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인생 레슨

알다시피, 인간의 삶이란 (따지고 보면, 결국은) 타고난 유전자와 주어진 환경이 빚어낸 결과물 아니겠나. 주어진 환경에는 가족환경도 있지만 교육환경 그리고 사회환경도 있다. 개미군락의 각각의 개미들처럼, 인간도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최적화된 구성원들을 생산해 내는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나라와 사회가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강도와 방향은 다르다. 한국처럼 (개인에게 미치는) 사회적 압력과 조직의 영향력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현저히 높은 사회에서는 더욱 더 ‘만들어진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손꼽히는 덴마크도, 사회적 압력과 조직의 영향력이 한국과 못지않아 보이더라. 어떤  도큐멘트리에서 덴마크 젊은이들에게, 이런 세계 최고 수준의 행복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는가 물었더니, ‘(사회적) 단일성에서 온다’고 하더라. 나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도 사는 방식도 같다는 의미다. 한국과 덴마크를,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비교해서는 안된다만.

나이가 들면, 이 진실을 알아채고 깨달아야 한다. 다시말해, 내 자신은 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집단의 영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차차 남들이 만들어낸 내가 아닌, 참된 내가 있는가 알아보고 찾아보면서, 어느듯 철이 들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사회화, 주조 혹은 빚어진 것들을 풀어내고 그 힘과 영향력을 빼면서, 자유롭고 시근있는 어른이 된다.

우리를 만들어낸 나라와 사회 그리고 조직은, 이런 진실을 말해줄 의사도 능력도 없다. 그리고 당신 옆 사람들도 마찬가지. 절대로 힌트를 주거나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갑자기 조용기의 빤질빤질 대머리가 떠오르네. 수십년 열성적으로 믿어보고 또 떠들어 보고나니, 결국은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을 자신이 깨달은 후에도, 신도들에게 절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 제 자식들에겐 행동으로 힌트를 주었지 싶다만. 그자는 ‘결국은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을 자기 노년의 삶에서 명백하게 드러내고선 갔다. 이것을 알아채면 더 이상 속지 않을텐데, 그러지를 못하니 오늘도 그곳에 가서 그 넘 자리를 물려 받은 또 다른 대머리를 우러러보면서 주님주님 하며 산다 (개신교등 종교에 반감도 관심도 없음, 그냥 그넘 대머리 생각이 갑자기 나길래 해본 이야기).

