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 이야기 1

어떤 사람이 도사를 찾아가서 물었어요. ‘윗층에서 뛰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운데요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요?’ 도사가 대답했어요. ‘놀이터에서 만나거든 이름도 물어보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친해지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좀 조용해질까요?’ 도사가 다시 대답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좀 덜 귀에 거슬리고 당신께 좀 덜 괴로울꺼요.’

완전한 해법이나 완벽한 솔루션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해탈 열반을 통하여, 인생의 완전한 해법 완벽한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또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좋은 ‘원’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티라다모 큰스님등 내가 잘 아는 훌륭한 스님들께서는 여러차례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해탈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십보를 가면 오십보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고 백보를 가면 또 그 만큼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를 수행한 나조차도 해탈 열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 ‘그렇다면 해서 뭐하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아! 그렇구나. 나 같은 사람도 내 처지에서 어떤 수준의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렇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 현실적이고 진실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극소수는 성공하여 구름을 타고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실패하여 아무런 발전도 없고 다만 어둠속에서 낙심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류의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흑백논리를 나는 매우 경계하며 마음속에서 한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께 티라다모 큰스님의 ‘적선’에 관한 설법을 들으면서 배운것이 있어요. 언젠가 전체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되겠지만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언가를 베풀어서 상대나 상황이 변하고 그 결과 혹은 댓가로 내가 복을 받거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에게 베푼다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 혹은 행위의 결과로 당신의 삶 자체가 점점 그러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당신을 해탈과 열반에 다다르게 돕기 때문에, 적선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위에서 언급했던 그 도사의 솔루션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내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관심을 가지고 친하게 되면서 만약 ‘아이가 고마워하면서 좀 덜 뛰고 조용해져서 내 괴로움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장차 더욱 더 괴롭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선은 상대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지요? 내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먹는 습관이 자연스레 좋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적선의 가장 큰 보상(?) 입니다. 아이가 달라지기를, 혹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부모가 감동해서 아이 단속을 더 잘해주기를 기대한다면 더욱 더 큰 괴로움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내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싫어하면서 내 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않고, 내 마음의 자유를 좀 덜 빼앗기면서 이웃들과 원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그럴것 같으면 뭣하러 사주나 그냥 서로 모른채 지내지? 이미 그 대답을 했지 싶네요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라고요? 때로는 그렇게 부스럼도 만들어서 괴로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더만요. 지혜롭게 능력껏 피할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그런 괴로움을 알고서도 적선을 베풀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길게보면) 우리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며 좋은 일이라고 나도 동의합니다. 물론 현실이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0 아니면 100처럼 ‘머리속에서 상상하는’ 흑백논리를 쫓지말고, ‘현실속에 실재하는’ 60이나 30 혹은 하다못해 5라도 내버리지 말고, 인정하고 또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또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지혜로운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 가까운 친구가, 아파트 아래층 노인과 커다란 갈등을 겪는 바로 그자리에 나도 우연히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한지가 오래되어, 내가 목격한 그 상황은 정말 폭력적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쌍방에게 주는 비극적인 (그리고 일촉직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얼마후 이 친구는 상당한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가 무었을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던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그렇게 따지기는, 이미 쌍방이 이성을 잃어 이만큼까지 오고 나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기에 불길을 진화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이사를 갈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이전에 미리 알고서 집을 내놓았었으면 나았겠지요. 그전에 고기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서로 대화를 좀 했었더라면 좋았겠지요. 문제 자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 집을 당장 내놓아야겠다’라든가 혹은 무었인가 내가 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미리 좀 파악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겠지요. 그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났기를 바라지만, 다시 유사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이번에는 더 잘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는,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는 현실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때 그 사람과 내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갈 수 밖에는 없었던가?’ ‘단지 그 사람이 미친넘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전에 혹시 내가 마음을 쓰거나 반응하는 어떤 기전에 (mechanism)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좀 되돌아 보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후자를 강조하셨고 또 그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적선’ 괜히 그냥 말로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깔려 있는 깊은 가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실천한다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때, 현실적으로 얻은 경험과 더불어 이러한 지혜가 또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찰을 찾아가 중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제발 이런 미친넘들을 좀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붓다는 신이 아니며 어떤 신통력도 우리에게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일개 중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붓다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진짜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분의 가르침을 밑천삼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여 ‘살아서 누리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는 적선의 단계를 옮기면서 이글을 마무리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선을 하면 (음식을 주거나 어떤 도움을 주면) 10배의 (무형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비구(스님)에게 적선을 하면 1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요, 비구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사찰을 지어주면 1000배의 보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계를 실천한다면 그 보상은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것의 10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 그대가 한번이라도 ‘이 세상에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면, 사찰을 지어주고 받을 보상의 100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전에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 차차 이 말씀이 진심이며, 또한 왜 그런가 쥐꼬리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

