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바꾸는 법

궁금하지요? 나도 궁금합니다. 바꿀 수 있을까요?

1. 지천명 혹은 주제파악 (스승)
2. 적선
3. 명상 (기도)
4. 독서
5. 풍수 (명당)

옛날부터 구전되는 5가지 팔자 바꾸는 법입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풍수 혹은 명당’은 조상의 묘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심신이 평온하게 살면 팔자가 나아지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뜻으로 받아 들이면 좋겠네요. 다섯가지 모두 맞는 말씀 같군요.

지난번에, 붓다께서는 그분이 깨달은 ‘세상이 돌아가는 Dhamma’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이것에서 예외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당신과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This is the way it is.’ 우리 이것 잘 기억하면서 계속 읽어 봐요. 참,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쓰는 글은 오늘 달리는 중에 깨달은 것이예요. 읽고 나거든, 과연 두뇌를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지 아니면 두뇌를 해치며 달리기를 하는지 각자 판단해 봐요 🙂

대학전산팀에 직원도 적지 않고 또 전체 교직원은 몇 천명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도 뛰어 갔다 온 그 풍력발전기가 있는 작은 산에는, 교직원은 커녕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거의 없어요. 조건은 같지 않나요? 그곳의 위치, 대학의 근무 여건, 날씨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고.

오늘 그곳에서 달리면서, 같은 조건을 현재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었보다도 먼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조건이 같은 상태에서), 원하는 바가 설령 (우연히) 같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만으로는 동일한 결과를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가 현실과 딱 부딪치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예요 (무너지거나 사라진다는 뜻이예요).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현재 바로 이 순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경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예요. 그 사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의 경험을 어떤 강도로 해보았는가, 즉 경험의 실질적인 양과 질이 그 사람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같은 아름다운 날씨에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곳에 오늘 한 번 뛰어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곳에 점심시간에 뛰어 올라가는 사람은 드물어요. 왜냐하면, 그것과 관련한 경험의 양과 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조건은 같지만 원하지도 않고 또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로, 담배 끊는 이야기를 해봐요. 어떤 흡연자는 끊을 생각이 아예 없어요. 그러면 다만 흡연이라는 행동의 결과와 더불어 사는 것 뿐이지요. 더 이상 복잡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많은 흡연자는 아마도 담배를 끊고 싶어 할꺼예요. 그리고 ‘자유의지’로 결정은 하지만 (스스로 원하고 마음은 먹지만) 대부분은 며칠 혹은 몇주 이내에 실패해요. 왜냐하면 담배를 끊는다는 어떤 행위에 대한 ‘총체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끊게 되지요. 자유의지의 실제 주인인 그 ‘총체적 경험’이 담배를 끊는다는 행위에 있어서, 양과 질에서 임계점을 돌파했기 때문에 담배를 결국은 끊게 되지 싶어요. 금연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무었이 생겨 났나요? 금연에 대한 ‘총체적 경험’ 그 양과 질이 늘어난 것이지요. 우리 이것 잘 기억하도록 해요.

그럼 ‘총제적 경험’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거나 늘일 수 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 내가 산에서 깨달은 거예요. 우리의 삶은 담배를 끊는 그런 종류의 행동 혹은 시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가 많고, 또 나아가 담배를 끊는다고 건강이 저절로 찾아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예요. 사람들이 (버켓리스트를 만들어) 죽기전에 ‘일등석 타고 북구에 가서 오로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 경험을 실제로 해본들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단지 그렇게 해보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다고 또 뭐가 달라지나요? 그런 일회성이고 간헐적인 ‘경험을 위한 경험’은, 의미있는 ‘총체적 경험’으로 쌓이지 않으며, 따라서 인생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었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경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경험들을 허락해서, 내 ‘총체적 경험’의 양과 질을 늘이게 할까요? ‘총체적 경험’의 주인은 우습게도, (두뇌가 없는)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몸을 쓰는 습관’ ‘마음을 쓰는 습관’ ‘무었을 하는 습관’ 그리고 ‘무었을 하지 않는 습관’ 바로 이 습관들이 결국은 그대와 나의 ‘총제적 경험’을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이렇게 모여진 유의미한 총체적 경험이, 당신과 나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통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오늘 실현하게 허락하는 것이지요.

