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역에 진전이 없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팬, 그대에게 미안하다.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고 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배우고 알게 될수록, 쓰고 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일 뿐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요, 장차 원래 계획했었던 것들을 포함하여, 더 낫고 좋은 원을 가지고 되돌아 올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나눌까 한다. 그대들에게는 어쩌면 처음 듣는 좀 놀라운 이야기 일수도 있고, 내게는 눈물 나는 이야기니 기대하시라 🙂
‘불교가 종교인가 철학인가?’ 하는 논쟁에 맞물려 자주 등장하는 것이, ‘붓다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가, 혹은 인간으로 왔었지만 신이 되었던 존재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신이었고 지금도 신으로 남아 있는 존재인가?’하는 질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 짧은 이야기가 어떤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가지를 먼저 밝힌다. 첫째는, 세계적으로 대다수의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약 150년 전에 그리고 일본에서는 약 80년 전에 번역되어 누구나 구입해서 볼 수 있다. 많은 분량의 책들이기도 하고 또 독자가 한정적이니 책값이 좀 비싸다고 하더라. 한국에서는 약 20여년 전부터 훌륭한 분들에 의해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일한 문헌이 영어와 일어로 이미 번역이 되었고 한국어로도 번역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우리가 흔히 들어 이름이라도 익숙한, 무슨 x장경이니 y강경 z심경 등은 이 원본 불경들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전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쓰던 후대의 지식층 인도인들이 ‘자체 제작’ 했던 것들을, 그 짜장면 원조국에서 천년 세월 자기네 문화와 언어에 녹여 ‘다시 제작’ 하여 우리들에게 전파했던 것들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처음에는, 강대국과 약소국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각으로 보고 혐오했었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에게 어떤 사회문화적 혹은 종교인류학적인 이유들이 있어서,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이런 모습의 불교를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장차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아래에 적은 이야기는, 내가 존경하는 두분의 세계적인 불교 학자들의 저서에서 발췌하였다. 한 분은, 스리랑카 출신의 학자이자 스님이신 ‘왈폴라 라훌라’ (Walpola Rahula Thero)라는 분인데, 위에 언급한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과 그에 사용된 고대 언어에 정통했던 학자요 스님으로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이분 이전에는 승려가 영어권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참고로 ‘라훌라’라는 예쁜 이름은, 붓다께서 출가하시기 이전에 낳은 아들의 이름이다 (그럼 붓다께서 섹스를? 물론이쥐 🙂 부인 이름은? ‘야쇼다라’. 둘다 실존했던 사람들로서, 아빠와 남편의 길을 따라 해탈 열반을 성취 했다고 전해진다 – 훌륭한 전례가 있으니 나도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정생활에 힘쓰고 있다). 이 분께서 쓰신 ‘What The Buddha Taught’라는 책을 참조하였다. 아름다운 책이니 기회가 되면 읽어 보시라. 한국어 번역도 있을 것이다. 이분은 1997년에 90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두번째 분은,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라는 일본의 불교학자시다. 선생의 ‘아함경 이야기 – 지혜와 사랑의 말씀’ 이라는 한국어 번역서를 참조하였다. 매우 아름다운 책이니 이 또한 추천한다. 왜 아름답다는 표현을 되풀이해서 사용하는지,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좀 공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일본 불교는, 1800년대에 이미 학승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매우 정확히 기록한 원본 불경들’을 배우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문헌들을 일본어로 1930년대에 완역함으로써 ‘제2의 불교전래’ 라고도 할만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마스타니 후미오 선생은, 도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서 ‘일본종교학자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이다. 아빠가 스님. 오잉? 🙂 이분의 저서 ‘아함경 이야기’는 붓다의 일생과 가르침을, 종교학자로서의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한 책으로써, 저자 본인께서 ‘지혜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부제를 붙였던 바, 이 책을 읽으면 그 부제에 많은 독자들이 동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1900년대 초에 출생하였으니 아마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내가 일본어를 하지 못하고, 그 당시의 기록들이 영어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붓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붓다께서 80세 고령에 이르러 식중독으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돌아가시는 생생한 모습이 경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게 와닿은 세 개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첫째, 어떤 열렬 극성팬이, 아파서 돌아가시는 와중인데도 꼭 좀 만나서 말씀을 나누어 보고 싶다고 졸랐다. 하도 조르니 제자들이 어렵게 말씀을 드려 붓다께서 허락하셨고, 너무 아프고 돌아가시기 직전임에도 붓다께서는 이자의 장광설을 모두 들어 주시고, 이은 가르침으로 그를 깨닫게 하여 마지막 제자로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식중독을 일으킨 음식을 제공한 그자를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제자들이 심히 비난함에도, 붓다께서는, 내게 처음으로 공양을 한 사람에게 감사하고 그의 복을 빌었듯이, 내게 마지막 공양을 한 이 사람에게도 감사하며 또한 복을 빈다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스승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나의 가르침에 관계 되어 확실하지 않거나 혹시 물어 볼 것이 있는가’ 물으셨다. ‘없습니다’ 라는 거듭된 대답에 마지막으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고 전해진다. ‘너희들이 혹시 스승이 아파서 죽어가는 마당에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질문할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혹시 원하거든 너희들 친구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 물어 보게 하거라’.
