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하는 것?

지난번 블로그 글을 읽고 난 아내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훈계조의 글로써 쓴 사람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라는 혹평을 하였어요. 밥상을 뒤엎으며 대판 싸우려다가 (요샌 스스로 차려서 바닥에 놓고 먹기도 하니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고) ‘그렇게 보여질 소지가 있으며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한 내 한계’라고 쿨하게 말을 하고선 내 방으로 꺼져서 혼자 한잔 하면서 울분을 삭였어요. 나이가 들면서 가정의 헤게모니도 생체 호르몬 구성비의 역전과 더불어 반전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요 🙂

오늘은 새해맞이 시리즈로, 지난 글에 이어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지만 훈계조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말투도 좀 덜 건방지게 써보려고 해요. 잠시라도 그대들께 즐거움을 주기를 바래요.

우리가 어릴때 말을 못하는 사람을 벙어리 혹은 버버리라고 불렀어요. 그들은 왜 말을 못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소리를 내는 입이나 성대에 문제가 있어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에 말을 못하게 된 주된 이유는 (청각기능의 문제로)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흉내를 낼 수가 없고 또 소리를 어떻게 낸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들을 수가 없으니 자신이 내는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해요. 마치 태어나면서 장님인 사람이 색깔을 전혀 상상할 방법이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네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부닥치게 되어 생각을 하게 되면, 예를 들면 ‘지금 그녀에게 고백을 할까 말까’ ‘저 떠나려는 버스에 지금 뛰어가면 놓치고 괜히 망신만 당할까 아니면 탈 수 있을까’ ‘앞에 고약한 호수가 공 내놓아라 하면서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는데 다음 샷을 어떻게 칠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머리속으로 생각을 하는데요,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국어로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하게 되지요 (내면의 대화). ‘지금 고백했다가 망신만 당하고 괜히 잘 되고 있는 관계를 망칠지도 몰라 그만 두자’ ‘지난번에 버스 세워서 잘 탓는데 뛰어가 보자’ ‘힘을 빼면 된다던데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말이에요. 나는 물론 한국어로 내면의 말을 하고 꿈도 한국어로 꾸는데요, 드물게 영어로 꿈을 꿀 때도 있어요. 꿈속에서 영어로 말을 술술 잘하고 또 어려운 단어를 쓰는 꿈을 꾸다가 내 자신이 (그것에) 놀라서 이게 왠일 하면서 꿈꾸는 자신을 놀라워하는 꿈을 꾸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는) 일도 있었어요. 자기가 꿈속에서 사용하는 영어단어들을 자기가 이해를 못하는 웃기는 경우지요. 이민와서 힘들게 살다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요 🙂

옛날에는 의사 과학자들이 벙어리들에게 (소리내어) 말을 하게 교육을 시킨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좋은 뜻이었겠지요. 자신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목이나 혀의 감각등 만을 (센세이션) 기억하면서 내야하는 어려운 일이었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수화를 (손으로 말하는 사인렝귀지) 덜 배웠거나 안 배웠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의사와 과학자들이 차차 깨닫게 된 것이 있어요. 어떤 이유로던지 수화를 배웠던 사람들보다 이렇게 말을 했던 벙어리들이 지능이 더 낮고 사회생활에 더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요. 왜 그랬을까요?

입으로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벙어리지만 수화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만약에 골프를 치면서 앞에 물이 딱 버티고 있는 고약한 상황에 부딪치면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할까요? (어떤 내면의 말을 할까요) 수화를 통해서, 우리가 음성언어로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내면의 말을 ‘저넘의 물에 안빠지려면 왼쪽으로 힘을 좀 빼고 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할 수가 있다고 해요. 꿈도 수화로 꾸며, 약간 중국어처럼 한 글자에 많은 의미가 주어진 그런 방식으로 꿈을 꾸기도 하고 또 상황극 비슷하게도 꿈을 꾼다고 연구한 사람들이 말하네요. 그런데 수화를 전혀 모르면서 다만 보통 사람의 음성 언어를 흉내낸 사람들은 이렇게 하기가 훨씬 힘들거나 할 수가 없어서 결과적으로 지능발달도 더디고 또 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다고 하네요.

