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문화 다른 생각 다른 삶

2주전 국민투표와 함께 실시되었던, 안락사와 대마초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물었던 투표 결과가 방금 발표되었다.

안락사는 65%의 지지를 받아 12개월 이내로 법으로 제정된다고 한다. 아무나 죽겠다면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자면 다수의 의사가 동의하는 6개월 미만의 생존 가능성 밖에는 없는 사람이 적법한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런 내용들이 포함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대마초는(마리화나) 안타깝게도(?) 46%의 찬성만으로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불법으로 여전히 남게 되었다.

최근에 김의신박사의 ‘암 걸리지 말고 행복하게 사는 법’ 주제의 강연을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분은 단지 세계적인 암전문가로서 좋은 의학 정보를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 최고의 암병원에서 오랜 기간동안 (대부분 다른 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다가 안되서 온) 수많은 미국인 암환자들과 또한 돈 보따리를 들고 (치료비가 엄청남) 태평양을 건너 그 병원을 찾은 수많은 부자 한국인 암환자들이, ‘암’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판이한 태도와 자세를 보이는지에 대한 사회인류학적인(?) 고찰을 또한 나누는 내용이라 내겐 큰 흥미가 있었다. 이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수십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나도 이분이 묘사하는 (부족하고 부끄러운) 한국인의 태도와 자세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가 아직 시간이 좀 있을때 자각을 하고서 무언가 개선과 발전을 이루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강연은 십여년 전에 촬영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현재에도 적용될 것으로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신문에 난 ‘한국인의 행복과 삶의 질에 관한 종합 연구’ 관련 기사를 보고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540페이지 논문을 대략 읽어 보았는데, 영미권국가들과 공통된 내용들도 물론 있었지만 몇가지 특이한, 다시 말해서 김의신박사가 말씀한 (암과 죽음에 관련하여 미국인들과 비교할때) 한국인들이 보이는 특이한 태도와 일맥상통하거나 어떤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언급한다.

일전에 하버드대학교 연구결과를 (‘돈 잘 쓰는법 ‘연구하여 책으로도 발간된 논문) 언급한 글에서도 나왔듯이 이 나라를 비롯한 영미권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요소들은 ‘경험’이나 (자기계발) ‘이타행’과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면서 기쁨과 의미를 찾는 것) 관련된 것들이 상위에 랭크 되는데 반하여, 이번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이러한 ‘경험’ ‘개인의 발전’ ‘이타행’ 같은 분야에는 관심이 없고 또한 이런 것들이 자신의 행복을 증신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수준이 영미권과 거의 동등한 상위 20%의 부유한 한국인들 조차도 동일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김의신박사의 강연과 이 논문의 (신문기사의) 내용을 동시에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면 무언가 우리들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단지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동일한 조사를 중국이나 인도 그리고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것 같은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요약한 표]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든 논문이니 결과에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굳어지면 죽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소위 말하는 클리세인가?

시작하기전에 일단 한마디 하자면, 어떤 사람이 말했다더만 ‘If common sense is that common, why is it so hard to see it?’ ‘상식이 정말 상식이라면 왜 그렇게 상식을 보기가 어려우냐?’.

요즘 드는 생각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아는 것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런식으로 좀 객관적으로 단순하고 명확히 구분된다면 얼마나 인생이 더 쉽고 덜 복잡하겠는가 싶다.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섞여 있고, 자신도 남들도 얼마나 아는지 모르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절대적으로 틀리거나 잘못된 생각이나 주장은 드물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속에서 ‘얼마만큼 맞고 얼마만큼은 잘 모르겠고 (혹은 틀리고)’를 좀 객관적으로 심사숙고하기 보다는 (이것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 ‘자신이 지금하는 생각이나 주장속에서 오직 자기가 보기에 맞는 부분만을 내세우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틀린 생각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딱 때어내서 말하면. 잘못된 주장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딱 때어낸 주장만을 보자면… 이러니 세상이 쉽지 않고 복잡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러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하는 생각이나 주장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덧붙이는 두가지 가르침은, (지금 나의) ‘생각이나 주장은 변한다는 것’과 또 ‘자기 자신이라고 (자아, ego) 그렇게 움켜지고 주장할 그것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정말?

