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의 말로

나는 국민학교 (초등학교) 시절 산수를 포기한 원조 수포자중 한사람입니다. 수포자로서의 학창시절은 괴롭고 지루했으며 또한 험난했습니다. 먼 나라로 떠나와 성인이 된 삶의 대부분을 살면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릴때 ‘나는 제도교육의 희생자야’ 가끔 농담을 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제도교육의 덕도 보았다’ 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익숙하고 힘이 들지 않는 것을 하려고 하지, 익숙하지 않고 힘이 드는 것은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마치 라틴어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수학시간이면 나는 ‘저 공식이 우리가 사는데 어떤 관련이 있담?’ ‘지금 배우는 저것들이 정말인지 어떻게 알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시절에는, 필수인 수학과목을 두번 낙제하고선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에 (지금 아내가 된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컨닝을 하는데, 전혀 모르는 기호를 마치 만화 그리듯이 ‘모양을 외워서 그려낸’ 답장으로 동정표를 받아 최하 학점을 받으며 겨우 졸업을 하였습니다. 내가 제출한 시험지를 체점하던 분은 그 괴이한 답안을 보면서 엄청 웃었거나 아니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었을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살며, 또 이민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전산관련 일을 하면서 나는 오랜 세월 수십개 나라에서 온 문화, 언어 그리고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오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과, 내가 지금 사는 나라 그리고 또  내가 떠나온 한국을 비교해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개인의 능력으로 볼때 한국인 개개인의 능력은, 일본인을 포함한  대부분 나라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여기 예외도 있긴 합니다 🙂 스위스나 독일 사람들에게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당당히 대접 받는 지금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왜 최고의 집단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보면 별로인 일본인들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고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한국인들은 개인적으로 너무 똑똑하다 보니 지도자를 인정하고 따르는 습성이 적고 또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잔머리나 편법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 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도 나라도 자기가 잘하는 것을 더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들어낸 것들을 좋은 머리와 감각으로 재빨리 파악해 내고 나아가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고 바쁘게 사는 세상에서는 ‘그것해서 뭐하게?’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들을 최대한 빨리 흡수하고 나서 한발짝이라도 더 빨리 더 위로 올라 가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학벌, 최고의 직장, 최고의 현직에서 일하는 성격좋고 똑똑한 친구를 이번 한국방문 때도 만났습니다. 최고 공부를 많이한 최고 아름다운 부인과 최고 좋은 차에 동승하여 서울을 잠시 둘러볼때, 수포자 부부에게는 ‘떠나버린’ 한국이 마치 ‘잃어버린’ 선경처럼(仙境) 느껴졌습니다 🙂 그 친구는 장차 은퇴하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또 좀 살기도 할 작정인지 어떤 대학 일본(어)학과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다운, 대단한 수준이라 생각하여 감탄하였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그저 재미 삼아서 또 심심해서, 일본 관련 도큐멘트리, 영화, 드라마 시리즈, 교양 프로그램 그리고 하다못해 맛집 방문기까지 (영어자막의 도움으로) 수없이 보았습니다. 일본을 다른 나라들의 시각으로 보는 도큐멘트리들도 이것저것 보았습니다.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어쩌면 대학을 두어번 졸업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일이나 일본 프랑스는 물론 하다못해(?) 러시아나 중국같은 나라들도 영어로 방송하는 (관영) 채널들이 있습니다. 영어를 통하여 접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은, 한국어로만  (번역포함) 접할 수 있는 양과 범위의 수십배 어쩌면 수백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만큼 쉽습니다.

