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은 알지만 가치는 모르는

오래전 티비에서 웃기는 실험을 한 것을 봤다. 똑 같은 남자를, 한번은 평범하게 입혀서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해보고, 또 한번은 아주 좋은 차를 몰면서 같은 시도를 해보는 실험이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부유해 보이는 (같은) 남자에게 전화번호를 주었던지 내가 그때 받은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여자들을 나무래는 것이 주제가 아니다. 물론 훌륭하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내가 사는 나라에서 똑 같은 실험을 한다면,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물론 여기도 얼빠진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사회적으로, 돈을 앞세우는 사람을, 무언가 모자라고 유치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크다. 한국이 ‘무었을 살 수 있는가 (무었을 소유하고 있는가)’로 부유함을 드러낸다면, 이곳은 ‘무었을 할 수 있는가 (소유한 것을 가지고 내가 무었을 할 능력이 있는가)’로 부유함을 드러낸다.

이곳도 돈이 주는 편리함이 분명히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돈으로 안되고 돈으로 못사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 돈 맛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살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뭐 이런 후진국이(?) 있는가 불평할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성숙한 정도는, 돈을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는지에서 잘 드러난다. 이 나라 수상이 (절반 정도 미국인 같은 괴상한 자) 국민들에게 오지게 깨지고 있는데, 이 입만 산 철부지를 (개인적으로는 아주 부자) 이 나라 사람들이 심하게 비난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모든 것들의 가격은 알지만 어떤 것의 가치도 모르는 인간’ 이더만. 이게 얼마나 심한 비난이며 비하인지 아나?

한국은 어때? 사회 구성원들이, 가격도 잘 알지만 가치에도 큰 의미를 두는 사회인가? 가격은 뭐고 가치는 뭐지? 가격은 물건 자체에 매겨지는 것이지만, 가치는 (그 물건을 가지고)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지.

돈으로 안되는 것이 많고, 사회 구성원들이 바로 이 사실을 명백히 알며 그에 맞추어 살아가는 나라가 건강한 나라요 살기 좋은 사회 아니겠어? 돈 없는 내게는 이모저모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

와인 wine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만 ‘와인은 음식의 일부다. 그리고 식사는 시간의 일부다.’ 내가 만든 말인데, 오늘 이 글의 주제다.

일이천개 와인병을 열어 본 사람으로서 (‘열어서 보기만’ 했다) 30-50달러대의 와인들이 가격대비 맛이 가장 좋다는 ‘정직한 전문가’들의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한국에 수입되고 나서 형성되는 가격대는 모른다). 그 정도 가격대라면 80점을 웃도는 상당히 좋은 와인일 가능성이 높다. 레드와인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장기보관의 가능성이 있다. 아무 와인이나 사다가 지하실에 오래 놓아 둔다고 맛이 숙성되거나 나아지지는 않는다. 와인은 만들어질 때부터 족보가 좀 있다.

그런데 이 좋은 80점대의 와인에 만족하지 못하고 90점이 넘는 와인을 찾기 시작하면 가격이 그 10점 차이 만큼에 비례해서 오르는 것이 아니라 몇백퍼센트는 쉽게 오른다 (몇배의 가격). 그리고 95점을 넘는 와인을 마셔야 되겠다는 발상을 하기 시작하면, 그 데미지는 (당신 지갑에) 열배 스무배 혹은 그 이상으로 커지게 된다.

한국에서도 그런 듯 한데, 일부 영어권 소믈리에들도 (와인감정가) 와인을 평가할때 흔히 무슨 열매맛, 무슨 과일맛, 무슨 나무향, 무슨 후추맛 하다못해 가죽향등등의 표현들을 하는데, 나는 딱 질색이다. 그런 표현을 주로 하는 자들은 그대로 패스다.

최근 K푸드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으며, 서구의 음식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는데, 이런 상황에 관한 뛰어난 분석을 근래에 본 적이 있다. 해외에서 오래 살며 비슷한 경험을 해 본 나로서도 100% 동의했던 딱 한 줄의 통찰이었다. ‘그들은 음식을 (K푸드) 먹고 어떤 객관적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유행을 따라서 적절한 말을 할 뿐’ 이라는 것이다. 즉 서구인들은 K푸드를 먹는다기 보다는 ‘유행을 먹는다’는 의미였다. 삼십여년 전에는 이곳에서도 예외없이, 한국산 가전제품은 한쪽 구석에서 싸구려 취급, 한국음식은 ‘그런 괴이한 것들을 먹다니, 이상한 종족들인가?’ 그런 대접을 받았었다. 내 첫 직장 매니져도, 내가, 아내가 아이를 낳고나서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고 했을때 갑자기 입을 막으며 구역질을 참는 모습을 보였었는데 (미역은, 이곳에서는 마치 잔디나 잡초처럼 그 누구도 먹으려는 상상도 하지 않기 때문) 그땐 크게 상처 받았지만 (이곳에 살면서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젠 지난 일이고 그도 이미 죽었다. 명복을 빈다. 담배 대신에 미역을 좀 먹었었더라면 🙂

