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의 말로

나는 국민학교 (초등학교) 시절 산수를 포기한 원조 수포자중 한사람입니다. 수포자로서의 학창시절은 괴롭고 지루했으며 또한 험난했습니다. 먼 나라로 떠나와 성인이 된 삶의 대부분을 살면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릴때 ‘나는 제도교육의 희생자야’ 가끔 농담을 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제도교육의 덕도 보았다’ 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익숙하고 힘이 들지 않는 것을 하려고 하지, 익숙하지 않고 힘이 드는 것은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마치 라틴어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수학시간이면 나는 ‘저 공식이 우리가 사는데 어떤 관련이 있담?’ ‘지금 배우는 저것들이 정말인지 어떻게 알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시절에는, 필수인 수학과목을 두번 낙제하고선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에 (지금 아내가 된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컨닝을 하는데, 전혀 모르는 기호를 마치 만화 그리듯이 ‘모양을 외워서 그려낸’ 답장으로 동정표를 받아 최하 학점을 받으며 겨우 졸업을 하였습니다. 내가 제출한 시험지를 체점하던 분은 그 괴이한 답안을 보면서 엄청 웃었거나 아니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었을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살며, 또 이민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전산관련 일을 하면서 나는 오랜 세월 수십개 나라에서 온 문화, 언어 그리고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오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과, 내가 지금 사는 나라 그리고 또  내가 떠나온 한국을 비교해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개인의 능력으로 볼때 한국인 개개인의 능력은, 일본인을 포함한  대부분 나라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여기 예외도 있긴 합니다 🙂 스위스나 독일 사람들에게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당당히 대접 받는 지금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왜 최고의 집단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보면 별로인 일본인들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고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한국인들은 개인적으로 너무 똑똑하다 보니 지도자를 인정하고 따르는 습성이 적고 또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잔머리나 편법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 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도 나라도 자기가 잘하는 것을 더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들어낸 것들을 좋은 머리와 감각으로 재빨리 파악해 내고 나아가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고 바쁘게 사는 세상에서는 ‘그것해서 뭐하게?’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들을 최대한 빨리 흡수하고 나서 한발짝이라도 더 빨리 더 위로 올라 가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학벌, 최고의 직장, 최고의 현직에서 일하는 성격좋고 똑똑한 친구를 이번 한국방문 때도 만났습니다. 최고 공부를 많이한 최고 아름다운 부인과 최고 좋은 차에 동승하여 서울을 잠시 둘러볼때, 수포자 부부에게는 ‘떠나버린’ 한국이 마치 ‘잃어버린’ 선경처럼(仙境) 느껴졌습니다 🙂 그 친구는 장차 은퇴하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또 좀 살기도 할 작정인지 어떤 대학 일본(어)학과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다운, 대단한 수준이라 생각하여 감탄하였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그저 재미 삼아서 또 심심해서, 일본 관련 도큐멘트리, 영화, 드라마 시리즈, 교양 프로그램 그리고 하다못해 맛집 방문기까지 (영어자막의 도움으로) 수없이 보았습니다. 일본을 다른 나라들의 시각으로 보는 도큐멘트리들도 이것저것 보았습니다.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어쩌면 대학을 두어번 졸업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일이나 일본 프랑스는 물론 하다못해(?) 러시아나 중국같은 나라들도 영어로 방송하는 (관영) 채널들이 있습니다. 영어를 통하여 접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은, 한국어로만  (번역포함) 접할 수 있는 양과 범위의 수십배 어쩌면 수백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만큼 쉽습니다.