한국에서 골프를 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위 싱글’을 치는 사람들 중에서는 레슨을 꼬박꼬박 받아서 그렇게 된 사람보다는 자기 스스로 죽기살기로 연습하고 연구해서 그렇게 된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잘 치는 방법은 한국과 전혀 다릅니다. 물론 아마추어 골퍼를 대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매우’ 잘 치는 평범하고(?) 흔한 방법은 골프를 잘 치거나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는 아마추어로서는 최고 수준의 골퍼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어릴때부터 아빠따라 엄마따라 놀이삼아서 골프장을 들락날락 거렸던 사람들입니다. 어른이 되서 한동안 규칙적으로 골프를 쳤거나 지금도 규칙적으로 치는 사람들인 것은 맞지만 ‘죽기살기로’ 골프를 치거나 ‘미친듯이’ 연습하고 연구하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같은 목표를 이루거나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다른 방법들과 길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같은 길로만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의심할바 없는 권위를 가진 선생들로부터 정리된 방법으로 일본을 배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놀이삼아, 마치 아빠따라 골프장에 와서 퍼터들고 그린에서 장난치듯, 많은 시간을 보낸 일본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듯 ‘나의 생각과 견해’가 생겼습니다. 수많은 일본사람들을, 수많은 상황에서, 수많은 스토리들을 통해서 일종의 교차검증을 하면서 듣고 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권위도 없고 학위도 없지만, 그 어떤 일본 전문가와 토론을 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나의 견해를 표명 할 수 있지 싶습니다. 건방진 말이었지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또 단 하나의 정답이 필요없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왜?’ 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답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밖에는 없지 싶습니다 (‘realise’ 라는 말을 이럴때 쓰지 싶네요).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것들 중에서, 이미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를 잘 고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정답은 주관식 문제의 답처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답뿐만 아니라 문제조차도 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내 삶이 가능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이 시간에 이런 글을 쓰기까지 ‘왜?’를 허락하지 않았던 내가 떠나온 나라 그리고 ‘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가 사는 나라, 둘 다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수포자의 말로가 너무 비참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우물안의 개구리 그리고 해탈

우연히 산악인 허영호에 대한 오래된 기사를 최근에  보게 되었다. 그가 한국산악회와 원수진(?) 이유에 대한 것들인데, 조선일보가 인터뷰한 내용을 먼저 보았다. 등산인으로서의 성취도 성취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살아온 길들을 읽으면서, 이 사람 도인인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늘 하듯이 크로스첵크를 (비교확인) 해보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산악회 부회장이 월간 ‘산’ 이라는 잡지에 산악회를 대표하여 올린 글이 있었다. 매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세상사가 칼로 무우자르듯 단순하고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 각자의 처지에 따라 동일한 일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해석되는 경우도 흔한 일이니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지만, 내 느낌으로는 한국산악회쪽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다시 허영호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이 사람이 과연 아까 내가 생각했던, 그 도인에 가까운 놀랍고 대단한 사람인지 아니면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부족함으로) 큰 실패를(?) 했던 사람이  화려한 언변으로 내로남불 하면서 일종의 정신승리나(?) 추구하는 것인지 햇갈리게 되었다.

오늘 산을 뛰다가 문득 ‘아! 해탈이란 것이 (득도, 경지등 어떤 표현을 쓰건 상관없다) 정말 어려운 이유가, 반드시 우물안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부대끼고 엮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스스로는 우물안의 개구리를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로구나’ 깨닫게 되었다. 이래서 정말 어려운 것이로구나!

내가 글을 잘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글을 잘 쓰는 것과 인생을 잘 사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가로질러 흐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들을때면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허영호의 인터뷰를 읽고나서 마음이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내가 이 사람처럼 말하거든, 나도 그와 비슷한 태도로 살거든, 그리고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감동할(?) 때도 있었고. 내가 그의 인터뷰를 맨 처음 읽으며 감동했었듯이.

괜찮은 여자 하나 팔자 고쳐주려고 내가 이리저리 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십년도 훨씬 전에 중매를 딱 한번 했었는데 아직 해로하고 있으니 성공율이 100%이긴 한데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첫 상대로 오래전부터 내가 잘 알던 종교인 한 사람을 설득해보았는데, 한이틀 기도를 한 후에 응답이 왔다. 고맙고 좋기는 한데 자기는 그래도 자기가 믿는 신과만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회신을 기다리면서 이 사람의 강연을 유튜브로 몇개 보았는데, 이분이 하는 일의 성격과 퍼스날리티를 알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강한 표현들을 하고 있구나’ 느낌이 들었다. 그의 거절을 더 이상 설득없이 조용히 받아들였다.

‘다른 개구리들과 우물안에서 부대끼고 엮이며 살지만, 그들과는 달리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높은 자리에서 앉아서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면서 떠들어대는 자들을 보면, 자신은 우물안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부대끼지도 않고 엮이지조차 않으면서 어쩌자고 다른 개구리들을 보면서 우물밖으로 나가라고 떠들어 대는지 기가 막힌다. 종교의 한계요 인간의 비극이다.

