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두번째 이야기

옛날부터 흥얼거리던 노래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그리고 언젠가 이런 말도 했었다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 차리기가 무척 힘들다’. 오늘은 어제부터 시작한 ‘개인주의’ 이야기를 비교문화적인(?) 시각에서 좀 더 하고자 한다.

• 소속감 혹은 ‘자신을 자신이 속한 집단과 동일시 하는 어떤 경향’이 한국과 이 나라는 무척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팔았던 어떤 물건이 (서비스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반대로 잘되었을때, 한국에서는 흡사 자기 잘못인 듯한 태도로 사과를 하거나 혹은 기뻐하는데 반해서, 이곳에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하거나 일하는 집단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소비자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또 당연하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회사일을 가지고 자기의 일처럼 이리뛰고 저리뛰지도 않고 마음을 졸이지도 않으며, 그저 계약서에 써진 상식적인 수준 만큼만 자신의 삶과 에너지를 일터에서 사용한다. 다시말하건데, 반대편이나 혹은 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 이상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 앞서말한 태도와 관련이 있지 싶은데, 예를들자면 백화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다고 (좋지 않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했거나 혹은 제공하는 방법에서 매끄럽지 못했다고) 그 개인을 직접적으로 나무래고 또 무릎을 꿇리며 사과하게 하는 짓 따위는 이곳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라면, 첫째로 위에서 언급한대로 사람과 그가 속한 집단을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여 그 댓가로 실질적인 이익을 취하는 주제를) 동일시 하지 않으므로 ‘무슨 이런 썩을 상점 / 회사 / 단체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지 (물론 ‘종업원 교육이 개판이구만, 이 회사 곧 망하겠네’ 이정도는 마음속으로 덧붙이겠지) 개인 차원으로는 잘 확대하지 않는다. 두번째로, 평등한 사회구조상 개인의 권리가 매우 존중된다. 위치고하를 막론하고 ‘좀 해달라’고 부탁하지, 돈을 줬고 당신 입장이 이러저러하니 네가 당연히 이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입고 있는 제복보다 그 사람 본연의 권리가 훨씬 더 크다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당연히 생각하므로, 제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확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그래서 ‘지나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종이 이곳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에 학생때, 한 친구에게 ‘어디 들어가면서 누군가가 문 열어주기를 당연한 듯 기대하는 넘’과 ‘목욕탕에 벌러덩 드러누워서 다른 사람의 힘으로 때미는 것이 당연한 넘’은 대가리가 근본적으로 좀 잘못됬다고 내가 말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지나친’ 서비스 업종은 이곳에 거의 없다. 인건비가 비싼 것도 한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사려고 상상하는 사람들조차 없으니 당연히 팔고자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이 더 맞지 싶다. 어제 ‘개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자신의 일을 자기 스스로 해내기를 서로가 기대한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나? 그리고 업종 자체의 존재유무만을 가지고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을 ‘한국에서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로’ 이곳에서 대하는 경우와 그럴만한 업종이 잘 없다는 뜻이다.