왜 이런 벙어리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나는 전산기술자로 오래 일을 해왔는데요, 내가 전문적으로 일해 온 분야는 ‘utilising management infrastructure such as Microsoft Configuration Manager to centrally manage large scale Standard Operating Environment’ 이렇게 요약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것을 한국어로 잘 옮겨서 한국에 있는 (전산을 전혀 모르는) 나이든 친척분들에게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아주 풀어서 말을 많이 하면서 장시간 설명을 하면 대략 머리속에서 이 비슷한 일을 하는가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학창시절 수학을 아주 못했는데요 물론 머리가 나쁜 것도 큰 이유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습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시작 부분에 나오는 개념들을 (수학적 약속들) 이해하지도 또 외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론들을 점점 발전시켜나가는 중반 이후에 가면 무슨 외국어인 듯 단어의 소리 그 자체는 들리는데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괴이한 상황이 발생하면서, 선생님들로 하여금 낙심한 마음에 주변에 우연히 놓여 있던 몽둥이를 손에 들게 만들었던 나쁜 학생이 되었던 것이지요. 비록 학창시절 수학의 언어를 익히는데는 실패했지만, 나는 부모님께서 주신 능력을 다른쪽에는 사용하여, 예를 들자면 전산의 언어를 스스로 익히는데는 실패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내 자랑 이야기가 아닌 줄 알지요?

사람이 왜 나이가 들면 수학 영어 말고 다른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명상등을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또 내면의 대화를 자주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내가 조금이나마 배우고 깨달은 것을 여러분들께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내면의 소리에는 두 종류가 있지 싶어요. 사자가 팀웤을 통해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사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냥 로보트처럼 초원에 지나가는 아무 작은 동물이나 앞발로 퍽쳐서 이빨로 물어 띁어 잡아 먹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도 (비록 본능에 기인한 것이지만) ‘일종의’ 생각을 하고 계획을 하며 서로 신호를 보내서 공동의 목표를 협업을 통해서 달성합니다. 이때 사자의 머리속에 어떤 ‘내면의 언어’가 존재하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어쩌면 위에서 말했던 (벙어리 꿈꾸는 예에서) 어떤 상황이나 이미지는 떠오르지 싶어요. 물소때를 혼자 쫒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위험을 감지하면, 어쩌면 지난날 겪었거나 보았던 어떤 상황에 대한 기억으로 말미암아) 몇번 해보다가 뒤돌아 섭니다. 잘못하다가 죽는 줄 알아요.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서 좀 미안한데요 (좀 씹혀도 싸다는 생각도 약간은 있네요) 그 전 서울 시장이 젊은 비서에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냄새를 맡고 싶다’ 이런 종류의 성추행의 말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요? 짐작컨데 아마 사자처럼 ‘본능을 따르는’ (그런쪽으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그런 생각을 했었을 꺼에요.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접근을 하고 시도를 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가 있을까’ 바로 이러한 사자가 사냥할 때와 유사한 내면의 대화를 자신과 (사자와는 다른 고도의 인간 언어를 이용하여) 했었겠지요. 육신을 가지고 욕망의 지배를 죽는날까지 받는 그대들과 나는 이런 것들에서 결코 (아마 죽는 그날까지)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 ‘수학 영어 말고 어른이 되어서 하는 다른 공부’를 통해서, 그것과는 수준이 좀 다른 ‘내면의 대화를 나눌 능력 또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나요?

