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그리고 문화의 차이 – 세번째 이야기

서양아이들은 철이 일찍든다지요. 빠다 먹어서 그런가 🙂

언젠가 네덜란드 음악가 안드레 리우 이야기할때, 그 사람의 초기 대표 음반인 Dreaming을 우리 아이가 수천번을 들으며 잠이 들어서 머리에 인이 박혔을 것이라고 했었지요. 무슨 조기교육? 언젠가 부모의 카르마가 자식들에게 대를 잊는다고도 했었는데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아시안 아이들이 지각을 하거나 오전에 유치원에서 맥을 못추는 일이 많다고 해요. 왜 그런가 하면, 설령 부모가 이곳에서 태어난 이민 2-3세라고 하더라도, 자기들의 부모가 했었던대로, 자기 아이들을 어른들 주변에서 뒹굴면서 밤늦도록 함께 있게 하다가 불규칙적으로 잠자게 하니 그렇다고 했어요.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서양아이들이 철이 일찍드는 이유는 ‘부모가 오냐오냐 오래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예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를 한국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싶은데요, 부모세대가 하도 없이 살고 또 눌려 살다 보니 한이 맺혀서 자식이라도 좀 큰소리 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면도 있지 않을까 짐작해요. 그런데 그런 성격은 이곳에서는 미숙아 혹은 성격에 문제가 있는 철부지로 취급되요.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언젠가 어떤 일본지식인이 ‘한국엄마들이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제멋대로 구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시작할때부터 한국도 선진국이라 불리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물론 나도 100% 동의 🙂 아주 어려서 젖먹이며 안아 기르는 거야 어딘들 다르겠나요 하지만 아이가 한두살이 되면서부터 (정확한 시기를 기억 못하겠네요) 이곳에서는 소위 말하는 routine을 (일정한 생활 ’습관’) 적용시켜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예요. 저녁먹고 재미있게 놀다가 이른 저녁이 되면 자기방으로 데리고 가요. 엄마가 (그리고 아빠도) 방에서 함께 노래도 불러주고 책도 읽어주며 잠을 잘 자도록 도와주다가는 딱 문을 닫고 나와요. 우리 경우는 ‘Dreaming’ 시디를 늘 틀어 놓고선 나왔지요. 그래서 아이가 그 음악을 수천번 들었던 것이지요. 좀 적응의 기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 결국 아이는 아무리 난동을 부리거나 악을 써도 (아이에게 위해가 되는 상황인지는 부모가 잘 봐요) 결코 나타나지 않는 부모를, 다시말해서, 아무때나 같이 뒹굴면서 ‘오냐오냐 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잔인하다고요? 아니지 싶은데요. 아이의 인격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요? 이것 하나만 듣고서 나머지 아홉은 모르면서 하는 말 같은데요 🙂 우리가 어떤 과정에 대한 언쟁을 벌이면서 결말이 나지 않을때는 그 과정이 초래한 결과들을 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물론 또 다른 종류의 언쟁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겠지만요…

가난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난을 벗어나고 난 이후에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언젠가 말했어요. 아시아 아이들이 부모와 뒹굴게 된 것은 어쩌면 그 부모 혹은 그 조부모 시절, 가난한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뒹굴던데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지금 그 2-3세들은 성실하게 노력하여 방이 여럿 있는 큰집에서 살면서도, 마치 단칸방에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말이예요.

이야기가 좀 옆으로 더 새는데요. 옛날에 훌륭한 부모와 착한 아들이 살았대요. 아들은 부모님이 제사 지내는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자랐는데요, 아들이 어릴때 집에서 고양이를 길렀어요. 제사상에 생선이나 고기를 얻을때면 몰래와서 먹어보거나 훔쳐가는 고양이를, 부모님은 제사를 지낼때면 방 한쪽에 좀 목을 묶어 놓았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착한 아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데요. 이 착한 아들은 정성껏 제사를 준비하면서 어릴적에 보았던 그 고양이를 기억했대요. 부인이 고양이를 싫어하기 때문에 집에는 없는대요, 잘 아는 집에서 좀 고양이를 빌어다가 제사를 지내는 날에만 방 한쪽에 목을 묶어서 놓아 두고선 제사를 올렸대요 🙂 만약 이 착한 아들이 장차 큰 벼슬을 하게 되고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면, 아마 제사용 고양이 빌리거나 혹은 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지 싶네요. 우리는 때로는 몰라서 장님 노릇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알고도 아무 생각이 없이 살다 보니 그냥 장님으로 지내는 경우도 있지 싶어요.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렇게 ‘습관’을 어릴때부터 몸으로 익히며 자라나는 아이들, 세상에 아무리 악을 써도 안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룰 속에서 플레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아기때부터 배우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자기 스스로 해야한다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저절로 싹트기 시작하고, 이러다보니 일찍 철이 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빠다 때문은 아닌것 같아요 🙂

철이 든다는 의미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어쩌면 ‘역지사지’ 하는 능력이 아닌가 해요. 언젠가 읽었는데, 미스월드대회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으로 경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미리 촬영해서 그 화면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전문가와 함께 보고 분석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거지를 수도 없이 수정한다고 해요. 자신이 상상하는 ‘화면에 비치는 내 언행은 이럴꺼야’와 실제 화면에 나타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한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된 상황을 잘 그려볼 능력과 의사가 있어야 하겠지요. 역지사지 그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쌓는 엄연한 능력이지 싶네요. 오직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 일어서 본 사람만이, 그것이 무었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또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도움과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바로 이런 이유로, 이나라 사람들이 매우 개인적인 경향이 높으면서도,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자발적으로 잘 돕는다고 나는 생각해요. 아이는 아비를 닯아서 축구를 잘 못했는데요, 어리버리한 아이가 축구팀이나 어떤 운동팀에 끼어서 함께 시합을 할때도, 어떤 아이도 부모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싫어하거나 배척하는 느낌을 주지 않았어요. 나는 이것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내 생각에는, 물론 여유있고 또 성격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겠지만 그 바탕에는 ‘역지사지’ 하는 부모들의 성숙함이 있었고, 그 영향 아래있는 아이들이 감히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거역하면서, 잘 하지 못하는 동료 친구에게 나쁘게 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버릇이 대를 이어요. 그리고 이렇게 대를 이은 버릇들이 모이면 그 사회의 어떤 큰 흐름 혹은 수준이 되는 것이겠지요.

지진이 났을때도 또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방송이 될 때도, 수 많은 이곳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리고 ‘조용히’ 해준 아름다운 미담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사회전체가 어떤 ‘안전망’ 같은 것으로 둘러 쌓인 느낌이 들어요. ‘내가 곤경에 처하면 누군가가 도와준다’는 잔잔하지만 확실한 믿음이 (경험을 통해서 오래 증명된 것이)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이런 믿음이, 곤경에 처한 타인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또 다른 큰 이유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개인주의적이지만 결코 이기적이지 않아요. 한국은 전체주의적이라 얼핏보기에 덜 이기주의적이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고양이 빌리는 것도 그만두고 또 방 여러개인 큰 집에서 정말로 부유하게 사는 것에도 익숙해지길 바래요. 우리 모두가 참된 의미의 ‘부자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