•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들 말이, 영어는 존대어법이 없고, 같은 동양권에서라도 중국어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편이고, 일본어가 가장 존대어법이 많고 복잡하며 한국어는 그 중간쯤 된다고 하더라. 영어문화권에서는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 보다는 (구조적으로 제한이 있을터이니) ‘같은 말이라도 어떤 태도나 혹은 방식으로 전달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또 그런식으로 존대를 (존중을) 표현한다. 여담으로, 어제 어떤 국제적인 온라인 서비스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아마도 주말이라서 인도 어디에 있는 콜센터와 연결이 되었던 것 같다. 24x7x365 서비스를 제공하는 큰 회사들은 주말이나 야간에, 인도에 있는 콜센터로 서비스 번호를 되돌리는 경우가 많다. 영어가 좀 되고 또 시간에 관계없이 일하고자 하는 지원자들이 많아서 콜센터 비즈니스가 인도에서는 큰 산업이란다. 말끝 마다 ‘Sir sir’ 하면서 버벅대며 시간을 질질 끄는 것에 거부감이 많이 생기더라. 그런 ‘말’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고 숙련된 ‘태도’로 응대해주면 좋으련만 ‘문화적차이’ 때문에 그만큼까지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것을 나도 안다. 내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하고 또 못된 면이 있어서 (무슨 삼위일체냐? 인생 쉽지 않았겠네?) 이런 경우에 통화를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경우가 이전에는 많았었는데, 어제는 그런 시도를 시작하다가 상대방이 어필하는 말을 좀 들어주고 더 시간을 주어서 좋게 잘 끝을 냈다. 밤에 누워서 문득, 이 여자 아마 중년의 인도여자 같은데, 그녀도 그 콜센터에서 퇴근하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되돌아 가고, 또 다른 어떤 어려움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터에서조차 괴롭지 않게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옛날에 이곳에서 콜센터를 지원하는 기술자로 일했던 적이 있어서 아는데, 이런 콜들을 매니져들이 모니터 하다가 고객을 잘 응대하지 못하고 콜을 놓치면 혼난다. 그리고 만약에 이런 곳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이라면 아마도 쫒겨나겠지. 죽을때까지 결코 다시 만날 수 없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지만, 그녀가 하루를 잘 마치고 또 보수도 무사히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식사도 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기를 나는 마음으로 기원하였다. 내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더 버벅거리는 기술자였을때, 그 누군가도 어쩌면 내게 이렇게 해주었고 또 기원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철드네… 붓다의 가르침이 차가운 콘크리트를 뚫고 스며드는 것인가 아니면 나이와 관련된 단순 호르몬 교란인가 🙂

• 일반화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선진국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다못해 다혈질이고 가족간의 유대가 강하다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조차도, 개인주의적 경향이 훨씬 큰 것을 볼 수 있다.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새로운 세대들은 어쩌면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롭고, 영어권 문화에 오래 노출되고 또 인터넷사용등의 이유로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상대적으로 훨씬 크지 싶다. 동시에, 더불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전세대들의 영향으로 집단주의적인 경향도 함께 가지고 있는 (예를들어, 자신의 무지나 선대의 카르마에 기인한, 일본에 대한 지나치거나 이율배반적인 태도등) 어떻게 보자면 좀 복잡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한 두세대가 더 지나야 안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내가 존경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스승들은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 혹은 실제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 만으로도 (‘자각하는 것’ 만으로도) 큰 발전이며 장차 더 큰 변화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는 의미있는 것이라고. 내가 전에 말했는데 ‘카르마에 휘둘리고 있을때에는 그것이 카르마인줄 깨닫기가 무척 어렵지만, 만약 깨닫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다고.’ 그래서 내가 당신께 이야기 해보는 것이다. 당신이 혹시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깨닫지 못한 당신의 자화상을, 숲밖에서 보는 숲속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어쩌면 훗날 어떤 실수를 저지른 백화점 종업원이 두려움 속에서 당신에게 혹시라도 무릎을 꿇을때,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며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당신 개인의 잘못만이 아니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좋은 태도로 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한국도 그런 멍멍이 같은 일들이 그야말로 멍멍이 같은 일들로 모든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는 나라, ‘개인주의’가 잘 발달된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참된 해탈은 해탈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다. 니르바나는 어떻게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일 뿐이라더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가 모르겠지만 그래도 굳이 밝히고 싶다 🙂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첫번째 이야기

우연히 이곳에서 아래에 보이는 도표와 ‘개인주의’에 관련된 설명을 보게 되었다. ‘개인주의적 성향’을 나라별로 표시한 이 도표에 따르면, 미국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한국은 반대로 집단주의적 성향이 높은 국가중의 하나로 나타나 있다.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은 스페인과 소련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통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을 더 뒤지며 교차검증을 시도하던 중에 원문으로 생각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몇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것인데, 그 중에서 ‘개인주의’ 편에 쓰인 글을 아래에 옮겨와 대략 번역하였다.

