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은, 종교와 세대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또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우리시대의 큰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분의 강연이나 활동에 참여하는 분들의 대다수는 (중년) 여성들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년) 남성들로 부터는 좀 외면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어쩌면 법륜스님께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때로 일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왜 법륜스님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 ‘어떻게 하면 술 담배를 (어떤 해로운 중독을) 끓을 수 있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질문에, ‘어떻게 끊긴 그냥 툭 끊으면 되지’ 이런 대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때면, 그 분에 대한 존경심도 크고 그분의 지혜를 높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늘 기분이 상했었습니다. 한때는, ‘천주교 신부가 황혼이혼 상담하는 꼴이고, 스님이 고기요리법 가르치는 꼴’ 이라며 분개도 했었지만, 차차 이분도 완벽할 수가 없는 인간이고 또 사람들을 도우려고 나름대로 애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더 이상 분개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그와 비슷한 투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채널을 돌리게 됩니다. 이분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이유중의 하나는, 자신이 과거에 모자라고 부족해서 저질렀던 어리석었던 일들을 숨기지 않으며 나아가 그런 부끄러운 경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으로 더 크게 더 많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제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험자로서 단언하건데, 술 담배는 절대 그렇게 툭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이 박힐대로 박힌 술 담배는 완전히 100%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마시지 않고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말하면 언제 어떻게 다시 마시고 피우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낙심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합니다. 아직 하나 더 있는데요 🙂 세상에는 하도 살을 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방송을 보면 무슨 인간승리 드라마처럼 체중을 수십킬로 뺏다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아마 방송측에서 좋은 취지로 연출했겠지만) 무슨 대단한 일을 했고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처럼 자랑스레 보여지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보면 즉각적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그들은 과거에 이미 병적으로 비만했었고 미래에 다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큰 고위험군에 속한 ‘아직도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고 또 몇몇 검사 수치가 건강치로 나왔다고, ‘건강을 되찾은 인생’이라고 결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들을 중단한다고 ‘갑자기’ ‘저절로’ 결코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의 심신에 해를 끼치던 짓을 다만 지금 멈춘 것 뿐입니다. 그러니 체중 몇십킬로 줄였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연과 금주는 그 자체로 떠벌이며 자랑할만한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자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계속 읽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저는 담배를 끊는 시도를 아마 수십번 아니 백번은 했었습니다. 이런저런 실패 끝에 나중에는 칼을 담배갑 중앙에 꽂아서 벽에 박아 놓고선, ‘흡연은 내 몸을 저 칼로 찌르는 행위와 같다’면서 다짐하고 또 애를 써보았습니만, 이미 오랜세월 인이 박힌 담배를 원하는대로 끊지 못하였습니다. 사회생활등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심신의 불안정은 자꾸만 저를 담배와 술 같은 손쉬운 찰나적 위안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서, 내 갈망이 적어서, 내가 덜 답답해서 술 담배를 끊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 담배가 끌어 당기는 힘이 내가 그것을 밀어내는 힘을 능가했었기 때문에 조금 버티다가 늘 꺽여지며 패했었던 것입니다. 그 힘은 잘 줄어들지 않으며 또 이미 만들어진 (밀고당기는) 힘의 균형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술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원하며 마음을 먹었다면, 상대가 결코 만만한 그냥 툭 내려놓으면 되는 그런 호락호락한 대상이 아니라, 무슨 악귀처럼 당신의 심신을 칭칭감고 동여매어, 아무리 발버둥치며 때내려해도 옴싹달싹조차 어려운 정말 무서운 대상이라는 것을 먼저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기전으로 어떻게 해서 해결될 상대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 잘 듣고 저런 묘수가 통하는 그런 말랑한 상대도 아닙니다. 마치 악성바이러스나 암세포와 같이 스스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바꾸며 (숙주인 당신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종의 생명체처럼 두렵게 인식하는 것이 옳습니다.