해탈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위험한 신호들을 생각해 봤다. 첫째로 꼽을 것은 ‘강성’이다. 책을 읽고 머리로 공부해 생겨난 이론들이 강하고, 그것을 강하게 표현하며 또 강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예외없이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 어떤 분야에서건 경지에 오른 사람이 ‘강성’인 경우는 없다. 둘째로, ‘분리’다. 사람이건 그 무었이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나와 남 혹은 우리와 그들처럼 대립구도를 만들어 낸다. 말이나 글이 그런 이분법적 구도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에고다 (ego). 나는 다르다는 거지, 내가 속한 이곳은 네가 속한 그곳과는 다르다는 거지. 아주 위험하다. 셋째로, 미려한 글이나 말로 ‘설득’하려는 태도다. 해탈의 가능성은 스스로 뱉아내는 미사려구와 반비례한다.

언젠가부터 믿음이 들기 시작했는데, 해탈하거나 도 트고 나도 유튜브에서 떠들고 책써서 팔고 안 그러지 싶다. 뭐 딱히 할말도 없고 또 뭐 좀 팔아서 돈벌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다 그런 욕망도 없을테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표가 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스쳐 지나간 해탈 도인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한국 방문 후에 연락이 재개된 한 친구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위에서 말한 위험한 신호들을 드러내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면서 마음이 무겁다.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강하게 말하고 너와 나를 분리하며 자꾸만 설득하려고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무것도 증명할 것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고 또 증명할 대상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것도 배우는 과정이니 발전의 일부 아닐까 싶다.

이번에 한국에 잠시 머무르며 사람들의 언행이 무식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경우가 몇차례 있었다. 내게 ‘마음의 노안’이 와서 세상이 굴절되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면들이 늘 있었는데 문제 삼지 않다가 요새들어 내가 문제 삼기 시작하는지 명확히 알기가 어렵다. 이 친구와도 ‘오랜 친구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시각과 ‘오랜 친구사이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라는 시각이 충돌하는 경험이 이번에도 있었다. 귀국해서 아이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아이가 세대도 사고방식도 다르지만 내가 보기에 소셜 아이큐가 높다. 자기 생각에는, 전자쪽이 더 맞는 것 같고 (오랜 친구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느낀 부정적 감정을 상대방에게 어떤 식으로건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에 주고받은 팩트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고, 아이는 그보다는 관계 자체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생의 대부분을 독고다이로 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한면만 있는 동전이 없고 잘 들면서 손 안베는 칼도 없다. 친구들의 이해와 인내에 감사한다.

다른 시각에서 보는 내로남불

한국사람들이 (영어권) 선진국에서 보게 되면 놀라는 장면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줄이 아무리 길어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무언가 서두르거나 더 빨리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싶어요. 그리고 줄 선 사람들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어떤 압력을 (?) 가하거나 불평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도요.

이전 글에서도, 중국이나 한국 문화에서는 개인기 혹은 개인차원의 스턴트를 중요시 여기거나 기대하지만, 이곳처럼 다른 문화에서는 그런 것들은 오히려 별로 환영받지 못하며 대부분의 경우 구조적이거나 환경적인 변화를 통해서 개선을 추구하는 경향이 훨씬 크다는 말을 했어요.

붓다의 가르침 그리고 함께 그려진 붓다의 모습도, 원래 붓다의 제자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진실이나 19세기부터 서양학자들이 찾아내고자 했던 진실과,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전달 받아서 더 키우고 강화한 그 모습과는 큰 차이를 보여요. 상이한 문화들이 동일한 대상을 오랜세월에 걸쳐 어떻게 해석하고 또 덧칠 하는가를 볼수 있는데요, 한쪽으로는 그렇게 그려진 붓다의 가르침과 그분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반대쪽으로는 그렇게 해석하고 덧칠한 그 문화의 진면목이 또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 자리에 있으니 이 정도는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 자격증을 가졌으니 이 정도는 기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이런류의 상(像)을 그려놓고선 다른 사람들을 그 상에 제멋대로 맞추어 이러니 저러니 기대하고 나무래고 성내거나 좋아하고 하는 모습들이 중화문화권과 한국에서는 더 흔한 것 같아요. 물론 그리스철학등의 영향을 받은 영어권에서도 ‘idea’ 라면서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두 문화권 모두 줄을 잘 서긴 하는데 그 줄선 사람들과 그들을 상대하는 서비스종사자의 태도는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것이 바로 이곳에도 적용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중국인들이 그려놓은 붓다의 모습을 대승경전에서 본 서양학자들은 ‘어리둥절’했다고 해요. 두 문화를 접해본 나로서는 이 어리둥절했다 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한 표현같아요. 마치 이 나라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 종업원이 미친듯이 그리고 미안해 하면서 일을 하면 이 나라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지 싶어요. 그리고 반대로 이나라 사람 종업원이 한국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성난 눈초리로 그렇게 밖에 못하니 하면서 성을 낸다면 또한 ‘어리둥절’하지 싶네요. 중국으로 부터 내려와 우리나라에 전파된 대승불교에서는 성불한 붓다를 신격화하지요? 완벽한 존재. 일단 성불하고 나면 (어떤 자리에 앉거나 자격증을 따고 나면) 그 성불한 붓다께서 인간적인 고뇌와 의심으로 괴로워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기 극히 어려워하는 문화가 아닌가 싶네요. 반대로 독일, 영국 그리고 일본의 학자들이 지난 100여년 연구하여 밝혀낸 보다 진실된 붓다의 가르침과 모습을 보면, 붓다께서는 성불후에도 인간적인 근심과 의심 그리고 괴로움으로 시달렸던 때가 있었다고 하네요. 물론 잘 극복하시고 또 현명하게 처리하셨겠지요.

