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당신의 자식?

인연은 소중합니다. 설령 개와 맺은 인연일지라도, 십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다 보면, 특별하고 애틋하고 또 잃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요. 우리와 함께 12년 세월을 살았었던 버둑이 녀석이 죽은지도 이제 2년이 되었어요. 뒷산에 온 가족이 울면서 묻어 주었는데 요새는 자주 가지 않게 되네요. 하지만 출퇴근길에, 버둑이가 다니던 그 가축병원을 지나면 아직도 생각이 많이 납니다. 처음 우리집에 데리고 올때 안고 왔던 사람도 나였었고 또 안락사 시키러 마지막으로 그 가축병원을 함께 걸어 갔던 사람도 나였어요.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었는데요, 그 어리버리하고 먹을 것만 밝이며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잘 자던 븅신개 (내 나름의 유머러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버둑이는 내게 좋은 교훈도 남겨주고 떠나 갔어요. 지금도 그 븅신개를 생각하니 븅신주인이 눈물 나네요.

몇년전에 호주에서 인도네시아로 수출한 도축용 소를 (어떤 이유로 소고기를 수입하는 대신에, 살아 있는 소를 수입하여 자기들이 직접 도축. 호주 북부와 인도네시아는 가까운 거리) 인도네시아인들이 비인도적으로 다루는 장면을, 아마도 호주동물보호단체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도축장에서 몰래 찍어서 호주 전체에 방송을 하면서 크게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던 적이 있었어요. 혹시 여러분도 봤을지도 모르는 ’60 Minutes’라는 프로그램에, 이 내용이 방영되는 것을 나도 보았어요.

그 나라의 수준을 보려면, 사람들이 장애인들과 동물들을 어떻게 대접하는가를 보라는 말이 있어요. 지당한 말이지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수준에 맞게 도축하려는 소들을 대접합디다. 그 사람들이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대접할 것 같아요? 가난하고 무식하면, 더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당연하고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인도네시아도 차차 호주처럼 부유해지고 또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면 도축장 환경도 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방식도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민주화되고 더 선진화되겠지요. 지금 선진국인 나라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겠지요.

그런데 방송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돈받고 판 소들이 인도네시아 도축장에서 얻어 맞는 것을 보는 호주인들이 그만 흥분하여 그 소들과 자신들을 동일시 하기 시작했어요. 동물애호협회나 그런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이지 싶은데요, 몰래 찍은 필름에 등장하는, 얻어 맞고 나쁘게 대접 받는 호주소들을 설명하면서 사람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저 앞줄에서 맞고 있는 소는 ‘John’ 그 뒤에 쓰러져 있는 암소는 ‘Jenny’ 이런 식으로 말이예요. 그 장면을 보면서 그런 이름을 듣는 호주 사람들은 기분이 어땟을까요? 마치 내 친구 ‘John’을 혹은 내 이웃 ‘Jenny’를 야만한 동양인 새끼들이 마구 팬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단번에 생기지 않았을까요? 이것을 노렸겠지요, 그리고 성공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소수출 금지).

그때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딱 들었어요. 그 ‘John’과 ‘Jenny’를 호주에서도 죽여서 스테이크로 만들어서 방송전에 당신도 먹고 왔잖아요? 아니 채식하라는 말이 아니고, 식용으로 길러서 판 소가 비록 도축되는 과정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마치 사람처럼 감정이입을 할 수가 있나요? 그리고 그 일부 호주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인) 목적은 달성했을지 몰라도, 이런 발상 자체가,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극히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도 무시했을 꺼예요.

작년에 버디와 오선이 이야기 하면서 ‘개는 개로 대접하는 것이 좋다. 주변에 있는, 개 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사는 동족 인간들에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 개라고) 나오는데로 지껄이고 하고 싶은데로 하면, 당신 자신에게도 그리고 개에게도 좋지 않다’고 말했었어요.