중3때 담임이셨던 키작고 눈매 무섭던 선생님은 자주 몽둥이를 드셨어요. 목재소에서 맞춤 주문한 사랑의 매. 늘 교탁 아래 잘 준비 되어 있었어요. 월말고사 결과가 발표되거나 혹은 다른 다양한 일들이 있을때면, 나를 포함한 급우들은 늘 그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드려 맞곤했어요. 허벅지 같은데를 그런 굵은 몽둥이로 수차례 맞으면 피멍이 크게 드는데, 한번은 부모님도 보셨어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을때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데요. 참 잘했어요 🙂 그런 폭력이 내게 어떤 영향을 장기적으로 끼쳤는가가(?) 오늘의 주제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 주제입니다.

그날은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었어요. 급우들은 모두 떠들썩하고 들뜬 기분으로 교실에서 왁짜지껄 소란하게 잡담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모두들 내려와서 강당으로 가라고 한두번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학급 전체에 말했어요. 우리는 그래도 계속 떠들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계단을 뛰어 올라 왔어요. 그리고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다행히 오늘은 몽둥이는 없었지만) 우리 급우들 모두에게 차가운 복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박기를 시켰어요. 이제 한두시간 후면 졸업할 제자들인데요… 그때 나는 고작 열댓살 먹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지만,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의 매를 드시다가 이제 스스로 변하고 말았구나. 이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줄담배 때문에 일찌기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그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시작되었던 그 몽둥이를 상습적으로 드는 ‘습관’이 선생님의 ‘총체적 경험’의 크고 중요한 부분을 어느 순간부터 차지하게 되었었던 것 같아요.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선생님의 ‘자유의지’는 어느 순간부터는 바로 그 습관이 만든 총체적 경험의 종이 되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마 그날 선생님도 댁에 가셔서, 늘 피우시던 독한 한산도인가 하는 담배를 태우시며 자신에 대한 좀 이상하고 불편한 그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서웠지만 존경했던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무지하게 얻어 맞았던 허벅지도 대가리도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은혜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니 요점 정리를 해야겠지요? 먼저, 붓다께서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삶의 조건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되요. 그리고 그 습관은 우리에게 ‘총체적 경험’을 가져오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가 좌지우지 (결정) 되는 거예요. 이렇게 궁극적으로는 자기자신이 만드는, 바로 이 ‘자유의지가 우리 자신의 팔자를 바꾼다’고 나는 생각해요. 지금 당장은 확실하게 모르지만, 결정론을 아주 반대하셨던 (이건 내가 알아요) 붓다께서도, 아마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주셨을 것으로 짐작해요. 차차 더 알아보고 확인해서 이야기 할께요.

누군가를 그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산길에서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 비슷해야겠지요. 동료 직원이든지 근처 동네에 살던지. 나이도 이십대 🙂 그리고 그 사람도 달리기에 있어서, 나와 비슷한 습관이 있어야 하고, 그 오랜 습관의 결과로 나와 비슷한 ‘총체적 경험’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러면 ‘자유의지’에 의해서, 어느 아름다운 겨울 오후에 그 사람과 나는 그 산길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거지요…

달리기 하고 싶어졌어요? 팔자 바꿀 수 있겠어요?

그곳에 왜 올라갔냐고?

원래 제목을 ‘그곳에 왜 올라갔냐고? 지금 당신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데?’ 이렇게 붙였는데 너무 길어서 줄였다.

