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성공 비결

첫째로, 젊었을때 이민 가야한다. 군대도 다녀오고 사회생활도 좀 해보고 또 가능하면 마음이 맞는 짝도 찾고 난,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 제일 좋고 30대 후반이 커트라인이다. 40넘으면 특출한 경험이나 (예를들어, 이민 대상국에서 과거 수년간 거주하여 사회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는 경우등, 하지만 1-2년 워킹홀리데이나 혹은 유학경험 등은 별 소용 없음) 어느나라에서나 즉시 확실히 통하는 기술등이 (예를들어, 컴퓨터 프로그래밍 미용기술등, 하지만 학원에서 배워 자격증만 딴 수준으로는 안되고, 실무에서 기른 실력과 확실한 실전경험이 필요) 있지 않는한 무리다.

둘째로, 즉시 사용 가능한 어떤 자신만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 체력이 아주 좋아서 한 몇년 힘든 노동도 끄떡없다든가, 이민 대상국에서도 필요하고 널리 쓰이는 기술을 한국 현업에서 실제로 사용한 실력과 경험이라던가, 아주 사회성과 세일즈 기술이 뛰어나서 말이 안통하는 에스키모에게도 손짓발짓으로 냉장고를 팔아먹을 능력이 있다던가등. 이것이 먼저고 영어는 두번째다 (영어권으로 이민 온다면). 현지에서는 거지들도 아기들로 모두 다 하는 것이 영어니, 단지 영어만 잘 한다고 그것만으로는 소용 없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다른 한국사람들 상대로 구질구질한 짓이나 하며 돈벌이 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로, 먼저 이민 온 한국인들을 피하는 것이 좋다. 당신의 접근을 바라거나 당신에게 접근하는 해외거주 한국인들은 (혹은 한국인 단체들은) 그들의 목적이 있다. 당신의 돈을 원하거나, 당신이 그들의 단체에 속하기를 원하는거나 혹은 둘 다를 원하는 것이다. 이민 정착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피하는 것이 좋다. 상식적으로 볼때, 이민와서 잘 정착해서 정상적으로 사는 한국사람들은 당신을 위해 신경 쓸 시간도 또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민오니 왠지 이상하게 경건한 마음이 들며 정말 종교를 필요로하거든 현지인들이 가는 곳에 가라. 신은 그곳에도 당연히 계시고 또 신심깊은 현지인들로부터 이모저모로 도움을 받게 될 가능성도 있다. 굳이 한국인들과 종교를 통한 교류를 원하거던, 일단 몇 년을 잘 정착하고나서 후에 만나도 전혀 늦지 않다. 그때는 당신도 현지 사정을 알만큼 알고, 상대도 당신이 초보 이민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문제 없을 것이다. 이민 온 나라에서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말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현지인들에게 받는 것이 좋다. 말이 안통하니 (어떤 현지인들은) 위험하거나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 너무 잘 통하는 (어떤) 한국인들도 위험하고 또 도움이 안되긴 마찬가지다. 쌀독에서 인심난다고, 가능하면 무난하게 잘 사는 현지인들과 엮이는 것이, 도토리키재기 수준인 다른 한국인 이민들과 엮이는 것보다 낫다.