다시 굳어지면 죽는다는 말로 되돌아 가보자. 최근 신문에서 읽은 내용중에 ‘나이가 들면 늘어나는 것은 고집과 불만이고, 줄어드는 것은 웃음과 인사’라는 말이 있었다. 고집과 불만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자기 주장’을 적당한 상황에 적절히 하는 센스를 점점 잃음과 동시에, 그것의 절대적인 양이 많아지니 배우자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똥고집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자신의 2차적인 반응이 불만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자기생각 자기주장은 나이가 들면 점점 많아지게 되어 있다. 마치 주름살이나 뱃살처럼. 가만히 두면 저절로 쌓이고 강화되는 것이 바로 ‘자아, ego’ 아닌가? 그것의 표출이 고집이고 불만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어렴풋이 깨달아도 그것과는 상반 힘이 (세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별 소용없이 무너지며 ‘속절없이 늙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머리만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heart & soul이 (영혼이) 동시에 굳어지는 모습이, 고집과 불만이라는 것을 우리들 모두가 자각하기를 바란다.

몸이 굳어지는 것도 막기 어렵고 또한 위험한 일이지만, 머리와 영혼이 굳어지는 것은 더욱 막기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남들도 얼마나 굳어지고 있는지 또 이미 얼마나 굳어졌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고, 종종 굳어지지 않은 자신의 단편적인 모습에 집중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하면 위험하다. ‘이래도 되는가?’ ‘이것이 맞는가?’ 늘 좀 불안해하면서 궁금해하고 또 자연스레 비교도 하고 검증도 하면서 사는 것이 ‘내게’ 더 낫다. 그러면 굳어지기 어렵다.

그런데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불안한 부드러움 보다는 덜 불안한 굳어짐쪽으로 자꾸 가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래도 저래도 좀 안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나? 그래서 붓다께서는 만족스럽고 여한없이 살기가 어렵다고 하신것이지 싶다. 그래도 생각하며 살아라고 가르치셨지 아마…

삽질의 기록 – 드라이버 장타 (6)

훗날의 장타

장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가 되겠다. 지난번 글을 골프여신께서 우연히 보셨나보나. 좀 마음이 편치 않은 동반자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가운데 주말 아침 라운드를 함께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 하지 않는 3종 세트가 딱 구비되어 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자처한 라운드였다. 누구를 원망하리오 🙂

뿌리가 깊지 못하고 기초가 부실한데도 여기저기 뻗은 가지들이 있다 보니 강풍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딱하고 기가 막힌 것은, 우리 인생의 다른 비극적인 상황들과 마찬가지로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 무너지는 한가운데 있게되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를 써도 그런 상황을 바꾸거나 혹은 그곳에서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 제발 좀 이런 상황을 앞으로는 처음부터 만들지를 말고 애초에 피해주세요~~~

한번의 4펏을 포함 여덟번의 3펏을 하고서 완전한 백돌이로 환생하고 말았다. 동반자 부부는, 친절하지만 까칠한 남편은 (?? 특이한 조합) 아무렇치도 않다는 듯이 싱글스코어 기록 그리고 실제 싱글핸디캡 골퍼임에도 10미터 떨어진 개울에 공을 3회 연속 빠트리는등 백돌이처럼 한참을 철퍼덕거리던 부인은 갑자기 부활하여 후반 파3에서 홀인원을 치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였다. 겉으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듯 보였지만, 내 마음에는 ‘such is golf’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골프’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저녁에 함께 티비를 보던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밤 늦게 내가 혼자서 무슨짓을 할지 정확히 한마디로 알아 맞추면 용돈을 두둑히 주겠어요.’ 나를 알고 골프를 아는 아내는 ‘차고에 내려간다’면서 반은 맞추었지만 100% 정답을 말하지는 못했다. 정답은 ‘차고에 내려가 고물 골프채를 닦으며 혼자서 조용히 운다’ 🙂 한국은 주택의 절반이 아파트라지만 이곳은 아직도 90%는 단독주택이니 ‘차고에 내려간다’는 것에 다른 뜻은 없다.