‘매일 먹고 싸야 살수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한계와, 매순간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인생의 본질’ 바로 이것들 위에 붓다의 가르침이 있고, 그 분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수행과 해탈을 통하여 증득한 ‘그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우리에게 실천으로 보여 주시면서 큰 가르침을 주시며 돌아가신 것이다.
가식 없고 진실한 가르침을 주신 붓다의 말씀은, 그 돌아가시던 장면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관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원본 불경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가, 혹시 미안한 마음에 돈 더 달라고 말 못하겠거든, 옆집 돌쇠한테 부탁해서 좀 더 달라고 대신 말하게 해도 된단다’. 고통속에서 돌아가시는 마당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그려보면, 흡사 남겨 두고 떠나는 자식을 염려하는 어미 아비의 마음과 같이 한없이 큰 사랑과 자비가 느껴진다. 하물며 가식이나 욕심 권위 혹은 우월감이 어디에 있을손가! 신? 나이키 아디다스 말인가?
비록 몸에서는 대소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위대한 정신과 자비의 마음은 조금의 흐트짐도 없이 오히려 이런 극도의 고통과 최악의 상황에서 그 빛과 아름다움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다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으며, 오직 수행 정진으로 매일 매순간 스스로를 닦아 살아서도 그리고 죽을때도 빛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똥오줌은 인간의 본질이며 이것이 우리를 더럽히고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오물들이야말로 참으로 더럽고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인 줄을 그대와 내가 깨달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닦아 낼 수 있도록 형편이 되는데로 부지런히 걸레를 빨아대며 우물가를 들락날락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분의 위대함은, 무슨 뜬구름 잡는 도술이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신비함, 혹은 주인 자리 빼앗아 아랫목 차지한 그 난해한 경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와 나, 오늘 마음이 아프고 몸이 괴로운, 이것 저것 닥치는데로 잡아 먹고는 쪼글쪼글한 구멍으로 한 두 덩어리 똥을 밀어 내고서는 또 다시 쪼르르 달려가 같은 짓을 반복하며 한 평생을 살다가는, 우리 인간의 한계와 삶의 본질을 참으로 이해 하시고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다가 갈 수 있는 훌륭한 지혜와 방법들을 우리들 같이 눈멀고 귀먼 똥대가리들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상세히 가르쳐 주시는 데에 그 위대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 고마움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위스뇬과 라오스넘, 깨달음과 습관
직원중에 라오스계 넘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아마 어렸을때 와서 자란 듯하다. 볼때마다, 내게는, 더럽고 게으르며 어글리한 느낌을 준다. 팀원 중에서 가장 능력이 떨어지지만 최소한의 일 이외는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늘 헤헤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큰 소리로 낸다. 그넘 참… 사무실에서 손톱을 깍으며, 신발을 벗고 왔다 갔다 한다 (자기 이외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짓들을 하면서 자각하지 못한다는 뜻). 그 부모의 영향이며 또 그 부모를 길러준 그 나라의 영향일 것이다.