전에도 말했지만, 소위 도를 많이 닦으면, 사람 육신으로 말미암은 (정상적인) 욕망이나 욕구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해요. 만약 늙은 승려나 성직자 혹은 철학자가 그런말을 하면 나이가 들어서 밥맛도 좀 없고 또 그곳이 작동이 잘 안되는 것을 어쩌면 득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세상에 알려진 반증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도를 많이 닦는다는 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좀 다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인간과 삶에 대한 연구 / 공부를 하고 (수학 물리등과 마찬가지로 그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또 관련된 내면의 대화를 (reflection) 좀 많이 해 보았다’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이것을 많이 하면 무슨일이 생길까요? 내가 배운 바로는 ‘생각의 기술 그리고 삶의 기술’이 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뭐요?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인간의 육신에 기인한 원초적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요 그런데 뭐가 나아진다는 것일까요? (상대적으로) 그것들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는 있지는 않을까요? 먹고 마시고 그리고 으음… 뭐하고 등등에 ‘덜 집중하고 덜 휘둘리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을 좀 더 지혜롭게 매니지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더 많이 먹고 더 비싼 것들을 마시고 더 많은 이성과… 이런 궁리만 사자처럼 만날천날 하면서 사는 대신에, 자기에게 길게 보아 더 나은 선택들을 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학교때 배웠던, 청각장애를 (아마 시각장애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 극복하고 훌륭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미국인 헬렌 켈러를 기억하세요? 그분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남긴 이야기에 ‘나는 나이들어 수화를 (아마 점자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기 이전에는, 사람으로서 의식은 있었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말해 그 당시에 나는 (사람으로 누구나 가지는) 의식은 있었으되 아무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사자와 같이)’ 라는 말이 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수학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우리가,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것들이 차원을 달리하는 어떤 것으로 진화 발전하여, 자신의 현재 삶을 그리고 다가올 죽음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산중에서 수행을 오래하여 득도했다는 사람에게 시장에 가서 한 두해 생선장사를 하면서 그 득도 수행의 효과를 한번 증명해 보라고 하면 생선장수로서의 성공이 별다른 노력없이 저절로 가능할까요? 수십년 성직자 노릇을 한 사람에게 한 일년 룸싸롱 매니저로 일하면서, 오래 닦은 도를 그 현실에서 한번 직접 적용하고 활용해 보라고 하면 과연 별 어려움이 없이 잘 될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한때 수학에 능했었고, 어떤 시험에 합격했었고 다만 어떤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해왔을 뿐이지 싶어요. 그것들이 우리가 나이들어 자신의 삶을 잘 경영하며 행복한 중년 노년을 누리다가 흙으로 (혹은 천국으로) 잘 되돌아 가는데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도나 수행을 몇십년 해도 삶의 현실에 직면하면 (육체적 욕망 감각 고통, 정신적 고뇌, 관계속에서의 이해의 충돌등)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 싶은데요?

지난 글에 골프 이야기를 좀 했었는데요, 그것 골프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줄 알고 있었지요? 그래도 조금만 더 할까봐요 🙂 위 항공사진에 보이는 파5는 내가 회원인 골프장의 소위 시그너쳐 홀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또 사람들이 훌륭하게 설계했다고 생각하는 홀). 드라이버를 200미터 이상 날리면 작은 개천을 건너 점 두개가 찍힌 장소에서 세컨 샷을 하게 됩니다 (점 세개를 향하여) 혹은 아이언으로 짧게 끊어쳐서 점 한개가 찍힌 장소에서 셋컨 샷을 하기도 합니다. 드라이버의 난조와 더불어 전술골프를 시도하는 요새는 주로 아이언으로 티샷을 하여 점이 한개 찍힌 장소에서 (비교적 자신있어 하는) 우드로 세컨샷을 점 세개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개의 점이 찍힌 장소에서 앞 개울까지는 몇십미터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너서 멀리 있는 두번째 벙커와 큰 호수까지는 거리와 방향도 넉넉하여 거의 문제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수차례 그것도 연속적으로 공의 대가리를 까면서 (탑핑) 세컨샷을 개울에 쳐박았습니다. 아무도 내 샷을 방해하지도 않았고 또 라이도 좋았으며 (또 내게는 너무나 놀랍고 또 억울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내가 그자리에서 세켠샷을 어드레스 하면서 100% 모든 상황을 명백히 의식하고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찬찬히 생각하고 나서 (내면의 대화 후에 충분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서) 샷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울로 풍덩 빠지는 꼴을 연속적으로 당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절망했어요. 그리고 무슨 대책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마치 그 작은 개울이 악마처럼 두려워졌습니다. 해답이 없는 기분이었어요. 지난 글에 골프를 잘 치지 못하는 내게도 한가지 강점이 있다고 했지요? 바로 이런샷을 치고도 성을 별로 내지 않는 것이지요. 물론 마음에 (이고에) 상처를 받긴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깨닫게 되었어요. ‘수행자가 생선장사를 잘 하려면 생선을 팔면서 (그와 관련된 희노애락에 시달리면서) 배우는 수 밖에 없지 다른 방법은 없으며, 100% 상황을 의식할 능력이 있고 또 충분한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100% 된다고 기대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때때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라는 내게는 중요한 교훈이었어요. 아무리 정신을 바싹 차리고 최선을 다해서 가진 능력을 전부 발휘해도 (결과적으로는) 생각대로 안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인생이 아닌가 다시금 깨닫게 되었어요. 궁금하지요? 어떻게 끝이 났는지 무슨 발전이 있었는지 🙂

