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마디로 인간이란 존재를 ‘짬뽕’이라고 정의하겠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지성과 무식, 평화와 폭력, 이기심과 희생심 그리고 맵고 짜고 쓴 맛과 단 맛 등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유리병 속에 기묘하게 뒤섞여 있다가 때와 장소에 따라 이리저리 분출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나는 많이 배우고 성공한 사람들 속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해왔고, 내 수준을 넘는 친구들도 여럿 사귀었으며, 하다못해 골프조차도 가장 성공한 부류들과 어울려 쳐왔다. 도덕적으로 최상위일 것이 기대되고 또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여러 종교의 수행자들과 지도자들도 오랜 세월 알아봤고 만나봤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 중에서 특출하게 뛰어나서 나를 감탄하게 하고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한 그리고 드러낸 학위, 돈 , 직위와 상관없는 수준의 언행을 보였으며, 일부는 그야말로 못된 철부지 아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사람들도 ‘그들의 자리’에서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관료, 학자, 사업가, 의사들일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병 위에 고여있던 향기로운 올리브 기름이 분출되다가, 다른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병 아래 고여있던 (올리브 기름이 덮고 있던) 악취나는 오물이 분출 되는 꼴이 우리 인간의 진면목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증거들이 하도 많아서, 사람들이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대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신기하고 의아하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만큼 (의도적이건 아니건) 속고 속이고, 또 이렇게 이중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묘미가 있고 또 끝없는 도전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차차 깨닫게 된다. 이전에는 이런 인간의 진면목을 단지 혐오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묘미와 도전 그리고 발전에 한가지 조건이 붙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도 나도 ‘짬뽕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조심해야 하겠지 언제 어디서 너와 나의 오물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모르기에. 또 기대도 낮추어 살아야 하겠지. 이런 나를 받아들이듯 그런 너를 또한 받아들여야 하니. 짬뽕이 짬뽕과 뒤섞이는 왕짬뽕 세상이로구나 🙂
수포자의 말로
나는 국민학교 (초등학교) 시절 산수를 포기한 원조 수포자중 한사람입니다. 수포자로서의 학창시절은 괴롭고 지루했으며 또한 험난했습니다. 먼 나라로 떠나와 성인이 된 삶의 대부분을 살면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릴때 ‘나는 제도교육의 희생자야’ 가끔 농담을 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제도교육의 덕도 보았다’ 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익숙하고 힘이 들지 않는 것을 하려고 하지, 익숙하지 않고 힘이 드는 것은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마치 라틴어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수학시간이면 나는 ‘저 공식이 우리가 사는데 어떤 관련이 있담?’ ‘지금 배우는 저것들이 정말인지 어떻게 알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시절에는, 필수인 수학과목을 두번 낙제하고선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에 (지금 아내가 된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컨닝을 하는데, 전혀 모르는 기호를 마치 만화 그리듯이 ‘모양을 외워서 그려낸’ 답장으로 동정표를 받아 최하 학점을 받으며 겨우 졸업을 하였습니다. 내가 제출한 시험지를 체점하던 분은 그 괴이한 답안을 보면서 엄청 웃었거나 아니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었을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살며, 또 이민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전산관련 일을 하면서 나는 오랜 세월 수십개 나라에서 온 문화, 언어 그리고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오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과, 내가 지금 사는 나라 그리고 또 내가 떠나온 한국을 비교해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개인의 능력으로 볼때 한국인 개개인의 능력은, 일본인을 포함한 대부분 나라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여기 예외도 있긴 합니다 🙂 스위스나 독일 사람들에게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당당히 대접 받는 지금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왜 최고의 집단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보면 별로인 일본인들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고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한국인들은 개인적으로 너무 똑똑하다 보니 지도자를 인정하고 따르는 습성이 적고 또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잔머리나 편법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 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도 나라도 자기가 잘하는 것을 더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들어낸 것들을 좋은 머리와 감각으로 재빨리 파악해 내고 나아가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고 바쁘게 사는 세상에서는 ‘그것해서 뭐하게?’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들을 최대한 빨리 흡수하고 나서 한발짝이라도 더 빨리 더 위로 올라 가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학벌, 최고의 직장, 최고의 현직에서 일하는 성격좋고 똑똑한 친구를 이번 한국방문 때도 만났습니다. 최고 공부를 많이한 최고 아름다운 부인과 최고 좋은 차에 동승하여 서울을 잠시 둘러볼때, 수포자 부부에게는 ‘떠나버린’ 한국이 마치 ‘잃어버린’ 선경처럼(仙境) 느껴졌습니다 🙂 그 친구는 장차 은퇴하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또 좀 살기도 할 작정인지 어떤 대학 일본(어)학과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다운, 대단한 수준이라 생각하여 감탄하였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그저 재미 삼아서 또 심심해서, 일본 관련 도큐멘트리, 영화, 드라마 시리즈, 교양 프로그램 그리고 하다못해 맛집 방문기까지 (영어자막의 도움으로) 수없이 보았습니다. 일본을 다른 나라들의 시각으로 보는 도큐멘트리들도 이것저것 보았습니다.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어쩌면 대학을 두어번 졸업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일이나 일본 프랑스는 물론 하다못해(?) 러시아나 중국같은 나라들도 영어로 방송하는 (관영) 채널들이 있습니다. 영어를 통하여 접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은, 한국어로만 (번역포함) 접할 수 있는 양과 범위의 수십배 어쩌면 수백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만큼 쉽습니다.