이 나라에서는, 어떤 자리에 있는 무슨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좀 잘못을 해도 일단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구조적인 개선을 시도하지 그 개인을 지나치게 까발려 공격하고 나무래지는 않아요. 그래서 바깥에서 온 사람들의 눈에는 물렁하고 어리버리하게 보일때도 있어요. 하지만 두 상이한 문화에 오래 살아본 나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아요. 이 나라에는 전국민 산재보험이 있는데요 (보험료를 따로 내지는 않고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합니다) 이 나라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고의 책임을 (설령 외국 여행자가 저지른 잘못이라고 하여도) 개인에게 묻지 않고 일단 나라가 먼저 책임을 져줍니다. 나라가 일단 먼저 치료를 해주고 또 봉급도 계속 대신 주면서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나중에 나라가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형사상의 책임을 묻습니다. 민사상 손해배상은 거의 없어요. 이게 왜 훌륭한가 하면, 사람들이 싸우고 다툴 여지의 90%를 애초에 없애버리는 아주 인도적인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들이 서로 내가 맞네 네가 틀리네, 죽이네 살리네, 네 잘못이네 아니네로 크게 다툴 가능성이 훨씬 적기 때문이이에요. 물론 여기도 약점은 있습니다. 보복이나 징벌을 가하여 속이 시원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아요. 그래서 어어없고 어리석은 짓의 결과로 큰 사고를 내고도 별 죄책감없이 그냥 기어나가서 (?) 사는 넘들도 있어요. 짧게 보면 속이 상하지만 길게 보면 아마도 모두에게 이로운 면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차차 나이가 들면서, 국민학교때 배웠던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난 괴물이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어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선의건 악의건 지어낸 어떤 상(像)들을 더 이상 잘 믿지 않아요. 여러번 교차검증 해보고 확인되지 않으면 믿지 않아요. 붓다에 대한 어떤 신격화된 이야기도 신화도 전혀 믿지 않아요. 머리에 뿔이난 괴물이므로 우리가 단단히 힘을 합쳐서 몰아내야 된다는 수준의 이야기를 나는 더 이상 듣지도 믿지도 않아요. 더 크고 더 위대해야 내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보다는, 나와 더 유사한 면이 많고 나와 똑같은 인간적인 조건인데 나보다 더 잘 했던 분의 진실한 (그리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내게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힘이 되요.

언젠가 말했는데요, 가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자기도 못할거면서 왜 다른사람이 단지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격증을 땄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잘못을 나무래고 인간적인 모욕을 가하는가 ‘어리둥절’할때가 종종 있어요. 물론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줄 알아요 그 자리에 앉았던 그 넘이 그 자리 때문에 또 그 자격증을 가지고 당신들 위에 군림했었고 또 쥐어짜서 가지고 갔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난 해답을 몰라요. 어떻게 해야 나아질지. 하지만 그냥 이런 이야기는 해봅니다. 세상에는 그런 방식 이외의 다른방식으로 어울려 잘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내 시각으로 본 내로남불이었어요.

진짜 실력 가짜 실력

오래전 중국출신 컴퓨터 넷트웤 기술자와 잠시 일했던 적이 있었어요. 시드니 본사에서 어쩌다 출장을 이곳으로 오면 함께 짱께 식당에도 가서 밥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곤 했었어요. 동료들 대부분이 유러피언인 상황에서 아마도 서로에게 더 동질감을 느끼고 좀 편안한 마음이 생겼던지도 모르겠네요.