넷째로, 무었이건 ‘최초’는 위험하지만 ‘선두그룹’에는 속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경우가 많다. 다시말해, 이미 한국인들이 잔뜩 이민와 있는 도시는 피하는 것이 좋지만 동시에 한국인들이 거의 아무도 정착한 적이 없는 곳도 피하는 것이 좋다. 당신이 정착하려는 도시가 평판이 나쁘지 않으며 어느정도 규모가 있어야 한다. 완전 깡촌이나, 극한의 추위등의 이유로 현지인은 물론 타국에서 이민온 사람들도 거의 오지 않는 그런 괴이한 곳들은 피하라. 기후를 우습게 여기지 마라. 기후에 혼나서 정착 못하거나 한국으로 귀국하는 사람들 꽤 있다. 괴이한 선택을 하는 ‘용기있는’ 사람들 가끔 봤지만 결국은 포기하더라. 아무도 안할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이미 너무 많은 곳이면 당신 자신에게 불리하다. 이민이 전혀 없는 도시나 지역에서는 현지인들이 도대체 이방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당신이 괴상한 대접을 받거나 불리할 가능성도 있으나, 한국인을 포함한 이민자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있는 곳에서는, 당신도 소수라고 다수의 도움과 보호를 받을 가능성이 (반대로 고약한 대접을 받을 가능성보다) 더 높다. 겁나고 두렵다고 다른 한국인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면 그 당시에는 안심도 되고 편할지 모르지만 현지인들이 좋은 눈으로 안봐주고 (그런 맨탈리티의) 당신도 좋은 대접 못받는다. 반대로, 혼자서 스스로 이것저것 해보려고 노력하다보면 현지인들이 좋은 마음으로 대해주고 예외적으로 (소수라고 좋은 쪽으로) 대접도 해주고 또 도움을 주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다섯째로, 배우자 혹은 짝을 잘 골라서 와야한다. 물론 운이 많이 따르는 일이지만. 배우자가 저질체력으로 몇년이 지나도 현지 기후에 적응을 못하고 골골거리면 두 사람 모두 심신이 점점 탈나고 지쳐서 결국은 정착에 실패한다. 또 배우자의 정신상태가 좀 모자라는 경우(?) 예를들어 해바라기처럼 당신만 바라보며 당신이 다 해주기를 바라는 경우라면 당신 어깨가 너무 무거워 뛰거나 날기는 커녕 결국 둘 다 주저 앉게 된다. 아주 싸가지가 없는 짝인데 무슨 최첨단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구사 능력이 있다면 저질체력이거나 정신상태가 좀 이상해도, 혹은 둘 다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시작은 해 볼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장기전으로 가면 좋은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부부와 가족 오래 못가더라. 뭐니뭐니해도 ‘성숙한 인간’이 (어느 정도라도) 잘 살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동서고금의 변함없는 진리다. 단기적으로 보면 예외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 겉보기에는 성공한 듯이 보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람사는 진짜 내막은 밖에서는 잘 모르는 법이다. 인생의 승부는 길고 정확하다. 마라톤 처럼.

여섯째, 젊음이 주는 용기, 마음이 맞고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짝 그리고 어느 수준의 머리와 능력이 있다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이민을 오는가, 지금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가 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 있는 돈과 영어실력이 주는 부작용을 피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이민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가진 사람들이 쑥쑥 줄어드는 정착자금 헤아리며 스트레스 받고, 알량한 영어로 다른 한국인들 상대로 돈벌이 하려고 잔머리 굴릴때, 가진 것도 잃을 것 없는 당신은 저절로 배수진을 치게 되니 죽지 않으면 당연히 앞으로 전진할 수 밖에 없다.

일곱째, 좀 세계화된 혹은 탈한국화된 발상과 생활습관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사는 방식 그리고 일상의 습관들이 너무나 토종 한국인이면 (다시말해 토종 한국인이 무었인가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 자신을 제3자의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이면) 이민와서 편히 살기가 좀 힘들고 또 이런저런 문제와 제약에 부딪히게 되니, 정착해서 오래 잘 살 가능성은 좀 낮다. 김치 짜장면도 잘 먹긴 하지만 그것들 없이도 한두달쯤은 끄떡 없으면 좋고, 비록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았지만, 좀 열린 마음으로 다른 나라 다른 세상에서 사는 방식에 관심도 가지고 또 새롭고 좋은 것들을 배우려는 자세도 있고 그런 사람이 이민에 훨씬 유리하다. 도둑질을 해도, 새벽잠이 너무 많은데다가 담도 잘 못넘고 무거운 것도 잘 못들고 (체력등 물리적 조건 나쁨) 마음은 약해서 죄책감은 많고 (정신상태나 태도 부적절) 또 도둑질한 물건 나누는데 파트너와 맨날 싸우고 (사회성부족, 타인들로부터 존중 / 존경 받을 줄 아는 기술 부족) 그러면 도둑질 오래 못하고 잘 하지도 못한다. 천성이 도둑질에 특화된 넘처럼 언행하는 자연스러운 넘이 도둑질 오래하고 잘 하듯이 이민도 좀 그런면이 있다.