우드클럽을 잘 다루어 160-200미터를 직선으로 쳐내던 ‘어제가’ 항상 지금의 내 실력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마치 수행자가 생선장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초보로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에요. ‘그 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 나의 우드 실력은 50미터 앞 개울에 연속적으로 쳐박는 수준’이라는 것을 아픔과 혼란을 겪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다시 그 자리에 몇차례 서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목표를 바꾸어 마치 초보 생선장수처럼 (이윤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몇 마리 팔고보자는 심정처럼) ‘무조건 공을 띄우기만 하겠다. 저 50미터 앞 개천 주변에 있는 우거진 잡풀을 넘기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공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나는 성공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진심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이것 속이다가는 심하게 혼나게 된다고 지난번에 말했지요?

그때부터 작은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 세켠샷이 개울에 빠지지 않고 멀리 멀리 하염없이 날아가는 모습을 요새는 자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아요. 내가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프의 여신은 뒤돌아서 나를 보게 될 것이며, 내 공은 (마치 마술과 같이) 다시 그 개천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요. 이 웃기는 골프가 나를 겸손하게 하네요. 탁구나 마라톤을 빌어 이야기 했었어도 전달하려는 내용은 다를 바가 없었을꺼예요. 혹시 골프 이야기를 자꾸 한다고 기분이 언짢았었다면 미안합니다. 이곳에선 누구나 하는 평범한 스포츠일 뿐이에요. 다른사람 말의 본질을 잘 이해 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며, 이때 발생하는 자신의 반응을 자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은 기술이라는 생각인데요 🙂

아는 것과 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과 또 우리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오늘은 이만 줄여요. 또 만나요.

노엘

출근길 버스, 막 떠나려는 참에 어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아주 힘겹게 버스에 천천히 오른다. 반신을 잘 쓰지 못하는 듯. 빈의자에도 간신히 걸터 앉는다. 허름한 옷차림에 가방을 등에 맨 흰머리 흰수염이 더부룩한 상늙은이…

가만있자 저 사람 혹시 노엘이 아닌가? 뒤쪽에 앉아 있던 내가 자세히 보니 맞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두세 정거장 가서 시내에 내린다. 이번에도 힘겹게 버턴을 누르고 겨우겨우 걸음을 옮겨 앞문으로 내렸는데, 내리고서도 빨리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좀 엉거주춤 서 있다. 운전수는 친절하게 기다렸다가 버스를 서서히 출발시킨다.

이 시간에 이곳에서 내리는 것을 보면 그는 놀러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런 몸과 행색으로 이 사람은 지금 무었을 하는 것일까? 그때 내가 그곳을 떠나면서 본것이 마지막이었으니 15년 세월이 흘렀다. 출근후 자리에 앉자말자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비록 오래전의 일이었으나 나는 그때의 에피소드를 생생히 기억할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성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단번에 찾을 수가 있다. 아! 한국으로 치면 국회사무처 비슷한 국회 지원 기관에서 매니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내가 좀 정신이 멍하고 충격을 받아서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같은 정부기관에서 일했던 그 당시에 그는 그곳에서 최고위급 매니져였었다. 그리고 그 당시 (죽었다 살아난) 뇌졸증의 여파로 반신이 불구가 되어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다녔으니, 지난 15년 이상을 이런 몸으로 계속 풀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오십이 넘었었지 싶고 또 머리가 하옛었다. 15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말할것도 없고.

