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 이야기 1

어떤 사람이 도사를 찾아가서 물었어요. ‘윗층에서 뛰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운데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도사가 대답했어요. ‘놀이터에서 만나거든 이름도 물어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친해지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도사가 다시 대답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좀 덜 귀에 거슬리고 당신께 좀 덜 괴로울꺼요.’

완전한 해법이나 완벽한 솔루션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 열반을 통하여, 인생의 완전한 해법 완벽한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좋은 ‘원’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티라다모 큰스님등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님들께서는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해탈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보를 가면 오십보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고 백보를 가면 또 그 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를 수행한 나조차도 해탈 열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해서 뭐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도 내 처지에서 어떤 수준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렇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 현실적이고 진실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극소수는 성공하여 구름을 타고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여 아무런 발전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낙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류의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흑백논리를 나는 매우 경계하며 마음속에서 한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께 티라다모 큰스님의 ‘적선’에 관한 설법을 들으면서 배운것이 있어요. 언젠가 전체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언가를 베풀어서 상대나 상황이 변하고 그 결과 혹은 댓가로 내가 복을 받거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에게 베푼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 혹은 행위의 결과로 당신의 삶 자체가 점점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당신을 해탈과 열반에 다다르게 돕기 때문에, 적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위에서 언급했던 그 도사의 솔루션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관심을 가지고 친하게 되면서 만약 ‘아이가 고마워하면서 좀 덜 뛰고 조용해져서 내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장차 더욱 더 괴롭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선은 상대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지요? 내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먹는 습관이 자연스레 좋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적선의 가장 큰 보상(?) 입니다. 아이가 달라지기를, 혹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부모가 감동해서 아이 단속을 더 잘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내 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자유를 좀 덜 빼앗기면서 이웃들과 원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럴것 같으면 뭣하러 사주나 그냥 서로 모른채 지내지? 이미 그 대답을 했지 싶네요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라고요? 때로는 그렇게 부스럼도 만들어서 괴로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더만요. 지혜롭게 능력껏 피할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그런 괴로움을 알고서도 적선을 베풀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길게보면) 우리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일이라고 나도 동의합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0 아니면 100처럼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흑백논리를 쫓지말고, ‘현실속에 실재하는’ 60이나 30 혹은 하다못해 5라도 내버리지 말고, 인정하고 또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또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지혜로운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가까운 친구가, 아파트 아래층 노인과 커다란 갈등을 겪는 바로 그자리에 나도 우연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한지가 오래되어, 내가 목격한 그 상황은 정말 폭력적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쌍방에게 주는 비극적인 (그리고 일촉직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후 이 친구는 상당한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었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던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그렇게 따지기는, 이미 쌍방이 이성을 잃어 이만큼까지 오고 나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기에 불길을 진화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이사를 갈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이전에 미리 알고서 집을 내놓았었으면 나았겠지요. 그전에 고기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서로 대화를 좀 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문제 자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 집을 당장 내놓아야겠다’라든가 혹은 무었인가 내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미리 좀 파악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겠지요. 그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났기를 바라지만, 다시 유사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번에는 더 잘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는,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는 현실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때 그 사람과 내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갈 수 밖에는 없었던가?’ ‘단지 그 사람이 미친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전에 혹시 내가 마음을 쓰거나 반응하는 어떤 기전에 (mechanism)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좀 되돌아 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후자를 강조하셨고 또 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적선’ 괜히 그냥 말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깔려 있는 깊은 가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실천한다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때, 현실적으로 얻은 경험과 더불어 이러한 지혜가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찰을 찾아가 중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제발 이런 미친넘들을 좀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며 어떤 신통력도 우리에게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일개 중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붓다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진짜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밑천삼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여 ‘살아서 누리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는 적선의 단계를 옮기면서 이글을 마무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면 (음식을 주거나 어떤 도움을 주면) 10배의 (무형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비구(스님)에게 적선을 하면 1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요, 비구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사찰을 지어주면 10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계를 실천한다면 그 보상은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것의 10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 그대가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면,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보상의 100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전에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 차차 이 말씀이 진심이며, 또한 왜 그런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