이토록 차이가 크게 나는 두개의 상이한 나라에서, 이럭저럭 살아온 내 자신이 나름대로는 놀랍고(?) 또한 한국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이 통계를 기억하면서 되씹어 보니, 나름대로 설명이 되어지는 부분도 좀 더 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Individualism is the one side versus its opposite, collectivism, that is the degree to which individuals are integrated into groups. On the individualist side we find societies in which the ties between individuals are loose: everyone is expected to look after him/herself and his/her immediate family. On the collectivist side, we find societies in which people from birth onwards are integrated into strong, cohesive in-groups, often extended families (with uncles, aunts and grandparents) which continue protecting them in exchange for unquestioning loyalty. 개인주의는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와는 상반되는 수준만큼 (정도로) 개인들이 단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보살피는 것이 기대된다. 집단주의자의 입장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태어나면서 부터 강하고 끈끈한 유대로 단체와 대가족의 일부가 되며, 그러한 무조건적인 충성의 댓가로, 단체와 대가족은 그 구성원을 지켜준다.

For example, Germany can be considered as individualistic with a relatively high score (67) on the scale of Hofstede compared to a country like Guatemala where they have strong collectivism (6 on the scale). 예를들면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독일은 상대적으로 과테말라같은 나라보다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In Germany people stress on personal achievements and individual rights. Germans expect from each other to fulfil their own needs. Group work is important, but everybody has the right of his own opinion and is expected to reflect those. In an individual country like Germany people tend to have more loose relationships than countries where there is a collectivism where people have large extended families. 독일 사람들은 개인의 성취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 여긴다. 그들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단체의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그런 구성원들의 의견이 단체에 반영되기를 (구성원들은) 기대한다. 독일처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는 인간관계가 보다 느슨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대가족에 소속되어 집단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와 비교하자면 그렇다.

The United States can clearly be seen as individualistic (scoring a 91). The “American dream” is clearly a representation of this. This is the Americans’ hope for a better quality of life and a higher standard of living than their parents’. This belief is that anyone, regardless of their status can ‘pull up their boot straps’ and raise themselves from poverty. 미국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것을 확실히 대변한다. 그들이 떠나온 부모의 나라보다도 더 나은 삶과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이를 통하여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아메리칸 드림’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희망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사회적 위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의 구두끈을 졸라매면’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경씨

인경씨는 서른이 넘은 프로골퍼예요. 전에 세계에서 유일한 도마 (뜀틀) 기술인 ‘양1’을 창조했다고 소개했던 체조선수 양학선 선수처럼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인경씨는 키도 작고 얼굴도 평범하며 또 나이도 많은 축에 속하는 골퍼예요. 온갖 스폰서들의 이름이 붙은 옷을 잘 차려입고서 섹시하게 배꼽을 드러내며 스윙을 날리는 상품성(?) 있는 골퍼는 아니랍니다. 인경씨 보면, 다른 골퍼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한복을 잘 차려 입은 북조선 미녀를 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 인경씨는 언제나 열심히 스스로 훈련을 하는 골퍼였고 또 재능도 있었어요. 그래서 한 5년쯤 전에 미국에서 열린 아주 큰 경기에서 (‘매이저’라고 해요)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었어요. 얼마나 가까이 두고 있었던가 하면 30센티 앞에 두고 있었어요. 이것을 굴려서 넣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못 넣었답니다. 결과적으로 연장전이 벌어졌고, 그렇게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어떻게 잘 칠 수가 있었겠어요? 졌답니다. 유튜브에, 골프 최악의 순간, 비운의 골퍼 이런 종류의 영상에 나오게 되는 치욕과 수모를 당하게 되었어요. 다시 마음을 추스려 잘 해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다음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우승은 커녕 상위권에도 들지 못하며 점점 잊혀졌답니다. 아래 사진은 그때 그 30센티 퍼팅을 실패한 직후의 모습입니다. 차마 인경씨 얼굴을 보기가 어렵내요.
인경씨는 순례여행도 홀로 다녀 보고 또 법륜스님이 계시는 정토회에도 나가서 수행도 하고 명상도 하면서 그때 그 고통을 딪고 일어나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칠흑같이 깜깜한 절망의 밤이 아마도 한 3-4년은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포기했지 싶어요. 그렇지만 인경씨는 포기하지 않고, 그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아 볼려고 열심히 노력을 계속 했대요.