먼저 이것을 똑똑히 자각하게 되면, 금연 시도가 실패하게 될때 절망과 좌절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할 마음을 먹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됩니다. 우스게 소리처럼 들리지만, 어떤 고대 국가에서는 제사장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낼때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항상 비가 왔다고 해요. 왜냐하면 ‘비가 올때까지 매일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글을 쓰면서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그 헤아릴 수도 없었던 (금연) 실패와 좌절 그리고 힘겨웠던 자기배반 후 재시도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는, 아니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떤 비법이나 비방 따위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 인터넷에서 찾아 본 것들 그런 것들을 이것저것 계속 시도하는 방법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알려드리는 한가지 핵심은 ‘넘어지고 좌절해도 다음날 다시 담배갑을 쓰레기통에 쳐넣고 (아니면 식칼을 답배갑 중간에 꽃아서 벽에 박고) 다시 일어나서 또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를 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고 또 시도하면, 내게는 담배와 반대의 에너지가 (force 혹은 기운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쌓여가고 내 몸과 마음은 서서히 하지만 분명히 ‘담배에 대해서 변화’하게 됩니다. 어느순간, 오랜 세월 그토록 집요하게 내 심신을 옭아매고 조여대던 그 담배라는 것의 힘이, 그 악한 기운이, 정말 별게 아니라는 것을 참으로 느낄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마치 거짓말처럼 담배는 ‘피워도 그만 안피워도 그만’인 온순한(?) 대상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괴상한 변신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담배가 무슨 바이러스처럼 변신했을까요? 아니오. 당신이 변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 실패와 좌절의 과정속에서 시도하고 또 시도할때, 그때 당신 스스로를 변화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듯 ‘당신이 담배보다 더 쎄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원래 약한지라, 어쩌다 하는 일이 잘 안되거나 가정에 힘든 일이 있거나 하면 다시 담배를 사다 피울지도 모릅니다. ‘아! 역시 실패했구나’가 아닙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아무도 ‘금연에 성공’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하세요. 오늘부터 시작해서 또 유지하면 됩니다. ‘아! 지친다’ 하지말고 그저 ‘방금 원하는데로 피웠으니 이제 다시하자’ 하면서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이 과정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되고 또 아무도 몰라도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하면 내 심신의 기운이 담배의 기운을 월등히 능가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되며 그때가 되면,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다시 부닥쳤을 때라도 담배가 나를 쉽사리 유혹하여 쓰러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담배로 부터 자유로운 기간을 ‘유지하는 능력’이 더 커지고 더 쎄지게 됩니다. 그때는 ‘담배를 끊었냐 말았냐’ 따위의 질문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얻게된 ‘담배를 상대하는 기운’은 다른 운동능력과는 달리 내가 담배를 피우지만 않으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쎄집니다.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은 금연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한 두가지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담배와 항상 물리적인 거리를 두세요. 집안에 담배를 한개피라도 놓아 두지말고 (칼 꽃은 담배갑은 이미 물에 담궈 피울수 없게 만든 다음에) 불편을 무릎쓰고 상점에 사러가야만 하는 상황을 유지하세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그리고 담배를 피울 상황을 미리 파악하여 표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피하도록 노력하세요. 둘째, 담배와 상극인 무언가를 찾아내어 그것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제게 그 상극은 장거리 달리기였어요. 굳이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실천 가능한 어떤 상극들이 있을 것이니 찾아내어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세요.
술 담배가, 당신 자신은 물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극히 위험한 이유는, 나와 당신이 건강하고 긍적적인 삶의 방향으로 조금씩이나마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기운을 도둑질하고 그 실천에 발목을 잡으며, 장차 오~오랜 기간을 당신이 결코 원치 않았을 상황 즉,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짐이 되어 엄청난 괴로움을 안겨 주다가, 아마 작별조차 제대로 하지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만들 가능성을 (술 담배가) 확실히 높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이 단초가 되고 도움이 되어, 성공적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게 되어, 마치 내가 잠든 사이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총탄처럼, 장차 일어날 수도 있었을 폐암등을 피하여 건강장수 한다면 (비록 본인도 저도 그 내막을 결코 알 수는 없겠지만) 저는 정말 기쁘겠습니다. 저도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인연이 되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도와드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술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겠습니다. 중요한 공통점들은 이미 위에서 말하기도 했고, 또 술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며 어느듯 강산이 한차례 변하기도 했지만, 술에 대한 애증과 복잡한 심사는 아직도 제 마음을 흐트려놓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싶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술을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고 더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밀양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때 뜬금없이 밀양을 찾았다. 영화 ‘밀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중 하나인, 밀양역전에서 교회사람들과 어색하게 어울려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남자주인공 생각이 나서였다. 가는 길에, 밀양역전에 가면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그 찬송가를 부르겠노라 공언하였지만, 정작 찬송가를 기억해 내지 못하여 노래는 못불렀다. 하지만 밀양역과 그 주변을 한동안 함께 걸으며, 이 뛰어난 영화가 내게 던졌던 매시지가 지난 십수년 동안 내 삶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반영이 되고 또 의미가 되어왔던지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 훌륭한 영화를 만든 감독과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 덕분에 ‘밀양’이 나와 인연이 되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찾게되니, 이것도 일종의 코미디랄까 웃기는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번 방문때는 그 중국집 ‘다래현’을 찾아볼 생각이다 🙂
