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르륵 소리 억울한 마음

지구의 자전시간이 늘 24시간은 아니었고 또 앞으로도 변할 것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배워서 일게 되었다. 지구가 탄생했던 아주 오래 전에는 하루가 5시간 정도였었고 (자전주기가 5시간) 그만큼 시간이 더 흐른 먼 미래에는 하루가 1천 시간이 넘을 것이라고 하더라. 우리의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가 🙂

한국어와 영어가 다른 줄이야 누구나 알겠지만 혹시 생각해 본적이 있나 한국어에 있고 또 흔히 사용되는 어떤 단어가 영어에는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말고 어떤 상황이나 느낌 혹은 생각을 지칭하는 단어중에서 말이다 (다시말해 그 언어의 배경인 문화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골프를 치다보면 2가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번째야 물론 자신이 좋은 샷을 쳤을때 느끼는 즐거움이겠고, 두번째는 동반자가 나쁜 샷을 쳣을때 ‘은근히 느끼는 일종의’ 즐거움 혹은 기쁨이 있다. 이런 두번째 상황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을 한마디로 정확히 표현하는 한국어 단어는 없지 싶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있다. Schadenfreude 라는 단어가 정확히 그런 (야비한) 즐거움과 기쁨을 의미한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혹은 영어 표현을 찾아보려고 가장 많이 애를 써보았던 한국어가 ‘억울하다’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다못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아이에게까지 (아빠 닮아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나왔다) 상세하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상황 예까지 들면서 설명을 해봐도 고개만 갸우뚱거리다가 우리도 아는 일반적인 영어 단어를 나열하지, 위에서 예로 들었던 독일어 Schadenfreude 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억울함’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나 표현은 말하지 못하더라. 아마 없지 싶다.

살 좀 덜 찌고 더 건강 장수 하려면 배에서 나는 ‘쪼로록’ 소리와 가까워지면 된다고 많은 유식한 사람들이 말하더라. 평온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억울한’ 마음과 가까워지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까워진다는 의미는, 부드럽게 대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내치거나 난폭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억울함은 반드시 풀어야만 (상대에게 표현하고 전달하여 내가 아닌 그를 바꿈으로써) 속이 시원해지고 그래야만 결과적으로 내게 행복이나 이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에 ‘억울함’을 표현하는 단어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근거없이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착각 아닐까?

영어에는, 한국어처럼 문장 끝을 변형시켜 같은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존대 하대를 실어서 표현하는 것이 없다. 예의 바른 우리 아이도 엄마 아빠한테 ‘헬로’ 라고 하지 ‘헬로까’ 혹은 ‘헬로세요’ 하지 않는다 🙂 ‘억울함’에는 ‘당했다’는 일종의 수동적인 태도와 ‘상하관계’에서 자신이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자세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내게 무언가 잘못을 해도 나는 ‘기분이 나쁘고 성이나지’ (영어 표현에 모두 있다) 아이에게 내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싶다. 아니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들도록 내 마음에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지 싶다.

영어를 모국어로 영어권 국가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우리 아이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도대체 그 의미조차도 모르는, 하지만 한국인인 그대와 내게는 고무신에 붙은 껌처럼 철썩 붙어 있는, 이 ‘억울함’ 이라는 마음. 그런 기분이나 감정이 들때 한번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 무의식 중에 자기 스스로를 ‘당하는 입장’ 그리고 ‘아래인 입장’으로 항상 저절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유사한 결과나 상황에 처해져서 기분이 나쁘고 성이 나도, 내가 ‘주는 입장’이었다면 (‘저지른’ 입장이었다면) 그리고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었다면 억울한 마음은 없지 않을까? 언어와 문화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구성원들의 생각을 규정 짓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 마음이 스스로를, 자기도 모르게 구속하고 규정 짓는지도 모른다.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도 위험하고 좋지 않은 카르마를 잉태할 가능성이 있지만, ‘억울한’ 감정이 개입될때 그것이 불러올 위험과 카르마는 아마도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mindfulness 란 어쩌면 이런 것들을 좀 깨닫고 생각해보고 또 조금이나마 자신의 삶에 실천으로 옮겨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해탈이 뭐 별거겠나?

무지와 지혜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현상의 일부를 보고서 (혹은 알고서) 전체를 미루어 판단하는 경우가 흔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이런 줄을 알면서 내리는 판단은 조심스럽고 또 쉽게 물러나거나 수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사람들에게 강요할 가능성이 적다.

이런 줄을 모르거나 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내리는 판단은 (자신과 타인들에게) 난폭하고 강압적이며 또 스스로 물러나거나 수정하기가 몹시 어렵다.

사람이나 사물 혹은 현상의 일부만을 보는 것을 (혹은 아는 것을) ‘무지’ 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무지에 근거한 판단에 집착하는 것을 ‘고집’ 이라고 한다.

듣고 보고 배워야 하나라도 더 알게 되어 조금이라도 덜 무지하게 되고 나아가 좀 덜 고집스러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이런 귀찮은 (그리고 남들도 하지 않는) 과정을 지속하고 반복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그냥 지금 아는 것, 지금 가진 것이 ‘모두’ 이고 또 ‘전부’ 라고 자신과 남들에게 떠들며 주장하게 된다. 나이가 많거나 상대적으로 가방끈이 길거나 돈이 많으면 이런 짓을 점점 더 강하게 또 드러내 놓고 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더 고집스럽게 되는데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그냥 고집인 것을 가지고) 신념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무슨 특별하고 괜찮은 것처럼 포장을 하여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며 또 나아가 그것을 팔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무지로 시작된 고집은 인간의 삶을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데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치매인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장차 그 꼴로 인생을 종치게 만든다. 자신도 비참하지만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고난 다음에.

