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 인간과 폭력 1

베트남에서 수입되는(?) 수많은 신부들, 천문학적인 규모의 한국-베트남간의 경제협력 그리고 우리세대만 하여도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상당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진 경우도 있어서 베트남은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했던 형님뻘 되는 베트남 친구도 있었고 또 직장에서는 매주 탁구를 치는, 보트피플로 이곳에 정착한 베트남인 동료도 있다.

이 훌륭한 도큐멘터리를 보기전까지 나는 내 자신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상당한 그리고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였었다. Ken Burns라는 그야말로 ‘위대한 감독’이 연출한 이 탁월한 베트남전쟁 도큐멘트리를 나는 2년전에 처음 보았었다. 10부작인데 약 15시간에 걸친 대작이다. 이번 여름 좀 한가한 시기에 10부작 전체를 다시 시청하였다. 2주에 결쳐서 보았는데 오늘 오전에야 끝이 났다.

언젠가 베트남을 한번 방문하고 또 기회가 된다면 무언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그런데 한국측에서 베트남정부에 어떤식으로건 사과의사를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표명 하려고 하면, 베트남정부는 ‘경제협력을 강화하면 좋겠다’면서 늘 직접적인 응대를 피하는 태도로 일관해 왔다는 것을 듣고서 의아해 했었다. 지금도 베트남에 수없이 남아있는 ‘우리 부모형제를 학살한 한국군을 대대손손 결코 잊지 않겠다’는 원한 맺힌 비석들과는 대조적인 반응이 아닌가?

얼마전 한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의 유족이 한국정부를 (국방부) 상대로, 자신의 부모도 희생된 구체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일이 있었다. 그 수많은 증거들과 확인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가 그 유족에게 보였던 반응은, 일본 전범들과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의 영령을 분리해 달라는 소송에서 최근 일본정부가 보였던 반응과 매우 유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송결과를 발표한 일본인 판사는 딱 한마디 ‘기각한다’고 했다던가. 한국정부는 그 베트남 유족에게 ‘증거 불충분’ 이라고 말했다더만.

어쨋던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인데, 승전국인 베트남은 말 그대로 전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패배한 나라, 특히 전쟁의 주체도 아니며 용병을 파견했었던 한국측으로 부터의 사과 따위는 좀 웃기는 이야기로 치부한다는 말을 들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승리한 이 전쟁에 관한한, 한국은 왈가왈부할 대상조차 못된다는 태도다. 듣고보면 일리가 있기도 하고 더 쪽팔리는 기분도 든다.

그 도큐멘터리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것을 보기 전에는 나는 나름대로 베트남이라는 나라와 국민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존중 혹은 존경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 2 나라를 상대로 이십년 전쟁을 치루어, 프랑스군대도 또 미국군대도 힘으로 박살내고 자기들의 영토에서 쫓아낸 자존심의 나라요 국민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두번째로 도큐멘터리를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고 또 느끼게 된 것은, 미국과의 십년전쟁은 사실상 ‘미국이 개입했던 베트남 내전’이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끼리 공산주의니 자유민주주의니 하면서 편을 갈라, 백만 이백만 서로를 죽이는 그 미친 내전에, 미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참전했었고 그들 자신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으로 패전하고 쫒겨났던 전쟁이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도큐멘트리 마지막에, 물론 세월이 반세기 가까이 지났기에 할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 당시 참전했었고 또 승리했던 북베트남 군인들과 베트콩들 중에서 이런말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그런 엄청난 희생을 치룰만큼 그 전쟁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무척 공감이 되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또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 되돌아 보는 지난 역사, 특히 이렇게 인간들의 의지가 충돌했던 큰 갈등과 폭력의 기록들은, 내게 와닿는 바가 이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단지 살생이나 폭력을 하지말라는 도덕책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고. 다음편에…