직원중에 스위스계 뇬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났던지 아주 어릴때 와서 자랐던지. 건데 생김새도 언행도 이곳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 있다. 팔등신 미녀에 똑똑하며 일을 딱 부러지게 한다. 회사 근처 공원에서 가끔 점심시간에 홀로 운동하는 모습을 본다. 그뇬 참… 이뇬은 신발을 벗는데서 한 수 더 떠서 아예 양말까지 벗고 맨발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을 자주 본다. 물론 이뇬 이외에 그 누구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 이 방면에 본좌다.
그 넘을 볼때는 ‘후진국’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고, 이 뇬을 볼때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생각이 떠오른다. 그 옛날 만화속에서 어쩌면 맨발로 잔디위를 뛰어 다녔을 그 예쁜 하이디가.
내가 일하는 이 대학에는, 인도네시아 영어교사들을 위한 학사학위 특별 과정이 있다. 교육대학을 마쳤거나 졸업반인 인도네시아 영어교사들이 이곳에서 1년 과정을 마치면서 TESOL 영어교육학사 학위를 받는 협력과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출퇴근때 그 건물을 자주 지나니, 소위 말해서 ‘대가리에 보자기 쓴’ 인도네시아 여학생들을 많이 보게 된다. 25년전 그 건물에서 잠시 영어를 배울때, 같은 코스를 공부하던 터키인인가 그 근처 나라에서 왔던 무슬램 여자, 보자기 쓴 그 여자가 전혀 건방지지 않은 태도로 ‘당신들이 이슬람 종교를 모르며 일생을 산다는 것이 나는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좋은 의사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대가리에는…
‘다문화 고부열전’이라는 EBS방송의 연재 도큐맨터리를 본 적이 있나?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수많은 외국 문화와 그 결과물인 외국인 아내들이, 한국의 문화와 만나서 부딪치고 갈등하는 가운데, 인간 삶의 어떤 진실 혹은 가치를 보여주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였다. 모든 문화는 (개인들은) 상대적이며 그 환경의 소산이고, 한국문화 (한국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문득 우리들 자신이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속에서 혹은 알 필요가 없다는 교만속에서 사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무언가 흔들리지 않는 것들,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나는 살아 왔다. 세상에 그런것들이 정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꽤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있다. 무지와 어리석음이 있는 곳에, 그 바탕위에서는, 흔들리지 않거나 바뀌지 않는 것들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다문화 고부열전’을 통하여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또 소위 후진국에서 자랐지만, 나의 수준이나 내공을 월등히 능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처했었던 어떤 상황보다 열악하고 힘든 여건속에서, 내가 해낼 능력이 없고 또 깜양이 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좋은 태도로 힘껏 해내는 그 사람들을 보고 나서, 나는 더 이상 ‘후진국’이니 ‘대가리에 보자기 쓴 뇬들’이니 하는 말들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깨달음을 잠시 맛보았다고 해서, 내가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을 며느리로 삼고 싶거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흡사 그 ‘다문화 고부열전’의 모든 결말이 이해와 화해로 끝은 나지만, 그것이 앞으로 갈등없고 행복하기만한 고부관계나 가족생활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머리로 부터 오는 것이요, 습관은 오랜 삶 속에서 굳어져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때문이다. 습관이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자명하듯, 깨닫음이 저절로 습관을 바꾸지 못하는 것 또한 자명하다.
깨달음은 다만 첫번째 문을 여는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첫번째 문조차도 열지 못한채 흘러 간다. 하지만 첫번째 문 뒤에 첩첩히 닫힌 문들이 습관 혹은 카르마라는 빗장을 걸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 빗장들을 풀며 그 첩첩히 닫힌 문들을 열기 위해서는, 그 머리로 깨달은 바가 가슴으로 흘러 내려가 내 몸의 새로운 습관이 되고 새로운 카르마가 되어야만 한다. 이 과정은, 친구의 급사에 크게 충격받은 배불뚝이 중년이, 새다리처럼 가는 팔로 턱걸이 20개를 목표로 철봉에 매달리는 그 손바닥 찢어지는 고통의 과정이며,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새로 산 신발을 신고 첫 몇 킬로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헉헉 억지로 뛰기 시작하는 그 물리적인 과정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10% 덴트의 법칙’ 이라고 내가 명명한 법칙이 있다. 오래 지속된 습관 카르마를 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이 과거에 지속되었던 기간의 10분의 1 기간이라도 최소한 시도를 해야 덴트(dent) 즉 ‘이빨이라도 약간 먹힌다’는 법칙이다. 운동 안한지 얼마나 되었나? 보자기 쓴 뇬들이라고 싸잡아 무시하며 산지는? 20년? 그러면 최소한 2년은 노력을 해야 이빨이라도 먹힐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 내 일천한 경험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전에는 잠시 반짝한다고 까불다가 훅간다.