이창동 감독의 수작들인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등은, 1994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수작 ‘포레스트 검프’처럼, 어른이 되고나서 누구나 그리워는 하지만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 좋았던 그때를 주제로 하고 있다. 옛 친구들을 만나며 새삼 깨닫게 되었지만, 나도 그들도 모두 많이 변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때마다, 막연히 그 좋았던 시절을 그리는 마음과 더불어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를 아쉬워 하는 마음도 든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내게 그런 그리움과 아쉬움도 떠올리게 하지만 더불어 인간의 구원 이라는 주제를 함께 다룬 영화다. 인간의 구원. 절망에 처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무었을 통하여 어떻게 몸부림치며 그 절망을 벗어나는가를 (어떻게 dealing하는가를) 잘 그리고 있다.
좋은 영화를 발견하면, 오랜 세월 두고두고 (몇년마다) 다시 보는데 그때마다 나의 해석과 반응 그리고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영화를 여태까지 봤을 때는,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슬픔) 앞에 종교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근본적인) 구원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어젯밤에는 이런 내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30년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또 드물게 내가 존경하게 된 성직자 친구분께서는, 모친 생전에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어머니께 말씀해 주셨는데, 매우 건방지고 웃기는 이야기지만, 어제 나는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도 (그리고 다른 세간의 종교를 통해서도)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 또 표나게 믿는다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거룩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그야말로 (선악의) 짬뽕이며 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잠시 반짝? 가능하다. 주변에 있다. 늘 번쩍?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 없다. 잠시 반짝 했던 것으로 마치 늘 번쩍인 것처럼 ‘척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 인생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만가지 더럽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제 밤 혼자 영화에 몰입하여, 주인공 여자가 절망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으며 찬송가를 부를때 같이 손뼉을 치며 그 교회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도 놀랐다. 미쳤나봐 🙂
이은상 시인이 오래 전에 남긴 ‘가고파’라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덧붙인다.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4절을 가장 먼저 지으셨다는 설도 있다.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어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일하여 시름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니아 깨끗이도 깨끗이
인간과 시간
인간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한가지를 꼽으라면 무었일까? 어떤 뛰어난 사람이 ‘시간’이라고 하던데 나도 동감한다.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좋은 영화들이 여러편 있는데, 오늘은 ‘About Time’이라는 영국영화를 보았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상영되었다고 한다.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매세지는, (영화속 주인공처럼) 설령 타임머신을 타고 마음대로 과거로 되돌아가 자신의 (그리고 자신과 관계된) 과거를 무한정 바꿀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참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보고 나면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별 의미도 없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그리고 주변의) 행복을 증대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바로 지금, 오늘, 현재’에 딱 한 번만 가능한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제목을 잊었는데 언젠가 꽤 재미있게 보았던,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를 다룬 또 다른 영화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천국에 있던 사람들이 결국은 자발적으로 평화로운 종말을 (죽음을)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유머러스하게 그렇지만 정확히 설명하였다. 흔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천국의 모습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 영화가 잘 (그리고 과학적으로) 묘사한데로, (예를들어)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전부 다 여러차례 읽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곳을 수차례 여행하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통달하여 올림픽 금매달을 모조리 따고 나서도, 그 ‘영원’이라는 시간의 극히 일부도 사용하지 못한 꼴이니, 나중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게 되어 결국은 천국이 처음 생각하던 그 천국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며, 이것을 깨닫게 된 천국 입주자들은 결국에는 스스로의 종말을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발적이며 평화롭고 좋은 죽음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들 인생인데…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던지는 매세지를 무시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볼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짐작하건데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좀 다른 (좀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2023년을 시작하며 ‘인간과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적절하다 싶다.