한국에서 골프를 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위 싱글’을 치는 사람들 중에서는 레슨을 꼬박꼬박 받아서 그렇게 된 사람보다는 자기 스스로 죽기살기로 연습하고 연구해서 그렇게 된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잘 치는 방법은 한국과 전혀 다릅니다. 물론 아마추어 골퍼를 대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매우’ 잘 치는 평범하고(?) 흔한 방법은 골프를 잘 치거나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는 아마추어로서는 최고 수준의 골퍼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어릴때부터 아빠따라 엄마따라 놀이삼아서 골프장을 들락날락 거렸던 사람들입니다. 어른이 되서 한동안 규칙적으로 골프를 쳤거나 지금도 규칙적으로 치는 사람들인 것은 맞지만 ‘죽기살기로’ 골프를 치거나 ‘미친듯이’ 연습하고 연구하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같은 목표를 이루거나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다른 방법들과 길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같은 길로만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의심할바 없는 권위를 가진 선생들로부터 정리된 방법으로 일본을 배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놀이삼아, 마치 아빠따라 골프장에 와서 퍼터들고 그린에서 장난치듯, 많은 시간을 보낸 일본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듯 ‘나의 생각과 견해’가 생겼습니다. 수많은 일본사람들을, 수많은 상황에서, 수많은 스토리들을 통해서 일종의 교차검증을 하면서 듣고 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권위도 없고 학위도 없지만, 그 어떤 일본 전문가와 토론을 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나의 견해를 표명 할 수 있지 싶습니다. 건방진 말이었지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또 단 하나의 정답이 필요없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왜?’ 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답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밖에는 없지 싶습니다 (‘realise’ 라는 말을 이럴때 쓰지 싶네요).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것들 중에서, 이미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를 잘 고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정답은 주관식 문제의 답처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답뿐만 아니라 문제조차도 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내 삶이 가능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이 시간에 이런 글을 쓰기까지 ‘왜?’를 허락하지 않았던 내가 떠나온 나라 그리고 ‘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가 사는 나라, 둘 다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수포자의 말로가 너무 비참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우물안의 개구리 그리고 해탈

우연히 산악인 허영호에 대한 오래된 기사를 최근에  보게 되었다. 그가 한국산악회와 원수진(?) 이유에 대한 것들인데, 조선일보가 인터뷰한 내용을 먼저 보았다. 등산인으로서의 성취도 성취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살아온 길들을 읽으면서, 이 사람 도인인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늘 하듯이 크로스첵크를 (비교확인) 해보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산악회 부회장이 월간 ‘산’ 이라는 잡지에 산악회를 대표하여 올린 글이 있었다. 매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세상사가 칼로 무우자르듯 단순하고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 각자의 처지에 따라 동일한 일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해석되는 경우도 흔한 일이니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지만, 내 느낌으로는 한국산악회쪽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다시 허영호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이 사람이 과연 아까 내가 생각했던, 그 도인에 가까운 놀랍고 대단한 사람인지 아니면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부족함으로) 큰 실패를(?) 했던 사람이  화려한 언변으로 내로남불 하면서 일종의 정신승리나(?) 추구하는 것인지 햇갈리게 되었다.

오늘 산을 뛰다가 문득 ‘아! 해탈이란 것이 (득도, 경지등 어떤 표현을 쓰건 상관없다) 정말 어려운 이유가, 반드시 우물안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부대끼고 엮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스스로는 우물안의 개구리를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로구나’ 깨닫게 되었다. 이래서 정말 어려운 것이로구나!

내가 글을 잘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글을 잘 쓰는 것과 인생을 잘 사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가로질러 흐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들을때면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허영호의 인터뷰를 읽고나서 마음이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내가 이 사람처럼 말하거든, 나도 그와 비슷한 태도로 살거든, 그리고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감동할(?) 때도 있었고. 내가 그의 인터뷰를 맨 처음 읽으며 감동했었듯이.

괜찮은 여자 하나 팔자 고쳐주려고 내가 이리저리 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십년도 훨씬 전에 중매를 딱 한번 했었는데 아직 해로하고 있으니 성공율이 100%이긴 한데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첫 상대로 오래전부터 내가 잘 알던 종교인 한 사람을 설득해보았는데, 한이틀 기도를 한 후에 응답이 왔다. 고맙고 좋기는 한데 자기는 그래도 자기가 믿는 신과만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회신을 기다리면서 이 사람의 강연을 유튜브로 몇개 보았는데, 이분이 하는 일의 성격과 퍼스날리티를 알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강한 표현들을 하고 있구나’ 느낌이 들었다. 그의 거절을 더 이상 설득없이 조용히 받아들였다.

‘다른 개구리들과 우물안에서 부대끼고 엮이며 살지만, 그들과는 달리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높은 자리에서 앉아서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면서 떠들어대는 자들을 보면, 자신은 우물안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부대끼지도 않고 엮이지조차 않으면서 어쩌자고 다른 개구리들을 보면서 우물밖으로 나가라고 떠들어 대는지 기가 막힌다. 종교의 한계요 인간의 비극이다.