부대찌게나 해물탕이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다고 가정해 보자 (수십년간 다양한 계층의 서양인들에게 한국음식을 대접해 본 경험에 의하면, 실제 그리되긴 어렵지 싶다). 그것을 서양 음식평론가들이 호평을 하면서 ‘아! 이 부대찌게에 사용한 햄은 2024년산 무슨무슨 제품 같고요, 면은 굵기나 쫀득함을 볼때 아마 무슨무슨 브랜드가 아닌가 싶고요’ 하고, 또 해물탕은 ‘아! 여기에 사용한 쭈꾸미는 아무래도 맛과 씹히는 감촉을 볼때 전라도쪽 보다는 동해안 쪽에서 온 것 같고요, 고추가루는 4-5년 숙성된 무슨무슨 지역의 것이 아닌가 해요.’ 이런 말들을 한다면, 그대와 나는 처음에는 좀 신기해 하다가 차차 ‘이 자가 좀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리라. 우리는 (너무나 당연히) 부대찌게나 해물탕을 먹고 평가하지, 그 속에 든 햄이나, 면 혹은 조개나 고추가루를 개별적으로 감상 혹은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나에게는, 훌륭한 와인을 마시는 것과 맛있는 부대찌게나 해물탕을 먹는 것이 별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와인을 감정하면서 무슨무슨 과일향이니 무슨무슨 나무 열매맛이니 떠드는 것은, 앞서 말한 (가상의 예로 들어 본) 부대찌게나 해물탕을 먹으면서 이상한 평가를 하는 서양의 음식평론가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앞에서 내가 뭐랬더라? 똑 같은 K푸드를 가지고, 그때는 구역질 지금은 판타스틱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한다고? ‘유행을 먹고 유행을 말할 뿐’이라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다.

수많은 와인 전문가들이 이러니저러니 말들과 의견들이 끝이 없는 줄 알지만 (아무도 모를 미래에 대한 ‘점쟁이들의 말’ 그리고 누구나 일가견이 있는 ‘골프 이야기’등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와인에도 있는 듯) 그중에서 한 사람, 내가 ‘이 양반 정말 와인을 아는 분이네’ 했던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수십년 산 사람인데 (유학 및 대학강의. 와인과는 관련은 없는 분야로 기억) 개인적으로 와인에 아주 조예가 깊은 분으로 소개되었다. 이 양반이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무슨무슨 과일향 그런 헛소리 대신에 한마디 먼저 던지더라 ‘(프랑스에서) 와인은 음식의 일부, 즉 식사의 일부로 취급된다’ (따라서 와인만을 즐겨 마시지도 않으며, 와인 자체만을 그리 왈가왈부 하지도 않는다). 내가 여태껏 느끼고 생각해 온 바를 딱 한마디로 표현하는 분을 그때 내가 처음으로 만났다.

내 경험에 따르면 그리고 그 경험에서 생겨난 내 의견에 따르면, (서두에서 밝혔듯) 와인은 음식의 일부이기에 그리고 식사는 시간의 일부이기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사랑과 기술로 만들어낸 음식과 더불어 마시는, 내가 고른 80점대 와인들은 (사랑하는 이들이 없는 시간에 기술로만 만들어진 음식과 같이 마시는) 어떤 95점대 아니 99점대의 와인들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호화보트 위에서 선남선녀들에 둘러싸여 일급요리사가 만든 음식과 수백만원 하는 와인을 마신들, 우리들 모두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똑같은 인간의 조건을 (생로병사, 오감의 한계, 정신적, 심리적, 영적 갈구등) 공유하는 존재들임에, 비싼 와인 그 자체가 더 큰 만족과 행복을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무지와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의 참된 JOY 그리고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결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또한 금전적인 우열에만 좌우되지도 않는다. 나아가 인생이라는 긴 시간 안에서, 참된 가치들은, 남들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 저절로 드러나고 매겨지게 되어 있다.

오늘 한 수 배웠나? 하지만 날뛰지 마라. 잘 난 사람들이 모여서, 90점 혹은 95점 되는 고가의 와인을, 거룩한 표정으로 마시면서, 이 빈티지는 무슨무슨 과일향이 어쩌구저쩌구 하고 있는데서, 해물탕 혹은 K푸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그대는 미친X 취급을 당할 것이다. 애꾸눈들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조심해야 한다 🙂

개가 당신의 자식?

