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is everything

‘원근법’이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견해 혹은 시각이 극히 중요하다’ 라는 말이 되겠다. 어제 소개한 One Strange Rock에 나오는, 명언중의 명언이다.

견해나 시각은, 여러개 있는 중에서 (구두나 자동차처럼) 고르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지는 것일까? 당신이 만약 골프를 쳐 본적이 없고 골프에 대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실제로 해본 것이 없다고 치자. 그러면 골프에 대해서 (골프라는 운동 자체) 당신이 견해나 시각이 있을 수 있나? 당연히 없다. 자연훼손이나 농약 그런 이야기들은 골프 ‘관련’이지 골프 ‘자체’가 아니지 않은가? 골프에 관한 견해나 시각은 골프를 치면서 생기고 또 발전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인간에게는 6개의 감각이 있다고 가르치셨다고 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오감에 더해서 ‘마음’을 6번째 감각기관 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이 ‘마음’이 저기서 말하는 ‘perspective’와 아주 관계가 깊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감이 받아들인 것을 뇌가 ‘마음을 통해서’ 해석하듯이, 세상만사 모든 것들과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perspective’에 따라서 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이 ‘견해’ 혹은  ‘시각’이 인간을 규정하고 그의 삶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지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왜 perspective를 그렇게 강조해서 이야기 하는가 하면, 내 생각에는, 첫째로 대기권 위에서 오랫동안 수없이 (하루에 열두번도 더 지구 주위를 돌면서 세상을 본다), 지구의 변화를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과 디테일로 본다는 것이, 그 우주인들에게 어떤 근본적이고 의미심장한 견해 혹은 시각의 변화를, 단지 지구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전체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왔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 주려고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과학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던 (너무 거대한 스케일 이거나 혹은 극히 작은 스케일의) 자연 현상들을 밝혀 내어 우리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견해 혹은 시각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에,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써, 아마 우주에서 보았던, 엄청난 규모의 연어 (salmon) 이동과 산란 그리고 죽음 (산란후 자연사). 그 집단적인 죽음 뒤에 실로 엄청난 규모의 질소 (nitrogen) 이동이 있고, 그렇게 이동된 질소가 다시 거대한 규모의 숲을 만들어 내는, 자연의 어마어마하며 또 정교한 ‘rebirth’의 과정을, NASA와 과학의 힘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무덤 위에 심은 사과나무 이야기 기억하지? 바로 그런 의미의 가르침을 붓다께서 주셨던 것이고 또 수천년 지나서 NASA와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Perspective is everything.

나이 든다는 증거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하는 편인가 듣는 편인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70%를 이야기 하고 상대방의 말을 30% 들으면, 서로 반반씩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으로 느낀다고 한다.

대화의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화의 소재.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방도 흥미가 있을 것으로 간주하고 떠들어 대는가 아니면, 공통된 어떤 주제를 찾아서 함께 이야기를 주고 받는가?

대화의 소재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당신 이야기의 주제가 주로 과거 이미 일어났던 것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 혹은 장차 일어날 일, 계획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

당신이, 상대방보다 더 많이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 떠벌리고, 또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주로 떠들어 댄다면… 이 글 제목이 뭐였더라 🙂

과거에 집작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이상하게 뒤틀릴 것이다. 달라이라마.

욕심과 두려움

아내는, 서너살 먹은 유치원 아이들이 어울려 놀며 갈등하고 부대끼는 것을 오래 보아 오면서, 그 본질은 성인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지금 그들이 보이는 언행에서 그들의 장래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코헨’ 이라는 서너살 된 사내 아이에게 관심이 많고 자주 그 아이의 이야기를 저녁 시간에 하곤 하였다. 이 아이는,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멋진 사내’ 라고 한다. 아! 그런 넘도 있구나. 그 어린 나이에도 그런 것들이 드러나는구나. 하지만 이 아이는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엄마는 알코올과 약물 중독자였고, 현재도 비록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노력은 하고 있으나 그 상태를 크게 벗어 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아이의 할아버지, 아내의 말에 따르면 한때 한 주먹 했을 법한 무섭게 생긴 노인이, 손자를 유치원에 데리고 오가며 부모 노릇을 대신 한다고 했다. 원장님께는 깍듯이 한다고 🙂

