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첫번째 이야기

우연히 이곳에서 아래에 보이는 도표와 ‘개인주의’에 관련된 설명을 보게 되었다. ‘개인주의적 성향’을 나라별로 표시한 이 도표에 따르면, 미국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한국은 반대로 집단주의적 성향이 높은 국가중의 하나로 나타나 있다.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은 스페인과 소련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통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을 더 뒤지며 교차검증을 시도하던 중에 원문으로 생각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몇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것인데, 그 중에서 ‘개인주의’ 편에 쓰인 글을 아래에 옮겨와 대략 번역하였다.

이토록 차이가 크게 나는 두개의 상이한 나라에서, 이럭저럭 살아온 내 자신이 나름대로는 놀랍고(?) 또한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이 통계를 기억하면서 되씹어 보니, 나름대로 설명이 되어지는 부분도 좀 더 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Individualism is the one side versus its opposite, collectivism, that is the degree to which individuals are integrated into groups. On the individualist side we find societies in which the ties between individuals are loose: everyone is expected to look after him/herself and his/her immediate family. On the collectivist side, we find societies in which people from birth onwards are integrated into strong, cohesive in-groups, often extended families (with uncles, aunts and grandparents) which continue protecting them in exchange for unquestioning loyalty. 개인주의는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와는 상반되는 수준만큼 (정도로) 개인들이 단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보살피는 것이 기대된다. 집단주의자의 입장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태어나면서 부터 강하고 끈끈한 유대로 단체와 대가족의 일부가 되며, 그러한 무조건적인 충성의 댓가로, 단체와 대가족은 그 구성원을 지켜준다.

For example, Germany can be considered as individualistic with a relatively high score (67) on the scale of Hofstede compared to a country like Guatemala where they have strong collectivism (6 on the scale). 예를들면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독일은 상대적으로 과테말라같은 나라보다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In Germany people stress on personal achievements and individual rights. Germans expect from each other to fulfil their own needs. Group work is important, but everybody has the right of his own opinion and is expected to reflect those. In an individual country like Germany people tend to have more loose relationships than countries where there is a collectivism where people have large extended families. 독일 사람들은 개인의 성취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 여긴다. 그들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단체의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그런 구성원들의 의견이 단체에 반영되기를 (구성원들은) 기대한다. 독일처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인간관계가 보다 느슨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대가족에 소속되어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와 비교하자면 그렇다.

The United States can clearly be seen as individualistic (scoring a 91). The “American dream” is clearly a representation of this. This is the Americans’ hope for a better quality of life and a higher standard of living than their parents’. This belief is that anyone, regardless of their status can ‘pull up their boot straps’ and raise themselves from poverty. 미국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것을 확실히 대변한다. 그들이 떠나온 부모의 나라보다도 더 나은 삶과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이를 통하여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아메리칸 드림’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희망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사회적 위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의 구두끈을 졸라매면’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경씨

인경씨는 서른이 넘은 프로골퍼예요. 전에 세계에서 유일한 도마 (뜀틀) 기술인 ‘양1’을 창조했다고 소개했던 체조선수 양학선 선수처럼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인경씨는 키도 작고 얼굴도 평범하며 또 나이도 많은 축에 속하는 골퍼예요. 온갖 스폰서들의 이름이 붙은 옷을 잘 차려입고서 섹시하게 배꼽을 드러내며 스윙을 날리는 상품성(?) 있는 골퍼는 아니랍니다. 인경씨 보면, 다른 골퍼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한복을 잘 차려 입은 북조선 미녀를 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 인경씨는 언제나 열심히 스스로 훈련을 하는 골퍼였고 또 재능도 있었어요. 그래서 한 5년쯤 전에 미국에서 열린 아주 큰 경기에서 (‘매이저’라고 해요)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었어요. 얼마나 가까이 두고 있었던가 하면 30센티 앞에 두고 있었어요. 이것을 굴려서 넣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못 넣었답니다. 결과적으로 연장전이 벌어졌고, 그렇게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어떻게 잘 칠 수가 있었겠어요? 졌답니다. 유튜브에, 골프 최악의 순간, 비운의 골퍼 이런 종류의 영상에 나오게 되는 치욕과 수모를 당하게 되었어요. 다시 마음을 추스려 잘 해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다음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우승은 커녕 상위권에도 들지 못하며 점점 잊혀졌답니다. 아래 사진은 그때 그 30센티 퍼팅을 실패한 직후의 모습입니다. 차마 인경씨 얼굴을 보기가 어렵내요.
인경씨는 순례여행도 홀로 다녀 보고 또 법륜스님이 계시는 정토회에도 나가서 수행도 하고 명상도 하면서 그때 그 고통을 딪고 일어나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칠흑같이 깜깜한 절망의 밤이 아마도 한 3-4년은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포기했지 싶어요. 그렇지만 인경씨는 포기하지 않고, 그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아 볼려고 열심히 노력을 계속 했대요.