이 진실을 알아채고 깨닫지 못하면, 그냥 남들이 만든대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다가 떠나게 된다. 그저 주변 사람들보다 한끝 위로 올라가려고 아우성치고 박터지다가 정신없이 간다. 우리들처럼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AI 세대가, 100년전 혹은 1,000년전 조상들과, 외향은 달라보여도 본질은 똑같은 삶을 살다가 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두번째는, ‘인간이란 정말로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짬뽕’이라는 것이다. ‘I didn’t have sex with her (루윈스키)’ 라고 청문회에서 거짓말 했던 클린튼은, 개인차원에서는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아무데나 쑤쎠대는 수케였던 것 같지만 (백악관에 있을때 힐러리가 던진 재떨이에 얻어맞아 안면에서 피를 질질 흘리기도 했고, 자주 쫒겨나서 소파에서 자곤 했었다는 설이 있다) 이 양반이, 목욕탕 수건 뒤집어 쓴 팔레스타인 지도자와 (아라파트), 훗날 이것 때문에 암살 당한 이스라엘 총리를 (라빈) 쑤쎠서 (일맥상통 하는구나) 만들어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2-state solution (두 나라로 공존하자는 해법)’ 은 결국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돕게 되지 싶다. 지금은 매우 나쁘고 시끄러운 상황이지만 길게 보면 결국은 그리 되리라. 또 다른 예로, 이곳 5선의원 법무장관 출신의 유명인과 우연히 몇번 골프를 치면서, 그자의 언행을 보고선 뭐 이런 철부지 무개념한 넘이 다 있는가 싶어서 가족들에게 여러번 욕을 퍼부었는데 (이곳은 빈자리있으면 아무하고나 같이 칠 수 있다. 몇 번 치고선 밥 맛 떨어져 다시는 안친다), 오늘 티비에 나와서, 이곳 집권당에서 원주민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법안을 발의하는데 대하여, 법무장관 시절 관련 법안을 만든 사람으로서, 고강도의 비판을 가하며 원주민들의 권리를 진심 지키려는 것을 우연히 보고서는 새삼 이 양반이 달리 보이더라. 아내도, 유아교육과 관련하여 원주민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의 권리를 위해 큰 일을 한 이자의 이름이 반드시 등장한다고 하더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아니다. 그리고 밖에서는 (진심) 민주주의 외치고 집에 와서는 (다른 방법을 모르다 보니?) 마누라 줘패는 것도 보통이다. 내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강조할려고 유명인들 이야기를 먼저 했지만, 그대들과 나를 포함한 99.99999%의 인간들은, 그야말로 알고도 짬뽕 (이익좇아 의도적으로) 모르고도 짬뽕 (무식하고 무지해서) 이다. 예외없다. 잘못된 사회화의 결과인지, 나는 어릴때부터 이런 부조리 혹은 불균형 (discrepancy)을 못견뎌 했고 비정상으로 여기며 살았었다. 그래서 삶이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엄청 힘들뻔 했었는데, 다행히 일찌기 혹성탈출에 성공하는 바람에 부작용을 최소화 하면서 살고 있다 🙂

일본의 한 유명 여가수가, 전용 버스를 오래 운전해 준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때 이나라에서 매우 유명했던 장관도 남편이 노가다 출신이었다. 이나라에서는 무언가를 결정할때, 내가 좋은가 싫은가를 앞세우지, 타인들이 어떻게 보는가 또 주변에서 어떤 압력을 가하는가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니, 중요하고 말고 그런 생각이 별로 없다. 사실 애초부터 타인들의 삶에 관심이 크게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어떤 사회 혹은 나라를 만드는가의 관점에서, 한국과 비교할때 결정적인 차이가 아닌가 싶다 (다음 글에서 더 이야기 하기로 하자). 반면에 한국은 ‘자기 생각’ 그리고 ‘자기 결정’ 등이 어렵고 드문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어떤 상을 (이데아 / 에이도스 혹은 image)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고 그것을 서로에게 강요한다. 입시건 결혼이건 아파트건 자동차건 죽는과정이건 구두모양이건 간에.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원하건 말건 간에 어쨌던 ‘완벽해야 된다’ 아니 ‘완벽하게 보여야 한다’. 따라서 (타인들의) 짬뽕스러움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배척된다. 그리고 (자신의) 짬뽕스러움은 절대로 드러나서는 안되고 철저히 감추어진다.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움과 추함이, 수성과 신성이 (짐승스러움과 영적임이), 입으로 들어간 것들과 항문으로 나오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짬뽕 자체인데, 그렇게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것을 만들어 내어 서로를 못살게 괴롭히며 또 자신도 괴롭게 산다는 말인가? 나도 진단은 하는데 처방이 없다.

그대들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 하나 하자. 이곳에서는 로우라이프들 (무식한 하류 인생, 막가는 인생) 포함하여 모든 운전자들이 99% 횡단보도에서 정차하여 보행자를 지나가게 한다. 경찰이나 CCTV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보고도 무시하며 그냥 지나가는 넘은 정말 몇년에 한번 볼까말까다. 반면에 한국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운전자들이 그 크고 거룩해 보이는 차를 모시면서도 99% 횡단보도에서 정차하지 않는다더라. 무었이 이런 괴상한 상황을 만들었을까? 어떻게 설명하지? 수십년 전, 진즉에 내가 낌새를 채고 혹성탈출을 감행 할 무렵, 어떤 티비 프로그램에서, 한 일본 지식인에게 (아마 친한파였던듯), 한국이 장차 선진국이 되려면 무었이 필요할까요 물었더니, 이 양반이 뜬금없이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마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엄마들이 통제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강산이 여러번 바뀌어 한국인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지만, 그 이외 다른 것들은?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졌나?