어떤 좋은 유전자를 받아 멋진 면을 가지고 태어난 이 어린 녀석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특히 유년기에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유치원에서 또래 아이들과 또 교사들에게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일으킬때, 아내는 화가 나기 보다는 성장 환경의 영향으로 이 아이의 삶이 서서히 ‘험난한 인생’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기에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기 어렵다고 한다. 아내가 말했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을 내가 지금 보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내가 묻는다. 당신이 이 아이가 그토록 마음에 걸린다면 유치원을 떠나고 난 이후에도 선생님으로 남아 도와 주면 되지 않겠는가? 아내가 덧붙인다. 그럴 수가 없다. 내게는 오늘, 바로 지금 돌봐야 할 수 많은 아이들이 있고 또한 내가 만약 이 아이 주변에 계속 머무른다면 그 아이와 그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나조차 휩쓸려 떠내려 갈 것이다. 아내와 그 멋진 녀석과의 인연은 곧 끝이 날 것이요, 그 아이는 태어난 환경이 짐지워준 숙명의 길을 오래 그리고 힘들게 걷게 될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모국에 머무는 동안, ‘두두두’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두어차례 재미있게 보았다. 한 지방 채널에서 매주 방영하는, 초등학교 대항 발야구 중계방송(?) 이다. 보통 열댓살 된 초등학교 6학년들이 팀을 이루어 발야구 시합을 하는데, 그 준비 과정, 임하는 자세, 응원 그리고 실전과 경기 후일담까지, 흡사 사회생활의 축소판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하다.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대화를 통하여,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은 욕심 때문에 그리고 운동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기가 공을 차는 공격 순서가 왔을때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처구니 없이 그리고 때로 우습게 아웃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전후해서 보이는 그들의 반응을 통하여 그들이 장차 성인이 되었을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내 나름 상상해 보게 된다. 아직 초등학생들이지만 성격의 많은 부분은 이미 형성이 되었으리라.

내 자신을 되돌아 보자면, 주로 두려움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는 우스꽝스럽게 타석을 내려가는 아이였을 가능성이 크겠다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신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나니 이미 나의 발야구는 끝난지가 오래 되어버렸다는 씁쓰래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참 사회 생활을 할 때는, 특히 모국에서는 이런 단체경기에서 주동이 되고 기량을 발휘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 하리라 생각 한다. 하지만 이제 내 나이가 되고 또 개인주의가 발달한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것 이외의 다른 능력들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지위에 있건 얼마나 부유하건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지배하는 이 욕심과 두려움이라는 큰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 나는 차차 깨닫게 된다. 욕심은 노력하면 줄일 수 있고 욕심이 줄면 두려움도 준다는 것을.

골프 샷을 망치는 가장 큰 두가지 이유는 역시 욕심과 두려움이다. 이 둘을 조금이라도 더 컨트롤 하며 라운드를 즐길 수 있기를 나는 바라며 또 노력한다. 골프의 참맛은, 딴 돈의 크기나 카드에 적인 점수보다는 오직 자신만 알 수 있는 바로 이 욕심과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싸움에서 자주 이기면 라운드의 결과는 2차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그래서 썩좋지 않은 스코어카드를 손에 들고서도 몹시 행복해 하는 고수들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클럽에서는, 로컬룰에 따라 겨울 동안에는 페어웨이에서 공을 집어들어 닦고 한 클럽 거리 안에서 더 나은 자리에 놓고 샷을 할 수 있다 (플레이싱). 몇 주 전 라운드중에 세켠샷을 3우드로 칠 때가 왔다. 몸 왼쪽으로 기울어진 좋지 않은 라이. 3우드샷에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문득, 나는 우드샷에 강한데 공을 그대로 두고 내 실력껏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가지고 프리샷 루틴을 따라 욕심과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해 샷을 날렸다. 좋은 샷이었지만, 좀 떨어진 페어웨이 벙크 앞 턱을 맞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아내에게도 말했었다. 나는 그때 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욕심과 두려움 없이 내 실력대로 한방 날려 보았노라고. 그래서 결과야 어떻게 되었건 내 속이 시원하고 내 자신에게 기분이 좋다고. 욕심과 두려움을, 최소한 그 순간에는 나의 역량과 에너지로 제압 했었다. 나에게는, 삶에서도 골프에서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따고 또 좋은 점수가 적힌 스코어 카드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쭐거려도, 그 과정에 욕심에 휩쓸리고 두려움에 시달렸다면 자기 자신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나 나나 떠날때 돈을 좀 덜 땃던 것 혹은 남들에게 좀 못 우쭐거렸던 것을 후회하면서 눈을 감을 것 같은가? 내가 듣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좀 더 해보았었더라면 하고 후회를 한다고 하던데.

