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담배 끊는 법

법륜스님은, 종교와 세대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또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우리시대의 큰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분의 강연이나 활동에 참여하는 분들의 대다수는 (중년) 여성들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년) 남성들로 부터는 좀 외면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어쩌면 법륜스님께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때로 일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왜 법륜스님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 ‘어떻게 하면 술 담배를 (어떤 해로운 중독을) 끓을 수 있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질문에, ‘어떻게 끊긴 그냥 툭 끊으면 되지’ 이런 대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때면, 그 분에 대한 존경심도 크고 그분의 지혜를 높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늘 기분이 상했었습니다. 한때는, ‘천주교 신부가 황혼이혼 상담하는 꼴이고, 스님이 고기요리법 가르치는 꼴’ 이라며 분개도 했었지만, 차차 이분도 완벽할 수가 없는 인간이고 또 사람들을 도우려고 나름대로 애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더 이상 분개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그와 비슷한 투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채널을 돌리게 됩니다. 이분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이유중의 하나는, 자신이 과거에 모자라고 부족해서 저질렀던 어리석었던 일들을 숨기지 않으며 나아가 그런 부끄러운 경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으로 더 크게 더 많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제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험자로서 단언하건데, 술 담배는 절대 그렇게 툭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이 박힐대로 박힌 술 담배는 완전히 100%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마시지 않고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말하면 언제 어떻게 다시 마시고 피우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낙심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합니다. 아직 하나 더 있는데요 🙂 세상에는 하도 살을 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방송을 보면 무슨 인간승리 드라마처럼 체중을 수십킬로 뺏다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아마 방송측에서 좋은 취지로 연출했겠지만) 무슨 대단한 일을 했고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처럼 자랑스레 보여지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보면  즉각적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그들은 과거에 이미 병적으로 비만했었고 미래에 다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큰 고위험군에 속한 ‘아직도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고 또 몇몇 검사 수치가  건강치로 나왔다고, ‘건강을 되찾은 인생’이라고 결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들을 중단한다고 ‘갑자기’ ‘저절로’ 결코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의 심신에 해를 끼치던 짓을 다만 지금 멈춘 것 뿐입니다. 그러니 체중 몇십킬로 줄였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연과 금주는 그 자체로 떠벌이며 자랑할만한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자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계속 읽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저는 담배를 끊는 시도를 아마 수십번 아니 백번은 했었습니다. 이런저런 실패 끝에 나중에는 칼을 담배갑 중앙에 꽂아서 벽에 박아 놓고선, ‘흡연은 내 몸을 저 칼로 찌르는 행위와 같다’면서 다짐하고 또 애를 써보았습니만, 이미 오랜세월 인이 박힌 담배를 원하는대로 끊지 못하였습니다. 사회생활등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심신의 불안정은 자꾸만 저를 담배와 술 같은 손쉬운 찰나적 위안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서, 내 갈망이 적어서, 내가 덜 답답해서 술 담배를 끊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 담배가 끌어 당기는 힘이 내가 그것을 밀어내는 힘을 능가했었기 때문에 조금 버티다가 늘 꺽여지며 패했었던 것입니다. 그 힘은 잘 줄어들지 않으며 또 이미 만들어진 (밀고당기는) 힘의 균형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술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원하며 마음을 먹었다면, 상대가 결코 만만한 그냥 툭 내려놓으면 되는 그런 호락호락한 대상이 아니라, 무슨 악귀처럼 당신의 심신을 칭칭감고 동여매어, 아무리 발버둥치며 때내려해도 옴싹달싹조차 어려운 정말 무서운 대상이라는 것을 먼저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기전으로 어떻게 해서 해결될 상대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 잘 듣고 저런 묘수가 통하는 그런 말랑한 상대도 아닙니다. 마치 악성바이러스나 암세포와 같이 스스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바꾸며 (숙주인 당신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종의 생명체처럼 두렵게 인식하는 것이 옳습니다.

