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지혜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현상의 일부를 보고서 (혹은 알고서) 전체를 미루어 판단하는 경우가 흔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이런 줄을 알면서 내리는 판단은 조심스럽고 또 쉽게 물러나거나 수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사람들에게 강요할 가능성이 적다.

이런 줄을 모르거나 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내리는 판단은 (자신과 타인들에게) 난폭하고 강압적이며 또 스스로 물러나거나 수정하기가 몹시 어렵다.

사람이나 사물 혹은 현상의 일부만을 보는 것을 (혹은 아는 것을) ‘무지’ 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무지에 근거한 판단에 집착하는 것을 ‘고집’ 이라고 한다.

듣고 보고 배워야 하나라도 더 알게 되어 조금이라도 덜 무지하게 되고 나아가 좀 덜 고집스러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이런 귀찮은 (그리고 남들도 하지 않는) 과정을 지속하고 반복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그냥 지금 아는 것, 지금 가진 것이 ‘모두’ 이고 또 ‘전부’ 라고 자신과 남들에게 떠들며 주장하게 된다. 나이가 많거나 상대적으로 가방끈이 길거나 돈이 많으면 이런 짓을 점점 더 강하게 또 드러내 놓고 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더 고집스럽게 되는데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그냥 고집인 것을 가지고) 신념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무슨 특별하고 괜찮은 것처럼 포장을 하여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며 또 나아가 그것을 팔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무지로 시작된 고집은 인간의 삶을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데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치매인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장차 그 꼴로 인생을 종치게 만든다. 자신도 비참하지만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고난 다음에.

무지의 반대는 ‘지혜’ 라고 한다. 지혜는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현상의 ‘전모’ 즉 전체 모습을 보고 또 아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수준에는 결코 도달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발 양보해서 ‘지금 내가 보는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현상에는 내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양한 측면들이 존재하니 나는 무슨 판단을 내리건 그것을 기억하겠다’ 이렇게 다짐하고 또 자주 시도만 해도, 지혜를 좀 가진 사람으로 그래서 덜 고집부리는 사람 덜 완고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겠다 🙂

배울만큼 배운, 가질만큼 가진 그리고 나이들만큼 든 사람이 ‘고집부리는 모습’ 만큼 스스로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자신을 깊이 초라하게 만들고 또 장차 어떤 모습으로 떠날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징표는 별로 없다.

일전에 언급했던, 내가 즐겨 뛰어 올라간다는 그 산꼭대기에 오르면 내가 사는 아름다운 수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날씨가 흐리고 남쪽에서 바람이 부는 어떤날에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날 때가 있다. 저 멀리 아름다운 도시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쓰레기 매립장에서 바람을 타고 올라 오는 냄새다. 그냥 쓰레기 냄새가 아니다. 이곳은 한국과는 달리 오수를 (똥물을)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모아 하수처리시설에서 일괄 처리한 다음에 바다 멀리로 내보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고형물을 (똥덩어리를) 걸러내서 수분을 제거하고 눌러 납작하게 만든 다음에 그 쓰레기 매립장으로 운반하여 땅에 묻는다. 그 똥냄새가 이토록 아름다운 산위로 때때로 올라오는 것이다. 내 발아래 펼쳐진 이 아름다운 도시 그 높고 화려한 사무실과 해변가의 아름다운 집들에서 선남선녀들이 입으로 넣었다가 항문으로 밀어낸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진실 덩어리를 나는 때때로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

하늘아래 어떤 인간도 이 진실에서 한치도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다. 그대의 똥과 나의 똥만 뒤섞여 바다로 흘러가고 함께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것을 자주 기억하는 만큼 그리고 어떤 판단을 내릴때 하나의 측면으로 고려하게 되는 만큼 우리는 지혜로워 지리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디로 가는지를 자주 상기한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조금이나마 향상시키려 하지 ‘고집’으로 상대를 이기고 주변을 어지럽히려고 하겠나? 그래서 무었하게? 더 멀리 더 빨리 바다로 흘러가고 매립장 더 위에 묻히게?