이번주에 우연히 개와 관련된 몇개의 기사를 읽으면서, 기사를 쓴 개인도 단체도 개를 ‘아이들’ ‘우리아들’ 같은 말로 공식적인 매체에서조차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참 왜 이러나 싶네요. 일전에 말했던 ‘out of proportion’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와 인연이 있다고 개를 아이니 아들이니 부르면서 마치 사람처럼 대접하면서, 나와 인연이 아직 없거나 혹은 내가 그 인연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개보다 못한 상태로 살고 있는 것에 털끗만큼의 관심도 없이 살면, 삶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까요? 사람이 사람의 도리가 있듯이, 개나 짐승도 (특히 사람들과 비교할때면) 그들의 위치와 받아 마땅한 대접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호주넘들이, 잡아 먹으려고 키워서 돈 받고 판 소를 ‘John’이니 ‘Jenny’니 부르는 꼴이나, 어떤 자들이 자기 개를 ‘아이’니 ‘아들’이니 부르는 꼴이나 참 가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에 내가 호주인들이 어떤 특징이 있다고 했었지요? 두 나라가 닮아가나요? 점점 선진국이 되어가는 모습인가요 🙂

당신의 기분을 가장 잡치는 인간 – 어쩌면 그 안에 당신이 있다

노르웨이의 노장 골퍼 ‘수잔 페테르센’이 어제 막을 내린 솔하임컵 매치에서 미국팀을 꺽고 유럽팀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기사를 아침에 읽었다.

한때 LPGA경기를 자주 티비로 보면서 이 여자 선수의 경기 모습도 많이 보았었다. 이 선수를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겉은 어른처럼 보이지만 속은 성질 못된 어린아이’ (인데 골프를 잘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침묵하는 뇬) 정도가 될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이 여자의 모습이 티비에 등장하면 밥맛이 뚝 떨어지기 때문에 잠시 채널을 돌렸다가 되돌아 오는 경우도 있었다.

경기 매너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나쁘고, 철없는 못된 언행을 티비 카메라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 당시 이미 서른 내외였다. 카메라가 버젓히 생중계를 하고 있는데도 ‘열여들’ 쌍욕을 해대는 것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 분위기 조성 또 심심할까봐 가끔씩 전설적인 쥐랄을 했었다.

2015년 솔하임컵 경기에서는, 미국팀에 소속된 한국계 골프선수와 일대일 매치를 하던 중에, 컵에서 50센티도 떨어지지 않았던 공을 당연히 컨시드를 받았다고 집어든 것을, 갑자기 가다가 되돌아와서 컨시드 준적이 없으니 반칙이라고 때를 써서 이겼던 적도 있었다. 상대선수 엘리슨리는 울고. 끝까지 제 잘났다고 우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사과 비슷하게 하는데 내가 사과문을 읽어 보니 이것 또한 철부지가 냄새가 솔솔나더라. 참 대책이 없는 인간이다 싶더라.

흔치는 않았지만 예전에 이런 인간들을 직접 상대했던 적이 나도 있었다. 나는 심하게 반발을 했었는데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었다. 나 자신이 그들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상대하는가 궁금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심하게 이런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안받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도를 넘어 (out of proportion) 심하게 반응하고 반작용을 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사람들의 어리석고 철없는 짓을 보고 상대하면서,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유사한 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강하게 부정하고 혐오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최근 메타에 관한 설법을 들으며, 그러한 좋은 수행을 내 스스로에게 먼저 적용시키라던 말씀이 많이 와 닿았다. 그렇게하면 자신의 부족함, 모자람 그리고 나쁜면들을 인정하게 되고 (차차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면들과 공존하게 되면서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살 것이라던, 그 붓다의 가르침이 참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오늘 아침에 든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나도 그대들도 또한 ‘이런 인간들도’ 🙂