이렇게 진단하는 나도 product of Korea 이다보니 아직도 이런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product of Korea 인 덕분에 버벅거리는 영어로 이곳에서 그나마 밥이라도 벌어 먹고 사는 면도 있다. 마치 K-문화니 하면서 외국에서는 열광하는데 (잘 팔리는데), 정작 그 문화의 원인이자 결과인 한국인 개개인은 그리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실상은 별로인), 또다른 한국적 짬뽕스러움이라고나 할까.

인생이 짬뽕임을, 자신이 짬뽕임을, 그리고 타인들도 짬뽕임을 보고 받아들이고 또 어느 정도는 드러내게 되면 삶이 나아진다. 더 자유로워지고 무었보다도 더 자연스러워 진다. 쓰고 나니 첫번째와 두번째가 결국은 하나였구나 깨닫게 된다.

3권의 아주 좋은 책들

질병해방  ‘Outlive’ – The Science & Art of Longevity by Peter Attia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Incognito’ – The Secret Lives of the Brain by David Eagleman

죽음이란 무었인가  ‘Death’ by Shelly Kagan

골프채는 골프의 일부분이다. 어느 정도는 필요 조건이지만 (그 자체가) 결코 충분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다시말해 타이거우즈의 골프채를 설령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참으로 골프를 즐기고 골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데는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와인은 좋은 식사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역시 충분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음식과 또 함께 어울리고픈 사람이 없는 와인 그 자체는 그냥 술 일뿐이다.

‘Outlive’ (질병해방) 책을 근래에 읽었다. 한국어 번역판으로 하지만 누가 번역했는지 알고 읽었다 (아주 훌륭한 번역). 원서를 구해서 읽을 수 있었지만 (엄청난 아마존 베스트셀러) 아마 10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너무 힘든 접근이다. 결론은? 최고의 책 중의 하나다. 딱 한마디로 이 양반이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면 ‘운동하라’ 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다이어트를 하고 병원이나 이곳저곳을 다니며 관리를 해도, 그것들은 필요 조건은 될지언정 결코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운동을 어떻게? 당신이 알아서 찾아내라. 하는 것이 중요하지 뭘 어떻게 따지지 말고. 잊지마라. 충분 조건은 오직 ‘운동’ 이라는 것을. 일독을 권한다.

죽음에 관한 꽤 많은 책과 정보를 읽고 들었지만, 최근에,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십여년동안 최고의 명강의로 뽑혔었다던, 셀리 케이건의 (남자다) 강의를, 교보문고에서 발간한 한글 번역 녹음판으로 들었다. 녹음 자체가 18시간이 넘으니 책도 뙈 두꺼웠을 것이다. 실제 강의를 찾아서 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사람이 전달하려는 매세지가 무었인가’ 이었으므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했었다. 전반부는 별 볼일이 없다. 아마 학부생을 대상으로 했던 강의라 좀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상식이거나 유치한 내용 혹은 그야말로 하나하나 곧이곧대로 따지는 내용들이라 많이 건너 뛰었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면서 이 학자의 휼륭한 견해들이 많이 나온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뭐냐 묻고 싶지? ‘(인생을) 아끼고 조심해서 그렇지만 여한없이 살아라 (죽음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 싶으니)’ 였다. 한번 읽거나 들어봐라.