나이들며 스스로 경계해야할 첫째는 고집이고 사람만나며 멀리해야할 첫째 부류는 ‘어떤 이유로든지’ 고집스러운 인간이다. 고집은 다양한 이유와 형태가 있겠지만 그 뿌리는 오직 하나 그리고 언제나 ‘무지’ 이기 때문에.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말했나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How you Perceive and How you Respond’

이 두가지가 내가 여태껏 살면서 깨달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가 되겠다.

내 영어는 아직도 엉터리지만,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몇십년 영어를 사용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좀 깊이 있는 의미를 전달하려면 때로는 중국어에서 빌어온 한국어 (한자) 보다는 영어단어가 더 수월하고 정확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착각인가 🙂

‘당신이 세상을 (당신과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당신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Perceive 하는지는, 부모로부터 우리가 아주 어릴때 물려 받은 ‘습관’ (양육) 그리고 ‘기질’ (유전) 에 좌우되는 바가 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Respond 하는지는, 물론 습관과 기질의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우리가 나이들어 살면서 경험하고 배워 기억한 것들에 좌우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매일 일상속에서 수없이 크고 작은 판단들을 내리고 또 그 판단의 결과로 어떤 언행을 하면서 살고 있다. 어떤 판단은 드러내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언행은 표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지만 매우 강한 판단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판단과 언행이 쌓이고 모여 인생의 방향과 수준이 결정된다.

금수저가 물려받은 돈다발이 인생의 방향과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학벌이나 계급장도 물론 아니다. 별의 겉보기 등급이 그 별의 진짜 크기와 밝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것과 같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거리에 따라 겉보기 등급이 좌우되는데, 한가지 정말 무서운 진실은 사람은 무슨짓을 하고 어떤 방법을 써도 자기자신에게서 한순간 한치도 멀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으로 안된다는 말이다 굳이 부연하자면.

많은 경우에, 우리가 인생초기에 물려받고 또 형성된 습관과 기질이, 우리가 장차 살면서 무었을 경험하고 배워서 기억할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이 진실을 깨달을만할 쯤이면 ‘땡’ 종치며 링에서 내려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습관과 기질이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나중에 살면서 경험하고 배워 기억한 그것들이 또한 자신의 습관과 기질을 되돌아 볼 능력을 주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그것들을 변화시킬 힘을 주기도 한다.

일단은 지혜로운 부모를 만나면 시작이 좋다. 물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겠지. 그래도 세상은 공평하다. 우리들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무었을 경험하게 할지 어떤 것을 배우게 할지 또 무었을 기억하게 할지 상당부분 결정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 선택해서 쌓은 경험과 배운것 그리고 기억한 것들이, 자신의 습관과 기질에 서서히 재갈을 물려 마치 마부가 말을 부드럽지만 능숙하게 다루듯이, 우리가 보다 나은 판단과 언행을 하도록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이끌어 준다. 그 결과로 우리 인생의 방향과 수준이 달라지게 된다.

인생의 봄이나 여름은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진다고 오는 봄이나 여름은 없다. 아마 당신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많은 제약회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미친듯이 개발하고 있어요. 상업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거대 제약회사로서 인류에 대한 책무를 다한다는 측면도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전 글에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인 빌 게이츠가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자선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이분도 빨리 효과적인 백신이 만들어져서 싼값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도 공급될 수가 있도록, 큰 돈을 기부하여 백신을 몇천원 수준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분이 지난 몇달간 효과적인 백신을 가장 빨리 만들어낼 가능성이 큰 제약회사로 지속적으로 언급해 온 회사는 우리도 들어본 ‘화이자’라는 제약회사 입니다.