시스템 확인

그때 오사카는 신입사원들이 시작하는 시기였다. 여자 신입사원들이 한결 같이 입고 있었던 그 베이지색 바바리처럼, 점잖고 튀지 않는 건물 디자인과 외벽 색깔이 한결 같아 보였던 오사카 시내. 우리 내외는 그중 하나에 들어가 일층에 있는 아케이드 상점들을 둘러 보고 있었다. 한쪽에는 수십명 신입사원들이 모여 있었는데 아마도 첫날 소개식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문득 나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아내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나는 그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아내의 가방을 들고. 들어가는 일본인 여자 두세명이 아마도 짧은 농담을 던지며 웃으며 갔던 기억이 난다. 잠시후 아내가 랄랄라라 하면서 나오는데, 동시에 제복을 입은 경찰관 혹은 보안회사에서 나온 듯한 남자가 급히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며 큰 소리로 무언가를 외쳤다.

나는 이게 무슨일일까 왜 남자가 갑자기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면서 소리를 지르는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내를 바라 보았다. 아내도 의아한 듯. 그때 아주 적으나마 이것이 혹시 아내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서늘한 느낌이 뇌리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밖으로 점잖게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 ‘별 일 없었지?’ ‘응. 그런데 물내리는 손잡이를 찾는데 좀 어려웠네.’ 공용화장실은 포함한 일본의 거의 모든 화장실에는 비데가 설치되어 있고 때로는 복잡해 보이는 버턴이 여러개 달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내는 그 중에서 물내리는 버턴을 찾느라 애를 먹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찾았는데?’ ‘이곳은 새 건물이라서 그런지 더 복잡해 보이더만. 여기 저기 찾아 보다가 한쪽 구석 밑에 빨간색 버턴이 있길래 누르고 나왔지.’

그것은 비상벨이었다. 일본에 있는 다른 많은 시스템들처럼, 그 시스템도 완벽히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목격하였던 것이다 🙂

그때 그 사람

Silly old Gordon fell in a ditch…

이자는 허우대도 멀쩡하고 또 한때 큰 회사에서 돈을 주무르는 일도 한적이 있어서, 한 큰 종교단체에 사무장 비스무래한 자리를 꽤차게 되었다. 매우 훌륭한 분을 근처에서 자주보며 그 큰 그릇의 언행과 삶을 보면서, ‘혹시 나도 격이 비슷한 것이 아닐까? 나 정도면 어쩌면 이런데 좀 끼일 수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자가, 자기와 유사한 종류의 인간들과 함께 일을 했었다면, 그들이 어떤 이유건 방식으로건 이자의 발상에 재동을 걸어 일종의 경고를 해주었을 테지만, 이자의 주위에는 그런 유용한(?) 자들이 없었다. 일단 이것 저것 주어 모아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한 권 출판하였다. 비영리출판단체가 아니고서는 출판하기 어려운 내용과 수준으로, 인쇄된 책 대부분은 아마 자기 서재에 꽃혀있었을 것이다. 내가 직접 집을 방문하여 목격한 적은 없다 – 실재로 책은 대략 읽어 보았다. 역시 쓰레받기… 읽는 모든 사람들은 아는데 정작 쓴 본인만 모르는 경우. 장차 큰 비 내릴 징조…

어쩌다 이자와 한번 엮일 기회가 있었다. 이자가 무언가 강연을 하는 중에 내가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잠시 졸았다. 뒤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아마 이때 이넘이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뭐 중요한 사람이라고… 사람이 좀 졸 수도 있고 그렇지… 아니 아니다.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니, 중요한 사람이 말씀하시는데 발칙하게 졸은 넘을 용서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 이외에는 이넘과 엮인적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10년에 한번씩, 어떤 종교단체들은 ‘Synod’ 라는 매우 큰 행사를 주최한다. 관련성직자들, 관련단체들 그리고 신도대표들이 참가하여 2박3일간 큰 회의를 한다. 나도 그때 우연히 참가 하게 되었다. 행사중 많은 소모임 토론등이 있는데, 한 토론장에서 이넘과 정통으로 마주 앉게 되었다. 난 아는 것도 없지만 그보다 꿀을 먹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글세 이넘이 주변에 앉은 참가자분들에게 ‘저 자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여기서 뭐하나’ 투의 조롱하는 말을 하는것을 듣게 되었다.