인간의 의지가 카르마를 만들며 흔히 비극의 씨앗이 된다고 말했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의지 – 몸부림 – 좌절 – 성취’의 반복되는 과정을 (붓다께서 ‘윤회’라고 표현하셨다) 거치지 않고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을, 다시말해서 장타니 스코어니 동반자가 어떠니 하는 것들을 초월하여 자신만의 잔잔한 즐거움을 골프에서도 또한 인생에서도 찾아서 만끽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르려니와 이런 뼈저런 (?) 경험을 하고나면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쩌면 이렇게 돌고도는 윤회를 피할 길은 정녕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게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또한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훗날의 장타? ‘장타를 노력하지만 전혀 연연하지 않는것’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비거리가 아닐까 🙂

삽질의 기록 – 드라이버 장타 (5)

지금의 장타

1만명에 가까운 골퍼들과 2천회 이상의 라운드 경험이 있다는 어떤 캐디의 말에 따르면, 평지에서 드라이버를 치면 남자들은 평균 180미터 여자들은 140미터 정도 그리고 규칙대로 점수를 매길 경우 스코어는 평균 100타 정도라고 한다. 평지에서 200미터 이상 드라이버를 치면 꽤 멀리 친다고 볼수 있다고 하며 진짜로 90정도의 스코어를 기록하는 보기플레이어들과 함께 라운드를 하면 캐디노릇 하기가 무척 쉽다고 한다.

빈약한 신체로 조금이라도 더 멀리 쳐보겠다고 이전에는 몸을 많이 쓰는 드라이버 스윙을 했었다. 요새 인터넷 골프채널에 자주 등장하는 김국진씨 같은 스윙, 몸과 팔을 휘리릭 돌리며 드라이버 스윙 스피드를 높여 보려는 그런 종류의 스윙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자라 이전에 언급했듯이 드로우샷을 (탁구 드라이버와 유사한, 그래서 땅에 떨어지면 굴러서 더 전진하는) 구사하려고 했었다.

평범한 아마추어 골퍼가 (연습량은 적고 신체 능력은 별로며 뒤늦게 골프를 시작한 사람들이) 이렇게 온몸을 쓰면서 스윙을 하고 또 특정 구질의 드라이버를 만들겠다고 시도하는 행위는, 심신의 끝없는 고통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나는 꽤 시간이 걸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식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무시했고 또 생각조차 않았었던지 모르겠다. 아마 욕심에 눈이 멀고 이상한 고집에 좀 미쳐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은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보장도 없으니 단정하기도 어렵다 🙂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보다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활을 쏘는 것이 훨씬 명중율이 높을 것이고, (이상한 발상으로) 포물선을 구태여 크게 그리면서 궤도를 변화시키며 쏘는 것보다 최대한 직선에 가깝게 화살을 쏘는 것이 명중율이 높을 것이며 또한 전반적인 운동능력이 향상되면 구태여 반동을 가하거나 끙끙대며 용을 쓰지 않고서도 활시위를 천천히 조용히 당길 수가 있을 것이다.

요샌 말도 안타고 포물선도 중지하고 또 휘리릭 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신 발과 하체를 최대한 고정한 채로 복근 (코어) 동력으로 드라이버 클럽이 일정한 궤도를 따라서 오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탁구에서 내가 경험으로 명백하게 깨달은 ‘10% 가벼운 채가 상상보다 훨씬 큰 샷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골프에도 적용하여, 서구인들 체격을 기준으로 만든 내게는 무거운 드라이버 대신에 10% 이상 가벼운 아시안 스펙의 드라이버와 더 부드러운 샤프트를 사용한다.