30센티 퍼팅을 실패했던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났어요. 인경씨는 영국에서 벌어진, 가장 권위있다는 브리티쉬오픈에서 (‘매이저’ 입니다) 우승을 하게 됩니다. 참 잘했어요. 그야말로 골퍼의 해탈 열반이 아니겠어요? 부활한 인경씨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에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훨훨 날고 있군요 🙂
인경씨는 이제 서른이 갓 넘었는데요. 앞으로도 오래 선수생활을 하길 바라지만 또 장차 은퇴를 하더라도 참 행복하게 살지 싶어요. 한 훌륭한 인간으로, 좋은 배우자 좋은 엄마 노릇을 하며, 인생의 많은 행복을 누릴 조건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녀가 벌어들인 돈때문이 물론 아니예요.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또 어떤 사람도 대신 찾아 줄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을, 행복의 열쇄를, 인경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찾은 것 같은 느낌이 그녀를 볼때면 들어요. 그 길고 절망적이었던 어둠을 인내와 노력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빛으로 다시 채운 인경씨. 한 인간이 이런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무르익고 여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참 훌륭하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누가 내게 ‘어떤 프로선수와 한라운드를 함께 해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섹시한 미녀골퍼도 또 300미터 티샷 날리는 괴물골퍼도 아니고, 물론 인경씨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겠지요.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인경씨와 한 라운드를 함께 한다면, 그녀가 부러진 날개로 더 높이 나르게 된 그 힘들고 외로웠던 과정을, 그리고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겸손하게 사는 그녀의 품위 있는 삶을 이야기 듣고 싶어요.

인경씨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지 싶네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 ‘더 로즈’ 베티 미들러가 불러요. 그리고 내 나름대로 번역을 덧붙였어요.

The Rose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

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

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

And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

어떤 이는,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익사 시키는 강물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이 그대의 영혼을 피흘리게 하는 면도날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사랑이 끝없이 아픈 갈망이며 굶주림이라고도 말하는데
나는, 사랑은 꽃이며 당신은 그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상처 받기 두려워 하는 마음이 결코 춤을 새로 배우지 못하게 막고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무언가를 결코 시도하지 못하게 막아요.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베풀지 못하는 법이며
죽는것을 두려워 하는 영혼은 정말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요.

밤이 너무 외롭고 또 갈 길은 너무 멀 때
사랑이란 운이 좋은 사람들이나 성공한 사람들만의 것인가 당신은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한겨울 차가운 눈 아래 묻혀 있는 그 씨앗이
봄이 오면 따스한 햇님의 사랑으로 장미로 피어나리라는 것을.

우리를 니르바나로 향하게 하는 7가지

지난번에 위빠사나 명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우선 ‘두카에 관한 4가지 진실’을 가지고 각자 형편과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위빠사나 명상을 한번 시도해 보자고 했어요. 그리고 다른 좋은 명상의 소재를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오늘은 ‘우리를 니르바나로 향하게 하는 7가지’의 요소 혹은 요인을 아래에 옮겨 보았어요.

1. Mindfulness

2. Investigation of Dhamma

3. Energy

4. Joy

5. Tranquility (평온 혹은 고요함이라는 의미인데요,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가 내린 곳이 ‘고요의 바다’라고 명명된 곳이라고 해요. 영어로는 ‘the sea of tranquility’.)

6. Concentration

7. Equanimity (평정 혹은 정서적 안정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요, ‘숨쉬는 것이 고르다’라는 두개의 말이 합쳐져서 생긴 단어라고 해요. 또 다른 설명은 ‘평정이란 마음의 균형을 잃을 수있는 경험에 노출 되어도 흔들리지 않고 또 방해받지 않는 심리적 안정과 평온의 상태라고도 하네요.)

이 7가지를 붓다의 제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또 수행하는지, 하나 하나씩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아요.