세번째로, 데이비드 이글먼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의 유튜브 채널에서 강의를 여럿 들어보았다. 여기저기서 이 대단한 책 ‘Incognito’ 언급을 하길래 아마존에서 책을 찾아보니 영어로 읽으려면 하세월일 것 같아서 (엄청난 베스트셀러) 한국어 번역본을 교보문고에서 구해서 읽어 보았다. 아주 훌륭한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한마디로 요약? ‘당신이 의식적으로 의도하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무의식의 (유전, 과거의 경험등) 지배를 엄청 많이 받는다’ (그러니 환경을 바꾸어 생각이 저절로 서서히 바뀌게 해야지, 지금 현실에서 몸부림 친다고 그게 잘 안바뀐다).

이 세권의 책들이 그대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쪼르륵 소리 억울한 마음

지구의 자전시간이 늘 24시간은 아니었고 또 앞으로도 변할 것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배워서 일게 되었다. 지구가 탄생했던 아주 오래 전에는 하루가 5시간 정도였었고 (자전주기가 5시간) 그만큼 시간이 더 흐른 먼 미래에는 하루가 1천 시간이 넘을 것이라고 하더라. 우리의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가 🙂

한국어와 영어가 다른 줄이야 누구나 알겠지만 혹시 생각해 본적이 있나 한국어에 있고 또 흔히 사용되는 어떤 단어가 영어에는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말고 어떤 상황이나 느낌 혹은 생각을 지칭하는 단어중에서 말이다 (다시말해 그 언어의 배경인 문화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골프를 치다보면 2가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번째야 물론 자신이 좋은 샷을 쳤을때 느끼는 즐거움이겠고, 두번째는 동반자가 나쁜 샷을 쳣을때 ‘은근히 느끼는 일종의’ 즐거움 혹은 기쁨이 있다. 이런 두번째 상황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을 한마디로 정확히 표현하는 한국어 단어는 없지 싶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있다. Schadenfreude 라는 단어가 정확히 그런 (야비한) 즐거움과 기쁨을 의미한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혹은 영어 표현을 찾아보려고 가장 많이 애를 써보았던 한국어가 ‘억울하다’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다못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아이에게까지 (아빠 닮아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나왔다) 상세하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상황 예까지 들면서 설명을 해봐도 고개만 갸우뚱거리다가 우리도 아는 일반적인 영어 단어를 나열하지, 위에서 예로 들었던 독일어 Schadenfreude 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억울함’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나 표현은 말하지 못하더라. 아마 없지 싶다.

살 좀 덜 찌고 더 건강 장수 하려면 배에서 나는 ‘쪼로록’ 소리와 가까워지면 된다고 많은 유식한 사람들이 말하더라. 평온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억울한’ 마음과 가까워지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까워진다는 의미는, 부드럽게 대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내치거나 난폭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억울함은 반드시 풀어야만 (상대에게 표현하고 전달하여 내가 아닌 그를 바꿈으로써) 속이 시원해지고 그래야만 결과적으로 내게 행복이나 이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에 ‘억울함’을 표현하는 단어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근거없이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착각 아닐까?

영어에는, 한국어처럼 문장 끝을 변형시켜 같은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존대 하대를 실어서 표현하는 것이 없다. 예의 바른 우리 아이도 엄마 아빠한테 ‘헬로’ 라고 하지 ‘헬로까’ 혹은 ‘헬로세요’ 하지 않는다 🙂 ‘억울함’에는 ‘당했다’는 일종의 수동적인 태도와 ‘상하관계’에서 자신이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자세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내게 무언가 잘못을 해도 나는 ‘기분이 나쁘고 성이나지’ (영어 표현에 모두 있다) 아이에게 내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싶다. 아니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들도록 내 마음에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지 싶다.