몬시뇰 그리고 결혼계약
‘몬시뇰’은 우리에게 슈퍼맨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1982년도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리고 ‘결혼계약’은 2016년에 방영된 티비 주말드라마입니다. 보았고 또 어쩌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몬시뇰은 언젠가 한번은 글을 올려보겠노라고 이야기 했던 영화입니다. 세상에는 훌륭하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영화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이 영화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영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IMDB에서 서양사람들이 (아마도 미국인들이) 매긴 점수가 10점 만점에 5점 정도로 그야말로 형편없는 어쩌면 중간도 못되는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는 내가 미친 것일까요 🙂 여하튼 내가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것은 부정할 수가 없겠네요.
인터넷 관련 기술의 발달로 옛날에는 가능하지 않았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싸게 가능해진 것들이 있지요? 지나간 티비 드라마를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일것 같네요. 일년에 한 두번 한국 드라마를 볼까말까한 우리부부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여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만큼 감동적으로 보았던 ‘어른들의 동화’ 같은 드라마가 바로 이 드라마 ‘결혼계약’입니다. 물론 ‘묜시뇰’ 보다는 훨씬 한국에 더 알려진, 감수성 있는 어른들이 많이 좋아했다던 통속적인 소재의 티비 드라마 입니다. 이런 통속적인 프리티우먼 백설공주 신데렐라 이야기를, 훌륭한 대본과 연기 그리고 연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요.
묜시뇰과 결혼계약은 만들어진 시기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른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화와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개의 어른 동화에서 크나큰 공통점을 봅니다. 이 두개의 족보가 전혀 다른 드라마들이 인간에게 극히 공통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게 됩니다.
1960년대 혹은 1970년대 미국에 유학했던 우리 선대들이 남긴 이야기들 중에서 한두가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학 식당에서 식판 위에 건드리지도 않은 그 크고 맛있는 오렌지가 식사 후에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의 놀람과 더불어 미국 남녀 대학생들이 한 방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만날때면 방문을 열어 두었다던 이야기 입니다. 그때 당시 그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한국 유학생의 시각은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시각과 다르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이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마치 조선시대에나 일어났을 그런 풍습을 유지했던 것은 문화적 시각적 차이를 떠나 사실로 여겨집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신을 숭배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그 당시 미국인들을 지배했던 삶의 방식이었어요. 물론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보고 듣고 알게된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면들이 있어요.
그저께 우연히 독일국영방송 DW에서 만든 ‘미국의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에 관한 도큐맨터리를 잠시 보다가 무척 놀랐어요. 일대일로 대응하는 한국말이 없어보여서 그냥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라고 했는데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신앙’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요? 침례교냐 장로교냐 이런 종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주어 해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전세계에서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도큐맨터리에 어떤 미국 중산층 가정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러한 삶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십대 중반의 두 딸들은 우리가 아는 통속적인 21세기 미국인들과 한참 거리가 멀어 보었어요. 침대옆 서랍에서 오래된 낡은 책을 보여주는데요 아주 어릴때부터 닳토록 읽어 그야말로 닳고 닳은 성경이었어요. 그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하다못해 아빠가 학교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도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매일 새벽기도를 몇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던 사람들이 문득 떠올랐어요. 어떤 특정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근본주의?) 매우 훌륭한 신자일 그런 사람들과 만약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램 관련 사태들이나 혹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을까요? 아까 이야기한 도큐맨터리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많은 어른들과 학생들이 켄터키 어디에 있다는 노아의 방주를 방문해요. 미국답게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 박물관이에요. 그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언제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역사에 언제 어떻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는지 배우고 또 기억합니다. 참 인간이란 안타까운 존재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실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결과가 ‘비정상’ (?) 이라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묜시뇰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미국의 한 젊고 멋진 천주교 사제가 이차대전을 참전한 후에 로마에 남아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며) 카톨릭 최고 권력에 (?) 다가가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희노애락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이 주어진 어떤 상황 혹은 사회적 구조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친구와 적을 만들고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좌절하며 또한 천주교회 재건을 위하여 교황의 암묵적 동의하에 마피아와 손잡고 아슬아슬한 사업을 벌이며 일어나는, 거룩한 천주교 의복 뒤에 감추어진 정말 있을 법한 인간들의 진면목을 담은 영화입니다. 왜 10점만점에 5점일까요? 그것은 흡사 우리가 어릴때, 부모님의 섹스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부끄럽고 괴로워했던 그런 상황이, 종교와 현실이라는 상황에도 일어난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른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나아가 걸프렌드와 섹스를 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케하는 (?) 자식을 둔 나이가 되고보니,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사랑을 나누셨다는 것에 조금도 거부감이 생기거나 이상하거나 하지 않게 되었어요. 마치 식사를 하셨고 화장실을 가셨었다는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와 마주치게 될때 그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신도들’ 그리고 지금도 미국 어디선가 아마도 ‘방문을 열어두고 남녀가 이야기를 나눌 그 에반젤리컬 크리스쳔들’에게는 큰 혼란과 부끄러움 그리고 괴로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상황을, 어릴때는 그냥 괴로워 했겠지만 어른이 되고 힘이 생기고 나면 그냥 괴로워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넘들의 가짜 진리’를 막으려고 하겠지요. 바로 이 결과가 묜시뇰이라는 탁월한 영화가 IMDB에서 10점 만점에 5점을 받은 이유지 싶네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신도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들이 자유로우며 그들이 사랑으로 자신과 타인들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실까요?