여덟째, earn respect 할 줄 하는 사람이면 참 좋다. 말이 좀 안통해도, 먹는 것이 좀 냄새를 풍겨도, 입고 사는 모습이 좀 특이해도, 사고방식이 좀 현지인들과 달라도, 자기가 속한 곳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하면서 주변 동료나 상사로부터 ‘존중 / 존경을 얻어낼 줄 알아야 한다’ 다시말해 ‘earn respect’ 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가진 근본적인 가치나 판단은 한국이나 당신이 이민을 가고자하는 (영어권) 선진국들이나 비슷한 경우가 많다. 선진국이 된데는 공통적인 비슷한 이유가 있다. 현지 동료나 상사들은, 당신의 언어를 넘어서, 당신이 온 몸으로 오래 보여주는 당신의 가치와 판단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려지고 속일 수 없다. 여기서 그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할 지가 결정된다. 물론 당신이 정말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동료나 상사들이 뭐라건 어떤 생각을 하건 당분간 회사를 다닐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 어울려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울리는 방법이나 수준은 비록 한국과 다를지라도. 또 영어권 문화에서는 ‘사람들의 운동능력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당신이 육체미를 하라든가 보디 프로파일 찍어서 보여주는 그런 괴이한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며 스스로를 보살피는가를, 사람들이 당신의 운동능력을 통해서 엿본다는 말이다. 신체가 보통이고 또 운동을 아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해도 이벤트등에 참여하고 규칙적으로 자신을 돌보는 것을 사람들이 보면 존중하고 좋게 본다. 이것은 한국에서는 잘 모르는 영어권 정서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이글 읽어보고 어떤 사람들은 없던 용기를 내게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기분도 나쁘고 낙심도 되었을지 모르겠다. 무었인가의 이유로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일을,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난 다음에 잘 되씹어보면, 안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때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지금 내 삶에 훨씬 큰 이익이 되었다 그런 경우도 꽤 있지 않은가? 어쨋든 이 글이 이민을 꿈꾸거나 상상하는 당신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기를 바란다.

술 담배 끊는 법

법륜스님은, 종교와 세대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또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우리시대의 큰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분의 강연이나 활동에 참여하는 분들의 대다수는 (중년) 여성들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년) 남성들로 부터는 좀 외면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어쩌면 법륜스님께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때로 일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왜 법륜스님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 ‘어떻게 하면 술 담배를 (어떤 해로운 중독을) 끓을 수 있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질문에, ‘어떻게 끊긴 그냥 툭 끊으면 되지’ 이런 대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때면, 그 분에 대한 존경심도 크고 그분의 지혜를 높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늘 기분이 상했었습니다. 한때는, ‘천주교 신부가 황혼이혼 상담하는 꼴이고, 스님이 고기요리법 가르치는 꼴’ 이라며 분개도 했었지만, 차차 이분도 완벽할 수가 없는 인간이고 또 사람들을 도우려고 나름대로 애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더 이상 분개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그와 비슷한 투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채널을 돌리게 됩니다. 이분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이유중의 하나는, 자신이 과거에 모자라고 부족해서 저질렀던 어리석었던 일들을 숨기지 않으며 나아가 그런 부끄러운 경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으로 더 크게 더 많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제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험자로서 단언하건데, 술 담배는 절대 그렇게 툭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이 박힐대로 박힌 술 담배는 완전히 100%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마시지 않고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말하면 언제 어떻게 다시 마시고 피우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낙심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합니다. 아직 하나 더 있는데요 🙂 세상에는 하도 살을 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방송을 보면 무슨 인간승리 드라마처럼 체중을 수십킬로 뺏다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아마 방송측에서 좋은 취지로 연출했겠지만) 무슨 대단한 일을 했고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처럼 자랑스레 보여지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보면  즉각적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그들은 과거에 이미 병적으로 비만했었고 미래에 다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큰 고위험군에 속한 ‘아직도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고 또 몇몇 검사 수치가  건강치로 나왔다고, ‘건강을 되찾은 인생’이라고 결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들을 중단한다고 ‘갑자기’ ‘저절로’ 결코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의 심신에 해를 끼치던 짓을 다만 지금 멈춘 것 뿐입니다. 그러니 체중 몇십킬로 줄였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연과 금주는 그 자체로 떠벌이며 자랑할만한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자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계속 읽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저는 담배를 끊는 시도를 아마 수십번 아니 백번은 했었습니다. 이런저런 실패 끝에 나중에는 칼을 담배갑 중앙에 꽂아서 벽에 박아 놓고선, ‘흡연은 내 몸을 저 칼로 찌르는 행위와 같다’면서 다짐하고 또 애를 써보았습니만, 이미 오랜세월 인이 박힌 담배를 원하는대로 끊지 못하였습니다. 사회생활등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심신의 불안정은 자꾸만 저를 담배와 술 같은 손쉬운 찰나적 위안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서, 내 갈망이 적어서, 내가 덜 답답해서 술 담배를 끊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 담배가 끌어 당기는 힘이 내가 그것을 밀어내는 힘을 능가했었기 때문에 조금 버티다가 늘 꺽여지며 패했었던 것입니다. 그 힘은 잘 줄어들지 않으며 또 이미 만들어진 (밀고당기는) 힘의 균형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술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원하며 마음을 먹었다면, 상대가 결코 만만한 그냥 툭 내려놓으면 되는 그런 호락호락한 대상이 아니라, 무슨 악귀처럼 당신의 심신을 칭칭감고 동여매어, 아무리 발버둥치며 때내려해도 옴싹달싹조차 어려운 정말 무서운 대상이라는 것을 먼저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기전으로 어떻게 해서 해결될 상대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 잘 듣고 저런 묘수가 통하는 그런 말랑한 상대도 아닙니다. 마치 악성바이러스나 암세포와 같이 스스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바꾸며 (숙주인 당신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종의 생명체처럼 두렵게 인식하는 것이 옳습니다.