무지의 반대는 ‘지혜’ 라고 한다. 지혜는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현상의 ‘전모’ 즉 전체 모습을 보고 또 아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수준에는 결코 도달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발 양보해서 ‘지금 내가 보는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현상에는 내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양한 측면들이 존재하니 나는 무슨 판단을 내리건 그것을 기억하겠다’ 이렇게 다짐하고 또 자주 시도만 해도, 지혜를 좀 가진 사람으로 그래서 덜 고집부리는 사람 덜 완고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겠다 🙂

배울만큼 배운, 가질만큼 가진 그리고 나이들만큼 든 사람이 ‘고집부리는 모습’ 만큼 스스로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자신을 깊이 초라하게 만들고 또 장차 어떤 모습으로 떠날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징표는 별로 없다.

일전에 언급했던, 내가 즐겨 뛰어 올라간다는 그 산꼭대기에 오르면 내가 사는 아름다운 수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날씨가 흐리고 남쪽에서 바람이 부는 어떤날에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날 때가 있다. 저 멀리 아름다운 도시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쓰레기 매립장에서 바람을 타고 올라 오는 냄새다. 그냥 쓰레기 냄새가 아니다. 이곳은 한국과는 달리 오수를 (똥물을)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모아 하수처리시설에서 일괄 처리한 다음에 바다 멀리로 내보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고형물을 (똥덩어리를) 걸러내서 수분을 제거하고 눌러 납작하게 만든 다음에 그 쓰레기 매립장으로 운반하여 땅에 묻는다. 그 똥냄새가 이토록 아름다운 산위로 때때로 올라오는 것이다. 내 발아래 펼쳐진 이 아름다운 도시 그 높고 화려한 사무실과 해변가의 아름다운 집들에서 선남선녀들이 입으로 넣었다가 항문으로 밀어낸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진실 덩어리를 나는 때때로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

하늘아래 어떤 인간도 이 진실에서 한치도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 그대의 똥과 나의 똥만 뒤섞여 바다로 흘러가고 함께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것을 자주 기억하는 만큼 그리고 어떤 판단을 내릴때 하나의 측면으로 고려하게 되는 만큼 우리는 지혜로워 지리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가는지를 자주 상기한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조금이나마 향상시키려 하지 ‘고집’으로 상대를 이기고 주변을 어지럽히려고 하겠나? 그래서 무었하게? 더 멀리 더 빨리 바다로 흘러가고 매립장 더 위에 묻히게?

나이들며 스스로 경계해야할 첫째는 고집이고 사람만나며 멀리해야할 첫째 부류는 ‘어떤 이유로든지’ 고집스러운 인간이다. 고집은 다양한 이유와 형태가 있겠지만 그 뿌리는 오직 하나 그리고 언제나 ‘무지’ 이기 때문에.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말했나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How you Perceive and How you Respond’

이 두가지가 내가 여태껏 살면서 깨달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가 되겠다.

내 영어는 아직도 엉터리지만,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몇십년 영어를 사용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좀 깊이 있는 의미를 전달하려면 때로는 중국어에서 빌어온 한국어 (한자) 보다는 영어단어가 더 수월하고 정확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착각인가 🙂

‘당신이 세상을 (당신과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당신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Perceive 하는지는, 부모로부터 우리가 아주 어릴때 물려 받은 ‘습관’ (양육) 그리고 ‘기질’ (유전) 에 좌우되는 바가 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Respond 하는지는, 물론 습관과 기질의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우리가 나이들어 살면서 경험하고 배워 기억한 것들에 좌우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매일 일상속에서 수없이 크고 작은 판단들을 내리고 또 그 판단의 결과로 어떤 언행을 하면서 살고 있다. 어떤 판단은 드러내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언행은 표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지만 매우 강한 판단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판단과 언행이 쌓이고 모여 인생의 방향과 수준이 결정된다.

금수저가 물려받은 돈다발이 인생의 방향과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학벌이나 계급장도 물론 아니다. 별의 겉보기 등급이 그 별의 진짜 크기와 밝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것과 같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거리에 따라 겉보기 등급이 좌우되는데, 한가지 정말 무서운 진실은 사람은 무슨짓을 하고 어떤 방법을 써도 자기자신에게서 한순간 한치도 멀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으로 안된다는 말이다 굳이 부연하자면.

많은 경우에, 우리가 인생초기에 물려받고 또 형성된 습관과 기질이, 우리가 장차 살면서 무었을 경험하고 배워서 기억할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이 진실을 깨달을만할 쯤이면 ‘땡’ 종치며 링에서 내려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습관과 기질이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나중에 살면서 경험하고 배워 기억한 그것들이 또한 자신의 습관과 기질을 되돌아 볼 능력을 주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그것들을 변화시킬 힘을 주기도 한다.

일단은 지혜로운 부모를 만나면 시작이 좋다. 물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겠지. 그래도 세상은 공평하다. 우리들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무었을 경험하게 할지 어떤 것을 배우게 할지 또 무었을 기억하게 할지 상당부분 결정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 선택해서 쌓은 경험과 배운것 그리고 기억한 것들이, 자신의 습관과 기질에 서서히 재갈을 물려 마치 마부가 말을 부드럽지만 능숙하게 다루듯이, 우리가 보다 나은 판단과 언행을 하도록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이끌어 준다. 그 결과로 우리 인생의 방향과 수준이 달라지게 된다.

인생의 봄이나 여름은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진다고 오는 봄이나 여름은 없다. 아마 당신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