묜시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무었을 만들어 어떤 매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명백히 알고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대본을 (혹은 원작 소설을) 쓴 분 그리고 영화를 만든 분들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이야기를 이미 알았었고 생각했었고 또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었던 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나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40년이 지나서 내 블로그를 통해서 반복하는 것이지 싶네요.
나는 ‘결혼계약’ 드라마를 보고선 그 극본을 쓰신 분의 뒷조사를 (?)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위에서 묜시뇰 영화의 대본을 쓴 분이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분도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분이 미디어에 인터뷰하는 (결혼계약 드라마에 대해서) 것도 읽어 보았어요. 이분이 크리스쳔인지 아닌지 나는 알길이 없지만, 이분은 인터뷰 끝에, 어떤 철학 혹은 믿음이 결혼계약 극본 바탕에 깔려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하셨어요. 누군가 내게, 이 결혼계약이라는 드라마를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 반복 시청하고선 도대체 무었을 보았던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이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에서 해탈을 얻는 과정을 그린 (붓다의 가르침을 표현한) 위대한 현대판 경전이다’ 🙂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교니 사랑이니 붓다의 가르침이니 해탈이니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어요. 그리스도교도 사랑이라는 의미도 또 붓다의 가르침도 해탈이라는 표현도, 우리 인간의 삶이 먼저 있고 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들 인간의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인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먼 미래에도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조건들 속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램도, 사랑을 주고 받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도, 그리고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도 변치 않고 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임에 분명해요.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붓다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은 인간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시고 내 놓으신 일종의 해결책들이 (?)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본질이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엄마와 둘이 사는 7살 은성이도,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멀리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동시에 엄마를 몹시 사랑하며 그 엄마의 행복을 깊이 바랍니다. 은성이는 결국 이 두가지 커다란 마음의 갈등을 이겨내고 스스로 해결하여 해탈에 도달합니다. 엄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닥쳐온 상황을 더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 냅니다. 그 싫어하던 아저씨를 받아들이며 결국은 새 아빠로 삼고 가장 아름다운 부녀의 관계로 발전시킵니다. 한 인간의 해탈을 이렇게 마음에 와닿도록 훌륭하게 표현한 것을 나는 일찌기 보았던 적이 없어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도대체 (현실 속의) 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연기를 극도로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하고 또 뛰어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스래 느낍니다.