카르마는 당사자가 죽어도 소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의식과 의도를 가지고 행했던 것들의 결과물인 카르마는 (업 혹은 업식은) 설령 그 당사자가 죽고난 후에도 쉽게 그리고 즉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카르마에 산 사람들이 휘둘리고 그들의 인생이 좌지우지 되는 것을 제 자신과 또한 주변에서 쉽게 그리고 자주 볼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인만 되고 나면 혹은 결혼만 하고나면, 그 부모인 내가 여태껏 만들어 놓은 카르마에서 벗어나 그들이 자유롭게 살게 될것으로 생각하세요? 그 아이들 나이의 두배가 훨씬 넘도록 세상을 산 당신이 바로 어제, 지난달 혹은 작년에, 의식과 의도를 가지고 했던 (그리고 또한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언행들이, 이미 돌아가신지가 오래되었거나 혹은 멀리 사시는 연로한 당신 부모님이 만들었던 어떤 카르마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당신 생각의 버릇, 반응의 방식 그리고 어떤 결정들 속에 그분들의 그림자와 영향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부모자식관계나 부부관계등 밀접한 인간관계는 카르마가 씨줄날줄로 복잡하게 얼키고 설켜 있습니다. 이것을 마치 날카로운 칼로 단칼에 잘라버린다고, 그 많던 카르마가 동시에 단번에 떨어져 나가고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있던 카르마 위에, 더 풀기 어렵고 복잡한 새로운 카르마를 덧붙이는것 뿐입니다. 결코 당신 곁에서 저절로 떠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사랑하는 그 아이들에게서도, 설령 당신이 죽은후에라도, 저절로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씨줄날줄을 한올두올 풀어내야 합니다, 그래도 꼭 해야만 한다면 말이예요. 그래야 당신도 상대방도 또한 당신들이 사랑하는 아이들도 자유롭고 장차 행복하게 살수 있을꺼예요. 아니 최소한 당신이 그들의 삶에, 아무도 원치않고 또 아무런 필요도 없는 부당한 카르마를 평생 짐지우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쉽고 빠른 길은 두고두고 부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선택의 결과를 당신 자신만 감당하게 된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지금 본인도 깨닫듯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부모님들께서 당신께 했던 것들 그리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기억해 보세요. 감사하고 좋았던 것들은 반복하여 당신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인간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좋지 않았던 것들은 당신 자녀들에게 어떤 형태로건 물려주지 않으려고, 당신이 죽는날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부모는 이렇게 힘들고 소리없는 과정을 거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뛰어 올라간 산위에서 나는, 나의 부모들이 내게 남긴 카르마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들의 은혜를 감사함과 동시에, 내가 내 자식에게 어떤 부모로 어떤 카르마를 남기며 살다가 떠나게 될 것인지 생각하며 나 자신의 건투를 빌어 봅니다.

당신도 나도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며 또한 동시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지당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들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때와 장소 그리고 방법을 선택하시길 새해 인사를 갈음하여 기원드립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원인을 모르면 결과라도 따라해본다?

중국의 전설적인 미인이라던 월나라 서씨 이야기를 아세요? 이 미녀가 아파서 찡그린 표정까지도 아름다워서 주변 여자들이 그 표정을 따라했다고 하네요.

사무실 내 뒷쪽편에 앉아서 일하는 젊은이는 한눈에 보아도 선하게 생긴 퉁퉁한 녀석인데요 (동물학을 대학에서 전공하고 동물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꿈이라네요. 지금은 전산일을 하고 있지만서도), 하루종일 양발로 재봉틀을 돌리고 있어요. 한쪽 발을 떠는 넘은 가끔 보았어도 이렇게 양발을 하루 종일 쉼없이 일하면서 떠는 넘은 나도 처음 🙂 그런데 덧붙여서 하루 종일 기지게를 켜요. 아마 나름대로는 어떤 실내체조랍시고 (혹은 마이크로포즈?) 의도적으로 하는것 같아요. 이런말을 하면 듣는 사람들이 기분이 좀 안좋겠지만, 나는 이 젊은이가 세상에 산 기간보다도 더 오랜 기간동안 매일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컴퓨터앞에서 일을 해왔어요. 물론 오래전에 한때 손목이 아팠던 적이 있었고 (아마도 손목수근관증후군 Carpal tunnel syndrome) 또 눈도 불편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꾸준한 운동과 관리로 지금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일하고 또 이 젊은이가 이미 끼고 있는 안경도 쓰지 않아요. 자주 단것과 기름진 것들을 사먹는 이 녀석의 버릇을 보면서 ‘야! 이넘아 나가서 좀 뛰고 운동을 해라. 하루 종일 양다리나 달달 떨고 기지게 켜면서 운동이랍시고 쥐랄하지 말고’ 이런 생각이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요.