팀 미팅을 하면, 뒤쪽에 서 있는 내 눈에 그넘의 검은 양말이 흘낏 보인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앉아 있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맨발을 본다. 그리고 소리없이 웃는다. 내 습관 내 카르마를 생각하면서.
교통사고의 어떤 결말
양로원 앞에서 길을 건너던 할머니를 치여 숨지게 한 트럭 운전자가 5천불의 배상금을 물다.
트럭에 치여 숨진 그 할머니의 유가족들은 그 운전자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을 나서서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알프레드 프라이스’라는 그 트럭 운전자는, 어쨋던, 자기 트럭에 치인 마가렛 스튜어트 할머니가 뉴질랜드 해밀턴시의 한 도로에서 사망하던 순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프라이스씨는 트레일러가 달린 큰 트럭을 운전하여 배달장소에 도착한 후에 입구를 찾는 중에 잠시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91세의 스튜어트 할머니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프라이스씨가 정신을 차려 횡단보도를 보았을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할머니는 트럭에 치인 후였습니다.
프라이스씨는 지난 목요일 해밀턴법원에서 과실치사에 대한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케시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에게, 할머니 유족들에게 5천불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언도 했습니다.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의 변호사가 제출한, 운전면허 유지를 위한 청원서를 받아 들여 허가 했습니다. 프라이스씨는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에 일어났던 이 사고는 그 트럭 전방에 설치된 카메라에 녹화되었습니다. 그 영상에 따르면 프라이스씨는 시속 약 30킬로미터로 서행하고 있었으며, 또한 경찰도 밝히기를, 초록색 신호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트럭을 운전했었던 것으로 영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라이스씨와 그의 부인은, 지난 5월, 법무부가 마련한 만남의 장소에서,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의 가족들과 만났습니다. 그는 유가족들에게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주저없이 돌아가신 분과 나의 자리를 바꾸겠다’고 하며 사죄하였습니다. 프라이스씨가 써 온 편지를 돌아가신 할머니의 조카딸이, 할머니의 오빠, 즉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 읽어 주었습니다.
경찰은 운전면허취소를 하지 않겠다면 징역형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법원에 권고하였지만, 윌슨판사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윌슨판사는, 운전자 프라이스씨의 무과실 운전경력, 사람들이 증언하는 그의 인간됨, 그가 처음부터 유죄를 주저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지난 5월에 있었던 스튜어트 할머니 유가족과의 만남의 결과를 모두 고려하였습니다.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는 면허정지 처벌을 받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사고로 크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가족은 물론 유가족까지도 당신을 돕고 싶어 합니다. 어쩔수 없는 사고였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사고는 그 62세의 트럭운전자에게 처음있는 사고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 가족들과 프라이스씨 가족이 서로 알게 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두 가족들은 법정에 나란히 앉아서 판사의 선고를 기다렸습니다. 유가족들은 (할머니의 오빠, 시누이 그리고 두 조카) 판사에게 운전자 프라이스씨가 운전면허를 정지 당하거나 감옥에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법정을 빠져 나오니, 프라이스씨가 밖에 주차해 둔 자신의 차에서 가족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유가족들도 기꺼이 동의했다고 합니다.
‘우린 그를 용서했어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한 조카가 말합니다. ‘그가 잘못했던 것이 아니예요. 내가 바로 지금 차를 주차하다가도 이런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또 다른 조카의 말입니다. ‘할머니는 체구가 조그만, 우리에게는 소중한 분이었어요.’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는 미혼에 자식도 없었다고 합니다. 늙은 부친을 돌아가실 때까지 뒷바라지 했었던 딸이었다고 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을 가지고도, 그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했었고 또한 그들은, 돌아가신 할머니도 기꺼이 받아 들이실 훌륭한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그런식으로 일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물론 않으셨겠지만, 어쩌면 사랑하는 남은 가족들과 또한 다른 한 가족의 가장이기도 할 그 가해자가,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받아들이고 잘 마무리 하기를 바라셨으리라 짐작해요.