남자 주인공 지훈씨의 친모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사람도 아니고 마음이 제대로 밖인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들의 사랑으로 결국은 마음을 비워내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아들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며 기생하고 나아가 자기의 생존을 도모하는 삶의 방식을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참으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해요 (비록 내 몸은 병들어 죽지만) ‘나는 너 덕분에 살게 되었다’. 훌륭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보고 또 그의 대사를 들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밤에 이룬 해탈이 아침에 얼마나 힘이 없는지’ 나는 또한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블로그에 골프 이야기를 몇차례 쓴 적이 있었는데요. 골프 자체가 주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골프의 속성이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것이 주제였던 적이 많았어요. 유튜브 골프 레슨을 보거나, 잠시 연습을 하거나 혹은 새 골프채를 손에 쥐게 되면 골프가 ‘이렇게 하면 되지 싶다’는 일종의 깨달음 혹은 해탈을 (?) 하게 되요. 그런데 그런 해탈이 얼마나 힘이 없고 현실에서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지를 온몸으로 뼈져리게 깨닫는데 필요한 시간을 별로 길지 않아요. 마치 밤에 얻은 깨달음이 다음 날 아침에 (마주치는 현실속에서) 산산조각 나듯이, 다음 라운드를 나가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 (현실자각타임) 속에서 더욱 더 괴로워 지게 되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남자 주인공 멋진 지훈씨는 여자 주인공이 (서로 지극히 사랑함에도 시한부 생명의 짐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지 않으려고) 자신을 밀쳐내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살렸으니 이제 너도 한번 살아봐. 내가 살릴께’ 이렇게 말합니다. 제벌 2세로 제멋대로 살아온 지훈씨. 가난하고 평범하지만 정말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심성을 가진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만나 차차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지훈씨는 주변 모두가 놀라자빠질 자신만의 해탈을 이루어 냅니다. 인생에서 무었이 중요하고 그 중요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힘을 주는지 재대로 맛본 다음부터 이 인간말종은 완전히 변화합니다. 한 인간을 참으로 존경하게 되면서 싹튼 사랑은 세상 그 무었도 막을 수가 없고 그 어떤 손해도 감수합니다. 이전에도 수차례 말했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고,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극작가가 배우의 입을 통해 이야기 하듯이) ‘돈으로 막으려면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해탈하고 나면, 그래서 돈을 진심으로 포기하고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보려는 시도를 진정으로 그만두게 되면, 상대방은 신기하게도 저절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결코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 보지 않아요. 우리 삶의 큰 진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주인공 혜수씨. 신데릴라 입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 시한부 생명. 어린 딸을 위해 모든 것 무슨 짓이던 하고선 세상을 뜰 훌륭한 엄마입니다. 난 남자 주인공 지훈씨가 쓰레기짓을 할때 ‘아 저런 것들을 사람들이 쓰레기 짓이라고 하는구나’ 배운 것이 많아요 🙂 그리고 동시에 ‘어 나도 보통 저렇게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적이 (때로 훌륭한 일이라고 조차 생각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렇게 좀 놀라게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미남에 금수저라는 것만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 지훈씨와 내가 닮은 점이 꽤 많았어요. 그래서 정말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이토록 끌렸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동시에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훈씨와 닮은 점이 많듯이 아내는 혜수씨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혜수씨가 지훈씨를 ‘살게 해 주었듯이’ 어쩌면 아내도 나를 살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러번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산다는 것이 무었일까요? 지훈씨가 혜수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했고, 또 지훈씨 엄마가 아들 지훈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 했는데요, 도대체 이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까 위에서 비유로 말했던, 매일 새벽 기도를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다는 그리스도교인과 내가 마주 앉아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 다난한 일들에 대한 견해를 서로 밝히고선, 전 세계에서 뽑은 수 많은 배운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누구의 견해가 보다 균형 잡혀 있는가 묻는다면, 건방진 말이 되겠지만, 나의 견해가 좀 더 균형 잡히게 들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 사람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또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언행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두 개의 상반된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기울이며 여태껏 살아 왔어요. 이미 말했듯이 인간의 안타까움은 (수십년 매일 새벽기도 같은) 그런 노력과 성취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변화하며 나아가 그런 변화의 영향을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있지 않은가 싶어요. 이처럼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 인생이라, 아마 붓다께서는 ‘삶은 두카’ (불완전, 불만족, 괴로움) 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다시 되돌아가서 ‘살게 해주었다’ 혹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몽고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야생 늑대는 경외의 대상이자 또한 최약의 적이기도 하다고 해요.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추적하여 죽이고 때때로 새끼들을 발견하기도 한다는데요, 태어난지 몇주만 지나도 늑대 새끼들은 절대로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태어난지 며칠이 되지 않은 핏덩이 새끼들을 데려다가 사람들과 가축들 사이에서 기르기도 한다는데요, 한살 정도가 되고 나면 (그동안 그렇게 같이 잘 놀고 좋았던 그 녀석이) 야성을 결코 감출 수가 없어 사람과 가축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가 되어 결국 죽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녀석과의 우정은 (?) 한장의 늑대 가죽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숙명이라네요. 늑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물려받은 DNA가 합쳐서 빚어낸 삶을 살겠지요. 그 드라마에서는 혜수씨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훈씨가 알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그의 형을 그 자리에 대입한다고 똑같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다만 웃음꺼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공평하기도 하지 싶네요. 서론이 길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산다’는 의미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그리고 물려 받은 DNA에 지배되는 그 작은 세계, 좁은 믿음 그리고 굳어진 가치관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세상에 산재하는 다른 환경들 그리고 과거에 살다간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와 믿음 그리고 가치관을 (최소한) ‘볼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무언가 작은 것들이라도 배워서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결과적으로 덜 다투고 더 사랑하고 더 가볍게 왔다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그리고 묜시뇰 영화에서도 많은 등장 인물들이 바로 이렇게 ‘살게 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뛰어나게 그리고 있어요.