오늘 이 화이자 제약회사에서, 90%에 가까운 매우 놀라운 효과를 보이는 백신이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는 발표를 했어요. 여러분이 혹시 아실지도 모르지만 빌 게이츠는 그동안 곧 백악관에서 쫒겨날 ‘노랑머리 인간말종’이 미국 전체에게 큰 화를 초래하는 무책임한 짓들을 하는데에 반대해 왔어요. 특히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매우 잘못된 대응을 여러차례 직접적으로 질타했어요. 한 신문에서 오늘 화이자의 백신발표를 언급하면서 ‘참으로 오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가 없다’고 했어요. 백신개발이 며칠안에 되는 것이 아니니 아마 일주일 전에 발표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랬다면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상상이 되나요?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존 멕케인은 미국 ‘아리주나’주의 상원의원이었어요. 해군제독의 (아마 4스타) 아들이며 젊은 시절에는 공군에서 유명한 ‘문제아 파일럿’이었다고 해요.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예요. 비행기를 사고로 불태워 먹었다던가 항공모함에서 출격하기 전에 ‘우연히’ 미사일을 함상에서 발사한다던가 그런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근래에 암으로 사망한 이분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던 용감한 미국의 군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인들이 군인과 경찰의 노고에 얼마나 감사하며, 특히 참전 군인들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여러분들도 알고 있나요? 어디서든 줄을 서 있는 군인들을 가장 앞으로 보내서 편의를 봐주는 것은 미국에서는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이라고 합니다.

존 맥케인은 북베트남 상공에서 피격당해 낙하산 탈출을 합니다. 뼈가 심하게 부러진 채로 붙잡혀 북베트남군 병원을 거쳐 감옥에서 수년간 갖혀 있었어요. 이 사람이 누구의 아들인지 아는 북베트남군들이 가만히 두었겠어요? 물론 몽둥이로 패거나 고문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온갖 방법으로 절망감과 두려움을 심어주어 자기들이 시키는데로 하도록 만들었겠지요. 지금도 존재하는 비데오를 보면 이 사람이 병원에서 붕대에 칭칭 감긴채로 눈물을 흘리며 아내와 가족을 그리워하는 (약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도 ‘부끄럽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강제로 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요. 전쟁이 끝나고 이 분도 감옥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되돌아 왔어요. 미국은 이 사람을 ‘화냥년’ 대접하며 천대하기는 커녕 나라에 봉사한 참전 영웅으로 대접합니다. 그래서 정계에 진출하여 상원의원도 오래하고 대통령 후보도 되었었지요.

이야기가 옆길로 좀 세는데요,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되었지만 예전에는 처신이 좋지 않은 여자를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 화냥년이라고도 표현했었어요. 이 표현의 어원은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조선이 많은 처녀들을 조공으로 바쳤는데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어떻게 고향으로 되돌아 왔을때 (‘환향녀’ 즉 고향으로 되돌아온 여자) 우리 조상님 남자들이 그 여자들을 더러운 여자라고 그렇게 천대를 했다고 해요. 임금까지 나서서 그들이 우물에 목욕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기만 하면 차별하지 말고 대해주라고 했는데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지요. 이 표현의 어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역사적인 사실들을 전후로 살펴보건데 실제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네요. 그런데 그녀들이 자기 발로 부모형제를 버리고 청나라에 갔나요? 누가 그 처녀들을 짱께들에게 붙들려가게 만들었나요? 아마도 이런 못난 남자들의 전통이 유구하게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자기는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해야 한다’며 지랄을 떠는 넘들이, 바로 헬조선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당신과 나는 예외겠지요 🙂

다시 그 인간말종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이자는 군대를 가지 않았어요. 베트남전쟁때 (무작위 추첨을 통한) 강제징집을 교묘한 방법으로 피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나라를 위해서 한번도 총을 잡아보지 않은 자가 참전 조종사였던 존 맥케인에게 ‘포로로 잡혔던 군인에게 무슨 명예가 있는가’ 이런식의 극히 모욕적이고 치명적인 악담을 합니다. 당연히 존 맥케인의 장례식에도 초대를 받지 못해요. 두 사람은 같은 정당 소속의 정치인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존 맥케인의 부인은 여러차례 직간접적으로 (반대 정당의) 바이든 후보를 지지하는 표현을 합니다. 이번 선거 결과 존 맥케인이 상원의원을 오래 했던 이 아리조나 주에서, 인간말종이 쉽게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던 그곳에서, 근소한 표차이로 바이든이 승리 합니다. ‘죽은 존 맥케인이 산 트럼프를 작살냈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존 루이스는 흑인 인권운동을 오래 했던 존경받는 하원의원이었습니다. ‘조지아’라는, 짐작컨데 옛날 흑인 노예들이 목화를 땃던 그런 미국 남부 주의 (state) 하원의원을 수십년 지내다가 근래에 암으로 죽었습니다. 이 사람도 존 맥케인처럼 자기 주에서는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이 사람이 죽었을때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그 인간말종에게 언론들이 인터뷰를 했어요. ‘이분의 죽음과 업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몰라.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뭘 믿겠어?’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언론들이 다시 물었어요 ‘흑인들의 인권신장에 근래에 가장 기여한 분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죽은 존 루이스를 떠올렸겠지요. 그 인간말종이 대답했어요 ‘응… 나. 내가 흑인들의 인권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기고 있지’. 이 언론의 인터뷰는 많은 미국인들의 공분을 샀어요. 특히 죽은 존 루이스의 고향인 조지아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미국 대통령 투표결과가 발표되었는데요, 보수적인 조지아 주에서도 그 인간말종은 근소한 차이로 바이든 후보에게 지고 맙니다. 역시 ‘죽은 존 루이스가 산 트럼프를 작살냈다’는 기사가 뜹니다.