그 할머니의 바램을, 남은 사람들이 (피해자, 가해자, 그 가족들, 법원 그리고 경찰까지도) 훌륭한 방식으로 실행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었더라면 무슨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두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이미 지나버린 그리고 아무도 되돌릴 수 없는 그 과거의 일에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의 무덤을 찾을때마다 사람들은 원망과 비통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겠지요. 자주 찾기도 어려워질 것이고요. 그리고 감옥을 나온 그 운전자는 더 이상 직장을 구할 수도 없고, 어쩌면 흠뻑 뒤집어 썻던 그 차가운 원망과 비난의 소나기 속에서 술이나 마시다가 뒤늦게 이혼 당하고 쓸쓸히 병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할머니가 기뻐했을까요?
그 벌금으로 유가족들은 아마도 할머니의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드렸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자주 찾아가서 꽃을 놓으며 할머니의 예뻣던 과거의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떠올리며 ‘아! 그 운전자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싶어요. 이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또 조금만 지나면 까맣게 잊혀질 이 사람들이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있지 싶어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이 우리가 익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어쩌면 지난 과거에 어떤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있지 않겠어요?
오늘 그대와 나는 어떤 선택의 상황에 놓여질까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 운전자가 그리고 유가족들이, 그 사고 전에, 아무렇게나 트럭을 몰며 또 서로 함부로 다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이었었다면, 그 할머니의 바램을, 듣지도 또 실행할 힘도 능력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오늘,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 선택을 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이미 쌓여 있는 과거의 카르마를 조금이라도 줄일 선택을 하세요. 그래야 가볍게 왔다가 가볍게 갈 수가 있을꺼예요. 길가에 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처럼…
버디 오선이 그리고 머시쉽
개 좋아하세요? 사진속의 개 두마리가 닮았지요? 레브레도라는 종으로, 개들 중에서 영특하기도 하고 또 성격도 좋아서, 세계적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하네요.
뼈다귀를 옆에 두고 앉아 있는 개가 ‘버디’인데, 우리 아이가 어릴때 와서 오래 함께 지내다가 작년에 뽕~ 지구를 떠났고, 등에 가방을 매고 있는 개가 ‘오선이’인데, 이 신문 기사대로 어떤 미친넘이 납치하여 개소주로 만들어 먹고는, 지금 재판장에 끌려 다니며 곤욕을 치르고 있는 그런 상황이 되겠습니다.
죽은 개들이지만, 난 이 사진들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먼저 나와요. 귀엽기도 하고 또 지난 시절 기억이 나서 그렇겠지요.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이해가 될 듯… 오선이 개주인처럼, 개를 가족의 일부로 여기고 흡사 자식처럼 키우는 사람이 한국에는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개를 무슨 아이니 하면서 극성을 떠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개가 개답게 살도록 사회적인 장치도 있고 또 사람들도 대부분 노력하지요.
‘머시쉽’ (Mercy Ships) 혹시 들어 보셨나요? 이전에도 보았었지만, 근래에 BBC도큐멘터리로 아프리카 머시쉽을 방영한 것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는 이곳 사람들은, 작고 외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원봉사자로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비로 모든 여행 및 승선경비 지불해야 함. 기간에 따라서 수백에서 수천만원) 이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한다고 합니다. 들어보면 정말 멋지고 또 가슴뭉클한 이야기들이 많아요.