두가지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며 오늘 이 길었던 두 편의 드라마 이야기, 내가 생각컨데 가히 최고의 드라마의 이야기를 마칠까해요. 먼저, 위에서 비유로 들었던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 드라마를 보고선 아내에게 비유로 말했어요. 평생 권투를 한 사람의 주먹은 부드러울 수가 없다. 샌드백을 때린 정권과 손에 베인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심신도 다르지 않다. 권투선수에게 부드러운 손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새벽기도 평생한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고 부드럽기를 기대하기 어려움과 같다. 그리고 두번째는, 밤에 얻은 해탈이 아침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나면, 다시 말해 비록 다음날 아침에 산산조각 나는 해탈이나마 하고 또 하면서 시간이 지나노라면,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덜 나든지, 산산조각이 나도 덜 괴롭든지 아니면 산산조각 자체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되든지 하면서 우리도 한 걸음 한 걸음 해탈에 가깝게 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에베레스트 산을 목숨을 걸고 오르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웃기는 존재 입니다. 그 등반을 이 세상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목숨걸고 그 힘들고 위험한 짓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론 그래도 할 사람이 소수는 있겠지요). 어떤 면에서는 해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우리 모두 각자 각자 어떤 시간이 오면 홀로 세상과 작별해야 합니다. 해탈? 그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좋아하는 당신이나 가지세요 🙂
예전엔 무슨 말장난인가 했었지만
매년 국가별 청렴도를 다양한 전문적 정보를 근거로 산출 발표하는 것이 있다. 이 조사가 시작된 1993년 이래 가히 독보적인 1위를 고수하는 나라에 내가 산다. 한국은? 칠레나 대만 폴란드와 유사한 위치에 있더라.
젊은 시절, 괜히 쿨해 보이는 것 같아서 멋모르고 책에서 보고 술자리에서 떠들었던, ‘길을 길이라 하면 더이상 길이 아니다’ 라든가 ‘난세가 충신을 만든다’ 같은 말들이 요새는 더 이상 말장난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 그 옛날에 이런말 했던 사람들 꽤나 똑똑한 사람들이었구나’ 싶다 🙂
한국과 비교해서 이 나라에서만 훨씬 더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 꽤 있는데, 한두가지 예를 들자면, ‘아무도 부정부패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과 ‘몰카로 더러운 촬영 하는 넘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있겠지 여기도 사람사는 곳인데. 그런데 1년에 1번 신문에 날까말까 하는 것과, 매일 신문에 도배를 하는 것이 같나?
모든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질서를 지키는 사회에서는 ‘줄’이나 ‘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이유가 거의 없다. 그래서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또 관심도 없는 것이다. 물론 복받은 곳이라서 사람들이 좀 헐렁하게 살아도 살만하고 또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서도 내 몫이 비교적 보장되는 곳이라는 것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짐작컨데 세상에는 해탈 열반을 성취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본 적도 또 들은 적도 없는 이유는 해탈 열반을 성취하고 나면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잘 살다가 조용히 떠나버렸기 때문이지 싶다. 나도 그렇게 하지 싶은데 🙂 붓다께서도 해탈 열반을 성취하신 후에 가장 먼저 했던 고민이 ‘이것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뭐하나’ 였었다고 한다. 다행히 마음을 바꾸셨지만.
이 나라에서 아무도 질서나 몰카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처럼, 이루고 나면 그 대상은 더 이상 대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룬 사람의 (주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라고 말했었지 싶고, 난세가 충신을 만들어 내긴 하는데 ‘편안한 시절에는 아무도 충신 이야기를 하지 않고 되려고 하는 사람도 또 될 이유도 없다’는 뜻으로 말했지 싶다. 난세를 만나 충신이 되어 이름을 빛내는 것도 좋겠지만 평안한 시절에 평안히 잘 왔다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