아마 한국이었다면, 소위 말하는 꼰대 고참이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No no! 절대 그런말 하면 안되요. 개인적으로 반발할 뿐만 아니라 좀 못된 넘이라면 매니저나 인사부를 통해서 공식항의를 할수도 있어요. 이곳은 그만큼 개인주의가 발달한 곳이랍니다. 며칠전에 말했던 드라마 ‘미생’에서 나오는 그런 끈끈한 직장생활은 (어떨때는 너무 끈적끈적?)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않아요. 일 마치고 한잔? 어쩌다 그런 분위기의 직장도 드물게 있긴 한데요 (젊은이들이 위주인 환경 혹은 매니져가 술꾼인 직장등) 대부분은 ‘일 마치고 문 나서면 남남’이며 인생은 ‘집에서 개인적으로 찾는것’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예요.

한가지 이야기를 더 할까요. 혹시 짐바브웨란 나라의 무가베란 독재자를 기억하세요? 이 넘이 짐바브웨라는 나라에 끼친 해악을 들으면서 (나도 짐바브웨 사람 2명을 친구로 또 직장동료로 옛날에 알고 있었어요. 물론 이 사람들과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서도요) 와! 이넘은 왜 이렇게 죽지 않고 장수를 하는 것인가? 언제 이넘이 죽어서 짐바브웨 사람들이 숨을 쉬고 정상적인 삶을 살수가 있을까 이렇게 늘 저주를(?) 퍼부었어요. 이 나쁜 넘은 100살에서 몇살 빠지는 천수를 누리다가 죽은지가 얼마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 이넘이 죽고 나서부터 짐바브웨에 평화와 번영이 왔을까요? 아니, 오기 시작했을까요? 썩은 이빨을 빼고 나면 건강이 저절로 오는 것일까요? 왜 썩은 이빨이 처음부터 생긴 것일까요? 그 썩은 이빨을 허락했던 구강환경과 생활습관이 발치로 말미암아 저절로 달라질까요? 담배를 끊는다고 저절로 건강해질까요? 대통령을 잘 뽑기만 하면, 아니면 지도층의 잘못을 끊임없이 크게 비난하고 그 사람들을 갈아치우면 세상이 정말 달라질까요?

무가베나, 지금 감옥에 있는 극히 함량미달인 전직 여자 대통령같은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년전에 한국을 방문했을때 친구들 중에서 이 여자를 크게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나는 속으로, 국민의 투표로 뽑은 한 나라의 수장을 이런식으로 막말하고 조롱해도 되는가 반발심이 많이 들었었어요. 이 여자의 실체가 차마 그렇게까지 골때리는 줄은 나도 상상을 못했었던 것이었지요), 내가 생각하건데,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잘하면 70점 못해도 60점’ 정도가 아닐까요? 우리는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똑같은 생물학적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또 비슷한 문화와 환경의 산물입니다. 아무리 날아도 100미터를 보통 사람보다 2배 이상 빠르게 뛸수가 없고 마라톤을 절반보다 더 빨리 완주할 수가 없어요. 그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길고 오래 크게 본다면 말이지요. 자기가 못하는 것을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강요하면서 못살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 이제 본론으로 🙂

현대에 들어와서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 중에서 집단주의나 독재주의가 발달한 나라는 없습니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이전에 블로그에서 말했듯이, 개인주의가 발달해 있습니다. 사무실 뒤에 앉은 젊은이가 직무와 관련된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개인적인 버릇이나 취향 혹은 선택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지 않는것이 ‘보다 더’ 정상이라는 것이지요.