당신과 나도 여태껏 살면서 비록 그 정도나 횟수는 다를지언정 얼마나 이와 비슷한 짓들을 했었을까요? 내가 언제 원수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었던지 또 내가 어떻게 앙갚음을 당했었던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보복은 있었으되 어리석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이야기가 아닌가요? 내가 의도를 가지고 저질렀던 언행의 결과는 부매랑처럼 언젠가는 그리고 어떤 형태로건 내 자신에게 되돌아 옵니다. 그것이 남들에게 했던 것이건 자신에게 했던 것이건 혹은 무었이었건 말이예요. 오늘 밧줄을 얽히고설키게 만들면 언젠가 그것에 내가 걸려 크게 넘어지는 순간이 올꺼예요. 그 순간은 내가 예상하지도 또 원하지도 않는 때일 것이며, 그때는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너무 늦겠지요. 지금 덜 얽히고설키게 만들며 또 하나라도 더 풀려고 노력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 아닌가 싶네요.

붓다께서 이미 수천년 전에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어요.

다른 문화 다른 생각 다른 삶

2주전 국민투표와 함께 실시되었던, 안락사와 대마초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물었던 투표 결과가 방금 발표되었다.

안락사는 65%의 지지를 받아 12개월 이내로 법으로 제정된다고 한다. 아무나 죽겠다면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자면 다수의 의사가 동의하는 6개월 미만의 생존 가능성 밖에는 없는 사람이 적법한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런 내용들이 포함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대마초는(마리화나) 안타깝게도(?) 46%의 찬성만으로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불법으로 여전히 남게 되었다.

최근에 김의신박사의 ‘암 걸리지 말고 행복하게 사는 법’ 주제의 강연을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분은 단지 세계적인 암전문가로서 좋은 의학 정보를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 최고의 암병원에서 오랜 기간동안 (대부분 다른 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다가 안되서 온) 수많은 미국인 암환자들과 또한 돈 보따리를 들고 (치료비가 엄청남) 태평양을 건너 그 병원을 찾은 수많은 부자 한국인 암환자들이, ‘암’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판이한 태도와 자세를 보이는지에 대한 사회인류학적인(?) 고찰을 또한 나누는 내용이라 내겐 큰 흥미가 있었다. 이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수십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나도 이분이 묘사하는 (부족하고 부끄러운) 한국인의 태도와 자세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가 아직 시간이 좀 있을때 자각을 하고서 무언가 개선과 발전을 이루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강연은 십여년 전에 촬영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현재에도 적용될 것으로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신문에 난 ‘한국인의 행복과 삶의 질에 관한 종합 연구’ 관련 기사를 보고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540페이지 논문을 대략 읽어 보았는데, 영미권국가들과 공통된 내용들도 물론 있었지만 몇가지 특이한, 다시 말해서 김의신박사가 말씀한 (암과 죽음에 관련하여 미국인들과 비교할때) 한국인들이 보이는 특이한 태도와 일맥상통하거나 어떤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언급한다.