욕심을 줄이면 두려움도 줄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내 능력껏 내 기량을 내 속이 시원하게 발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 참 중요하고 또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덧붙이는 이야기 – 어제 라운드 후반에 다시 그자리에 서게 되었다. 200미터 이상 남은 곳에서 3우드로 그린을 공략하는 그곳에. 동반자들에게 종게 양해를 구하고 그린에서 앞팀이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욕심과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프리샷 루틴에 따라 천천히 샷을 날렸다. 공은 똑 바로 날아가 230미터 떨어진 그린 중앙에 안착하였다. 물론 3펏 하고 내려오는 백돌이 수준이지만, 나는 이런 맛도 때로 즐길 줄 안다 🙂

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팬, 그대에게 미안하다.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고 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배우고 알게 될수록, 쓰고 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일 뿐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요, 장차 원래 계획했었던 것들을 포함하여, 더 낫고 좋은 원을 가지고 되돌아 올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나눌까 한다. 그대들에게는 어쩌면 처음 듣는 좀 놀라운 이야기 일수도 있고, 내게는 눈물 나는 이야기니 기대하시라 🙂

‘불교가 종교인가 철학인가?’ 하는 논쟁에 맞물려 자주 등장하는 것이, ‘붓다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가, 혹은 인간으로 왔었지만 신이 되었던 존재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신이었고 지금도 신으로 남아 있는 존재인가?’하는 질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 짧은 이야기가 어떤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가지를 먼저 밝힌다. 첫째는, 세계적으로 대다수의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약 150년 전에 그리고 일본에서는 약 80년 전에 번역되어 누구나 구입해서 볼 수 있다. 많은 분량의 책들이기도 하고 또 독자가 한정적이니 책값이 좀 비싸다고 하더라. 한국에서는 약 20여년 전부터 훌륭한 분들에 의해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일한 문헌이 영어와 일어로 이미 번역이 되었고 한국어로도 번역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우리가 흔히 들어 이름이라도 익숙한, 무슨 x장경이니 y강경 z심경 등은 이 원본 불경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전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쓰던 후대의 지식층 인도인들이 ‘자체 제작’ 했던 것들을, 그 짜장면 원조국에서 천년 세월 자기네 문화와 언어에 녹여 ‘다시 제작’ 하여 우리들에게 전파했던 것들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처음에는, 강대국과 약소국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각으로 보고 혐오했었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에게 어떤 사회문화적 혹은 종교인류학적인 이유들이 있어서,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이런 모습의 불교를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장차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아래에 적은 이야기는, 내가 존경하는 두분의 세계적인 불교 학자들의 저서에서 발췌하였다. 한 분은, 스리랑카 출신의 학자이자 스님이신 ‘왈폴라 라훌라’ (Walpola Rahula Thero)라는 분인데, 위에 언급한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과 그에 사용된 고대 언어에 정통했던 학자요 스님으로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이분 이전에는 승려가 영어권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참고로 ‘라훌라’라는 예쁜 이름은, 붓다께서 출가하시기 이전에 낳은 아들의 이름이다 (그럼 붓다께서 섹스를? 물론이쥐 🙂 부인 이름은? ‘야쇼다라’. 둘다 실존했던 사람들로서, 아빠와 남편의 길을 따라 해탈 열반을 성취 했다고 전해진다 – 훌륭한 전례가 있으니 나도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정생활에 힘쓰고 있다). 이 분께서 쓰신 ‘What The Buddha Taught’라는 책을 참조하였다. 아름다운 책이니 기회가 되면 읽어 보시라. 한국어 번역도 있을 것이다. 이분은 1997년에 90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두번째 분은,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라는 일본의 불교학자시다. 선생의 ‘아함경 이야기 – 지혜와 사랑의 말씀’ 이라는 한국어 번역서를 참조하였다. 매우 아름다운 책이니 이 또한 추천한다. 왜 아름답다는 표현을 되풀이해서 사용하는지,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좀 공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일본 불교는, 1800년대에 이미 학승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을 배우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문헌들을 일본어로 1930년대에 완역함으로써 ‘제2의 불교전래’ 라고도 할만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마스타니 후미오 선생은, 도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서 ‘일본종교학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이다. 아빠가 스님. 오잉? 🙂 이분의 저서 ‘아함경 이야기’는 붓다의 일생과 가르침을, 종교학자로서의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한 책으로써, 저자 본인께서 ‘지혜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부제를 붙였던 바, 이 책을 읽으면 그 부제에 많은 독자들이 동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1900년대 초에 출생하였으니 아마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내가 일본어를 하지 못하고, 그 당시의 기록들이 영어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붓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붓다께서 80세 고령에 이르러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돌아가시는 생생한 모습이 경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게 와닿은 세 개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첫째, 어떤 열렬 극성팬이, 아파서 돌아가시는 와중인데도 꼭 좀 만나서 말씀을 나누어 보고 싶다고 졸랐다. 하도 조르니 제자들이 어렵게 말씀을 드려 붓다께서 허락하셨고, 너무 아프고 돌아가시기 직전임에도 붓다께서는 이자의 장광설을 모두 들어 주시고, 이은 가르침으로 그를 깨닫게 하여 마지막 제자로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식중독을 일으킨 음식을 제공한 그자를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제자들이 심히 비난함에도, 붓다께서는, 내게 처음으로 공양을 한 사람에게 감사하고 그의 복을 빌었듯이, 내게 마지막 공양을 한 이 사람에게도 감사하며 또한 복을 빈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스승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나의 가르침에 관계 되어 확실하지 않거나 혹시 물어 볼 것이 있는가’ 물으셨다. ‘없습니다’ 라는 거듭된 대답에 마지막으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고 전해진다. ‘너희들이 혹시 스승이 아파서 죽어가는 마당에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질문할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혹시 원하거든 너희들 친구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 물어 보게 하거라’.