해탈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위험한 신호들을 생각해 봤다. 첫째로 꼽을 것은 ‘강성’이다. 책을 읽고 머리로 공부해 생겨난 이론들이 강하고, 그것을 강하게 표현하며 또 강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예외없이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 어떤 분야에서건 경지에 오른 사람이 ‘강성’인 경우는 없다. 둘째로, ‘분리’다. 사람이건 그 무었이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나와 남 혹은 우리와 그들처럼 대립구도를 만들어 낸다. 말이나 글이 그런 이분법적 구도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에고다 (ego). 나는 다르다는 거지, 내가 속한 이곳은 네가 속한 그곳과는 다르다는 거지. 아주 위험하다. 셋째로, 미려한 글이나 말로 ‘설득’하려는 태도다. 해탈의 가능성은 스스로 뱉아내는 미사려구와 반비례한다.

언젠가부터 믿음이 들기 시작했는데, 해탈하거나 도 트고 나도 유튜브에서 떠들고 책써서 팔고 안 그러지 싶다. 뭐 딱히 할말도 없고 또 뭐 좀 팔아서 돈벌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다 그런 욕망도 없을테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표가 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스쳐 지나간 해탈 도인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한국 방문 후에 연락이 재개된 한 친구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위에서 말한 위험한 신호들을 드러내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면서 마음이 무겁다.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강하게 말하고 너와 나를 분리하며 자꾸만 설득하려고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무것도 증명할 것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고 또 증명할 대상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것도 배우는 과정이니 발전의 일부 아닐까 싶다.

이번에 한국에 잠시 머무르며 사람들의 언행이 무식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경우가 몇차례 있었다. 내게 ‘마음의 노안’이 와서 세상이 굴절되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면들이 늘 있었는데 문제 삼지 않다가 요새들어 내가 문제 삼기 시작하는지 명확히 알기가 어렵다. 이 친구와도 ‘오랜 친구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시각과 ‘오랜 친구사이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라는 시각이 충돌하는 경험이 이번에도 있었다. 귀국해서 아이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아이가 세대도 사고방식도 다르지만 내가 보기에 소셜 아이큐가 높다. 자기 생각에는, 전자쪽이 더 맞는 것 같고 (오랜 친구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느낀 부정적 감정을 상대방에게 어떤 식으로건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에 주고받은 팩트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고, 아이는 그보다는 관계 자체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생의 대부분을 독고다이로 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한면만 있는 동전이 없고 잘 들면서 손 안베는 칼도 없다. 친구들의 이해와 인내에 감사한다.

쪼르륵 소리 억울한 마음

지구의 자전시간이 늘 24시간은 아니었고 또 앞으로도 변할 것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배워서 일게 되었다. 지구가 탄생했던 아주 오래 전에는 하루가 5시간 정도였었고 (자전주기가 5시간) 그만큼 시간이 더 흐른 먼 미래에는 하루가 1천 시간이 넘을 것이라고 하더라. 우리의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가 🙂

한국어와 영어가 다른 줄이야 누구나 알겠지만 혹시 생각해 본적이 있나 한국어에 있고 또 흔히 사용되는 어떤 단어가 영어에는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말고 어떤 상황이나 느낌 혹은 생각을 지칭하는 단어중에서 말이다 (다시말해 그 언어의 배경인 문화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골프를 치다보면 2가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번째야 물론 자신이 좋은 샷을 쳤을때 느끼는 즐거움이겠고, 두번째는 동반자가 나쁜 샷을 쳣을때 ‘은근히 느끼는 일종의’ 즐거움 혹은 기쁨이 있다. 이런 두번째 상황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을 한마디로 정확히 표현하는 한국어 단어는 없지 싶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있다. Schadenfreude 라는 단어가 정확히 그런 (야비한) 즐거움과 기쁨을 의미한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혹은 영어 표현을 찾아보려고 가장 많이 애를 써보았던 한국어가 ‘억울하다’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다못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아이에게까지 (아빠 닮아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학은 나왔다) 상세하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상황 예까지 들면서 설명을 해봐도 고개만 갸우뚱거리다가 우리도 아는 일반적인 영어 단어를 나열하지, 위에서 예로 들었던 독일어 Schadenfreude 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억울함’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나 표현은 말하지 못하더라. 아마 없지 싶다.