먼저 이것을 똑똑히 자각하게 되면, 금연 시도가 실패하게 될때 절망과 좌절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할 마음을 먹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됩니다. 우스게 소리처럼 들리지만, 어떤 고대 국가에서는 제사장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낼때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항상 비가 왔다고 해요. 왜냐하면 ‘비가 올때까지 매일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글을 쓰면서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그 헤아릴 수도 없었던 (금연) 실패와 좌절 그리고 힘겨웠던 자기배반 후 재시도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는, 아니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떤 비법이나 비방 따위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 인터넷에서 찾아 본 것들 그런 것들을 이것저것 계속 시도하는 방법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알려드리는 한가지 핵심은 ‘넘어지고 좌절해도 다음날 다시 담배갑을 쓰레기통에 쳐넣고 (아니면 식칼을 답배갑 중간에 꽃아서 벽에 박고) 다시 일어나서 또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를 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고 또 시도하면, 내게는 담배와 반대의 에너지가 (force 혹은 기운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쌓여가고 내 몸과 마음은 서서히 하지만 분명히 ‘담배에 대해서 변화’하게 됩니다. 어느순간, 오랜 세월 그토록 집요하게 내 심신을 옭아매고 조여대던 그 담배라는 것의 힘이, 그 악한 기운이, 정말 별게 아니라는 것을 참으로 느낄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마치 거짓말처럼 담배는 ‘피워도 그만 안피워도 그만’인 온순한(?) 대상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괴상한 변신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담배가 무슨 바이러스처럼 변신했을까요? 아니오. 당신이 변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 실패와 좌절의 과정속에서 시도하고 또 시도할때, 그때 당신 스스로를 변화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듯 ‘당신이 담배보다 더 쎄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원래 약한지라, 어쩌다 하는 일이 잘 안되거나 가정에 힘든 일이 있거나 하면 다시 담배를 사다 피울지도 모릅니다. ‘아! 역시 실패했구나’가 아닙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아무도 ‘금연에 성공’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하세요. 오늘부터 시작해서 또 유지하면 됩니다. ‘아! 지친다’ 하지말고 그저 ‘방금 원하는데로 피웠으니 이제 다시하자’ 하면서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이 과정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되고 또 아무도 몰라도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하면 내 심신의 기운이 담배의 기운을 월등히 능가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되며 그때가 되면,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다시 부닥쳤을 때라도 담배가 나를 쉽사리 유혹하여 쓰러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담배로 부터 자유로운 기간을 ‘유지하는 능력’이 더 커지고 더 쎄지게 됩니다. 그때는 ‘담배를 끊었냐 말았냐’ 따위의 질문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얻게된 ‘담배를 상대하는 기운’은 다른 운동능력과는 달리 내가 담배를 피우지만 않으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쎄집니다.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은 금연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한 두가지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담배와 항상 물리적인 거리를 두세요. 집안에 담배를 한개피라도  놓아 두지말고 (칼 꽃은 담배갑은 이미 물에 담궈 피울수 없게 만든 다음에) 불편을 무릎쓰고 상점에 사러가야만 하는 상황을 유지하세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그리고 담배를 피울 상황을 미리 파악하여 표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피하도록 노력하세요. 둘째, 담배와 상극인 무언가를 찾아내어 그것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제게 그 상극은 장거리 달리기였어요. 굳이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실천 가능한 어떤 상극들이 있을 것이니 찾아내어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세요.

술 담배가, 당신 자신은 물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극히 위험한 이유는, 나와 당신이 건강하고 긍적적인 삶의 방향으로 조금씩이나마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기운을 도둑질하고 그 실천에 발목을 잡으며, 장차 오~오랜 기간을 당신이 결코 원치 않았을 상황 즉,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짐이 되어 엄청난 괴로움을 안겨 주다가, 아마 작별조차 제대로 하지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만들 가능성을 (술 담배가) 확실히 높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이 단초가 되고 도움이 되어, 성공적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게 되어, 마치 내가 잠든 사이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총탄처럼, 장차 일어날 수도 있었을 폐암등을 피하여 건강장수 한다면 (비록 본인도 저도 그 내막을 결코 알 수는 없겠지만) 저는 정말 기쁘겠습니다. 저도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인연이 되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도와드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술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겠습니다. 중요한 공통점들은 이미 위에서 말하기도 했고, 또 술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며 어느듯 강산이 한차례 변하기도 했지만, 술에 대한 애증과 복잡한 심사는 아직도 제 마음을 흐트려놓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싶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술을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고 더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밀양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때 뜬금없이 밀양을 찾았다. 영화 ‘밀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중 하나인, 밀양역전에서 교회사람들과 어색하게 어울려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남자주인공 생각이 나서였다. 가는 길에, 밀양역전에 가면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그 찬송가를 부르겠노라 공언하였지만, 정작 찬송가를 기억해 내지 못하여 노래는 못불렀다. 하지만 밀양역과 그 주변을 한동안 함께 걸으며, 이 뛰어난 영화가 내게 던졌던 매시지가 지난 십수년 동안 내 삶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반영이 되고 또 의미가 되어왔던지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 훌륭한 영화를 만든 감독과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 덕분에 ‘밀양’이 나와 인연이 되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찾게되니, 이것도 일종의 코미디랄까 웃기는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번 방문때는 그 중국집 ‘다래현’을 찾아볼 생각이다 🙂