마리나와 클라우디아는 스페인 카탈로니아에 사는 7살 귀엽고 발랄한 소녀. 너무 이뻐요. 나도 그런 딸 있었으면 좋겠네 🙂 그곳에서는 매년 ‘사람탑쌓아올리기’ 대회가 열리는데, 두 소녀도 한 팀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선수들이시다. 가장 겁나지만 또 가장 쿨한 임무를 맡았다. 아저씨들을 밟고 타고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 이것 보면 좋은 사진 많이 있으니 더 이해가 될 듯. 그리고 귀여운 클라우디아와 마리나는 여기에서 볼 수 있어요. 사실 나도 그 소녀들을 ‘One Strange Rock’ 이라는 National Geographic 도큐멘터리에서 만났다. 전에 블로그에 몇 차례 언급했던 그 도큐멘터리. 꼭 한번 보기를 그리고 또 보게 되기를… 당신의 삶이 바뀔 수 있다. Overview Effect 라는 현상이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보는 눈이 아마 달라지지 싶다. 왜 마리나와 클라우디아 나오는 사람탑쌓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인간이 인간의 두뇌를 써서 인간의 모습으로 사는 컬러풀한 스넵샷’을 그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아래에 두 번째 예를 들어 더 이야기 하고 있으니 계속 읽어 보자.

Dawn Wall이라는 도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두 미국인이 요새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의 1,000미터 높이의 수직 암벽을 맨손으로, 수 년을 준비하여 19일에 걸쳐서 오른 인간 드라마다. 이것도 좋은 도큐멘터리다. 나는 우연히 한밤중에 빤스바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박수를 치면서 보다가 결국은 눈물을 (빤스에)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또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박수를 치면서.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위험 천만한 암벽등반을 하는 미친넘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과 내가 직면하는 우리 삶의 실체를 그 본질을, 이 두사람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상대하는지 보여주는 ‘드라마’다.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인 2시간짜리 주말 드라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이 돈들이고 힘들여 촬영하고 편집해다가, 나 같은 사람이 코딱지 후비면서 집에서 편안하게 보게 해 준 것을 나는 매우 감사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요즘 같은 세상에는 3년 수행하면 해탈해야 한다고 했지 싶다 🙂

암벽등반을 잘 모르는 우리들은 이 두사람이 이룬 성취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 성취의 크기로 그들의 크기와 깊이를 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좀 감이라도 있으면 좋지 싶어서 예를 들어본다. 이들이 수 년의 준비로 그 19일 동안 이룬 성취는, 보통 등산으로 치자면 아마도,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 14좌를 무산소 등정한 것과 맞먹지 않을까 싶다. 14좌를 성공적으로 등정한 사람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십여개국에 이십여명 있다고 들었지만, 무산소등반은 아무도 해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상상이지 싶다 (확인결과 있었음. 틀린 비유지만 그래도 의미는 전달 됬을 듯) 그것을 했다니까 이 두 미친 사람들이 🙂 상세한 내용과 감동은 그대 스스로의 손에 맡기고 나는 이제 본론으로.

다시 말하건데 나는 어떤 어려운 성취를 이룬 인간승리를 주제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대단한 성취를, 등반가 토미도 케빈도 그리고 이쁘고 씩씩한 클라우디아와 마리나도 이루었지만.

두 암벽 등반가는 그 역사적인 등반 이후에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사가 되어 수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한 미국의 대담 프로였던가 아니면 뉴스프로였던가에서 어떤 방송하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슬쩍 던진 멘트가 있었다. ‘너무 멋지고 너무 훌륭하고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그 사람들 그곳에 왜 올라갔다지…’ 내 귀에 딱 꽃혔는데, 그때 본능적으로 내게 떠올랐던 대답이 있었다. 물론 지금 기억에도, 그 멘트가 대답을 요구했던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보통 사람들이 궁금해 할 수도 있는 그런 의문’을 좀 가볍게 던진 ‘약간은 빈정대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내 대답이 ‘지금 당신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데?’였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미 나는 그 멘트가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고 또 악의적으로 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멘트에 깔려 있는 숨길 수 없는 의미를, 이 세상이 가치를 두는 바로 그 의미를, 나는 순간적으로 간파 했었다. ‘엄청난 돈을 쓰고 장비를 들여 올라 갔지만 결국은 내려 와야 하지 않았는가?’ 아마 이런 의미였을 것으로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 대답은 이렇다.