살 좀 덜 찌고 더 건강 장수 하려면 배에서 나는 ‘쪼로록’ 소리와 가까워지면 된다고 많은 유식한 사람들이 말하더라. 평온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려면 머리에 떠오르는 ‘억울한’ 마음과 가까워지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까워진다는 의미는, 부드럽게 대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내치거나 난폭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억울함은 반드시 풀어야만 (상대에게 표현하고 전달하여 내가 아닌 그를 바꿈으로써) 속이 시원해지고 그래야만 결과적으로 내게 행복이나 이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에 ‘억울함’을 표현하는 단어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근거없이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착각 아닐까?

영어에는, 한국어처럼 문장 끝을 변형시켜 같은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존대 하대를 실어서 표현하는 것이 없다. 예의 바른 우리 아이도 엄마 아빠한테 ‘헬로’ 라고 하지 ‘헬로까’ 혹은 ‘헬로세요’ 하지 않는다 🙂 ‘억울함’에는 ‘당했다’는 일종의 수동적인 태도와 ‘상하관계’에서 자신이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자세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내게 무언가 잘못을 해도 나는 ‘기분이 나쁘고 성이나지’ (영어 표현에 모두 있다) 아이에게 내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싶다. 아니 그런 것들이 항상 저절로 상하관계를 만들도록 내 마음에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지 싶다.

영어를 모국어로 영어권 국가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우리 아이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고 도대체 그 의미조차도 모르는, 하지만 한국인인 그대와 내게는 고무신에 붙은 껌처럼 철썩 붙어 있는, 이 ‘억울함’ 이라는 마음. 그런 기분이나 감정이 들때 한번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 무의식 중에 자기 스스로를 ‘당하는 입장’ 그리고 ‘아래인 입장’으로 항상 저절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유사한 결과나 상황에 처해져서 기분이 나쁘고 성이 나도, 내가 ‘주는 입장’이었다면 (‘저지른’ 입장이었다면) 그리고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었다면 억울한 마음은 없지 않을까? 언어와 문화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구성원들의 생각을 규정 짓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 마음이 스스로를, 자기도 모르게 구속하고 규정 짓는지도 모른다.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도 위험하고 좋지 않은 카르마를 잉태할 가능성이 있지만, ‘억울한’ 감정이 개입될때 그것이 불러올 위험과 카르마는 아마도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mindfulness 란 어쩌면 이런 것들을 좀 깨닫고 생각해보고 또 조금이나마 자신의 삶에 실천으로 옮겨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해탈이 뭐 별거겠나?

블링블링? 엉망진창?

어제 이야기 했던 티비드라마 ‘결혼계약’에서 주인공 혜수씨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받아들이기 직전에 묻는 말이 있어요. (나의 병으로) 앞으로 나는 ‘엉망진창’이 될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이렇게 묻습니다.

엉망의 ‘엉’은 큰 숫자를 의미하는 ‘억’이 변화된 것이에요. 그리고 ‘망’은 그물이라는 뜻인데요, 합치면 ‘엄청나게 많은 그물처럼’ 이런 의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물이 엄청나게 많이 얽히고 섥히면 그 겉으로 드러난 (표면의) 모습은 어떨까요? 몹시 우둘투둘하고 보기에 징그럽겠지요. 진창은 천연두나 종기의 자국 혹은 흉터를 의미합니다. 네 글자를 합친 의미는, 천연두나 종기의 흉터가 마치 수없이 많은 그물 모양처럼 피부를 징그럽게 뒤덮은 꼴 이런 정도입니다. 징그럽고 보기싫고 무섭고 괴롭고 가까이 하기싫고 아무도 원치않는 그런 꼴이 바로 ‘엉망진창’입니다.

오래 떠나 살면서 한국어가 변화하고 변천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때로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고 또 의미도 알수 없는 단어들을 사람들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드라마를 보면서 새롭게 듣게된 단어는 ‘블링블링’ 입니다. 물론 한국어는 아니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말인 듯 합니다. 알아보니 자마이카 출신의 어떤 래퍼가 (가수)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세계에 퍼져, 한국뿐만 아니라 영어권에서도 슬랭처럼 사용되는 듯 합니다. 한국어 ‘반짝반짝’과 대응하는 자마이카 말인듯 하네요.