짧은 비데오를 첨부했는데 혹시 영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우리가 어릴때는 종기가 흔하더니, 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이렇게 혹이 많이 나네요. 다 가난의 소치겠지요. 그 혹도 가난도 본인들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이렇게 훌륭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하건만, 스나미처럼 몰려드는 환자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나쁘고 독한 질병들에 비하면, 이 배에서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요 바다물을 양동이로 퍼올리는 모습이라는 것을 굳이 그 긴 줄, 아픈 사람들이 밤잠 자지 않고 먼길을 와서 마지막 희망으로 기다리건만 대부분은 돌아서야 하는, 그 긴 줄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알 수가 있겠지요. 한 의사가 말하고 있군요. ‘우리도 새발의 피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번에 한 사람씩 최선을 다한다.’ 이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엑스레이 기사들도 선장도 갑판원들도 또 전산지원자들도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인 줄 알지만, 나는 이들이 훌륭한 보살이라고도 표현하고 싶습니다. 보살은, 오늘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의심없이 최선을 다하지만, 덧없는 삶의 본질을 꽤뚫어 보기에, 최종적으로는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나는 무슨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이 사람들 인생을 바꿀 100불짜리 수술 보다는 내 입에 들어가는 100불짜리 고급 술이 더 중요한 사람이지만, 이런 것들을 보고 또 알고 나니 마음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나도 버디 개주인으로, 그 넘 눈 밑에 난 무슨 종양 수술을 하는데 상당한 돈을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스스럼 없이 썼었지만, 이렇게 불행한 사람들, 평생을 이런 큰 혹이나 끔찍한 불구 또 여러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별 희망도 없이 온 가족이 힘들고 우울하게 살아야 하는 그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그 긴 줄을 보고 나니, 감히 ‘사람들’ 앞에서 ‘개’ 수술 이야기 따위를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 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물론 개 수술도 하고 고급 술도 먹겠지요. 그리고 남의 개 훔쳐다가 개소주 해 먹은 넘을 잡아다 재판도… 하지만 사람의 도리가 무었인지, 나와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었인지, 내가 가진 것은 무었인지 또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무었인지, 여러번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한다고 사랑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한다고 사랑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담배를 끊는다고 건강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약점을 보완한다고 다른 강점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며, 또 보완된 약점이 새로운 강점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사랑이 ‘정말’ 커지면 문제가 해결 된다. 어떤 식으로 건. 덮히건 잊혀지건 실제로 함께 해결을 하건.
건강에 ‘참으로’ 신경을 쓰고 크게 투자를 하면, 피우던 담배가 멀어지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은 끊어진다. 저절로.
강점을 더욱 살려서 훨씬 더 강해지면, 약점이 더 이상 그때 그 치명적인 약점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러니,문제에서 시선을 의도적으로 때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더 크게 더 많이 만들 수 있을까 힘껏 연구하고 노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당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가능성이 더 높다.
담배를 계속 피우라. 그리고 죄책감도 버리고 신경도 뚝. 담배를 물고 인터넷을 뒤지고 전화를 걸어, 장안 최고의 선남선녀들이 모이는 체육관 / 운동시설 / gym을 찾아 등록하라. 담배를 상으로 스스로에게 걸고서라도, 정성을 다해 옷을 차려 입고 트레이너를 상전 대접하며 형편이 허락하는 최대한 자주 다녀라. 그것뿐. 다른 약속은 필요 없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건강해 질 것이다. 그러면 되지 않았나? 담배를 피건 말건 그때는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장담하노니, 그때는 담배가 그대에게 거의 아무런 영향력이 없게 될 것이다.부정적인 것들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그것들을 당신이 원하는데로 변화 시키기 전에 당신 자신이 그 부정적인 에너지에 의해 부정적으로 변화 당할 가능성이 높다. 효과도 적지만 위험도가 높으니 이 길은 피하는 것이 좋다.
대신, 그 부정적인 것과 상극인 긍정적인 그 무었을 찾아내어, 그 긍정적인 대상에만 집중하라. 그러면 그 긍정적인 대상을 노력 끝에 얻게 될 것이요, 또 시간이 지나면 그 부정적인 대상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스스로 줄어 들어 없어지던지, 그것이 더 이상 당신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리던지, 아니면 전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방법을 깨닫게 되어 해결을 하게 되던지.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반대로 여태까지 하던대로 계속하면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도 그냥 계속 그렇게 시도만 하고 앉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일례로, 담배를 피우는 것이 해롭긴 하지만, 그래서 끊는 것이 정말 좋기는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고 또 제한된 그 시간과 정력을 담배 끊는데만 집중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끊고 나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니까, 그런식으로는 설령 끊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