영어를 모국어로 영어권 국가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우리 아이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도대체 그 의미조차도 모르는, 하지만 한국인인 그대와 내게는 고무신에 붙은 껌처럼 철썩 붙어 있는, 이 ‘억울함’ 이라는 마음. 그런 기분이나 감정이 들때 한번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 무의식 중에 자기 스스로를 ‘당하는 입장’ 그리고 ‘아래인 입장’으로 항상 저절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유사한 결과나 상황에 처해져서 기분이 나쁘고 성이 나도, 내가 ‘주는 입장’이었다면 (‘저지른’ 입장이었다면) 그리고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었다면 억울한 마음은 없지 않을까? 언어와 문화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구성원들의 생각을 규정 짓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 마음이 스스로를, 자기도 모르게 구속하고 규정 짓는지도 모른다.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도 위험하고 좋지 않은 카르마를 잉태할 가능성이 있지만, ‘억울한’ 감정이 개입될때 그것이 불러올 위험과 카르마는 아마도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mindfulness 란 어쩌면 이런 것들을 좀 깨닫고 생각해보고 또 조금이나마 자신의 삶에 실천으로 옮겨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해탈이 뭐 별거겠나?

무지와 지혜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현상의 일부를 보고서 (혹은 알고서) 전체를 미루어 판단하는 경우가 흔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이런 줄을 알면서 내리는 판단은 조심스럽고 또 쉽게 물러나거나 수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사람들에게 강요할 가능성이 적다.

이런 줄을 모르거나 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내리는 판단은 (자신과 타인들에게) 난폭하고 강압적이며 또 스스로 물러나거나 수정하기가 몹시 어렵다.

사람이나 사물 혹은 현상의 일부만을 보는 것을 (혹은 아는 것을) ‘무지’ 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무지에 근거한 판단에 집착하는 것을 ‘고집’ 이라고 한다.

듣고 보고 배워야 하나라도 더 알게 되어 조금이라도 덜 무지하게 되고 나아가 좀 덜 고집스러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이런 귀찮은 (그리고 남들도 하지 않는) 과정을 지속하고 반복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그냥 지금 아는 것, 지금 가진 것이 ‘모두’ 이고 또 ‘전부’ 라고 자신과 남들에게 떠들며 주장하게 된다. 나이가 많거나 상대적으로 가방끈이 길거나 돈이 많으면 이런 짓을 점점 더 강하게 또 드러내 놓고 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더 고집스럽게 되는데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그냥 고집인 것을 가지고) 신념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무슨 특별하고 괜찮은 것처럼 포장을 하여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며 또 나아가 그것을 팔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무지로 시작된 고집은 인간의 삶을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데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치매인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장차 그 꼴로 인생을 종치게 만든다. 자신도 비참하지만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고난 다음에.

무지의 반대는 ‘지혜’ 라고 한다. 지혜는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현상의 ‘전모’ 즉 전체 모습을 보고 또 아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수준에는 결코 도달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발 양보해서 ‘지금 내가 보는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현상에는 내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양한 측면들이 존재하니 나는 무슨 판단을 내리건 그것을 기억하겠다’ 이렇게 다짐하고 또 자주 시도만 해도, 지혜를 좀 가진 사람으로 그래서 덜 고집부리는 사람 덜 완고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겠다 🙂

배울만큼 배운, 가질만큼 가진 그리고 나이들만큼 든 사람이 ‘고집부리는 모습’ 만큼 스스로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자신을 깊이 초라하게 만들고 또 장차 어떤 모습으로 떠날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징표는 별로 없다.

일전에 언급했던, 내가 즐겨 뛰어 올라간다는 그 산꼭대기에 오르면 내가 사는 아름다운 수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날씨가 흐리고 남쪽에서 바람이 부는 어떤날에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날 때가 있다. 저 멀리 아름다운 도시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쓰레기 매립장에서 바람을 타고 올라 오는 냄새다. 그냥 쓰레기 냄새가 아니다. 이곳은 한국과는 달리 오수를 (똥물을)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모아 하수처리시설에서 일괄 처리한 다음에 바다 멀리로 내보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고형물을 (똥덩어리를) 걸러내서 수분을 제거하고 눌러 납작하게 만든 다음에 그 쓰레기 매립장으로 운반하여 땅에 묻는다. 그 똥냄새가 이토록 아름다운 산위로 때때로 올라오는 것이다. 내 발아래 펼쳐진 이 아름다운 도시 그 높고 화려한 사무실과 해변가의 아름다운 집들에서 선남선녀들이 입으로 넣었다가 항문으로 밀어낸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진실 덩어리를 나는 때때로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

