어요. 여러분이 혹시 아실지도 모르지만 빌 게이츠는 그동안 곧 백악관에서 쫒겨날 ‘노랑머리 인간말종’이 미국 전체에게 큰 화를 초래하는 무책임한 짓들을 하는데에 반대해 왔어요. 특히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매우 잘못된 대응을 여러차례 직접적으로 질타했어요. 한 신문에서 오늘 화이자의 백신발표를 언급하면서 ‘참으로 오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가 없다’고 했어요. 백신개발이 며칠안에 되는 것이 아니니 아마 일주일 전에 발표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랬다면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상상이 되나요?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존 멕케인은 미국 ‘아리주나’주의 상원의원이었어요. 해군제독의 (아마 4스타) 아들이며 젊은 시절에는 공군에서 유명한 ‘문제아 파일럿’이었다고 해요.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예요. 비행기를 사고로 불태워 먹었다던가 항공모함에서 출격하기 전에 ‘우연히’ 미사일을 함상에서 발사한다던가 그런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근래에 암으로 사망한 이분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던 용감한 미국의 군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인들이 군인과 경찰의 노고에 얼마나 감사하며, 특히 참전 군인들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여러분들도 알고 있나요? 어디서든 줄을 서 있는 군인들을 가장 앞으로 보내서 편의를 봐주는 것은 미국에서는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이라고 합니다.

존 맥케인은 북베트남 상공에서 피격당해 낙하산 탈출을 합니다. 뼈가 심하게 부러진 채로 붙잡혀 북베트남군 병원을 거쳐 감옥에서 수년간 갖혀 있었어요. 이 사람이 누구의 아들인지 아는 북베트남군들이 가만히 두었겠어요? 물론 몽둥이로 패거나 고문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온갖 방법으로 절망감과 두려움을 심어주어 자기들이 시키는데로 하도록 만들었겠지요. 지금도 존재하는 비데오를 보면 이 사람이 병원에서 붕대에 칭칭 감긴채로 눈물을 흘리며 아내와 가족을 그리워하는 (약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도 ‘부끄럽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강제로 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요. 전쟁이 끝나고 이 분도 감옥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되돌아 왔어요. 미국은 이 사람을 ‘화냥년’ 대접하며 천대하기는 커녕 나라에 봉사한 참전 영웅으로 대접합니다. 그래서 정계에 진출하여 상원의원도 오래하고 대통령 후보도 되었었지요.

이야기가 옆길로 좀 세는데요,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되었지만 예전에는 처신이 좋지 않은 여자를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 화냥년이라고도 표현했었어요. 이 표현의 어원은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조선이 많은 처녀들을 조공으로 바쳤는데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어떻게 고향으로 되돌아 왔을때 (‘환향녀’ 즉 고향으로 되돌아온 여자) 우리 조상님 남자들이 그 여자들을 더러운 여자라고 그렇게 천대를 했다고 해요. 임금까지 나서서 그들이 우물에 목욕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기만 하면 차별하지 말고 대해주라고 했는데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지요. 이 표현의 어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역사적인 사실들을 전후로 살펴보건데 실제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네요. 그런데 그녀들이 자기 발로 부모형제를 버리고 청나라에 갔나요? 누가 그 처녀들을 짱께들에게 붙들려가게 만들었나요? 아마도 이런 못난 남자들의 전통이 유구하게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자기는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해야 한다’며 지랄을 떠는 넘들이, 바로 헬조선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당신과 나는 예외겠지요 🙂