언젠가 우연히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영국인 미녀와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어요. 그녀도 나도 스톡홀름 마라톤을 완주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이야기를 몇시간 나누게 되었는데요, 이 멋있는 30대의 여자를 통해서 영국에서 벌어지는 ‘브렉싯’에 대해서 듣게 되었어요. 아니 Brexit이 얼마나 평범한 영국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지 듣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이렇게 정치에 좀 미친 상황도 어쩌다 있지만, 내가 알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개인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따지고 보면 Brexit도, 자기들 일자리에 그리고 삶에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영국사람들이 광분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축구만큼도 영국인들의 관심을 끌지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선진국 사람들이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은 첫째로는, 정치가 사람들의 삶을 현저하게 발전시키거나 크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겠고 둘째로는, 그렇게 자기와는 별로 그리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곳에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과 관련된 곳에 (다른 사람들에게 왈가왈부할) 에너지를 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 싶네요.

무가베가 죽어도 짐바브웨는 당장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아니, 짐바브웨의 발전을 크고 길게 보면 무가베는 그저 일어날만한, 이빨을 오랫동안 닦지 않고 좋지 않은 것을 먹는 버릇을 가진 사람의 이빨이 썩는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그런 종류의 일이었지 무슨 결정적인 일이나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예요. 히틀러가 일차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해서 부상당했을때 우연히 어떤 영국군인이 자비를 베풀어 죽이지 않았다는데요, 그때 히틀러가 죽었다고 그 다음에는 세상이 평화롭고 전쟁이 없었을까요? 어금니가 썩을 상황이 지속된다면, 오른쪽 어금니가 이미 빠져버린 상태에서 왼쪽 어금니가 썩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썩은 이빨 아프게 빼면서, 구강 관리하지 않고 나쁜 버릇을 가졌던 자신을 깨닫고 구강관리의 전기로 활용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또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을테고요. 담배를 힘들게 끊어서 만암의 근원을 멀리했지만, 금연이 다이어트와 운동에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못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꼰대짓을 하는 것이 왜 바보짓인지 너무 길게 이야기 했나요? 왜 지나치게 오지랖 넓은 짓을 하면서 자신의 에너지와 삶을 낭비하는 것이 길고 크게 보면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리석은 짓인지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 했나요?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은 어쩌면 월나라 서씨의 찡그린 얼굴이라도 따라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훨씬 더 이익이 아닐까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

혹시라도 이 글의 의미를 ‘무기력 무책임 무감각’ 이런쪽으로 해석했다면, 이글들을 읽어 보면 좋겠어요. 비행기 타봤지요? 이륙직후 승무원들이 비상착륙 교육할때 뭐라고 합니까? ‘자신이 먼저 산소 마스크를 확실하게 착용을 하고난 이후에 주변의 가족과 다른 승객을 도우라’고 하지요. 내 경험에 따르면, 개인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단지 비상착륙뿐 아니라 일상 사회전반의 모든 일들이 바로 이러한 상식을 근거로 (이러한 상식을 인정하며)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같은 한계와 수준을 공유하는, 어떤 주어진 시간과 공간속에서 잠시 있다가 가는,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역사를 바꾼, 역사에 남을, 시공을 초월한 위대한 영웅이나 성인은 거의 없어요. 내 주변에는 확실히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 주변에도 거의 없을꺼예요. 그러니 그런것 될려고도 하지말고 찾으려고도 하지말고 애먼사람 등떠밀어 그렇게 억지로 만들려고도 하지 마세요.

‘자신이 먼저 산소 마스크를 확실하게 착용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주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며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존 그리고 개인 행복 추구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옛날에 아내가 멋을 좀 부릴때면 ‘월나라 서씨 몸종’ 운운 하면서 야비하게 놀렸던 적이 있었는데요, 어쩌면 아내는, 내가 오늘에서야 깨닫는 이 진실을 이미 그 옛날부터 알고서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지도 모르겠어요 🙂

그곳에 왜 올라갔냐고?

원래 제목을 ‘그곳에 왜 올라갔냐고? 지금 당신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데?’ 이렇게 붙였는데 너무 길어서 줄였다.