한국에서 골프를 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위 싱글’을 치는 사람들 중에서는 레슨을 꼬박꼬박 받아서 그렇게 된 사람보다는 자기 스스로 죽기살기로 연습하고 연구해서 그렇게 된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잘 치는 방법은 한국과 전혀 다릅니다. 물론 아마추어 골퍼를 대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매우’ 잘 치는 평범하고(?) 흔한 방법은 골프를 잘 치거나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는 아마추어로서는 최고 수준의 골퍼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어릴때부터 아빠따라 엄마따라 놀이삼아서 골프장을 들락날락 거렸던 사람들입니다. 어른이 되서 한동안 규칙적으로 골프를 쳤거나 지금도 규칙적으로 치는 사람들인 것은 맞지만 ‘죽기살기로’ 골프를 치거나 ‘미친듯이’ 연습하고 연구하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같은 목표를 이루거나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다른 방법들과 길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같은 길로만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의심할바 없는 권위를 가진 선생들로부터 정리된 방법으로 일본을 배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놀이삼아, 마치 아빠따라 골프장에 와서 퍼터들고 그린에서 장난치듯, 많은 시간을 보낸 일본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듯 ‘나의 생각과 견해’가 생겼습니다. 수많은 일본사람들을, 수많은 상황에서, 수많은 스토리들을 통해서 일종의 교차검증을 하면서 듣고 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권위도 없고 학위도 없지만, 그 어떤 일본 전문가와 토론을 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나의 견해를 표명 할 수 있지 싶습니다. 건방진 말이었지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또 단 하나의 정답이 필요없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왜?’ 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답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밖에는 없지 싶습니다 (‘realise’ 라는 말을 이럴때 쓰지 싶네요).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것들 중에서, 이미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를 잘 고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정답은 주관식 문제의 답처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답뿐만 아니라 문제조차도 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내 삶이 가능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이 시간에 이런 글을 쓰기까지 ‘왜?’를 허락하지 않았던 내가 떠나온 나라 그리고 ‘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가 사는 나라, 둘 다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수포자의 말로가 너무 비참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밀양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때 뜬금없이 밀양을 찾았다. 영화 ‘밀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중 하나인, 밀양역전에서 교회사람들과 어색하게 어울려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남자주인공 생각이 나서였다. 가는 길에, 밀양역전에 가면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그 찬송가를 부르겠노라 공언하였지만, 정작 찬송가를 기억해 내지 못하여 노래는 못불렀다. 하지만 밀양역과 그 주변을 한동안 함께 걸으며, 이 뛰어난 영화가 내게 던졌던 매시지가 지난 십수년 동안 내 삶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반영이 되고 또 의미가 되어왔던지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 훌륭한 영화를 만든 감독과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 덕분에 ‘밀양’이 나와 인연이 되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찾게되니, 이것도 일종의 코미디랄까 웃기는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번 방문때는 그 중국집 ‘다래현’을 찾아볼 생각이다 🙂
이창동 감독의 수작들인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등은, 1994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수작 ‘포레스트 검프’처럼, 어른이 되고나서 누구나 그리워는 하지만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 좋았던 그때를 주제로 하고 있다. 옛 친구들을 만나며 새삼 깨닫게 되었지만, 나도 그들도 모두 많이 변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때마다, 막연히 그 좋았던 시절을 그리는 마음과 더불어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를 아쉬워 하는 마음도 든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내게 그런 그리움과 아쉬움도 떠올리게 하지만 더불어 인간의 구원 이라는 주제를 함께 다룬 영화다. 인간의 구원. 절망에 처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무었을 통하여 어떻게 몸부림치며 그 절망을 벗어나는가를 (어떻게 dealing하는가를) 잘 그리고 있다.