그대에게 삶은 ‘블링블링’ 인가요 ‘엉망진창’ 인가요? 아니면 지금은 엉망진창인 느낌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블링블링을 꿈꾸며 살고 있나요?

붓다께서는 삶은 ‘두카’라고 하셨어요. 짱께들이 ‘고’ 즉 괴로움이라 번역하였고, 코쟁이들도 ‘suffering’ 역시 ‘괴로움 혹은 고통’이라고 번역하였는데요, 사실은 둘 다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두카’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는’ ‘결코 완전할 수가 없는’ 다시말해 ‘항상 불만족스럽고 늘 불완전한 (마음의) 상태’를 뜻하셨습니다. 목이 정말 마를때 시원한 물을 들이키면 행복해지나요? 갈증이라는 일종의 괴로움이 사라짐은 분명하고 잠시 어떤 기분 좋음이 (행복이라고 굳이 말할 수도 있겠네요) 있기도 하지만, 이 역시 금새 사라지고 결국 남는 것은 ‘다음번 목마름’ 뿐이 아니겠어요? 마시고 돌아서면 또 마셔야 하고, 잠시 기분이 좋더만 돌아서고 나면 잘 해야 본전 아니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는, 바로 이러한 우리 인생의 ‘멈추지 않는 갈증과 그것이 끝없이 빙글빙글 도는 윤회’를 표현하신 말이 ‘두카’입니다.

그러면 정말 이런 두카에서 해방된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예를 들자면) 목이 마를때 마신 물이 주는 그 쾌감 혹은 일종의 행복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는 상태? 아니면 한번 물을 마시고 나면 다시는 목마름이 애초에 생기지 조차 않는 상태? 하지만 이런 상태들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함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혹은 제정신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지 않겠어요? 목마름이라는 예를 떠나서 다른 어떤 것을 그 자리에 대입시켜도 ‘한번 얻어진 어떤 것이 (행복처럼 추상적인 대상이건 돈처럼 구체적인 것이건) 영원히 남아 있는 상태’ 혹은 ‘한번만 얻고 나면 다시는 더 얻을 필요가 없이 만족한 상태가 지속 되는 상황’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세계에도 알려진 신데렐라 이야기들이 꽤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동도 하고 또 일종의 희망을 (?) 가지게 만들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예요. 나는 좀 비범한 (?)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런 신데렐라 이야기의 뒷조사를 해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내가 알아본 모든 신데렐라 이야기의 현실속 결말은 ‘두카’입니다. 종종 상황이 정반대로 뒤집어져 처음의 행복을 나중에 모조리 토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길게보면 이 세상에는 신데렐라 이야기란 없어요.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인생의 참 모습은 ‘블링블링’ 보다는 ‘엉망진창’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네요. 물론 괜찮은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부러워 할지도 모를 삶을 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각자 각자의 처지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목마름은 (비유적으로)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며, 오로지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두카’가 동전의 뒷면처럼 우리의 삶에 찰싹 들어 붙어있다는 것뿐 아닌가 하는데서, ‘삶은 엉망진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이렇게 우리 인간의 삶이 ‘두카’이며 ‘엉망진창’에 가까울진데,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보려는 인간의 노력들도 (해탈의 과정도) 엉망진창의 과정일 것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랬다 저랬다, 됐다가 안됐다가, 저녁에 왔다가 아침이면 가버리는, 그야말로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불안정함, 불만족함, 불완전함. 이런 고약한 up & down의 반복이 해탈의 과정이 아니겠어요? 붓다께서는 80세가 넘어 돌아가셨어요. 현대의 나이로 환산하자면 아마 120세쯤 장수하셨지 싶네요. 이것 하나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분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알려진 이분의 또 다른 위대함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다른 사람들 그리고 수행자들과 더불어 매일 매주 매달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똑같이 함께 (정해진) 수행에 정진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만 먹고나면 영원히 배부른 밥이 없듯이, 한번만 성취하고나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해탈 열반도 세상에 없다는 진실을, 몸소 웅변으로 똑똑히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분만은 예외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내게는 많은 것을 무언으로 가르쳐 주시고 있어요.