30센티 퍼팅을 실패했던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났어요. 인경씨는 영국에서 벌어진, 가장 권위있다는 브리티쉬오픈에서 (‘매이저’ 입니다) 우승을 하게 됩니다. 참 잘했어요. 그야말로 골퍼의 해탈 열반이 아니겠어요? 부활한 인경씨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에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훨훨 날고 있군요 🙂
인경씨는 이제 서른이 갓 넘었는데요. 앞으로도 오래 선수생활을 하길 바라지만 또 장차 은퇴를 하더라도 참 행복하게 살지 싶어요. 한 훌륭한 인간으로, 좋은 배우자 좋은 엄마 노릇을 하며, 인생의 많은 행복을 누릴 조건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녀가 벌어들인 돈때문이 물론 아니예요.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또 어떤 사람도 대신 찾아 줄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을, 행복의 열쇄를, 인경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찾은 것 같은 느낌이 그녀를 볼때면 들어요. 그 길고 절망적이었던 어둠을 인내와 노력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빛으로 다시 채운 인경씨. 한 인간이 이런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무르익고 여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참 훌륭하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누가 내게 ‘어떤 프로선수와 한라운드를 함께 해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섹시한 미녀골퍼도 또 300미터 티샷 날리는 괴물골퍼도 아니고, 물론 인경씨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겠지요.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인경씨와 한 라운드를 함께 한다면, 그녀가 부러진 날개로 더 높이 나르게 된 그 힘들고 외로웠던 과정을, 그리고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겸손하게 사는 그녀의 품위 있는 삶을 이야기 듣고 싶어요.

인경씨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지 싶네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 ‘더 로즈’ 베티 미들러가 불러요. 그리고 내 나름대로 번역을 덧붙였어요.

The Rose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

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

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

And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

어떤 이는,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익사 시키는 강물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이 그대의 영혼을 피흘리게 하는 면도날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사랑이 끝없이 아픈 갈망이며 굶주림이라고도 말하는데
나는, 사랑은 꽃이며 당신은 그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상처 받기 두려워 하는 마음이 결코 춤을 새로 배우지 못하게 막고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무언가를 결코 시도하지 못하게 막아요.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베풀지 못하는 법이며
죽는것을 두려워 하는 영혼은 정말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요.

밤이 너무 외롭고 또 갈 길은 너무 멀 때
사랑이란 운이 좋은 사람들이나 성공한 사람들만의 것인가 당신은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한겨울 차가운 눈 아래 묻혀 있는 그 씨앗이
봄이 오면 따스한 햇님의 사랑으로 장미로 피어나리라는 것을.

목련

라벤다를 보고 그 향기를 맡으면, 그 꽃 좋아하시는 어머니 생각이 난다. 골프장에서 날려 먹은 공을 찾아 헤매다가,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보면, 함께 줏어다가 묵 만들던 어머니와의 기억이 늘 새롭다. 목련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오가다 목련을 보면 그 꽃 좋아하는 아내 생각이 난다. 아직 현재형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내가 늘 찾는 식물원에는 사람들이 기증한 벤치들이 많다. 작은 기념동판을 (플라그) 의자에 박아 놓은 경우가 많은데, 자주 읽어 보고 또 몇 개의 의자는 이제 매우 낯익게 되어 인사를 나눈다. 짐작하다시피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것들이다. 내가 자주 찾는 식물원의 어떤 장소에는 2개의 벤치가 있는데, 하나는 채 스물이 되기 전에 죽은 어떤 젊은이를 그 가족들이 기리는 의자다. 이미 죽은지 40년이 넘었으니, 플라그에 세겨진 그 가족들 (그때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그 사람들) 중에서도 이미 이 젊은이의 뒤를 따라간 사람도 있지 싶다. 그야말로 인생무상(?)이다. 또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한 1-2년 전에) 새로 설치된 벤치인데 ‘이 비밀의 정원을 (이 장소를) 사랑했던 부부’라며 나란히 이름이 적혀 있다. 앉을때마다,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혹시 살아서 우리가 이곳에서 마추쳤던 적은 없었을까 생각하며, 벤치를 고마워하고 또 명복을 빌어드린다.