큰 행사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큰 행사장에서 오고가며 복도나 계단에서 마주치게 되며, 그 중에는 안면이 있거나 아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한참 좁은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떤 사람이 내려오기에 문득 얼굴을 들어보니 그넘이었다. 그래도 때와 장소가 나를 경건하게 하는지라, 좋은 얼굴로 인사를 하였다, 아마 이름도 불렀겠지. 이넘이 면전에서 완전히 무시하며 그대로 지나가는거라.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2박3일이 지나서 행사를 마치는 총회가 열렸다. 수백명의 참가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서 행사 마무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의견을 수렴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큰 강당에 여러명의 ‘젊고 잘 뛰는’ 지원자들이 무선 마이크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 다닐 준비가 되었고, 모두들 숨죽여 누군가가 첫 스타트를 끊기를 눈치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뒤에 내가 손을 들었고 이내 한 발빠른 젊은이가 내손에 마이크를 쥐어 주었다. 나를 보낸 단체의 견해를,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용기있게 피력하고는 자리에 앉으며, 그 넘의 놀랐을 상판이 문득 떠올랐다. 그넘 때문에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넘에게 받았던 것을 면전에서 되돌려 주었다. 그넘과 나 (그리고 그때 함께 계셨던 고맙고 유머러스 하셨던 그분) 이외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그넘은 잊기를 바랬고 또 편리하게 잊었을 것이다.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자는 이번에는 다른 줄에 서서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이자가 속한 정당은, 늘 대표 1인만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는 1인당이었는데, 투표전후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며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바람에 당선확률이 0%었던 이넘이 졸지에 비례투표로 국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넘이, 당대표 즉 자기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준 바로 그사람과 다툼을 벌이다가 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탈당하면 더 이상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면 안된다. 처음부터 제 능력으로 얻은 자리가 아니었었고, 그 당수에게 기회를 되돌려 주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건데 이넘은 남은 한두해를 꼬박꼬박 봉급받으며 국회의원 노릇 잘 해먹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당수가 된 듣보잡 당을 하나 새로 만든다. 더 하고 싶다…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는 그저 수백표를 획득하며 우연히 올라왔었던 그 무대에서 영영 사라진다. 옛날 이자가 출판했던 그 책 수준이다. 그리고는 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거나 자기 말을 듣으려고 하지 않는지 아마도 오늘날 까지 몹시 의아해 하는, 늙고 꼬장꼬장한 은퇴한 영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의 그릇이 달라지는가? 그릇의 크기가 있는가? 무었이 그것을 결정 짓는가?

오래전 한 월간지에서, 교도관으로 수십년 근무했던 분의 긴 인터뷰를 읽었다. 많은 질문 중에 지금도 가끔 기억나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선천적인 악인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예. 교도소에 오는 사람 10명중 1명 정도는 아마도 선천적인 악인이거나 보통 사람과 확연히 달라서, 비록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범죄자가 되었을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자의 이름이 ‘고든’이었고, 그때 이자가 악인이었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릇이 작은자였고 그러한 자신을 잘 보지도 또 알지도 못했던 자였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그릇은 처음부터 너무 작았던지 아니면 결코 그 크기나 모양이 바뀌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 열 명 중의 한 명처럼…

내 자신도 내가 어떤 그릇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어떤 ‘엮임’이 벌어지면, 쌍방 그릇의 크기와 내용물이(?) 동시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Silly old Gordon fell in a ditch…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Thomas the Tank Engine’ 만화에 나오는 노래중의 하나로, 나도 아이와 함께 자주 불렀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