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했던 넘들의 실패, 실패했던 뇬들의 성공

중년이 되면 수많은 것들이 평준화 된다.

물론 아직도 지갑, 계급장, 가방끈 (그리고 간혹 어디서 줏은 얼빠진 젊은뇬) 같은 것들을 손에서 놓지 않고 꿰차고 있긴 하겠지만, 머리가 있고 그나마 정신이 비교적 온전한 넘들은 내심 안다. 남들 보라고 꿰차고 있는 것이지 제 자신의 삶에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사실상 별 볼일도 더이상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그런데 지난 수십년, 청춘을 바쳐 이런 것들을 주변보다 더 쫒고 더 모으고 더 자랑하는데 정신이 없었던 넘들에게서 ‘알고 보니 별것 아니더라’는 말이 입밖에 나온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삶 전부를 부정하라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니 주변의 비슷한 연배의 좀 부족한 넘들에게나 또 아직도 철이 안들어 정신없이 따라하는 어린넘들에게, 제가 마치 무언가 대단한 것이나 가지고 있는듯 꾸미는 맛이라도 보면서 살려고 하지 않겠어?

일본이 얼마나 엄청난 나라인줄 모르는 한국사람들이 많지 싶다. 빌 게이츠가 얼마나 훌륭하고 노력하는 인간인줄 모르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지 않을까 싶다. 일본어나 영어를 통해서 그 소스를 직접 접하고 스스로 해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무었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한국처럼 사람들이 서로에게 지나치게 영향을 주고받는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무었인지, 그 속에서 나고 살다 죽는 그대는 깨달을 도리가 없다. 좀 잘난척 했다. 미안하다.

빌 게이츠가 이혼을 발표했을때, 어떤 미국 신문에 났던 기사처럼, 나도 똑같이 ‘그 마저 실패하면 우리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먼저 들며 놀라고 또 실망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깨닫게 된다. 이 훌륭한 인간이 부인과 백년해로 했다면, 나도 또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크게 배우고 깨닫는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의 이혼을 통해서 나도 또 다른 수없이 많은 사람들도 그에 못지 않게 크게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빌 게이츠도 젊었던 시절, 년전에 죽은 한국 S그룹 회장처럼, 여자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또 사업상 법과 도덕사이에서 아슬아슬한 나쁜짓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철들어서는 자기자신과 타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훌륭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자신이 사업상 나쁜짓을 해서 끼친 해악을 몇배 갚고도 남을 자선과 봉사를 (돈다발을 툭 던져주는 수준이 아니라)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을 바쳐 수많은 인류에게 배풀었다.

그 죽은 S그룹 회장이 훌륭히 꾸며진 비싼 집에, 머리 좋고 기민한 비서들을 통해 창녀들을 불러들일때, 이 사람은 빌 게이츠 독서 목록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참조하는) 유명한 책 리스트들을 발표했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또 좋은 책들을 통해서 배우고 (자신의) 인간적인 성장과 성숙을 노력했었던지 나는 안다. 그래서 (이런 내막을 아는 미국사람들이) ‘빌 게이츠가 실패하면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탄식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 (아무 걱정이 없을텐데) 왜 이혼해요?’ 이런 수준이 아니다. 만약 당신 뇌에 이런 생각이 먼저 스쳐지나갔다면 당신은 다만 일본이 얼마나 엄청난 나라인지만 모르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건 또 가지게 되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긴 어렵지 싶다. (일정 수준을 지나면) 부유함이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금전적인 측면을 포함한 삶의 전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와 큰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그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무슨 생각으로 무었을 하면서 사는가와 훨씬 더 큰 관련이 있다.

그 죽은 S그룹의 회장 부인은 남편이 나으라고 어떤 절을 찾아서 불사를 (종교행사) 돈을 많이 들여서 했다고 신문에 났었다. 예술적이고 세련된 티 내는 그 여자가 병들어 누워있는 그 부자 남편을 인간 대 인간으로 존경했었을까? 보이와 걸로 (boy and girl) 사랑했었을까? 홀로 병실에 앉아 사랑의 손길로 그의 머리칼을 매만져주며 측은한 마음으로 똥싼 기저귀를 한번이라도 제 손으로 갈아 주었을까? 나는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짐작할 수가 있다. 인간들이 오랜 세월 살아온 족적은 마치 그 인간의 체취처럼 꾸밀수도 감출수도 또 피할수도 없는 것이다.