서양아이들은 철이 일찍든다지요. 빠다 먹어서 그런가 🙂

언젠가 네덜란드 음악가 안드레 리우 이야기할때, 그 사람의 초기 대표 음반인 Dreaming을 우리 아이가 수천번을 들으며 잠이 들어서 머리에 인이 박혔을 것이라고 했었지요. 무슨 조기교육? 언젠가 부모의 카르마가 자식들에게 대를 잊는다고도 했었는데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아시안 아이들이 지각을 하거나 오전에 유치원에서 맥을 못추는 일이 많다고 해요. 왜 그런가 하면, 설령 부모가 이곳에서 태어난 이민 2-3세라고 하더라도, 자기들의 부모가 했었던대로, 자기 아이들을 어른들 주변에서 뒹굴면서 밤늦도록 함께 있게 하다가 불규칙적으로 잠자게 하니 그렇다고 했어요.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서양아이들이 철이 일찍드는 이유는 ‘부모가 오냐오냐 오래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예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를 한국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싶은데요, 부모세대가 하도 없이 살고 또 눌려 살다 보니 한이 맺혀서 자식이라도 좀 큰소리 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면도 있지 않을까 짐작해요. 그런데 그런 성격은 이곳에서는 미숙아 혹은 성격에 문제가 있는 철부지로 취급되요.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언젠가 어떤 일본지식인이 ‘한국엄마들이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제멋대로 구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시작할때부터 한국도 선진국이라 불리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물론 나도 100% 동의 🙂 아주 어려서 젖먹이며 안아 기르는 거야 어딘들 다르겠나요 하지만 아이가 한두살이 되면서부터 (정확한 시기를 기억 못하겠네요) 이곳에서는 소위 말하는 routine을 (일정한 생활 ’습관’) 적용시켜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예요. 저녁먹고 재미있게 놀다가 이른 저녁이 되면 자기방으로 데리고 가요. 엄마가 (그리고 아빠도) 방에서 함께 노래도 불러주고 책도 읽어주며 잠을 잘 자도록 도와주다가는 딱 문을 닫고 나와요. 우리 경우는 ‘Dreaming’ 시디를 늘 틀어 놓고선 나왔지요. 그래서 아이가 그 음악을 수천번 들었던 것이지요. 좀 적응의 기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 결국 아이는 아무리 난동을 부리거나 악을 써도 (아이에게 위해가 되는 상황인지는 부모가 잘 봐요) 결코 나타나지 않는 부모를, 다시말해서, 아무때나 같이 뒹굴면서 ‘오냐오냐 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잔인하다고요? 아니지 싶은데요. 아이의 인격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요? 이것 하나만 듣고서 나머지 아홉은 모르면서 하는 말 같은데요 🙂 우리가 어떤 과정에 대한 언쟁을 벌이면서 결말이 나지 않을때는 그 과정이 초래한 결과들을 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물론 또 다른 종류의 언쟁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겠지만요…

가난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난을 벗어나고 난 이후에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언젠가 말했어요. 아시아 아이들이 부모와 뒹굴게 된 것은 어쩌면 그 부모 혹은 그 조부모 시절, 가난한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뒹굴던데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지금 그 2-3세들은 성실하게 노력하여 방이 여럿 있는 큰집에서 살면서도, 마치 단칸방에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말이예요.