다시 그 인간말종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이자는 군대를 가지 않았어요. 베트남전쟁때 (무작위 추첨을 통한) 강제징집을 교묘한 방법으로 피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나라를 위해서 한번도 총을 잡아보지 않은 자가 참전 조종사였던 존 맥케인에게 ‘포로로 잡혔던 군인에게 무슨 명예가 있는가’ 이런식의 극히 모욕적이고 치명적인 악담을 합니다. 당연히 존 맥케인의 장례식에도 초대를 받지 못해요. 두 사람은 같은 정당 소속의 정치인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존 맥케인의 부인은 여러차례 직간접적으로 (반대 정당의) 바이든 후보를 지지하는 표현을 합니다. 이번 선거 결과 존 맥케인이 상원의원을 오래 했던 이 아리조나 주에서, 인간말종이 쉽게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던 그곳에서, 근소한 표차이로 바이든이 승리 합니다. ‘죽은 존 맥케인이 산 트럼프를 작살냈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존 루이스는 흑인 인권운동을 오래 했던 존경받는 하원의원이었습니다. ‘조지아’라는, 짐작컨데 옛날 흑인 노예들이 목화를 땃던 그런 미국 남부 주의 (state) 하원의원을 수십년 지내다가 근래에 암으로 죽었습니다. 이 사람도 존 맥케인처럼 자기 주에서는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이 사람이 죽었을때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그 인간말종에게 언론들이 인터뷰를 했어요. ‘이분의 죽음과 업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몰라.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뭘 믿겠어?’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언론들이 다시 물었어요 ‘흑인들의 인권신장에 근래에 가장 기여한 분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죽은 존 루이스를 떠올렸겠지요. 그 인간말종이 대답했어요 ‘응… 나. 내가 흑인들의 인권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기고 있지’. 이 언론의 인터뷰는 많은 미국인들의 공분을 샀어요. 특히 죽은 존 루이스의 고향인 조지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미국 대통령 투표결과가 발표되었는데요, 보수적인 조지아 주에서도 그 인간말종은 근소한 차이로 바이든 후보에게 지고 맙니다. 역시 ‘죽은 존 루이스가 산 트럼프를 작살냈다’는 기사가 뜹니다.

당신과 나도 여태껏 살면서 비록 그 정도나 횟수는 다를지언정 얼마나 이와 비슷한 짓들을 했었을까요? 내가 언제 원수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었던지 또 내가 어떻게 앙갚음을 당했었던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보복은 있었으되 어리석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이야기가 아닌가요? 내가 의도를 가지고 저질렀던 언행의 결과는 부매랑처럼 언젠가는 그리고 어떤 형태로건 내 자신에게 되돌아 옵니다. 그것이 남들에게 했던 것이건 자신에게 했던 것이건 혹은 무었이었건 말이예요. 오늘 밧줄을 얽히고설키게 만들면 언젠가 그것에 내가 걸려 크게 넘어지는 순간이 올꺼예요. 그 순간은 내가 예상하지도 또 원하지도 않는 때일 것이며, 그때는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너무 늦겠지요. 지금 덜 얽히고설키게 만들며 또 하나라도 더 풀려고 노력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 아닌가 싶네요.

붓다께서 이미 수천년 전에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어요.

기질 습관 그리고 운명

어떤 산부의과 의사의 말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직후에 의사들이 아기 입을 벌려 이물질을 제거하는 절차가 있는데 이때 어떤 아기는 입을 좀 눌러서 벌려도 그냥 아~ 쉽게 벌려주면서 멀뚱멀뚱한(?) 아기도 있고 또 어떤 아기는 자지러질듯이 울고불고 하는 아기도 있다고 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어떤 외부적인 영향도 없는데 이렇듯 반응이 다른 것을 보고서 그 의사는, 아마도 이것은 아기들이 부모들로부터 유전적으로 받아서 가지고 태어나는 어떤 기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했어요.

몇달 전에 유치원을 시작한 한국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가 했어요. 오랜 세월 유치원에 재직하면서 수천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아 왔지만 한국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라고 해요. 서로 말이 통한다는 잇점을 지혜롭게 이용하여 아내가 어떻게 이 아이의 유치원 생활과 적응 과정을 표내지 않고 잘 도와주는지 나는 전부터 들어와 알고 있어요. 그 부모는 어쩌면 ‘아! 한국인 원장이라 다행이다’ 그 이상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처음 겪어보는 일이잖아요. 이 아이는 공부를 많이하고 능력이 있는 부모가 이곳 회사에 파견을 오는 바람에 함께 와서 몇년을 지내게 되었다고 해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당연하겠지요) 3살이 조금 넘은 이 사내 아이는 처음에는 아침에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곤 했었지만, 지난 몇달간 아내와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이제는 울지도 않고 점점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과도 더 어울리며 잘 놀게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영어는 아직도 한마디도 못해요. 아니 ‘결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 유치원에는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 아이도 한명이 있다는데요, 이 두아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영어를 알아 듣긴 해도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들은 둘 다 매우 영특한 편이라고 해요. 그리고 뚜렷한 개성 혹은 자아가 있어 보인다고 하네요 (유치원 다른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이 아이들은 ‘잘 하지 못할까봐’ 혹은 어쩌면 ‘잘 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의식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내는 생각한다고 해요. 타고난 기질일까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이런 특이한 상황에서 얻게 된 어떤 습관일까요? 아니면 타고난 기질이 이런 상황에서 그런 습관으로 드러난 것일까요?