최근 라운드에서 드라이버샷이 80% 페어웨이를 지키며 적절한 거리를 내는 바람에 좋은 스코어를 두어번 기록하였다. 보기플레이어들은 드라이버가 안정된 라운드에서는 어렵지 않게 80대를 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틀린말은 아닌 듯하다. 좋은 스코어를 함께 유지하던 동반자와 라운드 후반 무렵, 가장 어려운 스트로크 1홀에서 티샷을 하게 되었다. 396미터 파4 홀인데 전체적으로 오르막 경사다. 내가 먼저 친 드라이버가 운좋게 잘맞아 160미터 내외의 세컨샷을 남기게 되었다. 평소에 나보다 20미터는 더 보내는 내 동반자는 이것을 보고서 너무 감동(?)했던지 2번의 연속 드라이버 오비를 내면서 그만…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요. 그냥 어쩌다 한번 잘 맞았어요. 골프의 여신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

아까 위에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식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당시에는 왜…’ 이런 말을 했는데 어쩌면 그 해답이 ‘몸과 마음은 동시에 변화되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유흥준 선생이 조선시대 어떤 글에서 인용하여 유명하게 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내 미천한 경험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몸이 변화하면 마음도 따라 변화하리니, 그때 마음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몸과 마음은 동전의 앞뒷면이며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가지의 표현일 뿐임을 잊지 말아요~~

기질 습관 그리고 운명

어떤 산부의과 의사의 말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직후에 의사들이 아기 입을 벌려 이물질을 제거하는 절차가 있는데 이때 어떤 아기는 입을 좀 눌러서 벌려도 그냥 아~ 쉽게 벌려주면서 멀뚱멀뚱한(?) 아기도 있고 또 어떤 아기는 자지러질듯이 울고불고 하는 아기도 있다고 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어떤 외부적인 영향도 없는데 이렇듯 반응이 다른 것을 보고서 그 의사는, 아마도 이것은 아기들이 부모들로부터 유전적으로 받아서 가지고 태어나는 어떤 기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했어요.

몇달 전에 유치원을 시작한 한국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가 했어요. 오랜 세월 유치원에 재직하면서 수천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아 왔지만 한국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라고 해요. 서로 말이 통한다는 잇점을 지혜롭게 이용하여 아내가 어떻게 이 아이의 유치원 생활과 적응 과정을 표내지 않고 잘 도와주는지 나는 전부터 들어와 알고 있어요. 그 부모는 어쩌면 ‘아! 한국인 원장이라 다행이다’ 그 이상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처음 겪어보는 일이잖아요. 이 아이는 공부를 많이하고 능력이 있는 부모가 이곳 회사에 파견을 오는 바람에 함께 와서 몇년을 지내게 되었다고 해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당연하겠지요) 3살이 조금 넘은 이 사내 아이는 처음에는 아침에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곤 했었지만, 지난 몇달간 아내와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이제는 울지도 않고 점점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과도 더 어울리며 잘 놀게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영어는 아직도 한마디도 못해요. 아니 ‘결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 유치원에는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 아이도 한명이 있다는데요, 이 두아이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영어를 알아 듣긴 해도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들은 둘 다 매우 영특한 편이라고 해요. 그리고 뚜렷한 개성 혹은 자아가 있어 보인다고 하네요 (유치원 다른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이 아이들은 ‘잘 하지 못할까봐’ 혹은 어쩌면 ‘잘 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의식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내는 생각한다고 해요. 타고난 기질일까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이런 특이한 상황에서 얻게 된 어떤 습관일까요? 아니면 타고난 기질이 이런 상황에서 그런 습관으로 드러난 것일까요?