내가 상당한 근거로 짐작컨데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람 어쩌면 의지의 사나이 조용한 인간승리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라면 그런 몸상태로 수많은 크고 작은 어려움들과 도전들에 직면할때 노엘처럼 꾿꾿히 견디며 가혹한 운명에 대응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동안 그를 잊지 않았으며 때때로 기억했었는데 앞으로는 힘겹게 버스를 타고 내리던 그의 모습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내 삶에서 내가 직면해 있는 어려움과 도전들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한때 나는 어려움에 빠진 그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져 이유없는 호의를 베풀었었다. 그는 그때 멋지게 그것을 되갚았을뿐만 아니라, 이토록 세월이 흐른 후에 자신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더 많은 호의를 다시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인연이 흘러가는 모습이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때 한순간 그런 자비의 마음을 내지 않았었더라면 그와 나는 아무런 인연없이 헤어졌을 것이고 아무것도 서로 주고 받지도 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작은 자비가 15년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내게로 되돌아 온다. 신기하기도 하고 또 좀 무섭기도 한것이 인연 카르마가 아닌가 싶다.

오늘 아침 비가 오는 바람에 버스를 타게 되었다. 막 버스에 오르려는데 줄 반대쪽에 어떤 사람이 기다리고 서있길래 손짓으로 먼저 타라고 하였다. 괜찮다며 사양하는 사람과 문득 눈이 마주쳤는데 노엘이었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듯 하였다. 혹은 기억하지 못하는체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뒤쪽 자리에 앉아 내릴때까지 그를 물끄럼히 바라보면서 그의 삶에 행복과 기쁨을 기원하였다.

가혹한 시련이 지난날 이유없이 그를 덥쳤었다. 비록 그는 쓰러졌었지만 다시 일어났다. 하루하루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는 집에서 안락하게 서서히 죽어가는 삶보다는, 일어나서 쪽팔리고 힘이 들지만 정상적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였고 15년이 지난 오늘도 그렇게 살고 있다. 확실히. 나의 존경과 감사를 전하며 그의 건투를 빈다.

내가 나의 작고 가벼운 십자가마저도 불평하며 원망하는 마음이 들때 나는 그를 기억하리라. 힘들게 지팡이를 짚고서 천천히 버스를 오르내리던 그의 모습을 잊지 않으리라.

삽질의 기록 – 드라이버 장타 (6)

훗날의 장타

장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가 되겠다. 지난번 글을 골프여신께서 우연히 보셨나보나. 좀 마음이 편치 않은 동반자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가운데 주말 아침 라운드를 함께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 하지 않는 3종 세트가 딱 구비되어 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자처한 라운드였다. 누구를 원망하리오 🙂

뿌리가 깊지 못하고 기초가 부실한데도 여기저기 뻗은 가지들이 있다 보니 강풍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딱하고 기가 막힌 것은, 우리 인생의 다른 비극적인 상황들과 마찬가지로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 무너지는 한가운데 있게되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를 써도 그런 상황을 바꾸거나 혹은 그곳에서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 제발 좀 이런 상황을 앞으로는 처음부터 만들지를 말고 애초에 피해주세요~~~