잘 먹고 입고 편해서 얼굴에 기름이 졸졸 흐르는 모양새로 (그렇게 먹고 입고 자도록 땀흘려 제공해 주었던 사람들 고마운 줄은 모르고)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또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입을 놀리는 성직자나 도사같은 가짜들을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또 따르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

어쩌다 한번씩 청소를 하면서, 예를들면 밀대로 부엌바닥을 닦으면서, 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청소란 사실은 (더러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희석시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요. ‘줄이는 행위가 청소’ 입니다. 희석시켜 줄이는 것이지 결코 전부 없앨 수도 없고 또 설령 어떻게 한번 거의 없앤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되돌아 오지 않겠어요? 인생도,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해탈이니 사랑도 결국은 이와 같지 않을까요? 더러움을, 어두움을, 어리석음을 좀 닦아내서 줄이고 또 뒤돌아서 다시 좀 닦아내고 줄이면서 세월이 흐르고 장차 종착역에 다다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우리가 바라는 그 무언가 명백하고 확실한 그래서 내 손에 꼭 쥘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데도, 닦아내고 또 닦아내는 땀 흘리는 과정만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의 실체이며 또한 인간의 숙명이 아닌가 싶네요.

붓다께서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선 한동안 망설이셨다고 합니다. 이것 가르쳐서 뭐하나? 누가 알아 듣겠나? 이런 마음이셨다고 하지요. 하지만 붓다께서는 마음을 바꿔 잡수셨다고 해요. 그래서 오늘 이 순간 우리도 두카니 해탈이니 배워서 나름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왜 마음을 바꾸셧을까요? 무었이 그분의 마음을 돌렸을까요? 내가 듣기로는, 그분이 보시기에 ‘인간들이 불쌍해서’ ‘사람들이 사는게 슬퍼서’ 그러셨다고 해요. 측은한 마음.

계절 탓인지, 돌아가신 사랑하던 이들의 삶을 되돌아 보아도, 내가 사는 꼴을 보아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아도 인생은 참 애잔하다는 마음입니다. 애처롭고 애틋한 마음. 일종의 슬픔.

이 글을 쓰고 난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다시 전철에서 사람들을 밀치고, 회사에서 사람들과 다투고, 스쳐가는 사람들에게는 알게뭐야 불친절, 그리고 가족과 가까운 이들에게는 야비한 언행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겠지요. 그럼 그때 또 만나요 🙂

다른 시각에서 보는 내로남불

한국사람들이 (영어권) 선진국에서 보게 되면 놀라는 장면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줄이 아무리 길어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무언가 서두르거나 더 빨리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싶어요. 그리고 줄 선 사람들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어떤 압력을 (?) 가하거나 불평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도요.

이전 글에서도, 중국이나 한국 문화에서는 개인기 혹은 개인차원의 스턴트를 중요시 여기거나 기대하지만, 이곳처럼 다른 문화에서는 그런 것들은 오히려 별로 환영받지 못하며 대부분의 경우 구조적이거나 환경적인 변화를 통해서 개선을 추구하는 경향이 훨씬 크다는 말을 했어요.