좋은 영화를 발견하면, 오랜 세월 두고두고 (몇년마다) 다시 보는데 그때마다 나의 해석과 반응 그리고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영화를 여태까지 봤을 때는,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슬픔) 앞에 종교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근본적인) 구원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어젯밤에는 이런 내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30년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또 드물게 내가 존경하게 된 성직자 친구분께서는, 모친 생전에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어머니께 말씀해 주셨는데, 매우 건방지고 웃기는 이야기지만, 어제 나는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도 (그리고 다른 세간의 종교를 통해서도)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 또 표나게 믿는다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거룩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그야말로 (선악의) 짬뽕이며 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잠시 반짝? 가능하다. 주변에 있다. 늘 번쩍?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 없다. 잠시 반짝 했던 것으로 마치 늘 번쩍인 것처럼 ‘척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 인생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만가지 더럽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제 밤 혼자 영화에 몰입하여, 주인공 여자가 절망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으며 찬송가를 부를때 같이 손뼉을 치며 그 교회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도 놀랐다. 미쳤나봐 🙂
이은상 시인이 오래 전에 남긴 ‘가고파’라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덧붙인다.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4절을 가장 먼저 지으셨다는 설도 있다.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어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일하여 시름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니아 깨끗이도 깨끗이
우물안의 개구리 그리고 해탈
우연히 산악인 허영호에 대한 오래된 기사를 최근에 보게 되었다. 그가 한국산악회와 원수진(?) 이유에 대한 것들인데, 조선일보가 인터뷰한 내용을 먼저 보았다. 등산인으로서의 성취도 성취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살아온 길들을 읽으면서, 이 사람 도인인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늘 하듯이 크로스첵크를 (비교확인) 해보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산악회 부회장이 월간 ‘산’ 이라는 잡지에 산악회를 대표하여 올린 글이 있었다. 매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세상사가 칼로 무우자르듯 단순하고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 각자의 처지에 따라 동일한 일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해석되는 경우도 흔한 일이니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지만, 내 느낌으로는 한국산악회쪽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다시 허영호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이 사람이 과연 아까 내가 생각했던, 그 도인에 가까운 놀랍고 대단한 사람인지 아니면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부족함으로) 큰 실패를(?) 했던 사람이 화려한 언변으로 내로남불 하면서 일종의 정신승리나(?) 추구하는 것인지 햇갈리게 되었다.
오늘 산을 뛰다가 문득 ‘아! 해탈이란 것이 (득도, 경지등 어떤 표현을 쓰건 상관없다) 정말 어려운 이유가, 반드시 우물안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부대끼고 엮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스스로는 우물안의 개구리를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로구나’ 깨닫게 되었다. 이래서 정말 어려운 것이로구나!
내가 글을 잘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글을 잘 쓰는 것과 인생을 잘 사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가로질러 흐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들을때면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허영호의 인터뷰를 읽고나서 마음이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내가 이 사람처럼 말하거든, 나도 그와 비슷한 태도로 살거든, 그리고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감동할(?) 때도 있었고. 내가 그의 인터뷰를 맨 처음 읽으며 감동했었듯이.
괜찮은 여자 하나 팔자 고쳐주려고 내가 이리저리 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십년도 훨씬 전에 중매를 딱 한번 했었는데 아직 해로하고 있으니 성공율이 100%이긴 한데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첫 상대로 오래전부터 내가 잘 알던 종교인 한 사람을 설득해보았는데, 한이틀 기도를 한 후에 응답이 왔다. 고맙고 좋기는 한데 자기는 그래도 자기가 믿는 신과만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회신을 기다리면서 이 사람의 강연을 유튜브로 몇개 보았는데, 이분이 하는 일의 성격과 퍼스날리티를 알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강한 표현들을 하고 있구나’ 느낌이 들었다. 그의 거절을 더 이상 설득없이 조용히 받아들였다.
‘다른 개구리들과 우물안에서 부대끼고 엮이며 살지만, 그들과는 달리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높은 자리에서 앉아서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면서 떠들어대는 자들을 보면, 자신은 우물안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부대끼지도 않고 엮이지조차 않으면서 어쩌자고 다른 개구리들을 보면서 우물밖으로 나가라고 떠들어 대는지 기가 막힌다. 종교의 한계요 인간의 비극이다.