중요하지 않아요. 이 아이들도… 언젠가 아내가 말해 주었던 그 수줍은 이나라 아이. 그렇게 좋아하는 소방차가 유치원에 왔는데도 너무 부끄럽고 무서워서 친구들처럼 차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먹였다던 그 아이. 아내가 제안을 하면서 약속을 했다고 해요. ‘네가 스스로 올라가면 나는 네 뒤에 꼭 서 있겠다’. 아이는 자신의 결정으로 올라갔고 참 기쁘고 좋아했다고 해요. 그 기뻐하는 아이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아이들의 습관을 바꾸어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돌려주는 아내의 직업이 참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때 유치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또 이런 프로페셔널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믿어요)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자랐어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저를 길러주신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 없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성인이 되고 나서 깨달은 자신의 기질 그리고 습관과의 힘겨루기가 만만치 않은 경우도 있어요.

다시 ‘결코 말하지 않는 그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아내와 다른 훌륭한 선생님들과 또 이곳의 좋은 교육 시스템의 도움으로 입을 열게 될꺼예요. 그리고 신나게 떠들고 싸우고 울고 불다가 만 5살이 되면,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씨앗처럼 자기의 인연을 따라서 멀리 떠나갈 꺼예요. 좀 웃기는 이야기는, 이렇게 떠나간 아이들이 장차 부모가 되어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이 유치원에 되돌아 오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고 해요. 자기를 돌보아 주셨던, 자기의 모든 것을 보았던 그 선생님들이 아직 있어요 하하하 🙂

때대로 나는 아내에게 ‘당신은 제자없는 스승이다’ 이렇게 놀리는 말을 할때가 있는데요, 진심으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자들이 감사해 하고 또 가슴에 달아주는 카네이션도 물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지만, 아내의 손을 거쳐 지나간 아이들이 아내와 다른 선생님들의 지혜와 사랑으로, 어쩌면 성인이 된 자신의 인생을 어둡게 하고 또 망칠지도 모를 습관들을 조금이라도 바꾸어 세상에 나간다면, 이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베푸는 참으로 큰 적선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요. 이런 종류의 괴로움을 직면하여 발버둥을 쳐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공감하지 싶네요.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가격을 매기거나 사고 팔수가 없지 싶어요. 참으로 큰 적선은 준 사람도 모르고 받은 사람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크고 작다’는 것도 없고 ‘주고 받았다’는 것도 없지만 그 실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나는 봅니다. 어쩌면 이미 성인이 된 인간들의 구원은(?)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닫고 의식하는 바탕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마치 어른이 되어 배우는 골프는, 어릴때 아무 생각없이 아빠 따라가서 놀면서 저절로 익힌 골프와는 그 과정도 차원도 다를수 밖에 없듯이 말이예요.

세살 아기들도 이렇게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아 (ego).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할 무거운 등짐 혹은 두꺼운 외투처럼,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고 또 내게 이익이 되라고 자연의 섭리로 주어졌지만, 마치 양날의 칼처럼, 이토록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조차도 짐과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 ‘나’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마음이 무겁지 않습니까? 붓다께서 해탈 열반을 만드셨나요?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마치 나이든 배뿔뚝이 중년에게 골프를 가르치듯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바로 이 자아가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단지 기질과 습관의 덩어리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자아를 만들고 또 강화하는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줄이고 또 지우면서 열반을 (니르바나) 향해 노력하며 살다가 가면 좋다 말씀하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소방차 위를 스스로의 결정으로 올랐던  그 아기는 장차 어른이 되면, 소방차를 아직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이고, 자신이 어릴때부터 존중 받았듯이 타인을 자연스레 존중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또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힘이 센 사람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요? 아니면 주변 사람들 모두 맹목적으로 쫓는 것들 중에서 더 비싸고 더 크고 더 멋져 보이는 것들을 획득하여, 이차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노병들의 군복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들처럼 ‘여기 봐요. 나 좀 봐요’ 하다가 나중에는 플라스틱 줄이나 주렁주렁 매달고선 졸지에 허무하게 떠나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어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나요? 어떤 어린 시절을 통해 어떤 몸과 마음의 습관을 길러 오늘을 살고 있나요?

열아홉 후안마이의 마지막 편지

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은 한국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도 부인이 기뻐 보이지 않으면 남편이 그 이유를 물어보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남편은 왜 오히려 아내에게 화를 내는지, 당신은 아세요?

남편이 어려운 일 의논해 주고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아내를 제일 아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저는 당신의 일이 힘들고 지친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저도 한 여자로서, 아내로서 나중에 더 좋은 가정과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당신은 아세요?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는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당신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려 주기를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해 왔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하고, 그럴 때마다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가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한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고 있어요. 좋으면 결혼하고 안 좋으면 이혼을 말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진실된 남편으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지만, 결혼에 대한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어요.