이창동 감독의 수작들인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등은, 1994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수작 ‘포레스트 검프’처럼, 어른이 되고나서 누구나 그리워는 하지만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 좋았던 그때를 주제로 하고 있다. 옛 친구들을 만나며 새삼 깨닫게 되었지만, 나도 그들도 모두 많이 변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때마다, 막연히 그 좋았던 시절을 그리는 마음과 더불어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를 아쉬워 하는 마음도 든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내게 그런 그리움과 아쉬움도 떠올리게 하지만 더불어 인간의 구원 이라는 주제를 함께 다룬 영화다. 인간의 구원. 절망에 처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무었을 통하여 어떻게 몸부림치며 그 절망을 벗어나는가를 (어떻게 dealing하는가를) 잘 그리고 있다.

좋은 영화를 발견하면, 오랜 세월 두고두고 (몇년마다) 다시 보는데 그때마다 나의 해석과 반응 그리고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영화를 여태까지 봤을 때는,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슬픔) 앞에 종교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근본적인) 구원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어젯밤에는 이런 내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30년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또 드물게 내가 존경하게 된 성직자 친구분께서는, 모친 생전에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어머니께 말씀해 주셨는데, 매우 건방지고 웃기는 이야기지만, 어제 나는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도 (그리고 다른 세간의 종교를 통해서도)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 또 표나게 믿는다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거룩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그야말로 (선악의) 짬뽕이며 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잠시 반짝? 가능하다. 주변에 있다. 늘 번쩍?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 없다. 잠시 반짝 했던 것으로 마치 늘 번쩍인 것처럼 ‘척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 인생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만가지 더럽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제 밤 혼자 영화에 몰입하여, 주인공 여자가  절망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으며 찬송가를 부를때 같이 손뼉을 치며 그 교회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도 놀랐다. 미쳤나봐 🙂

이은상 시인이 오래 전에 남긴 ‘가고파’라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덧붙인다.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4절을 가장 먼저 지으셨다는 설도 있다.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어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니아 깨끗이도 깨끗이

인간과 시간

인간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한가지를 꼽으라면 무었일까? 어떤 뛰어난 사람이 ‘시간’이라고 하던데 나도 동감한다.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좋은 영화들이 여러편 있는데, 오늘은 ‘About Time’이라는 영국영화를 보았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상영되었다고 한다.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매세지는, (영화속 주인공처럼) 설령 타임머신을 타고 마음대로 과거로 되돌아가 자신의 (그리고 자신과 관계된) 과거를 무한정 바꿀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참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보고 나면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별 의미도 없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그리고 주변의) 행복을 증대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바로 지금, 오늘, 현재’에 딱 한 번만 가능한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제목을 잊었는데 언젠가 꽤 재미있게 보았던,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를 다룬 또 다른 영화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천국에 있던 사람들이 결국은 자발적으로 평화로운 종말을 (죽음을)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유머러스하게 그렇지만 정확히 설명하였다. 흔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천국의 모습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 영화가 잘 (그리고 과학적으로) 묘사한데로, (예를들어)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전부 다 여러차례 읽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곳을 수차례 여행하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통달하여 올림픽 금매달을 모조리 따고 나서도, 그 ‘영원’이라는 시간의 극히 일부도 사용하지 못한 꼴이니, 나중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게 되어 결국은 천국이 처음 생각하던 그 천국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며, 이것을 깨닫게 된 천국 입주자들은 결국에는 스스로의 종말을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발적이며 평화롭고 좋은 죽음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들 인생인데…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던지는 매세지를 무시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볼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짐작하건데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좀 다른 (좀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2023년을 시작하며 ‘인간과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적절하다 싶다.