마리나와 클라우디아는 스페인 카탈로니아에 사는 7살 귀엽고 발랄한 소녀. 너무 이뻐요. 나도 그런 딸 있었으면 좋겠네 🙂 그곳에서는 매년 ‘사람탑쌓아올리기’ 대회가 열리는데, 두 소녀도 한 팀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선수들이시다. 가장 겁나지만 또 가장 쿨한 임무를 맡았다. 아저씨들을 밟고 타고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 이것 보면 좋은 사진 많이 있으니 더 이해가 될 듯. 그리고 귀여운 클라우디아와 마리나는 여기에서 볼 수 있어요. 사실 나도 그 소녀들을 ‘One Strange Rock’ 이라는 National Geographic 도큐멘터리에서 만났다. 전에 블로그에 몇 차례 언급했던 그 도큐멘터리. 꼭 한번 보기를 그리고 또 보게 되기를… 당신의 삶이 바뀔 수 있다. Overview Effect 라는 현상이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보는 눈이 아마 달라지지 싶다. 왜 마리나와 클라우디아 나오는 사람탑쌓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인간이 인간의 두뇌를 써서 인간의 모습으로 사는 컬러풀한 스넵샷’을 그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아래에 두 번째 예를 들어 더 이야기 하고 있으니 계속 읽어 보자.

Dawn Wall이라는 도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두 미국인이 요새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의 1,000미터 높이의 수직 암벽을 맨손으로, 수 년을 준비하여 19일에 걸쳐서 오른 인간 드라마다. 이것도 좋은 도큐멘터리다. 나는 우연히 한밤중에 빤스바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박수를 치면서 보다가 결국은 눈물을 (빤스에)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또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박수를 치면서.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위험 천만한 암벽등반을 하는 미친넘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과 내가 직면하는 우리 삶의 실체를 그 본질을, 이 두사람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상대하는지 보여주는 ‘드라마’다.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인 2시간짜리 주말 드라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이 돈들이고 힘들여 촬영하고 편집해다가, 나 같은 사람이 코딱지 후비면서 집에서 편안하게 보게 해 준 것을 나는 매우 감사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요즘 같은 세상에는 3년 수행하면 해탈해야 한다고 했지 싶다 🙂

암벽등반을 잘 모르는 우리들은 이 두사람이 이룬 성취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 성취의 크기로 그들의 크기와 깊이를 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좀 감이라도 있으면 좋지 싶어서 예를 들어본다. 이들이 수 년의 준비로 그 19일 동안 이룬 성취는, 보통 등산으로 치자면 아마도,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 14좌를 무산소 등정한 것과 맞먹지 않을까 싶다. 14좌를 성공적으로 등정한 사람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십여개국에 이십여명 있다고 들었지만, 무산소등반은 아무도 해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상상이지 싶다 (확인결과 있었음. 틀린 비유지만 그래도 의미는 전달 됬을 듯) 그것을 했다니까 이 두 미친 사람들이 🙂 상세한 내용과 감동은 그대 스스로의 손에 맡기고 나는 이제 본론으로.

다시 말하건데 나는 어떤 어려운 성취를 이룬 인간승리를 주제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대단한 성취를, 등반가 토미도 케빈도 그리고 이쁘고 씩씩한 클라우디아와 마리나도 이루었지만.

두 암벽 등반가는 그 역사적인 등반 이후에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사가 되어 수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한 미국의 대담 프로였던가 아니면 뉴스프로였던가에서 어떤 방송하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슬쩍 던진 멘트가 있었다. ‘너무 멋지고 너무 훌륭하고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그 사람들 그곳에 왜 올라갔다지…’ 내 귀에 딱 꽃혔는데, 그때 본능적으로 내게 떠올랐던 대답이 있었다. 물론 지금 기억에도, 그 멘트가 대답을 요구했던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보통 사람들이 궁금해 할 수도 있는 그런 의문’을 좀 가볍게 던진 ‘약간은 빈정대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내 대답이 ‘지금 당신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데?’였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미 나는 그 멘트가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고 또 악의적으로 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멘트에 깔려 있는 숨길 수 없는 의미를, 이 세상이 가치를 두는 바로 그 의미를, 나는 순간적으로 간파 했었다. ‘엄청난 돈을 쓰고 장비를 들여 올라 갔지만 결국은 내려 와야 하지 않았는가?’ 아마 이런 의미였을 것으로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 대답은 이렇다.