한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누구든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되요. 물론 부부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처가 너무 많아 결국 이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한 사람의 감정을 존경하고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는 상황들과 원망하게 하는 상황들이 무관심하게 지나가게 되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자존심이 있고 자신을 ‘정답’에 서게 하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부부가 행복할 수 없고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에요. (중략) 당신은 저와 결혼했지만, 저는 당신이 좋으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을 많은 여자들 중에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아세요? 제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호치민 시에서 일을 했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집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가정을 위해서 일을 나가야 했고,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하지만 봉급은 얼마 못 받았지요. 저는 노동이 필요한 일도 했었어요.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그것이 가축을 기르는 일이든, 농작을 하는 일이든. 가족들은 노동일로 벼를 심고 베는 일을 했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랬을 뿐이에요. 저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일을 어떻게 하고 또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제가 베트남에 돌아가게 되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에요. 저는 당신이 저말고 당신을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래요. 당신이 잘 살고 당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지길 바래요.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 저를 잘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다시 처음처럼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의 희망은 이제 이것뿐이에요. 당신과 전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이 당신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하느님이 저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정말 더 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

 


이 사건 범행은 피고인이 그 경위에 어찌 되었던 간에 피고인과 결혼하여 피고인만을 의지하여 말도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에 온 19세의 피해자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으로 그 결과가 지극히 무거워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가 남긴 편지 내용을 보자. 피해자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피고인과 서로 이해하고 위해주는 애틋한 부부관계를 이루고, 한국어를 빨리 배워 한국생활에 적응하면서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한국에 와 피고인과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피고인의 피해자에 대한 배려의 부족, 어려운 경제적 형편 및 언어문제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원만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였다.

피고인의 무관심과 통제로 인하여 피고인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기는커녕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누리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피고인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을 것이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이와 같은 반응을 보고 피해자가 처음부터 피고인과 결혼할 생각 없이 사기결혼을 하였다고 오해한 것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에 이른 주된 원인이 되었다.

거기에 피고인의 피해망상적 사고경향과 음주 중 폭력습벽이 더 해져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사건 범행은 결국 계획적이거나 미리 의도된 범행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피고인의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 피해망상적 사고경향 및 음주 중 폭력습벽에 기인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이러한 그릇된 성행을 교정하기 위하여서도 상당한 기간동안 피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형의 선고는 불가피하다고 판단된다.

한편 시각을 바꾸어 이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한 근본 원인을 돌아보고 싶다. 특히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남성과 제3세계 여성 사이의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국제결혼의 명암을 재조명해 보도록 하고 있다. 배우자감을 국내에서 찾을 처지가 되지 못했던 피고인이 결혼정보회사를 통하여 베트남 현지에 임하여 졸속으로 피해자를 만나게 된 전 과정을 보면서 스스로 깊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은 그저 피해자가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단 몇 분만에 피해자를 배우자감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누구 집 자식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도 알려 준 바 없었고, 그래서 이를 전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또한 스스로 알고자 하지도 아니하였다. 목표는 단 한 가지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일 뿐, 그 이후의 뒷감당에 관하여 진지한 고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지탄을 피고인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숙함의 한 발로일 뿐이다. 노총각들의 결혼대책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하는 남녀를 그저 한 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무모함.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 사건과 같은 비정한 파국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혼인은 사랑의 결실로 소중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의 아내가 되고자 한국을 찾아온 피해자 후안마이. 그녀의 예쁜 소망을 지켜줄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19세 후안마이의 편지는 오히려 더 어른스럽고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이 사건이 피고인에 대한 징벌만으로 끝나서는 아니되리라는 소망을 해 보는 것도 이러한 자기반성적 이유 때문이다.

이 법원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국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사람과 결혼하여 이역만리 땅에 온 후 단란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한 채 살해되어 19세의 짧은 인생을 마친 피해자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위무하고 싶었다. 그 전제로 피고인이나 결혼을 알선한 결혼정보업체를 통하여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을 알리려고 하였다.

결혼정보업체는 피해자의 성장배경, 생활환경 및 피해자의 가족들의 소재에 대한 이 법원의 사실조회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고, 관계당국이나 피고인을 통하여서도 피해자의 가족들의 소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을 알릴 길을 찾지 못한 채 이 사건 판결에 이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피고인으로서도 피해자의 가족들로부터 용서를 받는 기회를 갖지도 못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에 피고인의 연령, 성행, 전과관계, 범행의 동기, 경위, 결과 및 범행 이후의 정황 등 양형의 조건이 되는 여러 가지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에 대하여 징역 12년을 선고한 제1심의 형량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워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대전고등법원

인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넓이뛰기 예선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육상선수로 장차 남게 될 선수가 발판을 잘못 밟아 이미 두차례 실격을 당하고 마지막 시도를 남겨둔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 흑인선수는 당시 넓이뛰기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리안의 우월성을 떠벌리던 히틀러 면전이라 긴장했었나… 이전에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라 몹시 당황한다.