쪼르륵 소리 억울한 마음

지구의 자전시간이 늘 24시간은 아니었고 또 앞으로도 변할 것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배워서 일게 되었다. 지구가 탄생했던 아주 오래 전에는 하루가 5시간 정도였었고 (자전주기가 5시간) 그만큼 시간이 더 흐른 먼 미래에는 하루가 1천 시간이 넘을 것이라고 하더라. 우리의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가 🙂

한국어와 영어가 다른 줄이야 누구나 알겠지만 혹시 생각해 본적이 있나 한국어에 있고 또 흔히 사용되는 어떤 단어가 영어에는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말고 어떤 상황이나 느낌 혹은 생각을 지칭하는 단어중에서 말이다 (다시말해 그 언어의 배경인 문화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골프를 치다보면 2가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번째야 물론 자신이 좋은 샷을 쳤을때 느끼는 즐거움이겠고, 두번째는 동반자가 나쁜 샷을 쳣을때 ‘은근히 느끼는 일종의’ 즐거움 혹은 기쁨이 있다. 이런 두번째 상황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을 한마디로 정확히 표현하는 한국어 단어는 없지 싶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있다. Schadenfreude 라는 단어가 정확히 그런 (야비한) 즐거움과 기쁨을 의미한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혹은 영어 표현을 찾아보려고 가장 많이 애를 써보았던 한국어가 ‘억울하다’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다못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아이에게까지 (아빠 닮아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나왔다) 상세하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상황 예까지 들면서 설명을 해봐도 고개만 갸우뚱거리다가 우리도 아는 일반적인 영어 단어를 나열하지, 위에서 예로 들었던 독일어 Schadenfreude 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억울함’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나 표현은 말하지 못하더라. 아마 없지 싶다.

살 좀 덜 찌고 더 건강 장수 하려면 배에서 나는 ‘쪼로록’ 소리와 가까워지면 된다고 많은 유식한 사람들이 말하더라. 평온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억울한’ 마음과 가까워지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까워진다는 의미는, 부드럽게 대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내치거나 난폭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억울함은 반드시 풀어야만 (상대에게 표현하고 전달하여 내가 아닌 그를 바꿈으로써) 속이 시원해지고 그래야만 결과적으로 내게 행복이나 이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에 ‘억울함’을 표현하는 단어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근거없이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착각 아닐까?

영어에는, 한국어처럼 문장 끝을 변형시켜 같은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존대 하대를 실어서 표현하는 것이 없다. 예의 바른 우리 아이도 엄마 아빠한테 ‘헬로’ 라고 하지 ‘헬로까’ 혹은 ‘헬로세요’ 하지 않는다 🙂 ‘억울함’에는 ‘당했다’는 일종의 수동적인 태도와 ‘상하관계’에서 자신이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자세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내게 무언가 잘못을 해도 나는 ‘기분이 나쁘고 성이나지’ (영어 표현에 모두 있다) 아이에게 내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싶다. 아니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들도록 내 마음에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지 싶다.

영어를 모국어로 영어권 국가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우리 아이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도대체 그 의미조차도 모르는, 하지만 한국인인 그대와 내게는 고무신에 붙은 껌처럼 철썩 붙어 있는, 이 ‘억울함’ 이라는 마음. 그런 기분이나 감정이 들때 한번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 무의식 중에 자기 스스로를 ‘당하는 입장’ 그리고 ‘아래인 입장’으로 항상 저절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유사한 결과나 상황에 처해져서 기분이 나쁘고 성이 나도, 내가 ‘주는 입장’이었다면 (‘저지른’ 입장이었다면) 그리고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었다면 억울한 마음은 없지 않을까? 언어와 문화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구성원들의 생각을 규정 짓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 마음이 스스로를, 자기도 모르게 구속하고 규정 짓는지도 모른다.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도 위험하고 좋지 않은 카르마를 잉태할 가능성이 있지만, ‘억울한’ 감정이 개입될때 그것이 불러올 위험과 카르마는 아마도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mindfulness 란 어쩌면 이런 것들을 좀 깨닫고 생각해보고 또 조금이나마 자신의 삶에 실천으로 옮겨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해탈이 뭐 별거겠나?