10부작인 ‘One Strange Rock’에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 하는 어떤 상황에 클라우디아와 마리나가 (다시말해 ‘결국 무너지는 사람탑을 왜 그 난리를 치며 쌓는데요?’ 물을 수도 있는 그런 장면이) 등장했었을까? 바로 인간의 인간 됨. 즉 인간의 두뇌, 창조성, 협동과 같은 인간의 참된 힘에 대해서 말하는 에피소드에 한 예로써 등장했던 것이다. ‘인간의 인간 됨’ ‘인간의 참된 힘’. 더 벌고 더 쓰고 더 폼 잡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다시말해 더 인기있는 티비프로그램을 만들고 더 인기 있는 인터뷰를 해서 더 이름을 날리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무너질 줄 뻔히 알며, 쌓아 올려본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는 사람탑을, 매년 돈과 정력을 엄청나게 들여 다치고 싸우고 지랄을 하면서도 쌓아 올리며 울고 불고 사진찍고 뽀뽀하고 생난리를 치고, 그넘의 돌댕이에 기어 올라가 보려고 수 년 동안 수십 수백번을 찾아 가서 (밧줄 타고 꼭대기에서) 이리 내려오고 저리 내려오면서 어디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면 다음 스텝이 나오는가, 손의 한 움직임 발의 한 스텝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또 시도하기를 수백 수천번. 그 짓을 손가락이 찢어지고 온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고 삶이 정지하도록 했던 결과로, 그넘의 돌댕이에 결국은 기어 올라가서, 좀 있다가 다시 기어내려 오는, 바로 그것에 ‘인간의 인간 됨’ ‘인간의 참된 힘’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왜 사람들이 미국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지 생각 해본 적이 있나? 잘 만들기 어려운 인공위성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른 나라들을 몰래 훔쳐보고 또 제 이익을 위해서 과학기술로 야비한 짓을 하는 넘들이 그곳에 득실 거리는데도? 내 생각에, 그런 인공위성 같은 것들을 만들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자기가 좋아서’ 하는거라. 그리고 이 미국이란 나라가, 자기가 좋아서 하는 별의 별짓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는거라. 왜냐하면 인간의 위대한 성취나 거대한 진보는 이렇게 자기 좋아서 하는 미친넘들로 말미암아 생긴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이것을 알아주고 이해 해주고 박수 쳐주고 대접 해주고 또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나라. 그 나라가 미국이란 말일세.

희망컨데, 이글을 읽고 난 그대가, 언젠가 이런 도큐멘터리들을 보게 되었을때, 그때 그 멘트했던 방송사 사람처럼 ‘뭐야 이거?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저럴 시간있고 여유있으면 무언가 생산적인 것을 하지’ 그런 말 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넘들 (그넘들이 하는 그런 종류의 짓들) 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유인원에서 벗어나 문명인으로 사는 최대 최고의 원인(이유)이자 결과(증거)이며, 또 크고 길게 볼때 온 인류가 발전하게 하는 ‘진짜’ 돈을 벌어주고 밥을 나오게 해주는, 최고로 생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의미를 우리 모두가 차차 더 이해하고 깨닫게 되길 바란다. 붓다가 아니라도 좋고 불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 의미를 이해하여 우리들의 삶에서 나름데로 구현하며 살게 될 때 어쩌면 우리들은 해탈 열반에 그리고 천국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JW

밤새 두꺼운 서리가 내려 흡사 눈처럼 온 세상을 뒤덥은 겨울의 이른 아침. 출근길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늘 그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오늘도 본다. JW (Jehovah’s Witnesses) 팻말 아래로 Watch Tower라고 쓰인 책들이 보인다. 아! 정말 춥겠다. 나도 군대서 보초를 많이 서봐서 아는데 겨울에 해뜨기 직전이 정말 쥐약이다. 추워서 죽음이다. 이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고 또 그 책은, 그 옛날 그 시절 파수대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출간되던 책이다.