먼저 이것을 똑똑히 자각하게 되면, 금연 시도가 실패하게 될때 절망과 좌절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할 마음을 먹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됩니다. 우스게 소리처럼 들리지만, 어떤 고대 국가에서는 제사장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낼때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항상 비가 왔다고 해요. 왜냐하면 ‘비가 올때까지 매일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글을 쓰면서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그 헤아릴 수도 없었던 (금연) 실패와 좌절 그리고 힘겨웠던 자기배반 후 재시도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는, 아니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떤 비법이나 비방 따위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 인터넷에서 찾아 본 것들 그런 것들을 이것저것 계속 시도하는 방법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알려드리는 한가지 핵심은 ‘넘어지고 좌절해도 다음날 다시 담배갑을 쓰레기통에 쳐넣고 (아니면 식칼을 답배갑 중간에 꽃아서 벽에 박고) 다시 일어나서 또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를 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고 또 시도하면, 내게는 담배와 반대의 에너지가 (force 혹은 기운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쌓여가고 내 몸과 마음은 서서히 하지만 분명히 ‘담배에 대해서 변화’하게 됩니다. 어느순간, 오랜 세월 그토록 집요하게 내 심신을 옭아매고 조여대던 그 담배라는 것의 힘이, 그 악한 기운이, 정말 별게 아니라는 것을 참으로 느낄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마치 거짓말처럼 담배는 ‘피워도 그만 안피워도 그만’인 온순한(?) 대상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괴상한 변신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담배가 무슨 바이러스처럼 변신했을까요? 아니오. 당신이 변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 실패와 좌절의 과정속에서 시도하고 또 시도할때, 그때 당신 스스로를 변화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듯 ‘당신이 담배보다 더 쎄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원래 약한지라, 어쩌다 하는 일이 잘 안되거나 가정에 힘든 일이 있거나 하면 다시 담배를 사다 피울지도 모릅니다. ‘아! 역시 실패했구나’가 아닙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아무도 ‘금연에 성공’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하세요. 오늘부터 시작해서 또 유지하면 됩니다. ‘아! 지친다’ 하지말고 그저 ‘방금 원하는데로 피웠으니 이제 다시하자’ 하면서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이 과정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되고 또 아무도 몰라도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하면 내 심신의 기운이 담배의 기운을 월등히 능가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되며 그때가 되면,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다시 부닥쳤을 때라도 담배가 나를 쉽사리 유혹하여 쓰러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담배로 부터 자유로운 기간을 ‘유지하는 능력’이 더 커지고 더 쎄지게 됩니다. 그때는 ‘담배를 끊었냐 말았냐’ 따위의 질문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얻게된 ‘담배를 상대하는 기운’은 다른 운동능력과는 달리 내가 담배를 피우지만 않으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쎄집니다.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은 금연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한 두가지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담배와 항상 물리적인 거리를 두세요. 집안에 담배를 한개피라도  놓아 두지말고 (칼 꽃은 담배갑은 이미 물에 담궈 피울수 없게 만든 다음에) 불편을 무릎쓰고 상점에 사러가야만 하는 상황을 유지하세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그리고 담배를 피울 상황을 미리 파악하여 표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피하도록 노력하세요. 둘째, 담배와 상극인 무언가를 찾아내어 그것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제게 그 상극은 장거리 달리기였어요. 굳이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실천 가능한 어떤 상극들이 있을 것이니 찾아내어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세요.