블링블링? 엉망진창?

어제 이야기 했던 티비드라마 ‘결혼계약’에서 주인공 혜수씨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받아들이기 직전에 묻는 말이 있어요. (나의 병으로) 앞으로 나는 ‘엉망진창’이 될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이렇게 묻습니다.

엉망의 ‘엉’은 큰 숫자를 의미하는 ‘억’이 변화된 것이에요. 그리고 ‘망’은 그물이라는 뜻인데요, 합치면 ‘엄청나게 많은 그물처럼’ 이런 의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물이 엄청나게 많이 얽히고 섥히면 그 겉으로 드러난 (표면의) 모습은 어떨까요? 몹시 우둘투둘하고 보기에 징그럽겠지요. 진창은 천연두나 종기의 자국 혹은 흉터를 의미합니다. 네 글자를 합친 의미는, 천연두나 종기의 흉터가 마치 수없이 많은 그물 모양처럼 피부를 징그럽게 뒤덮은 꼴 이런 정도입니다. 징그럽고 보기싫고 무섭고 괴롭고 가까이 하기싫고 아무도 원치않는 그런 꼴이 바로 ‘엉망진창’입니다.

오래 떠나 살면서 한국어가 변화하고 변천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때로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고 또 의미도 알수 없는 단어들을 사람들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드라마를 보면서 새롭게 듣게된 단어는 ‘블링블링’ 입니다. 물론 한국어는 아니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말인 듯 합니다. 알아보니 자마이카 출신의 어떤 래퍼가 (가수)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세계에 퍼져, 한국뿐만 아니라 영어권에서도 슬랭처럼 사용되는 듯 합니다. 한국어 ‘반짝반짝’과 대응하는 자마이카 말인듯 하네요.

그대에게 삶은 ‘블링블링’ 인가요 ‘엉망진창’ 인가요? 아니면 지금은 엉망진창인 느낌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블링블링을 꿈꾸며 살고 있나요?

붓다께서는 삶은 ‘두카’라고 하셨어요. 짱께들이 ‘고’ 즉 괴로움이라 번역하였고, 코쟁이들도 ‘suffering’ 역시 ‘괴로움 혹은 고통’이라고 번역하였는데요, 사실은 둘 다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두카’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는’ ‘결코 완전할 수가 없는’ 다시말해 ‘항상 불만족스럽고 늘 불완전한 (마음의) 상태’를 뜻하셨습니다. 목이 정말 마를때 시원한 물을 들이키면 행복해지나요? 갈증이라는 일종의 괴로움이 사라짐은 분명하고 잠시 어떤 기분 좋음이 (행복이라고 굳이 말할 수도 있겠네요) 있기도 하지만, 이 역시 금새 사라지고 결국 남는 것은 ‘다음번 목마름’ 뿐이 아니겠어요? 마시고 돌아서면 또 마셔야 하고, 잠시 기분이 좋더만 돌아서고 나면 잘 해야 본전 아니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는, 바로 이러한 우리 인생의 ‘멈추지 않는 갈증과 그것이 끝없이 빙글빙글 도는 윤회’를 표현하신 말이 ‘두카’입니다.