목련

라벤다를 보고 그 향기를 맡으면, 그 꽃 좋아하시는 어머니 생각이 난다. 골프장에서 날려 먹은 공을 찾아 헤매다가,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보면, 함께 줏어다가 묵 만들던 어머니와의 기억이 늘 새롭다. 목련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오가다 목련을 보면 그 꽃 좋아하는 아내 생각이 난다. 아직 현재형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내가 늘 찾는 식물원에는 사람들이 기증한 벤치들이 많다. 작은 기념동판을 (플라그) 의자에 박아 놓은 경우가 많은데, 자주 읽어 보고 또 몇 개의 의자는 이제 매우 낯익게 되어 인사를 나눈다. 짐작하다시피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것들이다. 내가 자주 찾는 식물원의 어떤 장소에는 2개의 벤치가 있는데, 하나는 채 스물이 되기 전에 죽은 어떤 젊은이를 그 가족들이 기리는 의자다. 이미 죽은지 40년이 넘었으니, 플라그에 세겨진 그 가족들 (그때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그 사람들) 중에서도 이미 이 젊은이의 뒤를 따라간 사람도 있지 싶다. 그야말로 인생무상(?)이다. 또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한 1-2년 전에) 새로 설치된 벤치인데 ‘이 비밀의 정원을 (이 장소를) 사랑했던 부부’라며 나란히 이름이 적혀 있다. 앉을때마다,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혹시 살아서 우리가 이곳에서 마추쳤던 적은 없었을까 생각하며, 벤치를 고마워하고 또 명복을 빌어드린다.

지금은 플라그를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누군가가 읽을 플라그가 되는 것이 인생 아닌가. 이전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오늘 점심때는, 철 이르게 피어난 목련 나무를 지나며 사진을 두장 찍어 왔다. 하나는 물론 목련 나무지만 또 하나는 그대에게 아마 흥미 있지 싶다.

‘이 목련은 1935년 8월 28일 심어졌고 1950년 8월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어요’ 이렇게 적혀 있다. 참 그때 우리 뭐하고 있었지 🙂

그리고 ‘인생무상’ (人生無常) 이라는 말은 사실은 불교적 의미를 담은 표현인데, ‘삶이 허무하다’ 라는 뜻 보다는, ‘우리의 삶에는 늘 같은 것 그리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 그런 뜻이 되겠다.

팔자 바꾸는 법

궁금하지요? 나도 궁금합니다. 바꿀 수 있을까요?

1. 지천명 혹은 주제파악 (스승)
2. 적선
3. 명상 (기도)
4. 독서
5. 풍수 (명당)

옛날부터 구전되는 5가지 팔자 바꾸는 법입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풍수 혹은 명당’은 조상의 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심신이 평온하게 살면 팔자가 나아지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뜻으로 받아 들이면 좋겠네요. 다섯가지 모두 맞는 말씀 같군요.

지난번에, 붓다께서는 그분이 깨달은 ‘세상이 돌아가는 Dhamma’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이것에서 예외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당신과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This is the way it is.’ 우리 이것 잘 기억하면서 계속 읽어 봐요. 참,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쓰는 글은 오늘 달리는 중에 깨달은 것이예요. 읽고 나거든, 과연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지 아니면 두뇌를 해치며 달리기를 하는지 각자 판단해 봐요 🙂

대학전산팀에 직원도 적지 않고 또 전체 교직원은 몇 천명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도 뛰어 갔다 온 그 풍력발전기가 있는 작은 산에는, 교직원은 커녕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거의 없어요. 조건은 같지 않나요? 그곳의 위치, 대학의 근무 여건, 날씨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고.

오늘 그곳에서 달리면서, 같은 조건을 현재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었보다도 먼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원하는 바가 설령 (우연히) 같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만으로는 동일한 결과를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가 현실과 딱 부딪치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예요 (무너지거나 사라진다는 뜻이예요).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현재 바로 이 순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경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예요. 그 사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의 경험을 어떤 강도로 해보았는가, 즉 경험의 실질적인 양과 질이 그 사람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같은 아름다운 날씨에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곳에 오늘 한 번 뛰어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곳에 점심시간에 뛰어 올라가는 사람은 드물어요. 왜냐하면, 그것과 관련한 경험의 양과 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조건은 같지만 원하지도 않고 또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담배 끊는 이야기를 해봐요. 어떤 흡연자는 끊을 생각이 아예 없어요. 그러면 다만 흡연이라는 행동의 결과와 더불어 사는 것 뿐이지요.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많은 흡연자는 아마도 담배를 끊고 싶어 할꺼예요. 그리고 ‘자유의지’로 결정은 하지만 (스스로 원하고 마음은 먹지만) 대부분은 며칠 혹은 몇주 이내에 실패해요. 왜냐하면 담배를 끊는다는 어떤 행위에 대한 ‘총체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끊게 되지요.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인 그 ‘총체적 경험’이 담배를 끊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양과 질에서 임계점을 돌파했기 때문에 담배를 결국은 끊게 되지 싶어요. 금연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무었이 생겨 났나요? 금연에 대한 ‘총체적 경험’ 그 양과 질이 늘어난 것이지요. 우리 이것 잘 기억하도록 해요.