붓다의 가르침 그리고 함께 그려진 붓다의 모습도, 원래 붓다의 제자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진실이나 19세기부터 서양학자들이 찾아내고자 했던 진실과,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전달 받아서 더 키우고 강화한 그 모습과는 큰 차이를 보여요. 상이한 문화들이 동일한 대상을 오랜세월에 걸쳐 어떻게 해석하고 또 덧칠 하는가를 볼수 있는데요, 한쪽으로는 그렇게 그려진 붓다의 가르침과 그분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반대쪽으로는 그렇게 해석하고 덧칠한 그 문화의 진면목이 또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 자리에 있으니 이 정도는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 자격증을 가졌으니 이 정도는 기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이런류의 상(像)을 그려놓고선 다른 사람들을 그 상에 제멋대로 맞추어 이러니 저러니 기대하고 나무래고 성내거나 좋아하고 하는 모습들이 중화문화권과 한국에서는 더 흔한 것 같아요. 물론 그리스철학등의 영향을 받은 영어권에서도 ‘idea’ 라면서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두 문화권 모두 줄을 잘 서긴 하는데 그 줄선 사람들과 그들을 상대하는 서비스종사자의 태도는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것이 바로 이곳에도 적용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중국인들이 그려놓은 붓다의 모습을 대승경전에서 본 서양학자들은 ‘어리둥절’했다고 해요. 두 문화를 접해본 나로서는 이 어리둥절했다 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한 표현같아요. 마치 이 나라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 종업원이 미친듯이 그리고 미안해 하면서 일을 하면 이 나라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지 싶어요. 그리고 반대로 이나라 사람 종업원이 한국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성난 눈초리로 그렇게 밖에 못하니 하면서 성을 낸다면 또한 ‘어리둥절’하지 싶네요. 중국으로 부터 내려와 우리나라에 전파된 대승불교에서는 성불한 붓다를 신격화하지요? 완벽한 존재. 일단 성불하고 나면 (어떤 자리에 앉거나 자격증을 따고 나면) 그 성불한 붓다께서 인간적인 고뇌와 의심으로 괴로워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기 극히 어려워하는 문화가 아닌가 싶네요. 반대로 독일, 영국 그리고 일본의 학자들이 지난 100여년 연구하여 밝혀낸 보다 진실된 붓다의 가르침과 모습을 보면, 붓다께서는 성불후에도 인간적인 근심과 의심 그리고 괴로움으로 시달렸던 때가 있었다고 하네요. 물론 잘 극복하시고 또 현명하게 처리하셨겠지요.

이 나라에서는, 어떤 자리에 있는 무슨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좀 잘못을 해도 일단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구조적인 개선을 시도하지 그 개인을 지나치게 까발려 공격하고 나무래지는 않아요. 그래서 바깥에서 온 사람들의 눈에는 물렁하고 어리버리하게 보일때도 있어요. 하지만 두 상이한 문화에 오래 살아본 나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아요. 이 나라에는 전국민 산재보험이 있는데요 (보험료를 따로 내지는 않고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합니다) 이 나라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고의 책임을 (설령 외국 여행자가 저지른 잘못이라고 하여도) 개인에게 묻지 않고 일단 나라가 먼저 책임을 져줍니다. 나라가 일단 먼저 치료를 해주고 또 봉급도 계속 대신 주면서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나중에 나라가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형사상의 책임을 묻습니다. 민사상 손해배상은 거의 없어요. 이게 왜 훌륭한가 하면, 사람들이 싸우고 다툴 여지의 90%를 애초에 없애버리는 아주 인도적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들이 서로 내가 맞네 네가 틀리네, 죽이네 살리네, 네 잘못이네 아니네로 크게 다툴 가능성이 훨씬 적기 때문이이에요. 물론 여기도 약점은 있습니다. 보복이나 징벌을 가하여 속이 시원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아요. 그래서 어어없고 어리석은 짓의 결과로 큰 사고를 내고도 별 죄책감없이 그냥 기어나가서 (?) 사는 넘들도 있어요. 짧게 보면 속이 상하지만 길게 보면 아마도 모두에게 이로운 면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차차 나이가 들면서, 국민학교때 배웠던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난 괴물이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어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선의건 악의건 지어낸 어떤 상(像)들을 더 이상 잘 믿지 않아요. 여러번 교차검증 해보고 확인되지 않으면 믿지 않아요. 붓다에 대한 어떤 신격화된 이야기도 신화도 전혀 믿지 않아요. 머리에 뿔이난 괴물이므로 우리가 단단히 힘을 합쳐서 몰아내야 된다는 수준의 이야기를 나는 더 이상 듣지도 믿지도 않아요. 더 크고 더 위대해야 내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보다는, 나와 더 유사한 면이 많고 나와 똑같은 인간적인 조건인데 나보다 더 잘 했던 분의 진실한 (그리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내게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힘이 되요.

언젠가 말했는데요, 가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자기도 못할거면서 왜 다른사람이 단지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격증을 땄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잘못을 나무래고 인간적인 모욕을 가하는가 ‘어리둥절’할때가 종종 있어요. 물론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줄 알아요 그 자리에 앉았던 그 넘이 그 자리 때문에 또 그 자격증을 가지고 당신들 위에 군림했었고 또 쥐어짜서 가지고 갔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난 해답을 몰라요. 어떻게 해야 나아질지. 하지만 그냥 이런 이야기는 해봅니다. 세상에는 그런 방식 이외의 다른방식으로 어울려 잘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내 시각으로 본 내로남불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