한번의 4펏을 포함 여덟번의 3펏을 하고서 완전한 백돌이로 환생하고 말았다. 동반자 부부는, 친절하지만 까칠한 남편은 (?? 특이한 조합) 아무렇치도 않다는 듯이 싱글스코어 기록 그리고 실제 싱글핸디캡 골퍼임에도 10미터 떨어진 개울에 공을 3회 연속 빠트리는등 백돌이처럼 한참을 철퍼덕거리던 부인은 갑자기 부활하여 후반 파3에서 홀인원을 치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였다. 겉으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듯 보였지만, 내 마음에는 ‘such is golf’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골프’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저녁에 함께 티비를 보던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밤 늦게 내가 혼자서 무슨짓을 할지 정확히 한마디로 알아 맞추면 용돈을 두둑히 주겠어요.’ 나를 알고 골프를 아는 아내는 ‘차고에 내려간다’면서 반은 맞추었지만 100% 정답을 말하지는 못했다. 정답은 ‘차고에 내려가 고물 골프채를 닦으며 혼자서 조용히 운다’ 🙂 한국은 주택의 절반이 아파트라지만 이곳은 아직도 90%는 단독주택이니 ‘차고에 내려간다’는 것에 다른 뜻은 없다.

인간의 의지가 카르마를 만들며 흔히 비극의 씨앗이 된다고 말했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의지 – 몸부림 – 좌절 – 성취’의 반복되는 과정을 (붓다께서 ‘윤회’라고 표현하셨다) 거치지 않고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을, 다시말해서 장타니 스코어니 동반자가 어떠니 하는 것들을 초월하여 자신만의 잔잔한 즐거움을 골프에서도 또한 인생에서도 찾아서 만끽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르려니와 이런 뼈저런 (?) 경험을 하고나면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쩌면 이렇게 돌고도는 윤회를 피할 길은 정녕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게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또한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훗날의 장타? ‘장타를 노력하지만 전혀 연연하지 않는것’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비거리가 아닐까 🙂

삽질의 기록 – 드라이버 장타 (5)

지금의 장타

1만명에 가까운 골퍼들과 2천회 이상의 라운드 경험이 있다는 어떤 캐디의 말에 따르면, 평지에서 드라이버를 치면 남자들은 평균 180미터 여자들은 140미터 정도 그리고 규칙대로 점수를 매길 경우 스코어는 평균 100타 정도라고 한다. 평지에서 200미터 이상 드라이버를 치면 꽤 멀리 친다고 볼수 있다고 하며 진짜로 90정도의 스코어를 기록하는 보기플레이어들과 함께 라운드를 하면 캐디노릇 하기가 무척 쉽다고 한다.

빈약한 신체로 조금이라도 더 멀리 쳐보겠다고 이전에는 몸을 많이 쓰는 드라이버 스윙을 했었다. 요새 인터넷 골프채널에 자주 등장하는 김국진씨 같은 스윙, 몸과 팔을 휘리릭 돌리며 드라이버 스윙 스피드를 높여 보려는 그런 종류의 스윙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자라 이전에 언급했듯이 드로우샷을 (탁구 드라이버와 유사한, 그래서 땅에 떨어지면 굴러서 더 전진하는) 구사하려고 했었다.

평범한 아마추어 골퍼가 (연습량은 적고 신체 능력은 별로며 뒤늦게 골프를 시작한 사람들이) 이렇게 온몸을 쓰면서 스윙을 하고 또 특정 구질의 드라이버를 만들겠다고 시도하는 행위는, 심신의 끝없는 고통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나는 꽤 시간이 걸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식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무시했고 또 생각조차 않았었던지 모르겠다. 아마 욕심에 눈이 멀고 이상한 고집에 좀 미쳐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은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보장도 없으니 단정하기도 어렵다 🙂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보다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활을 쏘는 것이 훨씬 명중율이 높을 것이고, (이상한 발상으로) 포물선을 구태여 크게 그리면서 궤도를 변화시키며 쏘는 것보다 최대한 직선에 가깝게 화살을 쏘는 것이 명중율이 높을 것이며 또한 전반적인 운동능력이 향상되면 구태여 반동을 가하거나 끙끙대며 용을 쓰지 않고서도 활시위를 천천히 조용히 당길 수가 있을 것이다.