하늘아래 어떤 인간도 이 진실에서 한치도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 그대의 똥과 나의 똥만 뒤섞여 바다로 흘러가고 함께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것을 자주 기억하는 만큼 그리고 어떤 판단을 내릴때 하나의 측면으로 고려하게 되는 만큼 우리는 지혜로워 지리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가는지를 자주 상기한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조금이나마 향상시키려 하지 ‘고집’으로 상대를 이기고 주변을 어지럽히려고 하겠나? 그래서 무었하게? 더 멀리 더 빨리 바다로 흘러가고 매립장 더 위에 묻히게?

나이들며 스스로 경계해야할 첫째는 고집이고 사람만나며 멀리해야할 첫째 부류는 ‘어떤 이유로든지’ 고집스러운 인간이다. 고집은 다양한 이유와 형태가 있겠지만 그 뿌리는 오직 하나 그리고 언제나 ‘무지’ 이기 때문에.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말했나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How you Perceive and How you Respond’

이 두가지가 내가 여태껏 살면서 깨달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가 되겠다.

내 영어는 아직도 엉터리지만,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몇십년 영어를 사용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좀 깊이 있는 의미를 전달하려면 때로는 중국어에서 빌어온 한국어 (한자) 보다는 영어단어가 더 수월하고 정확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착각인가 🙂

‘당신이 세상을 (당신과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당신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Perceive 하는지는, 부모로부터 우리가 아주 어릴때 물려 받은 ‘습관’ (양육) 그리고 ‘기질’ (유전) 에 좌우되는 바가 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Respond 하는지는, 물론 습관과 기질의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우리가 나이들어 살면서 경험하고 배워 기억한 것들에 좌우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매일 일상속에서 수없이 크고 작은 판단들을 내리고 또 그 판단의 결과로 어떤 언행을 하면서 살고 있다. 어떤 판단은 드러내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언행은 표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지만 매우 강한 판단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판단과 언행이 쌓이고 모여 인생의 방향과 수준이 결정된다.

금수저가 물려받은 돈다발이 인생의 방향과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학벌이나 계급장도 물론 아니다. 별의 겉보기 등급이 그 별의 진짜 크기와 밝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것과 같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거리에 따라 겉보기 등급이 좌우되는데, 한가지 정말 무서운 진실은 사람은 무슨짓을 하고 어떤 방법을 써도 자기자신에게서 한순간 한치도 멀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으로 안된다는 말이다 굳이 부연하자면.

많은 경우에, 우리가 인생초기에 물려받고 또 형성된 습관과 기질이, 우리가 장차 살면서 무었을 경험하고 배워서 기억할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이 진실을 깨달을만할 쯤이면 ‘땡’ 종치며 링에서 내려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습관과 기질이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나중에 살면서 경험하고 배워 기억한 그것들이 또한 자신의 습관과 기질을 되돌아 볼 능력을 주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그것들을 변화시킬 힘을 주기도 한다.

일단은 지혜로운 부모를 만나면 시작이 좋다. 물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겠지. 그래도 세상은 공평하다. 우리들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무었을 경험하게 할지 어떤 것을 배우게 할지 또 무었을 기억하게 할지 상당부분 결정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 선택해서 쌓은 경험과 배운것 그리고 기억한 것들이, 자신의 습관과 기질에 서서히 재갈을 물려 마치 마부가 말을 부드럽지만 능숙하게 다루듯이, 우리가 보다 나은 판단과 언행을 하도록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이끌어 준다. 그 결과로 우리 인생의 방향과 수준이 달라지게 된다.

인생의 봄이나 여름은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진다고 오는 봄이나 여름은 없다. 아마 당신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