이때 한 독일선수가 다가온다. 그는 당시 나찌독일을 대표하는 올림픽 육상선수이며 최근 벌어진 유럽육상선수권 대회에서 넓이뛰기 3위를 차지 했었다. 출발선부터 발판까지를 이 미국인의 보폭으로 재보고서는 발판 훨씬 이전의 한 지점을 가르키며 조용히 말한다. 당신의 평소 기록이라면 발판 훨씬 이전에서 뛰어 올라도 지금 예선 통과기록을 충분히 넘을 수가 있으니 위험을 감수한 무리한 시도를 하지말고 이 지점에서 점프하라…

예선을 통과했다. 둘이 결승에서 다시 만나 겨루었다. 그리고 시상대에 오른다. 나란히. 약간 낮은 곳에 선 그 독일선수가 이 흑인선수를 올려다 보며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함께 시상대에서 내려와 팔짱을 끼고 스타디움을 돌아 퇴장한다. 그 넘이 보고 있는데도.

이 흑인선수는 그때 그 독일인이 보여주었던 스포츠맨쉽, 그 용기와 우정을 잊을 수가 없다. 미국으로 되돌아 가서 편지를 주고 받는다. 자식을 둘 남겨두고 이 독일선수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사한다. 죽기전에 부탁하였다. 장차 자기 아들에게, 세상이 전쟁으로 이렇게 쪼게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었던지를 꼭 좀 알려주라고.

종전 후에 이 미국인은 독일을 몇차례 방문한다. 그리고 그때 그의 훌륭한 아버지와 함께 겨루었었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아들을 만나 그 약속을 지킨다. 또한 그 아들의 결혼식을 bestman이 되어 축하해 준다. 이들의 우정은 대대로 이어진다.

70년이 지났다. 그때 베를린 올림픽이 열였던 바로 그곳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렸고, 넓이뛰기 시상식에 그 독일선수의 아들과 손녀 그리고 맨 오른쪽에 그 미국선수의 손녀가 함께 섰다. 중간에 흰 담뇨 뒤집어 쓴 사람은 누군지 몰라도 되고.

인간이 이렇게 숭고하고 멋질 수 있다. 인연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


M은 중견 변호사였다. 남편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몇 년간 이곳에서 일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기를 원하였다. 그녀와 나는, 변호사와 지원부서 말단직원으로 만났다. 불과 석달 남짓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내 발로 기어 나왔던, 나에게는 악몽과 같았던 로펌이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아무것도 아니었던 짧은 인연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무었을 서로에게서 보았던지 우리는 그 인연을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다시 직장을 구했고 우리는 서로 오고 갔다. 그녀와 남편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서로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좋은 스카치 위스키도… 첫 아이를 임신한 그녀에게 배가 터지도록 LA갈비를 구워 먹였다. 알아 듣기 어려운 서로의(?) 영어발음을 넘어 존경과 우정을 아마도 서로에게서 느꼈던가 보다.

자기 나라로 되돌아 갔다. 열심히 일하는 능력있는 변호사 그리고 또한 세 아들을 둔 특별한 엄마가 되었다. 십수년 동안 주고 받은 손편지가 한 박스다 – 가리늦게 왠 펜팔… 매년 잊지 않고 주고 받는 달력도 늘 내 서재에 걸려 있다.

1형 당뇨병으로 평생을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산다. 일과 세 아이들 엄마 노릇 하는 그 빠쁜 와중에 틈틈히 운동을 계속 하였다. 얼마 전에 사진과 편지를 받았다. 뉴욕마라톤을 완주하였다. 내가 그녀의 처지였었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인간승리다.

아내와 함께 에딘버러공항에 내릴 날이 올 것이다. 그 특별한 엄마, 아빠 그리고 그 아들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그넘들의 대가리를 만져줄 때가 올 것이다.

그 로펌에, 10년이 훨씬 지나 우리 가족 모두가 방문하게 되었다. 아이가 그 로펌의 장학생이 되어 수여식에 온가족이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이 더 지났다. 이제 아이는 그 옛날 M이 일했었던 그 회사에서 그녀의 옛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