요샌 말도 안타고 포물선도 중지하고 또 휘리릭 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신 발과 하체를 최대한 고정한 채로 복근 (코어) 동력으로 드라이버 클럽이 일정한 궤도를 따라서 오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탁구에서 내가 경험으로 명백하게 깨달은 ‘10% 가벼운 채가 상상보다 훨씬 큰 샷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골프에도 적용하여, 서구인들 체격을 기준으로 만든 내게는 무거운 드라이버 대신에 10% 이상 가벼운 아시안 스펙의 드라이버와 더 부드러운 샤프트를 사용한다.

최근 라운드에서 드라이버샷이 80% 페어웨이를 지키며 적절한 거리를 내는 바람에 좋은 스코어를 두어번 기록하였다. 보기플레이어들은 드라이버가 안정된 라운드에서는 어렵지 않게 80대를 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틀린말은 아닌 듯하다. 좋은 스코어를 함께 유지하던 동반자와 라운드 후반 무렵, 가장 어려운 스트로크 1홀에서 티샷을 하게 되었다. 396미터 파4 홀인데 전체적으로 오르막 경사다. 내가 먼저 친 드라이버가 운좋게 잘맞아 160미터 내외의 세컨샷을 남기게 되었다. 평소에 나보다 20미터는 더 보내는 내 동반자는 이것을 보고서 너무 감동(?)했던지 2번의 연속 드라이버 오비를 내면서 그만…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요. 그냥 어쩌다 한번 잘 맞았어요. 골프의 여신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

아까 위에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식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당시에는 왜…’ 이런 말을 했는데 어쩌면 그 해답이 ‘몸과 마음은 동시에 변화되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유흥준 선생이 조선시대 어떤 글에서 인용하여 유명하게 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내 미천한 경험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몸이 변화하면 마음도 따라 변화하리니, 그때 마음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몸과 마음은 동전의 앞뒷면이며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가지의 표현일 뿐임을 잊지 말아요~~

기질 습관 그리고 운명

어떤 산부의과 의사의 말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직후에 의사들이 아기 입을 벌려 이물질을 제거하는 절차가 있는데 이때 어떤 아기는 입을 좀 눌러서 벌려도 그냥 아~ 쉽게 벌려주면서 멀뚱멀뚱한(?) 아기도 있고 또 어떤 아기는 자지러질듯이 울고불고 하는 아기도 있다고 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어떤 외부적인 영향도 없는데 이렇듯 반응이 다른 것을 보고서 그 의사는, 아마도 이것은 아기들이 부모들로부터 유전적으로 받아서 가지고 태어나는 어떤 기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했어요.

몇달 전에 유치원을 시작한 한국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가 했어요. 오랜 세월 유치원에 재직하면서 수천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아 왔지만 한국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라고 해요. 서로 말이 통한다는 잇점을 지혜롭게 이용하여 아내가 어떻게 이 아이의 유치원 생활과 적응 과정을 표내지 않고 잘 도와주는지 나는 전부터 들어와 알고 있어요. 그 부모는 어쩌면 ‘아! 한국인 원장이라 다행이다’ 그 이상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처음 겪어보는 일이잖아요. 이 아이는 공부를 많이하고 능력이 있는 부모가 이곳 회사에 파견을 오는 바람에 함께 와서 몇년을 지내게 되었다고 해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당연하겠지요) 3살이 조금 넘은 이 사내 아이는 처음에는 아침에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곤 했었지만, 지난 몇달간 아내와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이제는 울지도 않고 점점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과도 더 어울리며 잘 놀게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영어는 아직도 한마디도 못해요. 아니 ‘결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 유치원에는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 아이도 한명이 있다는데요, 이 두아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영어를 알아 듣긴 해도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들은 둘 다 매우 영특한 편이라고 해요. 그리고 뚜렷한 개성 혹은 자아가 있어 보인다고 하네요 (유치원 다른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이 아이들은 ‘잘 하지 못할까봐’ 혹은 어쩌면 ‘잘 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의식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내는 생각한다고 해요. 타고난 기질일까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이런 특이한 상황에서 얻게 된 어떤 습관일까요? 아니면 타고난 기질이 이런 상황에서 그런 습관으로 드러난 것일까요?