그러면 정말 이런 두카에서 해방된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예를 들자면) 목이 마를때 마신 물이 주는 그 쾌감 혹은 일종의 행복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는 상태? 아니면 한번 물을 마시고 나면 다시는 목마름이 애초에 생기지 조차 않는 상태? 하지만 이런 상태들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함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혹은 제정신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지 않겠어요? 목마름이라는 예를 떠나서 다른 어떤 것을 그 자리에 대입시켜도 ‘한번 얻어진 어떤 것이 (행복처럼 추상적인 대상이건 돈처럼 구체적인 것이건) 영원히 남아 있는 상태’ 혹은 ‘한번만 얻고 나면 다시는 더 얻을 필요가 없이 만족한 상태가 지속 되는 상황’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세계에도 알려진 신데렐라 이야기들이 꽤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동도 하고 또 일종의 희망을 (?) 가지게 만들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예요. 나는 좀 비범한 (?)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런 신데렐라 이야기의 뒷조사를 해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내가 알아본 모든 신데렐라 이야기의 현실속 결말은 ‘두카’입니다. 종종 상황이 정반대로 뒤집어져 처음의 행복을 나중에 모조리 토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길게보면 이 세상에는 신데렐라 이야기란 없어요.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인생의 참 모습은 ‘블링블링’ 보다는 ‘엉망진창’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네요. 물론 괜찮은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부러워 할지도 모를 삶을 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각자 각자의 처지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목마름은 (비유적으로)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며, 오로지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두카’가 동전의 뒷면처럼 우리의 삶에 찰싹 들어 붙어있다는 것뿐 아닌가 하는데서, ‘삶은 엉망진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이렇게 우리 인간의 삶이 ‘두카’이며 ‘엉망진창’에 가까울진데,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보려는 인간의 노력들도 (해탈의 과정도) 엉망진창의 과정일 것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랬다 저랬다, 됐다가 안됐다가, 저녁에 왔다가 아침이면 가버리는, 그야말로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불안정함, 불만족함, 불완전함. 이런 고약한 up & down의 반복이 해탈의 과정이 아니겠어요? 붓다께서는 80세가 넘어 돌아가셨어요. 현대의 나이로 환산하자면 아마 120세쯤 장수하셨지 싶네요. 이것 하나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분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알려진 이분의 또 다른 위대함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다른 사람들 그리고 수행자들과 더불어 매일 매주 매달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똑같이 함께 (정해진) 수행에 정진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만 먹고나면 영원히 배부른 밥이 없듯이, 한번만 성취하고나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해탈 열반도 세상에 없다는 진실을, 몸소 웅변으로 똑똑히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분만은 예외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내게는 많은 것을 무언으로 가르쳐 주시고 있어요.

잘 먹고 입고 편해서 얼굴에 기름이 졸졸 흐르는 모양새로 (그렇게 먹고 입고 자도록 땀흘려 제공해 주었던 사람들 고마운 줄은 모르고)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또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입을 놀리는 성직자나 도사같은 가짜들을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또 따르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

어쩌다 한번씩 청소를 하면서, 예를들면 밀대로 부엌바닥을 닦으면서, 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청소란 사실은 (더러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희석시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요. ‘줄이는 행위가 청소’ 입니다. 희석시켜 줄이는 것이지 결코 전부 없앨 수도 없고 또 설령 어떻게 한번 거의 없앤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되돌아 오지 않겠어요? 인생도,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해탈이니 사랑도 결국은 이와 같지 않을까요? 더러움을, 어두움을, 어리석음을 좀 닦아내서 줄이고 또 뒤돌아서 다시 좀 닦아내고 줄이면서 세월이 흐르고 장차 종착역에 다다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우리가 바라는 그 무언가 명백하고 확실한 그래서 내 손에 꼭 쥘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데도, 닦아내고 또 닦아내는 땀 흘리는 과정만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의 실체이며 또한 인간의 숙명이 아닌가 싶네요.

붓다께서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선 한동안 망설이셨다고 합니다. 이것 가르쳐서 뭐하나? 누가 알아 듣겠나? 이런 마음이셨다고 하지요. 하지만 붓다께서는 마음을 바꿔 잡수셨다고 해요. 그래서 오늘 이 순간 우리도 두카니 해탈이니 배워서 나름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왜 마음을 바꾸셧을까요? 무었이 그분의 마음을 돌렸을까요? 내가 듣기로는, 그분이 보시기에 ‘인간들이 불쌍해서’ ‘사람들이 사는게 슬퍼서’ 그러셨다고 해요. 측은한 마음.

계절 탓인지, 돌아가신 사랑하던 이들의 삶을 되돌아 보아도, 내가 사는 꼴을 보아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아도 인생은 참 애잔하다는 마음입니다. 애처롭고 애틋한 마음. 일종의 슬픔.

이 글을 쓰고 난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다시 전철에서 사람들을 밀치고, 회사에서 사람들과 다투고, 스쳐가는 사람들에게는 알게뭐야 불친절, 그리고 가족과 가까운 이들에게는 야비한 언행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겠지요. 그럼 그때 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