빌 게이츠와 그의 부인은, 내가 보기에, 스스로에게선 인간적인 성숙을, 서로에게선 인간 대 인간의 존경과 (boy and girl 사이의) 친밀감을 끝없이 추구했었을 것이다. 이런 가치들은, 돈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고, 빌 게이츠가 인류 역사상 가장 확실히 증명했듯이, 어떤 돈이나 권력 가방끈 기타 무었으로도 절대 구입하거나 강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인간의 성숙함, 자각, 오래된 좋은 관계, 무르익은 사랑, 쌓아 올린 존경과 존중, 진심을 통한 깊이 있는 이해… 이런것들만 관련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삶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마치 시간이나 중력처럼, 돈으로 살수 없고 권력으로 강제할수 없고 학벌 미모 그 무었으로도 억지로 얻을수 없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가치들이 무었인지 깨달아 가는 과정이며, 그 깨달은 바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겪으며 하루하루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빌 게이츠와 그의 부인도, 나도 또 나의 아내도 이런면에서는 완전히 동일하며, 여기에서 예외인 인간은 결코 없다.

내가 회사 점심시간에 근처 산을 달리고 온 뒤에 체육관 탈의실에서, 나보다 덩치도 좌쥐도 2배는 큰 넘들 사이에서 작은 방울을 딸랑거리며 나체로 꺼리낌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지나친 운동으로 순간적으로 과잉 발생된 호르몬의 영향이겠지만, 세상에서 성공한 그 어떤 인간을 내가 대면할 때도, 인간 대 인간으로 기죽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인간 내면을 보며 인간 삶의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대다수 성공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지만, 극소수의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 나를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

적선 이야기 3 – 빌 게이츠

어제 본, 1부 ‘똥과의 전쟁’ 그리고 3부 ‘이산화탄소와의 전쟁’에 이어서 오늘은 2부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보았어요. 영화 ‘포레스트검프’ 기억나세요? 주인공 포레스트가 어렸을때 다리에 쇠로 만든 보조장치를 하고서 바보처럼 걷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당시 미국에서도 있었던 소아마비 (폴리오 바이러스 감염) 때문이었지요. 내가 어렸을때도 동네나 학교에 몇 명씩 그런 보조장치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빌 게이츠와 부인 멜린다는 많은 질병중에 왜 하필이면 소아마비를 박멸시키려고 그렇게 많은 돈과 정력을 투자했을까요? 왜냐하면, 주로 가난하고 (백신을 맞지 못하는) 더러운 환경에서 (폴리오 바이러스 전염이 쉬운) 사는 어린 아이들이 소아마비에 걸리는데요, 사지가 멀쩡해도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운 그런 곳에서, 소아마비의 결과로 하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앉은뱅이 혹은 절름발이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라는 것을 이분들이 가슴 깊이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88올림픽이 열렸던 시기에, 세계적으로 약 40만명의 운명을 그토록 가혹하게 바꾸었던 이 소아마비라는 질병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더불어 빌 게이츠 재단의 헌신적이고 (돈만 쏟아 부은 것이 아니예요) 천문학적인 투자의 결과로 작년에는 약 30명 세계적으로 발병했다고 해요. 도큐멘트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서는 많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발병이 발견되었는데요, 빌 게이츠는 그의 두뇌와 간절함 (마음씀)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합니다.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나이지리아 각 지역으로 보내서 백신을 맞히는데요, 그들이 사용했던 유일한 지도는 1940년대 영국인들이 만든것이었다고 해요. 그 부정확성으로 인하여 지역의 경계에 있는 마을들에 (이 지역에 속하는지 저 지역에 속하는지 모호한 마을들) 백신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고 해요. 마치 아주 좋은 총은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타겟이 흐릿한 상황과 비슷한 것이랄까요. 아무리 총의 성능이 좋아도 아무리 많은 탄환을 쏟아부어도 명중시킬 수 없습니다. 빌 게이츠는 위성사진과 첨단 컴퓨팅을 결합하여 (엄청난 돈이 들었겠지요) 정확한 나이지리아 지도를 만들어 냅니다. 이 지도를 활용하여 그 취약한 지역들을 찾아내어 정확하게 작살(?) 냅니다.