지금은 플라그를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누군가가 읽을 플라그가 되는 것이 인생 아닌가. 이전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오늘 점심때는, 철 이르게 피어난 목련 나무를 지나며 사진을 두장 찍어 왔다. 하나는 물론 목련 나무지만 또 하나는 그대에게 아마 흥미 있지 싶다.

‘이 목련은 1935년 8월 28일 심어졌고 1950년 8월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어요’ 이렇게 적혀 있다. 참 그때 우리 뭐하고 있었지 🙂

그리고 ‘인생무상’ (人生無常) 이라는 말은 사실은 불교적 의미를 담은 표현인데, ‘삶이 허무하다’ 라는 뜻 보다는, ‘우리의 삶에는 늘 같은 것 그리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 그런 뜻이 되겠다.

팔자 바꾸는 법

궁금하지요? 나도 궁금합니다. 바꿀 수 있을까요?

1. 지천명 혹은 주제파악 (스승)
2. 적선
3. 명상 (기도)
4. 독서
5. 풍수 (명당)

옛날부터 구전되는 5가지 팔자 바꾸는 법입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풍수 혹은 명당’은 조상의 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심신이 평온하게 살면 팔자가 나아지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뜻으로 받아 들이면 좋겠네요. 다섯가지 모두 맞는 말씀 같군요.

지난번에, 붓다께서는 그분이 깨달은 ‘세상이 돌아가는 Dhamma’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이것에서 예외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당신과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This is the way it is.’ 우리 이것 잘 기억하면서 계속 읽어 봐요. 참,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쓰는 글은 오늘 달리는 중에 깨달은 것이예요. 읽고 나거든, 과연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지 아니면 두뇌를 해치며 달리기를 하는지 각자 판단해 봐요 🙂

대학전산팀에 직원도 적지 않고 또 전체 교직원은 몇 천명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도 뛰어 갔다 온 그 풍력발전기가 있는 작은 산에는, 교직원은 커녕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거의 없어요. 조건은 같지 않나요? 그곳의 위치, 대학의 근무 여건, 날씨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고.

오늘 그곳에서 달리면서, 같은 조건을 현재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었보다도 먼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원하는 바가 설령 (우연히) 같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만으로는 동일한 결과를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가 현실과 딱 부딪치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예요 (무너지거나 사라진다는 뜻이예요).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현재 바로 이 순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경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예요. 그 사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의 경험을 어떤 강도로 해보았는가, 즉 경험의 실질적인 양과 질이 그 사람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같은 아름다운 날씨에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곳에 오늘 한 번 뛰어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곳에 점심시간에 뛰어 올라가는 사람은 드물어요. 왜냐하면, 그것과 관련한 경험의 양과 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조건은 같지만 원하지도 않고 또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담배 끊는 이야기를 해봐요. 어떤 흡연자는 끊을 생각이 아예 없어요. 그러면 다만 흡연이라는 행동의 결과와 더불어 사는 것 뿐이지요.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많은 흡연자는 아마도 담배를 끊고 싶어 할꺼예요. 그리고 ‘자유의지’로 결정은 하지만 (스스로 원하고 마음은 먹지만) 대부분은 며칠 혹은 몇주 이내에 실패해요. 왜냐하면 담배를 끊는다는 어떤 행위에 대한 ‘총체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끊게 되지요.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인 그 ‘총체적 경험’이 담배를 끊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양과 질에서 임계점을 돌파했기 때문에 담배를 결국은 끊게 되지 싶어요. 금연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무었이 생겨 났나요? 금연에 대한 ‘총체적 경험’ 그 양과 질이 늘어난 것이지요. 우리 이것 잘 기억하도록 해요.