이 사람이 했던 말 중에서 지금도 어떤 상황이나 컨텍스트에서 기억나는 말이 있는데요 ‘이 사람들은 (유러피언 백인들을 지칭) 유드리가 없어. 새로운 무슨 일이나 평소에는 안생기던 일이 벌어지면, 내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단순한 것들을 가지고 그렇게 회의를 하고 난리를 치는데 그 시간이면 난 다 끝냈겠다’ 이런 의미였다고 기억해요. 그 당시에는 나도 아마 동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난 수십년 중국은 (그리고 한국도 어쩌면 아직) 격동과 발전의 시기를 겪고 있어요. ‘이전에 이렇게 했었다’는 선례가 거의 없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니 그저 일상이 새로운 것 천지요 소위 ad-hoc 상황이 보편적이지 않겠어요? 땜빵질이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개인의 순발력과 재치를 발휘해서 즉시 고안해 내는 해결책들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어쩌면 ‘기대된 보통’ 상황인 나라에서 이 사람과 나는 성장했었고 또 이민을 왔었던 것이에요.

입장을 바꾸어 말하면, 이나라 사람들에게는 정말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며 원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그 중국인 기술자는 전혀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 발휘되는 개인의 역량에 (보다 촛점을 맞추면서) 오히려 자랑스러워 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세상이 참 다르지요?

옛날 나와 늘 함께 라운드를 했었던 친구 노(老)골퍼가 한번은 이븐파를 칠때 내가 좀 라운드 내용을 기록해 둔 것이 있어요. 요즘도 가끔 꺼내서 읽어 보는데요 그 기록에 따르면 그날 브루스는 아무런 기적의 샷이나 마술 묘기 샷을 치지 않았어요. 거의 모든 드라이버 샷이 페어웨이에 길지는 않아도 무난히 떨어졌었고 2온 2펏을 대부분 성공시켰던 것으로 적혀 있어요. 그야말로 시시한 골프, 이전 홀과 다음 홀의 내용이 별반 다를바가 없는 boring한 골프를 쳤던 결과가 이븐파였어요.

기대하지 않거나 원치 않는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았던 것이, 다시 말해 직전의 샷이 훌륭했던 결과로 현재의 샷이 쉽고 또 다음의 샷도 또한 훌륭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그런 샷들을 연속적으로 쳤던 것이, 그 최고 라운드의 이유였던 것이지요. 수많은 괜찮은 아마추어 골퍼들과 라운드를 하면서 (내게는) 마치 기적과 같은 샷들을 치던 사람들도 가끔씩 보았어요. 입을 다물수 없이 멀리가던 드라이버 샷, 마술과 같은 트러블 샷 이런 것들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좋은 스코어 카드를 내는 것은 드물게 보았어요. 또 좋은 골퍼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도 별로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네요. 기적의 샷은 아주 잘못된 직전 샷이 원인입니다. 설령 성공시켜도 엄청난 심신의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고 또한 마음도 알게 모르게 흐트러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좀 이야기가 새는대요, 한번은 친구 노골퍼가 클럽 챔피언쉽 결승에 나갔어요. 내가 캐디를 9홀 했어요 (나머지 9홀은 아들이) 그때 10대 후반의 젊은이가 결국은 우승을 했었는데요, 이 젊은이는 이후 프로골퍼가 되어 이 나라에서는 유명한 선수랍니다. 이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는 지금 내가 속한 클럽의 명예회원이기도 한데요, 일전에 라운드 기록을 우연히 보니 블랙티에서 6언더파를 쳤네요. 블랙티는 나 같은 보통골퍼들이 치는 화이트티와 50-100미터 더 뒤로 물러나 있어서 한번 서보면 페어웨이가 까맣게 멀어보이며 마치 다른 골프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어요. 코스를 잘 알기에 이런 곳에서 거의 모든 홀을 파 하면서 수없는 버디나 이글을 잡아내는 이 젊은이는 (내겐) 마치 외계인 같아요. 그런데 세상이 참 다르기도 하지만 또 넓기도 하지요? 이렇게 엄청난 골프를 치는 이 젊은이도 PGA문턱은 커녕 명함도 한번 내밀어보지 못한 것 같아요.