이야기가 좀 옆으로 더 새는데요. 옛날에 훌륭한 부모와 착한 아들이 살았대요. 아들은 부모님이 제사 지내는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자랐는데요, 아들이 어릴때 집에서 고양이를 길렀어요. 제사상에 생선이나 고기를 얻을때면 몰래와서 먹어보거나 훔쳐가는 고양이를, 부모님은 제사를 지낼때면 방 한쪽에 좀 목을 묶어 놓았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착한 아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요. 이 착한 아들은 정성껏 제사를 준비하면서 어릴적에 보았던 그 고양이를 기억했대요. 부인이 고양이를 싫어하기 때문에 집에는 없는대요, 잘 아는 집에서 좀 고양이를 빌어다가 제사를 지내는 날에만 방 한쪽에 목을 묶어서 놓아 두고선 제사를 올렸대요 🙂 만약 이 착한 아들이 장차 큰 벼슬을 하게 되고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면, 아마 제사용 고양이 빌리거나 혹은 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지 싶네요. 우리는 때로는 몰라서 장님 노릇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알고도 아무 생각이 없이 살다 보니 그냥 장님으로 지내는 경우도 있지 싶어요.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렇게 ‘습관’을 어릴때부터 몸으로 익히며 자라나는 아이들, 세상에 아무리 악을 써도 안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룰 속에서 플레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아기때부터 배우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자기 스스로 해야한다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저절로 싹트기 시작하고, 이러다보니 일찍 철이 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빠다 때문은 아닌것 같아요 🙂

철이 든다는 의미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어쩌면 ‘역지사지’ 하는 능력이 아닌가 해요. 언젠가 읽었는데, 미스월드대회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으로 경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미리 촬영해서 그 화면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전문가와 함께 보고 분석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거지를 수도 없이 수정한다고 해요. 자신이 상상하는 ‘화면에 비치는 내 언행은 이럴꺼야’와 실제 화면에 나타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한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된 상황을 잘 그려볼 능력과 의사가 있어야 하겠지요. 역지사지 그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쌓는 엄연한 능력이지 싶네요. 오직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 일어서 본 사람만이, 그것이 무었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또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도움과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바로 이런 이유로, 이나라 사람들이 매우 개인적인 경향이 높으면서도,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자발적으로 잘 돕는다고 나는 생각해요. 아이는 아비를 닯아서 축구를 잘 못했는데요, 어리버리한 아이가 축구팀이나 어떤 운동팀에 끼어서 함께 시합을 할때도, 어떤 아이도 부모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싫어하거나 배척하는 느낌을 주지 않았어요. 나는 이것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내 생각에는, 물론 여유있고 또 성격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겠지만 그 바탕에는 ‘역지사지’ 하는 부모들의 성숙함이 있었고, 그 영향 아래있는 아이들이 감히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거역하면서, 잘 하지 못하는 동료 친구에게 나쁘게 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버릇이 대를 이어요. 그리고 이렇게 대를 이은 버릇들이 모이면 그 사회의 어떤 큰 흐름 혹은 수준이 되는 것이겠지요.

지진이 났을때도 또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방송이 될 때도, 수 많은 이곳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리고 ‘조용히’ 해준 아름다운 미담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사회전체가 어떤 ‘안전망’ 같은 것으로 둘러 쌓인 느낌이 들어요. ‘내가 곤경에 처하면 누군가가 도와준다’는 잔잔하지만 확실한 믿음이 (경험을 통해서 오래 증명된 것이)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이런 믿음이, 곤경에 처한 타인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또 다른 큰 이유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개인주의적이지만 결코 이기적이지 않아요. 한국은 전체주의적이라 얼핏보기에 덜 이기주의적이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고양이 빌리는 것도 그만두고 또 방 여러개인 큰 집에서 정말로 부유하게 사는 것에도 익숙해지길 바래요. 우리 모두가 참된 의미의 ‘부자 되기를’ 기원합니다.