‘매일 먹고 싸야 살수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한계와, 매순간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인생의 본질’ 바로 이것들 위에 붓다의 가르침이 있고, 그 분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수행과 해탈을 통하여 증득한 ‘그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우리에게 실천으로 보여 주시면서 큰 가르침을 주시며 돌아가신 것이다.

가식 없고 진실한 가르침을 주신 붓다의 말씀은, 그 돌아가시던 장면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원본 불경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가, 혹시 미안한 마음에 돈 더 달라고 말 못하겠거든, 옆집 돌쇠한테 부탁해서 좀 더 달라고 대신 말하게 해도 된단다’. 고통속에서 돌아가시는 마당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그려보면, 흡사 남겨 두고 떠나는 자식을 염려하는 어미 아비의 마음과 같이 한없이 큰 사랑과 자비가 느껴진다. 하물며 가식이나 욕심 권위 혹은 우월감이 어디에 있을손가! 신? 나이키 아디다스 말인가?

비록 몸에서는 대소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위대한 정신과 자비의 마음은 조금의 흐트짐도 없이 오히려 이런 극도의 고통과 최악의 상황에서 그 빛과 아름다움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다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으며, 오직 수행 정진으로 매일 매순간 스스로를 닦아 살아서도 그리고 죽을때도 빛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똥오줌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것이 우리를 더럽히고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오물들이야말로 참으로 더럽고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인 줄을 그대와 내가 깨달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닦아 낼 수 있도록 형편이 되는데로 부지런히 걸레를 빨아대며 우물가를 들락날락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분의 위대함은, 무슨 뜬구름 잡는 도술이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신비함, 혹은 주인 자리 빼앗아 아랫목 차지한 그 난해한 경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와 나, 오늘 마음이 아프고 몸이 괴로운, 이것 저것 닥치는데로 잡아 먹고는 쪼글쪼글한 구멍으로 한 두 덩어리 똥을 밀어 내고서는 또 다시 쪼르르 달려가 같은 짓을 반복하며 한 평생을 살다가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 삶의 본질을 참으로 이해 하시고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다가 갈 수 있는 훌륭한 지혜와 방법들을 우리들 같이 눈멀고 귀먼 똥대가리들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상세히 가르쳐 주시는 데에 그 위대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마움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위스뇬과 라오스넘, 깨달음과 습관

직원중에 라오스계 넘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아마 어렸을때 와서 자란 듯하다. 볼때마다, 내게는, 더럽고 게으르며 어글리한 느낌을 준다. 팀원 중에서 가장 능력이 떨어지지만 최소한의 일 이외는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늘 헤헤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큰 소리로 낸다. 그넘 참… 사무실에서 손톱을 깍으며, 신발을 벗고 왔다 갔다 한다 (자기 이외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짓들을 하면서 자각하지 못한다는 뜻). 그 부모의 영향이며 또 그 부모를 길러준 그 나라의 영향일 것이다.

직원중에 스위스계 뇬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났던지 아주 어릴때 와서 자랐던지. 건데 생김새도 언행도 이곳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 있다. 팔등신 미녀에 똑똑하며 일을 딱 부러지게 한다. 회사 근처 공원에서 가끔 점심시간에 홀로 운동하는 모습을 본다. 그뇬 참… 이뇬은 신발을 벗는데서 한 수 더 떠서 아예 양말까지 벗고 맨발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을 자주 본다. 물론 이뇬 이외에 그 누구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 이 방면에 본좌다.