인연은 소중합니다. 설령 개와 맺은 인연일지라도, 십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다 보면, 특별하고 애틋하고 또 잃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요. 우리와 함께 12년 세월을 살았었던 버둑이 녀석이 죽은지도 이제 2년이 되었어요. 뒷산에 온 가족이 울면서 묻어 주었는데 요새는 자주 가지 않게 되네요. 하지만 출퇴근길에, 버둑이가 다니던 그 가축병원을 지나면 아직도 생각이 많이 납니다. 처음 우리집에 데리고 올때 안고 왔던 사람도 나였었고 또 안락사 시키러 마지막으로 그 가축병원을 함께 걸어 갔던 사람도 나였어요.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었는데요, 그 어리버리하고 먹을 것만 밝이며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잘 자던 븅신개 (내 나름의 유머러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버둑이는 내게 좋은 교훈도 남겨주고 떠나 갔어요. 지금도 그 븅신개를 생각하니 븅신주인이 눈물 나네요.

몇년전에 호주에서 인도네시아로 수출한 도축용 소를 (어떤 이유로 소고기를 수입하는 대신에, 살아 있는 소를 수입하여 자기들이 직접 도축. 호주 북부와 인도네시아는 가까운 거리) 인도네시아인들이 비인도적으로 다루는 장면을, 아마도 호주동물보호단체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도축장에서 몰래 찍어서 호주 전체에 방송을 하면서 크게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던 적이 있었어요. 혹시 여러분도 봤을지도 모르는 ’60 Minutes’라는 프로그램에, 이 내용이 방영되는 것을 나도 보았어요.

그 나라의 수준을 보려면, 사람들이 장애인들과 동물들을 어떻게 대접하는가를 보라는 말이 있어요. 지당한 말이지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수준에 맞게 도축하려는 소들을 대접합디다. 그 사람들이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대접할 것 같아요? 가난하고 무식하면, 더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당연하고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인도네시아도 차차 호주처럼 부유해지고 또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면 도축장 환경도 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방식도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민주화되고 더 선진화되겠지요. 지금 선진국인 나라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겠지요.

그런데 방송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돈받고 판 소들이 인도네시아 도축장에서 얻어 맞는 것을 보는 호주인들이 그만 흥분하여 그 소들과 자신들을 동일시 하기 시작했어요. 동물애호협회나 그런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이지 싶은데요, 몰래 찍은 필름에 등장하는, 얻어 맞고 나쁘게 대접 받는 호주소들을 설명하면서 사람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저 앞줄에서 맞고 있는 소는 ‘John’ 그 뒤에 쓰러져 있는 암소는 ‘Jenny’ 이런 식으로 말이예요. 그 장면을 보면서 그런 이름을 듣는 호주 사람들은 기분이 어땟을까요? 마치 내 친구 ‘John’을 혹은 내 이웃 ‘Jenny’를 야만한 동양인 새끼들이 마구 팬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단번에 생기지 않았을까요? 이것을 노렸겠지요, 그리고 성공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소수출 금지).

그때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딱 들었어요. 그 ‘John’과 ‘Jenny’를 호주에서도 죽여서 스테이크로 만들어서 방송전에 당신도 먹고 왔잖아요? 아니 채식하라는 말이 아니고, 식용으로 길러서 판 소가 비록 도축되는 과정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마치 사람처럼 감정이입을 할 수가 있나요? 그리고 그 일부 호주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인) 목적은 달성했을지 몰라도, 이런 발상 자체가,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극히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도 무시했을 꺼예요.

작년에 버디와 오선이 이야기 하면서 ‘개는 개로 대접하는 것이 좋다. 주변에 있는, 개 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사는 동족 인간들에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 개라고) 나오는데로 지껄이고 하고 싶은데로 하면, 당신 자신에게도 그리고 개에게도 좋지 않다’고 말했었어요.

이번주에 우연히 개와 관련된 몇개의 기사를 읽으면서, 기사를 쓴 개인도 단체도 개를 ‘아이들’ ‘우리아들’ 같은 말로 공식적인 매체에서조차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참 왜 이러나 싶네요. 일전에 말했던 ‘out of proportion’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와 인연이 있다고 개를 아이니 아들이니 부르면서 마치 사람처럼 대접하면서, 나와 인연이 아직 없거나 혹은 내가 그 인연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개보다 못한 상태로 살고 있는 것에 털끗만큼의 관심도 없이 살면, 삶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까요? 사람이 사람의 도리가 있듯이, 개나 짐승도 (특히 사람들과 비교할때면) 그들의 위치와 받아 마땅한 대접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호주넘들이, 잡아 먹으려고 키워서 돈 받고 판 소를 ‘John’이니 ‘Jenny’니 부르는 꼴이나, 어떤 자들이 자기 개를 ‘아이’니 ‘아들’이니 부르는 꼴이나 참 가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에 내가 호주인들이 어떤 특징이 있다고 했었지요? 두 나라가 닮아가나요? 점점 선진국이 되어가는 모습인가요 🙂

당신의 기분을 가장 잡치는 인간 – 어쩌면 그 안에 당신이 있다

노르웨이의 노장 골퍼 ‘수잔 페테르센’이 어제 막을 내린 솔하임컵 매치에서 미국팀을 꺽고 유럽팀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기사를 아침에 읽었다.