해탈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위험한 신호들을 생각해 봤다. 첫째로 꼽을 것은 ‘강성’이다. 책을 읽고 머리로 공부해 생겨난 이론들이 강하고, 그것을 강하게 표현하며 또 강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예외없이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 어떤 분야에서건 경지에 오른 사람이 ‘강성’인 경우는 없다. 둘째로, ‘분리’다. 사람이건 그 무었이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나와 남 혹은 우리와 그들처럼 대립구도를 만들어 낸다. 말이나 글이 그런 이분법적 구도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에고다 (ego). 나는 다르다는 거지, 내가 속한 이곳은 네가 속한 그곳과는 다르다는 거지. 아주 위험하다. 셋째로, 미려한 글이나 말로 ‘설득’하려는 태도다. 해탈의 가능성은 스스로 뱉아내는 미사려구와 반비례한다.
언젠가부터 믿음이 들기 시작했는데, 해탈하거나 도 트고 나도 유튜브에서 떠들고 책써서 팔고 안 그러지 싶다. 뭐 딱히 할말도 없고 또 뭐 좀 팔아서 돈벌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다 그런 욕망도 없을테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표가 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스쳐 지나간 해탈 도인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한국 방문 후에 연락이 재개된 한 친구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위에서 말한 위험한 신호들을 드러내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면서 마음이 무겁다.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강하게 말하고 너와 나를 분리하며 자꾸만 설득하려고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무것도 증명할 것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고 또 증명할 대상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것도 배우는 과정이니 발전의 일부 아닐까 싶다.
이번에 한국에 잠시 머무르며 사람들의 언행이 무식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경우가 몇차례 있었다. 내게 ‘마음의 노안’이 와서 세상이 굴절되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면들이 늘 있었는데 문제 삼지 않다가 요새들어 내가 문제 삼기 시작하는지 명확히 알기가 어렵다. 이 친구와도 ‘오랜 친구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시각과 ‘오랜 친구사이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라는 시각이 충돌하는 경험이 이번에도 있었다. 귀국해서 아이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아이가 세대도 사고방식도 다르지만 내가 보기에 소셜 아이큐가 높다. 자기 생각에는, 전자쪽이 더 맞는 것 같고 (오랜 친구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느낀 부정적 감정을 상대방에게 어떤 식으로건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에 주고받은 팩트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고, 아이는 그보다는 관계 자체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생의 대부분을 독고다이로 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한면만 있는 동전이 없고 잘 들면서 손 안베는 칼도 없다. 친구들의 이해와 인내에 감사한다.
인간과 시간
인간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한가지를 꼽으라면 무었일까? 어떤 뛰어난 사람이 ‘시간’이라고 하던데 나도 동감한다.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좋은 영화들이 여러편 있는데, 오늘은 ‘About Time’이라는 영국영화를 보았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상영되었다고 한다.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매세지는, (영화속 주인공처럼) 설령 타임머신을 타고 마음대로 과거로 되돌아가 자신의 (그리고 자신과 관계된) 과거를 무한정 바꿀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참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보고 나면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별 의미도 없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그리고 주변의) 행복을 증대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바로 지금, 오늘, 현재’에 딱 한 번만 가능한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제목을 잊었는데 언젠가 꽤 재미있게 보았던, ‘인간과 시간’이라는 주제를 다룬 또 다른 영화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천국에 있던 사람들이 결국은 자발적으로 평화로운 종말을 (죽음을)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유머러스하게 그렇지만 정확히 설명하였다. 흔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천국의 모습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 영화가 잘 (그리고 과학적으로) 묘사한데로, (예를들어)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전부 다 여러차례 읽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곳을 수차례 여행하고 나서도, 이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통달하여 올림픽 금매달을 모조리 따고 나서도, 그 ‘영원’이라는 시간의 극히 일부도 사용하지 못한 꼴이니, 나중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게 되어 결국은 천국이 처음 생각하던 그 천국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며, 이것을 깨닫게 된 천국 입주자들은 결국에는 스스로의 종말을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발적이며 평화롭고 좋은 죽음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들 인생인데…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던지는 매세지를 무시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볼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짐작하건데 ‘인간과 시간’에 대한 좀 다른 (좀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2023년을 시작하며 ‘인간과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적절하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