그럼 ‘총제적 경험’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거나 늘일 수 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 내가 산에서 깨달은 거예요. 우리의 삶은 담배를 끊는 그런 종류의 행동 혹은 시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고, 또 나아가 담배를 끊는다고 건강이 저절로 찾아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예요. 사람들이 (버켓리스트를 만들어) 죽기전에 ‘일등석 타고 북구에 가서 오로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본들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단지 그렇게 해보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다고 또 뭐가 달라지나요? 그런 일회성이고 간헐적인 ‘경험을 위한 경험’은, 의미있는 ‘총체적 경험’으로 쌓이지 않으며, 따라서 인생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었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경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경험들을 허락해서, 내 ‘총체적 경험’의 양과 질을 늘이게 할까요? ‘총체적 경험’의 주인은 우습게도, (두뇌가 없는)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몸을 쓰는 습관’ ‘마음을 쓰는 습관’ ‘무었을 하는 습관’ 그리고 ‘무었을 하지 않는 습관’ 바로 이 습관들이 결국은 그대와 나의 ‘총제적 경험’을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렇게 모여진 유의미한 총체적 경험이, 당신과 나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통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오늘 실현하게 허락하는 것이지요.

중3때 담임이셨던 키작고 눈매 무섭던 선생님은 자주 몽둥이를 드셨어요. 목재소에서 맞춤 주문한 사랑의 매. 늘 교탁 아래 잘 준비 되어 있었어요. 월말고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혹은 다른 다양한 일들이 있을때면, 나를 포함한 급우들은 늘 그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드려 맞곤했어요. 허벅지 같은데를 그런 굵은 몽둥이로 수차례 맞으면 피멍이 크게 드는데, 한번은 부모님도 보셨어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을때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데요. 참 잘했어요 🙂 그런 폭력이 내게 어떤 영향을 장기적으로 끼쳤는가가(?) 오늘의 주제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 주제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었어요. 급우들은 모두 떠들썩하고 들뜬 기분으로 교실에서 왁짜지껄 소란하게 잡담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모두들 내려와서 강당으로 가라고 한두번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학급 전체에 말했어요. 우리는 그래도 계속 떠들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단을 뛰어 올라 왔어요. 그리고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다행히 오늘은 몽둥이는 없었지만) 우리 급우들 모두에게 차가운 복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기를 시켰어요. 이제 한두시간 후면 졸업할 제자들인데요… 그때 나는 고작 열댓살 먹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지만,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의 매를 드시다가 이제 스스로 변하고 말았구나. 이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줄담배 때문에 일찌기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시작되었던 그 몽둥이를 상습적으로 드는 ‘습관’이 선생님의 ‘총체적 경험’의 크고 중요한 부분을 어느 순간부터 차지하게 되었었던 것 같아요.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선생님의 ‘자유의지’는 어느 순간부터는 바로 그 습관이 만든 총체적 경험의 종이 되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마 그날 선생님도 댁에 가셔서, 늘 피우시던 독한 한산도인가 하는 담배를 태우시며 자신에 대한 좀 이상하고 불편한 그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서웠지만 존경했던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무지하게 얻어 맞았던 허벅지도 대가리도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은혜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니 요점 정리를 해야겠지요? 먼저, 붓다께서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삶의 조건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되요. 그리고 그 습관은 우리에게 ‘총체적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가 좌지우지 (결정) 되는 거예요. 이렇게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이 만드는, 바로 이 ‘자유의지가 우리 자신의 팔자를 바꾼다’고 나는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확실하게 모르지만, 결정론을 아주 반대하셨던 (이건 내가 알아요) 붓다께서도, 아마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으로 짐작해요. 차차 더 알아보고 확인해서 이야기 할께요.

누군가를 그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산길에서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 비슷해야겠지요. 동료 직원이든지 근처 동네에 살던지. 나이도 이십대 🙂 그리고 그 사람도 달리기에 있어서, 나와 비슷한 습관이 있어야 하고, 그 오랜 습관의 결과로 나와 비슷한 ‘총체적 경험’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러면 ‘자유의지’에 의해서, 어느 아름다운 겨울 오후에 그 사람과 나는 그 산길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거지요…

달리기 하고 싶어졌어요? 팔자 바꿀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