Perception

‘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를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그대를 기쁘게 해줄(?) 독설이 너무 많이 들어 있네요. 좀 묵혀 두었다가 잊혀질만 하면 다시 봐요 🙂

오늘은 대신에 ‘Perception’에 관한 이야기를 ‘티라다모 큰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좀 해볼까 해요. 한자로는 ‘지각’(知覺)이라는 단어와 대응하는 것 같군요. 좀 어려운 말 같은데요?

불교적 시각에서 영어로 하는 설명은 ‘Perception (Pāli – saññā, Chinese – 想蘊) is sensory and mental process that registers, recognises and labels, for instance, the shape of a tree, color green, emotion of fear’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Perception은 기록하고 인지하며 표식을 붙이는 (표를 다는), 감각 및 정신의 작용. 예를 들자면, 나무모양, 초록색, 공포감등이 perception이라 할 수 있어요’. 참고로 (perception으로 영역된) 팔리 원어 ‘saññā’는 ‘관련된 지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associated knowledge’라고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perception에 대응하는 태국어 단어는 그 의미가 ‘기억’ (memory) 이라고 하네요.

어떤 한국어 불교사전에서는 ‘6가지 감각기관의 접촉과 동시에 생기는 것이다’ 라고해요 (간접적인 설명이지만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어봐요). 우리가 모두 아는 오감에다가 ‘마음’을 더해서 6감인데요. 붓다께서는 마음도, 보는 것이나 감촉하는 것과 동일하게, 감각의 한 종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이 6가지의 감각기관에, 외부적인 접촉이 가해질때 발생하게 되는 것이 perception 즉 지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카레는 맛과 향은 좋지만 그 모양으로 말미암아 영국여왕의 만찬에 오르기는 어렵겠다’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 말속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의 perception이 드러나겠지요. ‘짱께들은 다꾸앙들보다 더럽고 시끄럽고 무질서하다’ 이렇게 누가 말을 한다고 하면 또한 어떤 사람의 perception들이 그 말속에 들어 있겠네요.

자 이제 perception이 무었인지 좀 감을 잡았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가 궁금하지요? 혹시 기억을 할지 모르겠는데요, 예전에 이 글에서 The Five Aggregates를 간략하게 언급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다섯가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perception입니다. 그 당시에는 cognition으로 번역했었던 책을 참조 했었네요.

이 perception은 ‘나’ (자신,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는 다섯가지 요소 중 하나로써, 우리의 일상 삶에도 (현실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칠뿐만 아니라, 그대와 내가 장차 수행을 해서 해탈 열반을 증득하고 경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수행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시네요. 우리들 모두, 오늘 하루 동안에, 수많은 순간에 수없이 많은 perception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었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하루를 보냈을 꺼예요. 그리고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그 세번째 글 안에 들어 있다는 ‘독설’들도 또한 나의 perception이 많이 드러나고 표현된 것들이지요.

티라다모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모든 사람들이 perception을 가지고 있다. 지혜란, perception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perception을 자각하고, 나아가 그것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때로 그것을 활용하기도 하면서, perception과 자유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 또한 변화하며 영속하지 않고 또한 당신이 아니다.’ 좋은 말씀이지요? 그래서 내가 쓴 세번째 글을 언젠가 다시 읽어보고 블로그에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