한때 LPGA경기를 자주 티비로 보면서 이 여자 선수의 경기 모습도 많이 보았었다. 이 선수를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겉은 어른처럼 보이지만 속은 성질 못된 어린아이’ (인데 골프를 잘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침묵하는 뇬) 정도가 될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이 여자의 모습이 티비에 등장하면 밥맛이 뚝 떨어지기 때문에 잠시 채널을 돌렸다가 되돌아 오는 경우도 있었다.

경기 매너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나쁘고, 철없는 못된 언행을 티비 카메라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 당시 이미 서른 내외였다. 카메라가 버젓히 생중계를 하고 있는데도 ‘열여들’ 쌍욕을 해대는 것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 분위기 조성 또 심심할까봐 가끔씩 전설적인 쥐랄을 했었다.

2015년 솔하임컵 경기에서는, 미국팀에 소속된 한국계 골프선수와 일대일 매치를 하던 중에, 컵에서 50센티도 떨어지지 않았던 공을 당연히 컨시드를 받았다고 집어든 것을, 갑자기 가다가 되돌아와서 컨시드 준적이 없으니 반칙이라고 때를 써서 이겼던 적도 있었다. 상대선수 엘리슨리는 울고. 끝까지 제 잘났다고 우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사과 비슷하게 하는데 내가 사과문을 읽어 보니 이것 또한 철부지가 냄새가 솔솔나더라. 참 대책이 없는 인간이다 싶더라.

흔치는 않았지만 예전에 이런 인간들을 직접 상대했던 적이 나도 있었다. 나는 심하게 반발을 했었는데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었다. 나 자신이 그들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상대하는가 궁금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심하게 이런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안받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도를 넘어 (out of proportion) 심하게 반응하고 반작용을 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사람들의 어리석고 철없는 짓을 보고 상대하면서,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유사한 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강하게 부정하고 혐오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최근 메타에 관한 설법을 들으며, 그러한 좋은 수행을 내 스스로에게 먼저 적용시키라던 말씀이 많이 와 닿았다. 그렇게하면 자신의 부족함, 모자람 그리고 나쁜면들을 인정하게 되고 (차차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면들과 공존하게 되면서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살 것이라던, 그 붓다의 가르침이 참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오늘 아침에 든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나도 그대들도 또한 ‘이런 인간들도’ 🙂

시스템 확인

그때 오사카는 신입사원들이 시작하는 시기였다. 여자 신입사원들이 한결 같이 입고 있었던 그 베이지색 바바리처럼, 점잖고 튀지 않는 건물 디자인과 외벽 색깔이 한결 같아 보였던 오사카 시내. 우리 내외는 그중 하나에 들어가 일층에 있는 아케이드 상점들을 둘러 보고 있었다. 한쪽에는 수십명 신입사원들이 모여 있었는데 아마도 첫날 소개식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문득 나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아내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나는 그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아내의 가방을 들고. 들어가는 일본인 여자 두세명이 아마도 짧은 농담을 던지며 웃으며 갔던 기억이 난다. 잠시후 아내가 랄랄라라 하면서 나오는데, 동시에 제복을 입은 경찰관 혹은 보안회사에서 나온 듯한 남자가 급히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며 큰 소리로 무언가를 외쳤다.

나는 이게 무슨일일까 왜 남자가 갑자기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면서 소리를 지르는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내를 바라 보았다. 아내도 의아한 듯. 그때 아주 적으나마 이것이 혹시 아내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서늘한 느낌이 뇌리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밖으로 점잖게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 ‘별 일 없었지?’ ‘응. 그런데 물내리는 손잡이를 찾는데 좀 어려웠네.’ 공용화장실은 포함한 일본의 거의 모든 화장실에는 비데가 설치되어 있고 때로는 복잡해 보이는 버턴이 여러개 달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내는 그 중에서 물내리는 버턴을 찾느라 애를 먹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찾았는데?’ ‘이곳은 새 건물이라서 그런지 더 복잡해 보이더만. 여기 저기 찾아 보다가 한쪽 구석 밑에 빨간색 버턴이 있길래 누르고 나왔지.’

그것은 비상벨이었다. 일본에 있는 다른 많은 시스템들처럼, 그 시스템도 완벽히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목격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