중요하지 않아요. 이 아이들도… 언젠가 아내가 말해 주었던 그 수줍은 이나라 아이. 그렇게 좋아하는 소방차가 유치원에 왔는데도 너무 부끄럽고 무서워서 친구들처럼 차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먹였다던 그 아이. 아내가 제안을 하면서 약속을 했다고 해요. ‘네가 스스로 올라가면 나는 네 뒤에 꼭 서 있겠다’. 아이는 자신의 결정으로 올라갔고 참 기쁘고 좋아했다고 해요. 그 기뻐하는 아이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아이들의 습관을 바꾸어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돌려주는 아내의 직업이 참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때 유치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또 이런 프로페셔널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믿어요)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자랐어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저를 길러주신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전혀 없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성인이 되고 나서 깨달은 자신의 기질 그리고 습관과의 힘겨루기가 만만치 않은 경우도 있어요.

다시 ‘결코 말하지 않는 그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아내와 다른 훌륭한 선생님들과 또 이곳의 좋은 교육 시스템의 도움으로 입을 열게 될꺼예요. 그리고 신나게 떠들고 싸우고 울고 불다가 만 5살이 되면,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씨앗처럼 자기의 인연을 따라서 멀리 떠나갈 꺼예요. 좀 웃기는 이야기는, 이렇게 떠나간 아이들이 장차 부모가 되어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이 유치원에 되돌아 오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고 해요. 자기를 돌보아 주셨던, 자기의 모든 것을 보았던 그 선생님들이 아직 있어요 하하하 🙂

때대로 나는 아내에게 ‘당신은 제자없는 스승이다’ 이렇게 놀리는 말을 할때가 있는데요, 진심으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자들이 감사해 하고 또 가슴에 달아주는 카네이션도 물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지만, 아내의 손을 거쳐 지나간 아이들이 아내와 다른 선생님들의 지혜와 사랑으로, 어쩌면 성인이 된 자신의 인생을 어둡게 하고 또 망칠지도 모를 습관들을 조금이라도 바꾸어 세상에 나간다면, 이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베푸는 참으로 큰 적선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요. 이런 종류의 괴로움을 직면하여 발버둥을 쳐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공감하지 싶네요.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가격을 매기거나 사고 팔수가 없지 싶어요. 참으로 큰 적선은 준 사람도 모르고 받은 사람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크고 작다’는 것도 없고 ‘주고 받았다’는 것도 없지만 그 실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나는 봅니다. 어쩌면 이미 성인이 된 인간들의 구원은(?)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닫고 의식하는 바탕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마치 어른이 되어 배우는 골프는, 어릴때 아무 생각없이 아빠 따라가서 놀면서 저절로 익힌 골프와는 그 과정도 차원도 다를수 밖에 없듯이 말이예요.

세살 아기들도 이렇게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아 (ego).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할 무거운 등짐 혹은 두꺼운 외투처럼,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고 또 내게 이익이 되라고 자연의 섭리로 주어졌지만, 마치 양날의 칼처럼, 이토록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조차도 짐과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 ‘나’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마음이 무겁지 않습니까? 붓다께서 해탈 열반을 만드셨나요?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좀 더 체계적으로, 마치 나이든 배뿔뚝이 중년에게 골프를 가르치듯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바로 이 자아가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단지 기질과 습관의 덩어리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자아를 만들고 또 강화하는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줄이고 또 지우면서 열반을 (니르바나) 향해 노력하며 살다가 가면 좋다 말씀하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소방차 위를 스스로의 결정으로 올랐던  그 아기는 장차 어른이 되면, 소방차를 아직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이고, 자신이 어릴때부터 존중 받았듯이 타인을 자연스레 존중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며 또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힘이 센 사람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요? 아니면 주변 사람들 모두 맹목적으로 쫓는 것들 중에서 더 비싸고 더 크고 더 멋져 보이는 것들을 획득하여, 이차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노병들의 군복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들처럼 ‘여기 봐요. 나 좀 봐요’ 하다가 나중에는 플라스틱 줄이나 주렁주렁 매달고선 졸지에 허무하게 떠나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어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나요? 어떤 어린 시절을 통해 어떤 몸과 마음의 습관을 길러 오늘을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