중요하지 않아요. 이 아이들도… 언젠가 아내가 말해 주었던 그 수줍은 이나라 아이. 그렇게 좋아하는 소방차가 유치원에 왔는데도 너무 부끄럽고 무서워서 친구들처럼 차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먹였다던 그 아이. 아내가 제안을 하면서 약속을 했다고 해요. ‘네가 스스로 올라가면 나는 네 뒤에 꼭 서 있겠다’. 아이는 자신의 결정으로 올라갔고 참 기쁘고 좋아했다고 해요. 그 기뻐하는 아이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아이들의 습관을 바꾸어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돌려주는 아내의 직업이 참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때 유치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또 이런 프로페셔널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믿어요)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자랐어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저를 길러주신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 없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성인이 되고 나서 깨달은 자신의 기질 그리고 습관과의 힘겨루기가 만만치 않은 경우도 있어요.

다시 ‘결코 말하지 않는 그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아내와 다른 훌륭한 선생님들과 또 이곳의 좋은 교육 시스템의 도움으로 입을 열게 될꺼예요. 그리고 신나게 떠들고 싸우고 울고 불다가 만 5살이 되면,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씨앗처럼 자기의 인연을 따라서 멀리 떠나갈 꺼예요. 좀 웃기는 이야기는, 이렇게 떠나간 아이들이 장차 부모가 되어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이 유치원에 되돌아 오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고 해요. 자기를 돌보아 주셨던, 자기의 모든 것을 보았던 그 선생님들이 아직 있어요 하하하 🙂

때대로 나는 아내에게 ‘당신은 제자없는 스승이다’ 이렇게 놀리는 말을 할때가 있는데요, 진심으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자들이 감사해 하고 또 가슴에 달아주는 카네이션도 물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지만, 아내의 손을 거쳐 지나간 아이들이 아내와 다른 선생님들의 지혜와 사랑으로, 어쩌면 성인이 된 자신의 인생을 어둡게 하고 또 망칠지도 모를 습관들을 조금이라도 바꾸어 세상에 나간다면, 이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베푸는 참으로 큰 적선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요. 이런 종류의 괴로움을 직면하여 발버둥을 쳐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공감하지 싶네요.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가격을 매기거나 사고 팔수가 없지 싶어요. 참으로 큰 적선은 준 사람도 모르고 받은 사람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크고 작다’는 것도 없고 ‘주고 받았다’는 것도 없지만 그 실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나는 봅니다. 어쩌면 이미 성인이 된 인간들의 구원은(?)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닫고 의식하는 바탕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마치 어른이 되어 배우는 골프는, 어릴때 아무 생각없이 아빠 따라가서 놀면서 저절로 익힌 골프와는 그 과정도 차원도 다를수 밖에 없듯이 말이예요.

세살 아기들도 이렇게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아 (ego).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할 무거운 등짐 혹은 두꺼운 외투처럼,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고 또 내게 이익이 되라고 자연의 섭리로 주어졌지만, 마치 양날의 칼처럼, 이토록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조차도 짐과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 ‘나’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마음이 무겁지 않습니까? 붓다께서 해탈 열반을 만드셨나요?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마치 나이든 배뿔뚝이 중년에게 골프를 가르치듯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바로 이 자아가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단지 기질과 습관의 덩어리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자아를 만들고 또 강화하는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줄이고 또 지우면서 열반을 (니르바나) 향해 노력하며 살다가 가면 좋다 말씀하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소방차 위를 스스로의 결정으로 올랐던  그 아기는 장차 어른이 되면, 소방차를 아직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이고, 자신이 어릴때부터 존중 받았듯이 타인을 자연스레 존중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또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힘이 센 사람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요? 아니면 주변 사람들 모두 맹목적으로 쫓는 것들 중에서 더 비싸고 더 크고 더 멋져 보이는 것들을 획득하여, 이차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노병들의 군복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들처럼 ‘여기 봐요. 나 좀 봐요’ 하다가 나중에는 플라스틱 줄이나 주렁주렁 매달고선 졸지에 허무하게 떠나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어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나요? 어떤 어린 시절을 통해 어떤 몸과 마음의 습관을 길러 오늘을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