이십대 초반, 휴학 후 입대를 기다리던 동안 나도 한때 이 사람들과 어울렸던 적이 있었다. 참 좋은 사람들이었지. 아! 그때 내게 교리를 가르친 그 아가씨 선생님,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그넘의 책에 자꾸 등장하던 ‘할례’가 무었인가 재차 뭇는 내게 (오~ 븅신) 차마 대답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 아가씨. 지금 돌이켜 보아도 괜찮은 여자였다. 인간적으로 존경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지.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금방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땐 인터넷은 커녕 피시도 거의 없었다. 어떻게 처녀가 총각 앞에서 일대일로 그것이 무었인지를 설명하겠나 🙂

그녀와 주변의 좋은 사람들. ‘입영거부’ 아무도 내색조차 하지 않았지만 나를 받아들여주고 또 나에게 그들을 알고 이해할 기회를 주었던 진실했던 사람들. 입대를 위해 떠날때가 왔고 그녀와 마지막 세션 (공부)을 마치던 그날, 우리는 작은 선물을 주고 받으며 악수를 하고 작별하였다. 아마 만년필이었던가를 내가 주었던지 받았던지 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 함께 모여서 그렇게 가드를 내리고 서로를 잘 대해주면, 사람들이 그렇게 진실하고 착할 수가 없더라. 비록 그들의 믿음을 나는 함께하지는 않지만, 내가 만났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한결같이 괜찮은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만큼 하기도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면서, ‘지금 뭐하는 짓인가’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이렇게 힐난할 만큼 대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에 이사람들에게 커피라도 한잔씩 사주고 싶지만, 내 마음에서 종교라는 것이 너무나 멀어졌고 또 그 사람들이 내 호의를 오해할까도 두려워 못 본척 지나쳤다.

입대후 나는 81130 특기를(?) 받고 기지교도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날 새로운 죄수들이(?) 들어 왔다. 문서를 보니 총기수령거부. 아! 이 사람은 여호아의 증인이었던 것이다. 기지교도소에서 육군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얼마간을 이 사람과 나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함께 보냈다. 아마 밤에 시간을 내어 위로도 하고 또 아무도 보지 않으면 잘 대해 주었었지 싶다. 차마 내입으로, 나도 한때 당신들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었던 적이 있었으나, 당신과 같은 믿음과 용기가 없어서 지금 철창 반대쪽에 서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었다. 어느날 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더라. ‘우리 지역 회중에서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하다가 입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때 그는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군인이 바로 그 사람임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믿기에, 그 처녀 선생님과 다른 사람들은 나를 위해, 그들의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했었을 것이다. 나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 주었을 것이다. 내가 군대에서 ‘그때 그자리에 있었더라면 백발백중 인생 종칠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운좋게 제대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다가 이곳에 와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모두 우연이거나 혹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기도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베풀어준 좋은 인연 카르마의 결과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왜 눈물이 나는지… 아마 그 사람들의 인간적인 노력과 희생을 보았고 (설령 세상이 그것을 비웃는다 할지라도) 또 지금도 그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리라. 그저 돈따라 이익따라 부초처럼 이리갔다 저리갔다 사는 세상에서, 한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따뜻하고 또 굳게 잡아주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진심으로 노력하던 그 사람들을 떠올리면 안타깝고 또 존경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굳이 덧붙이자면, 내가 지금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결국은 지푸라기임을 나는 점점 깨닫게 되기에. 우리 모두를 향한 눈물 방울…

종교와 믿음을 떠나서, 내 자식이 진실한 여호와의 증인과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지 싶다. 세상에 그만큼 하기도 정말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내가 너무나 잘 깨닫게 되었기에. 다른 믿음을 가지고 서로 다투지 않아도 되고 또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살기에. 그리고 우리가 존경하는 친구 노(老)신부님께서 어머니께 말씀하셨듯이 ‘어떤 종교를 가지던 진실하고 훌륭한 삶을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나도 그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응원해주고 싶기에. 아름답고 품위있고 착했던 그녀. 지금도 훌륭한 여호와의 증인으로 잘 살고 계시길 그리고 행복하시길 기원한다. 고마웠어요. 그리고 그런 것 물으면서 븅신짓해서 미안했어요. 지금도 종류는 다를지 몰라도 여전히 그 지랄하며 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