그럼 ‘총제적 경험’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거나 늘일 수 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 내가 산에서 깨달은 거예요. 우리의 삶은 담배를 끊는 그런 종류의 행동 혹은 시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고, 또 나아가 담배를 끊는다고 건강이 저절로 찾아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예요. 사람들이 (버켓리스트를 만들어) 죽기전에 ‘일등석 타고 북구에 가서 오로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본들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단지 그렇게 해보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다고 또 뭐가 달라지나요? 그런 일회성이고 간헐적인 ‘경험을 위한 경험’은, 의미있는 ‘총체적 경험’으로 쌓이지 않으며, 따라서 인생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었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경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경험들을 허락해서, 내 ‘총체적 경험’의 양과 질을 늘이게 할까요? ‘총체적 경험’의 주인은 우습게도, (두뇌가 없는)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몸을 쓰는 습관’ ‘마음을 쓰는 습관’ ‘무었을 하는 습관’ 그리고 ‘무었을 하지 않는 습관’ 바로 이 습관들이 결국은 그대와 나의 ‘총제적 경험’을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렇게 모여진 유의미한 총체적 경험이, 당신과 나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통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오늘 실현하게 허락하는 것이지요.

중3때 담임이셨던 키작고 눈매 무섭던 선생님은 자주 몽둥이를 드셨어요. 목재소에서 맞춤 주문한 사랑의 매. 늘 교탁 아래 잘 준비 되어 있었어요. 월말고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혹은 다른 다양한 일들이 있을때면, 나를 포함한 급우들은 늘 그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드려 맞곤했어요. 허벅지 같은데를 그런 굵은 몽둥이로 수차례 맞으면 피멍이 크게 드는데, 한번은 부모님도 보셨어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을때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데요. 참 잘했어요 🙂 그런 폭력이 내게 어떤 영향을 장기적으로 끼쳤는가가(?) 오늘의 주제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 주제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었어요. 급우들은 모두 떠들썩하고 들뜬 기분으로 교실에서 왁짜지껄 소란하게 잡담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모두들 내려와서 강당으로 가라고 한두번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학급 전체에 말했어요. 우리는 그래도 계속 떠들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단을 뛰어 올라 왔어요. 그리고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다행히 오늘은 몽둥이는 없었지만) 우리 급우들 모두에게 차가운 복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기를 시켰어요. 이제 한두시간 후면 졸업할 제자들인데요… 그때 나는 고작 열댓살 먹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지만,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의 매를 드시다가 이제 스스로 변하고 말았구나. 이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줄담배 때문에 일찌기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시작되었던 그 몽둥이를 상습적으로 드는 ‘습관’이 선생님의 ‘총체적 경험’의 크고 중요한 부분을 어느 순간부터 차지하게 되었었던 것 같아요.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선생님의 ‘자유의지’는 어느 순간부터는 바로 그 습관이 만든 총체적 경험의 종이 되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마 그날 선생님도 댁에 가셔서, 늘 피우시던 독한 한산도인가 하는 담배를 태우시며 자신에 대한 좀 이상하고 불편한 그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서웠지만 존경했던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무지하게 얻어 맞았던 허벅지도 대가리도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은혜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니 요점 정리를 해야겠지요? 먼저, 붓다께서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삶의 조건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되요. 그리고 그 습관은 우리에게 ‘총체적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가 좌지우지 (결정) 되는 거예요. 이렇게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이 만드는, 바로 이 ‘자유의지가 우리 자신의 팔자를 바꾼다’고 나는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확실하게 모르지만, 결정론을 아주 반대하셨던 (이건 내가 알아요) 붓다께서도, 아마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으로 짐작해요. 차차 더 알아보고 확인해서 이야기 할께요.

누군가를 그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산길에서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 비슷해야겠지요. 동료 직원이든지 근처 동네에 살던지. 나이도 이십대 🙂 그리고 그 사람도 달리기에 있어서, 나와 비슷한 습관이 있어야 하고, 그 오랜 습관의 결과로 나와 비슷한 ‘총체적 경험’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러면 ‘자유의지’에 의해서, 어느 아름다운 겨울 오후에 그 사람과 나는 그 산길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거지요…

달리기 하고 싶어졌어요? 팔자 바꿀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