이 사람, 자신도 인정하듯이 젊은 시절에 잘못했던 일들도 있었어요. 삼성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어떻게 항상 100% 합법적이고 윤리적으로’만’ 경영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적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이런 일을 해내는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존경심이 생겼어요. 그냥 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의 삶을 바치고 있어요. 아무도 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또 극히 어렵고 힘든 일들을 사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 다시 꺼내서 미안한데요 어떤 사람은 노년에 집으로 창녀들이나 불러들여 추잡한 짓이나 하고, 또 그 부인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위해서 유명한 사찰에 가서 중들에게 돈을 주고 큰 행사를 하며 복을 빈다는 것을 뉴스에서 들었어요. 지금은 그 사람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는지 모르지만, 이 부부는 과연 서로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할까요? 빌 게이츠가 ‘지금 버스에 치여 죽는다면 한가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이 무었인가’ 묻는 질문에 거의 울먹이면서 ‘아내에게 고맙다고 한번 더 말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것 같다’라고 대답하던데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은 과연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요? 왜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사람들이, 사는 수준은 이렇게 상이한지 나는 정말 궁금하고 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금 내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돌대가리’라는 것인데요,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이 돌대가리가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나도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진짜 돌대가리’가 분명할테니까요 🙂

1960년대 미국은 자신에 차 있었다고 해요. 곧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질병들을 지구상에서 ‘박멸’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하네요. 지금 들으면 참 기가 막힌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소아마비를 박멸하면 그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더이상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될까요? 또 빌 게이츠 아니었으면 걸렸을지도 모를 소아마비를 걸리지 않게 되었다고 알아주고 또 고마워하며 잘 살까요? 아니겠지요. 그런 일은 우리 인간세계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것을 모를까요? 물론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 왜?

그에 대한 일부의 대답이 이곳에 있어요. 어떤 훌륭한 분이 이렇게 말하고 있군요. ‘우리도 새발의 피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번에 한 사람씩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내가 덧붙이고 있네요. ‘보살은, 오늘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의심없이 최선을 다하지만, 덧없는 삶의 본질을 꽤뚫어 보기에, 최종적으로는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적선 이야기 2 – 빌 게이츠

인류역사상 가장 부자였으며 가장 많은 적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빌 게이츠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지금 컴퓨터로 지금 읽고 있다면 이 사람이 만든 윈도우즈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겠네요. 나도 이 사람 덕분에 직장도 있고 봉급도 받으며 산지가 오래 됬네요. 개인적으로도 고마운 사람입니다. 오늘은 Inside Bill’s Brain: Decoding Bill Gates 라는 도큐멘터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3부작인데요, 그중에서 1부 ‘똥과의 전쟁’ 그리고 3부 ‘이산화탄소와의 전쟁’편을 보았어요. 불과 2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어요. 똥과의 전쟁도 그렇고 이산화탄소와의 전쟁도 (원래 제목은 다른데요, 더 정확하고 좋은 제목으로 내가 바꾸었어요??) 그 규모와 중요성이 (인류전체에 끼치는) 참으로 어마어마하네요. 이분은 그 좋은 머리와 세계최고부자의 재력으로 사실상 그대와 나를 대신하여 이 엄청난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랍니다. 몰랐지요 🙂

도큐멘터리 거의 마지막에 빌 게이츠에게 물어요. ‘만일 교통사고 같은 것을 당해서 지금 당장 죽게 된다면 가장 아쉽거나 안타깝게 생각하며 눈을 감을 것은 무었인가요?’ ‘아내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깝지 싶네요’. 너무 허무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나요? 그럼 도큐멘터리를 장식하는 이 마지막 말은 어때요? 읽어보면 마치, 어제 이야기한 붓다의 적선에 관한 가르침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Each one of us has to start out with developing his or her own definition of success, and when we have these expectations of ourselves, we are more likely to live up to them, ultimately its not what you get or even what you give, its what you become.’

‘우리들 각자는, (자기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 무었인지를 찾아내고 계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준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산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될 가능성이 훨씬 커집니다. 궁극적으로 (성공이란) 얼마나 가지는가가 아니며, 나아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는가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 혹은 ‘내가 진정 원하는 사람으로 사는가’가 궁극적인 인생의 성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