그 넘을 볼때는 ‘후진국’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고, 이 뇬을 볼때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생각이 떠오른다. 그 옛날 만화속에서 어쩌면 맨발로 잔디위를 뛰어 다녔을 그 예쁜 하이디가.


내가 일하는 이 대학에는, 인도네시아 영어교사들을 위한 학사학위 특별 과정이 있다. 교육대학을 마쳤거나 졸업반인 인도네시아 영어교사들이 이곳에서 1년 과정을 마치면서 TESOL 영어교육학사 학위를 받는 협력과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출퇴근때 그 건물을 자주 지나니, 소위 말해서 ‘대가리에 보자기 쓴’ 인도네시아 여학생들을 많이 보게 된다. 25년전 그 건물에서 잠시 영어를 배울때, 같은 코스를 공부하던 터키인인가 그 근처 나라에서 왔던 무슬램 여자, 보자기 쓴 그 여자가 전혀 건방지지 않은 태도로 ‘당신들이 이슬람 종교를 모르며 일생을 산다는 것이 나는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좋은 의사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대가리에는…

‘다문화 고부열전’이라는 EBS방송의 연재 도큐맨터리를 본 적이 있나?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수많은 외국 문화와 그 결과물인 외국인 아내들이, 한국의 문화와 만나서 부딪치고 갈등하는 가운데, 인간 삶의 어떤 진실 혹은 가치를 보여주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였다. 모든 문화는 (개인들은) 상대적이며 그 환경의 소산이고, 한국문화 (한국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문득 우리들 자신이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속에서 혹은 알 필요가 없다는 교만속에서 사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무언가 흔들리지 않는 것들,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나는 살아 왔다. 세상에 그런것들이 정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꽤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있다. 무지와 어리석음이 있는 곳에, 그 바탕위에서는, 흔들리지 않거나 바뀌지 않는 것들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다문화 고부열전’을 통하여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또 소위 후진국에서 자랐지만, 나의 수준이나 내공을 월등히 능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처했었던 어떤 상황보다 열악하고 힘든 여건속에서, 내가 해낼 능력이 없고 또 깜양이 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좋은 태도로 힘껏 해내는 그 사람들을 보고 나서, 나는 더 이상 ‘후진국’이니 ‘대가리에 보자기 쓴 뇬들’이니 하는 말들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깨달음을 잠시 맛보았다고 해서, 내가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을 며느리로 삼고 싶거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흡사 그 ‘다문화 고부열전’의 모든 결말이 이해와 화해로 끝은 나지만, 그것이 앞으로 갈등없고 행복하기만한 고부관계나 가족생활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머리로 부터 오는 것이요, 습관은 오랜 삶 속에서 굳어져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때문이다. 습관이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자명하듯, 깨닫음이 저절로 습관을 바꾸지 못하는 것 또한 자명하다.

깨달음은 다만 첫번째 문을 여는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첫번째 문조차도 열지 못한채 흘러 간다. 하지만 첫번째 문 뒤에 첩첩히 닫힌 문들이 습관 혹은 카르마라는 빗장을 걸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 빗장들을 풀며 그 첩첩히 닫힌 문들을 열기 위해서는, 그 머리로 깨달은 바가 가슴으로 흘러 내려가 내 몸의 새로운 습관이 되고 새로운 카르마가 되어야만 한다. 이 과정은, 친구의 급사에 크게 충격받은 배불뚝이 중년이, 새다리처럼 가는 팔로 턱걸이 20개를 목표로 철봉에 매달리는 그 손바닥 찢어지는 고통의 과정이며,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새로 산 신발을 신고 첫 몇 킬로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헉헉 억지로 뛰기 시작하는 그 물리적인 과정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10% 덴트의 법칙’ 이라고 내가 명명한 법칙이 있다. 오래 지속된 습관 카르마를 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이 과거에 지속되었던 기간의 10분의 1 기간이라도 최소한 시도를 해야 덴트(dent) 즉 ‘이빨이라도 약간 먹힌다’는 법칙이다. 운동 안한지 얼마나 되었나? 보자기 쓴 뇬들이라고 싸잡아 무시하며 산지는? 20년? 그러면 최소한 2년은 노력을 해야 이빨이라도 먹힐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 내 일천한 경험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전에는 잠시 반짝한다고 까불다가 훅간다.

팀 미팅을 하면, 뒤쪽에 서 있는 내 눈에 그넘의 검은 양말이 흘낏 보인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앉아 있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맨발을 본다. 그리고 소리없이 웃는다. 내 습관 내 카르마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