술 담배가, 당신 자신은 물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극히 위험한 이유는, 나와 당신이 건강하고 긍적적인 삶의 방향으로 조금씩이나마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기운을 도둑질하고 그 실천에 발목을 잡으며, 장차 오~오랜 기간을 당신이 결코 원치 않았을 상황 즉,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짐이 되어 엄청난 괴로움을 안겨 주다가, 아마 작별조차 제대로 하지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만들 가능성을 (술 담배가) 확실히 높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이 단초가 되고 도움이 되어, 성공적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게 되어, 마치 내가 잠든 사이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총탄처럼, 장차 일어날 수도 있었을 폐암등을 피하여 건강장수 한다면 (비록 본인도 저도 그 내막을 결코 알 수는 없겠지만) 저는 정말 기쁘겠습니다. 저도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인연이 되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도와드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술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겠습니다. 중요한 공통점들은 이미 위에서 말하기도 했고, 또 술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며 어느듯 강산이 한차례 변하기도 했지만, 술에 대한 애증과 복잡한 심사는 아직도 제 마음을 흐트려놓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싶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술을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고 더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밀양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때 뜬금없이 밀양을 찾았다. 영화 ‘밀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중 하나인, 밀양역전에서 교회사람들과 어색하게 어울려 찬송가를 따라 부르던 남자주인공 생각이 나서였다. 가는 길에, 밀양역전에 가면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그 찬송가를 부르겠노라 공언하였지만, 정작 찬송가를 기억해 내지 못하여 노래는 못불렀다. 하지만 밀양역과 그 주변을 한동안 함께 걸으며, 이 뛰어난 영화가 내게 던졌던 매시지가 지난 십수년 동안 내 삶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반영이 되고 또 의미가 되어왔던지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 훌륭한 영화를 만든 감독과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 덕분에 ‘밀양’이 나와 인연이 되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찾게되니, 이것도 일종의 코미디랄까 웃기는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번 방문때는 그 중국집 ‘다래현’을 찾아볼 생각이다 🙂

이창동 감독의 수작들인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등은, 1994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수작 ‘포레스트 검프’처럼, 어른이 되고나서 누구나 그리워는 하지만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 좋았던 그때를 주제로 하고 있다. 옛 친구들을 만나며 새삼 깨닫게 되었지만, 나도 그들도 모두 많이 변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때마다, 막연히 그 좋았던 시절을 그리는 마음과 더불어 이제는 없는 동심, innocence를 아쉬워 하는 마음도 든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내게 그런 그리움과 아쉬움도 떠올리게 하지만 더불어 인간의 구원 이라는 주제를 함께 다룬 영화다. 인간의 구원. 절망에 처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무었을 통하여 어떻게 몸부림치며 그 절망을 벗어나는가를 (어떻게 dealing하는가를) 잘 그리고 있다.

좋은 영화를 발견하면, 오랜 세월 두고두고 (몇년마다) 다시 보는데 그때마다 나의 해석과 반응 그리고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영화를 여태까지 봤을 때는,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슬픔) 앞에 종교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근본적인) 구원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어젯밤에는 이런 내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30년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또 드물게 내가 존경하게 된 성직자 친구분께서는, 모친 생전에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어머니께 말씀해 주셨는데, 매우 건방지고 웃기는 이야기지만, 어제 나는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도 (그리고 다른 세간의 종교를 통해서도)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 또 표나게 믿는다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거룩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그야말로 (선악의) 짬뽕이며 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잠시 반짝? 가능하다. 주변에 있다. 늘 번쩍?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 없다. 잠시 반짝 했던 것으로 마치 늘 번쩍인 것처럼 ‘척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 인생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만가지 더럽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제 밤 혼자 영화에 몰입하여, 주인공 여자가  절망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으며 찬송가를 부를때 같이 손뼉을 치며 그 교회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도 놀랐다. 미쳤나봐 🙂

이은상 시인이 오래 전에 남긴 ‘가고파’라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덧붙인다.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4절을 가장 먼저 지으셨다는 설도 있다.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어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니아 깨끗이도 깨끗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