이야기가 좀 더 새는대요, 년전에 우리 클럽에 십여명의 중국인 골퍼들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 한꺼번에 회원이 되었어요. 다른 클럽에서 집단 이주한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회원들과 전혀 어울려 라운드를 하지 않음은 물론이려니와 (한국사람들도 비슷한 경우가 많지요?) 위에서 말한 블랙티나 블루티에서 라운드를 한답니다. 하도 많은 클럽회원들이 늑장플레이를 한다고 불평을 하고 진정을 해서, 클럽에서도 그러지 말고 실력에 맞는 보통 화이트티에서 치라고 강하게 말했다고 해요. 그래도 ‘내돈 내고 내가 치는데 네가 왜?’ 하면서 말짱 무시하고 여전히 블랙티에서 칩니다. 중국인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또 어디서 무슨짓을 해도 중국인 임을 드러냅니다. 부끄러움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당함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것이 중국인들에게만 있는 어떤 민족적인 특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간 혹은 사회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흔히 보여지는 보편적인 것일까요 🙂

다시 되돌아 옵니다. 진짜 실력은 잘 보이지 않아요. 화려함도 없고 우리가 상상하는 마법과 같은 드러난 묘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 뵹신으로 평가절하 취급 당하기도 합니다. 물론 진짜 뵹신들에게서요. 가짜 실력은 화려합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드러납니다. 하지만 ‘시간 앞에 장사 없으니’ 오랜 시간이라는 자를 딱 대고서 보면 실체가 드러납니다. 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려함을 쫓기도 하지만 또 기억력이 별로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잘 기억을 못하거나 무언가 잘못된 것을 보아도 예외인가? 실수인가? 이렇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아 보여요. 난 머리는 나빠도 기억력은 아주 좋은 편에 속해요. 그래서 내 눈엔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그 전모와 실체가. 그러니 어찌 내가 가짜 실력을 쫓을 수가 있겠어요 🙂

난 유튜브나 매스컴에 나와서 ‘이래라 저래라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들의 말을 전혀 듣지도 또 믿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붓다께서도 그러셨듯이, 정말 알고 나면 정말 실력을 쌓고 나면 정말 위로 올라가고 나면, 자신에게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다 저렇다 이래라 저래라 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지 싶어요. 참된 실력은 고요하니 잘 드러나지 않으며, 정말 잘 사는 사람들 또한 고요하니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글 따위는 쓰지 않아요 🙂

나는 예선 탈락인데요. 그대는 고요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나서고 내세우며 시끄러운 것을 일종의 성공이며 우월함이라고 생각하는 ‘당당한’ 사람인가요?

삶의 진리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혹시 들어봤어요? 나는 펜인데요, 오랜 세월 하도 즉문즉설을 많이 보고 또 그분의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질문만 딱봐도 해답이 저절로 줄줄 나와요. 그리고 모범답안을 들어보면 내가 미리 낸 해답이 대부분 맞아요 🙂 그래서 그런지 요샌 좀 재미가 (?) 덜해서 별로 안보게 되네요.

우연히 보니 오늘 질문 제목이 ‘아이가 고집이 센대요 사랑으로 대해야 하나요 아니면 엄하게 대해서 고쳐줘야 하나요’ 이런 것이었어요. 아! 해답을 모르는 문제가 오랫만에 등장했네요. 아주 짧은 동영상인데요 모범답안이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이 양반이 무슨 황당무계한 (내가 느끼기에 그런적도 있었어요)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에 봤어요.

사랑으로 대해줘야 하나 엄하게 고쳐줘야 하나 그런 생각일랑 하지말고, 사랑스러운 내자식이 고집을 피울때 ‘아! 이 아이의 고집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로구나. 어른인 내가 이런 언행을 했을때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딱하고 가관이었겠나’ 스스로 돌이켜 깨달으며, 아이에게 빙그레 미소 지을수 있으면 된다 이런 맥락의 대답을 했어요. 그리고 덧붙여 ‘엄마가 그렇게 미소 지을만한 수준이 되면 아이도 엄마를 따라서 저절로 변화하게 된다’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여태껏 보고 듣고 배운, 그 어떤 박사 도사 노벨상 무슨상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훌륭한, 삶의 진리를 단 몇마디로 함축한, 참으로 대단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에 고개숙이며 크게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빙그레 미소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또 그것을 지속하고 반복하기는 얼마나 더 어려운지 나는 조금은 이해가 되요.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 ‘내 수준의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 인생에 더 이상 뭐가 있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