내 생각에, 그대와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들은 무슨 크고 거창한 사건 사고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perception이 사람들마다 다름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견해의 차이, 시각의 차이, 생각의 차이 그리고 느낌의 차이에서 비롯된 알력과 충돌이 아닌가 싶어요.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 ‘자신’이라는 ‘아상’과 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perception도, 위에서 언급한 다른 The Five Aggregates들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 변화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어떤 생각이나 견해 혹은 느낌이 바뀌었던 적이 많지 않았나요? 바뀌기 전에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어떤 것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그리고 다른 경험이 쌓임으로써 변하지 않았던가요? 이렇게 perception에서 비롯된 견해나 생각 혹은 느낌을 가지고 타인들과 언쟁을 벌이며 충돌할때, 혹은 말 못할 괴로움에 빠질때, 그대와 나는 바로 이러한 perception의 참 모습을 기억하도록 노력해요. 우리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지혜를 얻고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길 바래요.

Perspective is everything

‘원근법’이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견해 혹은 시각이 극히 중요하다’ 라는 말이 되겠다. 어제 소개한 One Strange Rock에 나오는, 명언중의 명언이다.

견해나 시각은, 여러개 있는 중에서 (구두나 자동차처럼) 고르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지는 것일까? 당신이 만약 골프를 쳐 본적이 없고 골프에 대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실제로 해본 것이 없다고 치자. 그러면 골프에 대해서 (골프라는 운동 자체) 당신이 견해나 시각이 있을 수 있나? 당연히 없다. 자연훼손이나 농약 그런 이야기들은 골프 ‘관련’이지 골프 ‘자체’가 아니지 않은가? 골프에 관한 견해나 시각은 골프를 치면서 생기고 또 발전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인간에게는 6개의 감각이 있다고 가르치셨다고 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오감에 더해서 ‘마음’을 6번째 감각기관 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이 ‘마음’이 저기서 말하는 ‘perspective’와 아주 관계가 깊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감이 받아들인 것을 뇌가 ‘마음을 통해서’ 해석하듯이, 세상만사 모든 것들과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perspective’에 따라서 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이 ‘견해’ 혹은  ‘시각’이 인간을 규정하고 그의 삶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지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왜 perspective를 그렇게 강조해서 이야기 하는가 하면, 내 생각에는, 첫째로 대기권 위에서 오랫동안 수없이 (하루에 열두번도 더 지구 주위를 돌면서 세상을 본다), 지구의 변화를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과 디테일로 본다는 것이, 그 우주인들에게 어떤 근본적이고 의미심장한 견해 혹은 시각의 변화를, 단지 지구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전체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왔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 주려고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과학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던 (너무 거대한 스케일 이거나 혹은 극히 작은 스케일의) 자연 현상들을 밝혀 내어 우리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견해 혹은 시각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에,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써, 아마 우주에서 보았던, 엄청난 규모의 연어 (salmon) 이동과 산란 그리고 죽음 (산란후 자연사). 그 집단적인 죽음 뒤에 실로 엄청난 규모의 질소 (nitrogen) 이동이 있고, 그렇게 이동된 질소가 다시 거대한 규모의 숲을 만들어 내는, 자연의 어마어마하며 또 정교한 ‘rebirth’의 과정을, NASA와 과학의 힘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무덤 위에 심은 사과나무 이야기 기억하지? 바로 그런 의미의 가르침을 붓다께서 주셨던 것이고 또 수천년 지나서 NASA와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Perspective is everything.

나이 든다는 증거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하는 편인가 듣는 편인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70%를 이야기 하고 상대방의 말을 30% 들으면, 서로 반반씩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으로 느낀다고 한다.

대화의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화의 소재.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방도 흥미가 있을 것으로 간주하고 떠들어 대는가 아니면, 공통된 어떤 주제를 찾아서 함께 이야기를 주고 받는가?

대화의 소재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당신 이야기의 주제가 주로 과거 이미 일어났던 것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 혹은 장차 일어날 일, 계획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

당신이, 상대방보다 더 많이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 떠벌리고, 또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주로 떠들어 댄다면… 이 글 제목이 뭐였더라 🙂

과거에 집작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이상하게 뒤틀릴 것이다. 달라이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