일전에 하버드대학교 연구결과를 (‘돈 잘 쓰는법 ‘연구하여 책으로도 발간된 논문) 언급한 글에서도 나왔듯이 이 나라를 비롯한 영미권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요소들은 ‘경험’이나 (자기계발) ‘이타행’과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면서 기쁨과 의미를 찾는 것) 관련된 것들이 상위에 랭크 되는데 반하여, 이번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이러한 ‘경험’ ‘개인의 발전’ ‘이타행’ 같은 분야에는 관심이 없고 또한 이런 것들이 자신의 행복을 증신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수준이 영미권과 거의 동등한 상위 20%의 부유한 한국인들 조차도 동일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김의신박사의 강연과 이 논문의 (신문기사의) 내용을 동시에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면 무언가 우리들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단지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동일한 조사를 중국이나 인도 그리고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것 같은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요약한 표]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든 논문이니 결과에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굳어지면 죽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소위 말하는 클리세인가?

시작하기전에 일단 한마디 하자면, 어떤 사람이 말했다더만 ‘If common sense is that common, why is it so hard to see it?’ ‘상식이 정말 상식이라면 왜 그렇게 상식을 보기가 어려우냐?’.

요즘 드는 생각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아는 것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런식으로 좀 객관적으로 단순하고 명확히 구분된다면 얼마나 인생이 더 쉽고 덜 복잡하겠는가 싶다.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섞여 있고, 자신도 남들도 얼마나 아는지 모르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절대적으로 틀리거나 잘못된 생각이나 주장은 드물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속에서 ‘얼마만큼 맞고 얼마만큼은 잘 모르겠고 (혹은 틀리고)’를 좀 객관적으로 심사숙고하기 보다는 (이것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 ‘자신이 지금하는 생각이나 주장속에서 오직 자기가 보기에 맞는 부분만을 내세우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틀린 생각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딱 때어내서 말하면. 잘못된 주장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딱 때어낸 주장만을 보자면… 이러니 세상이 쉽지 않고 복잡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러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하는 생각이나 주장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덧붙이는 두가지 가르침은, (지금 나의) ‘생각이나 주장은 변한다는 것’과 또 ‘자기 자신이라고 (자아, ego) 그렇게 움켜지고 주장할 그것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정말?

다시 굳어지면 죽는다는 말로 되돌아 가보자. 최근 신문에서 읽은 내용중에 ‘나이가 들면 늘어나는 것은 고집과 불만이고, 줄어드는 것은 웃음과 인사’라는 말이 있었다. 고집과 불만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자기 주장’을 적당한 상황에 적절히 하는 센스를 점점 잃음과 동시에, 그것의 절대적인 양이 많아지니 배우자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똥고집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자신의 2차적인 반응이 불만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자기생각 자기주장은 나이가 들면 점점 많아지게 되어 있다. 마치 주름살이나 뱃살처럼. 가만히 두면 저절로 쌓이고 강화되는 것이 바로 ‘자아, ego’ 아닌가? 그것의 표출이 고집이고 불만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어렴풋이 깨달아도 그것과는 상반 힘이 (세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별 소용없이 무너지며 ‘속절없이 늙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머리만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heart & soul이 (영혼이) 동시에 굳어지는 모습이, 고집과 불만이라는 것을 우리들 모두가 자각하기를 바란다.

몸이 굳어지는 것도 막기 어렵고 또한 위험한 일이지만, 머리와 영혼이 굳어지는 것은 더욱 막기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남들도 얼마나 굳어지고 있는지 또 이미 얼마나 굳어졌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고, 종종 굳어지지 않은 자신의 단편적인 모습에 집중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하면 위험하다. ‘이래도 되는가?’ ‘이것이 맞는가?’ 늘 좀 불안해하면서 궁금해하고 또 자연스레 비교도 하고 검증도 하면서 사는 것이 ‘내게’ 더 낫다. 그러면 굳어지기 어렵다.

그런데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불안한 부드러움 보다는 덜 불안한 굳어짐쪽으로 자꾸 가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래도 저래도 좀 안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나? 그래서 붓다께서는 만족스럽고 여한없이 살기가 어렵다고 하신것이지 싶다. 그래도 생각하며 살아라고 가르치셨지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