10부작인 ‘One Strange Rock’에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 하는 어떤 상황에 클라우디아와 마리나가 (다시말해 ‘결국 무너지는 사람탑을 왜 그 난리를 치며 쌓는데요?’ 물을 수도 있는 그런 장면이) 등장했었을까? 바로 인간의 인간 됨. 즉 인간의 두뇌, 창조성, 협동과 같은 인간의 참된 힘에 대해서 말하는 에피소드에 한 예로써 등장했던 것이다. ‘인간의 인간 됨’ ‘인간의 참된 힘’. 더 벌고 더 쓰고 더 폼 잡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다시말해 더 인기있는 티비프로그램을 만들고 더 인기 있는 인터뷰를 해서 더 이름을 날리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무너질 줄 뻔히 알며, 쌓아 올려본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는 사람탑을, 매년 돈과 정력을 엄청나게 들여 다치고 싸우고 지랄을 하면서도 쌓아 올리며 울고 불고 사진찍고 뽀뽀하고 생난리를 치고, 그넘의 돌댕이에 기어 올라가 보려고 수 년 동안 수십 수백번을 찾아 가서 (밧줄 타고 꼭대기에서) 이리 내려오고 저리 내려오면서 어디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면 다음 스텝이 나오는가, 손의 한 움직임 발의 한 스텝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또 시도하기를 수백 수천번. 그 짓을 손가락이 찢어지고 온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고 삶이 정지하도록 했던 결과로, 그넘의 돌댕이에 결국은 기어 올라가서, 좀 있다가 다시 기어내려 오는, 바로 그것에 ‘인간의 인간 됨’ ‘인간의 참된 힘’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왜 사람들이 미국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지 생각 해본 적이 있나? 잘 만들기 어려운 인공위성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른 나라들을 몰래 훔쳐보고 또 제 이익을 위해서 과학기술로 야비한 짓을 하는 넘들이 그곳에 득실 거리는데도? 내 생각에, 그런 인공위성 같은 것들을 만들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자기가 좋아서’ 하는거라. 그리고 이 미국이란 나라가, 자기가 좋아서 하는 별의 별짓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는거라. 왜냐하면 인간의 위대한 성취나 거대한 진보는 이렇게 자기 좋아서 하는 미친넘들로 말미암아 생긴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이것을 알아주고 이해 해주고 박수 쳐주고 대접 해주고 또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나라. 그 나라가 미국이란 말일세.

희망컨데, 이글을 읽고 난 그대가, 언젠가 이런 도큐멘터리들을 보게 되었을때, 그때 그 멘트했던 방송사 사람처럼 ‘뭐야 이거?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저럴 시간있고 여유있으면 무언가 생산적인 것을 하지’ 그런 말 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넘들 (그넘들이 하는 그런 종류의 짓들) 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유인원에서 벗어나 문명인으로 사는 최대 최고의 원인(이유)이자 결과(증거)이며, 또 크고 길게 볼때 온 인류가 발전하게 하는 ‘진짜’ 돈을 벌어주고 밥을 나오게 해주는, 최고로 생산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의미를 우리 모두가 차차 더 이해하고 깨닫게 되길 바란다. 붓다가 아니라도 좋고 불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 의미를 이해하여 우리들의 삶에서 나름데로 구현하며 살게 될 때 어쩌면 우리들은 해탈 열반에 그리고 천국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우산, 잃어버린 지갑

비오네… ‘잃어버린 우산’ 생각나네. 일단 우순실님 노래 한번 듣고 나서… 그때 대학가요제에서 불렀던 그 노래를, 30년도 더 지나서 부르는데 멋있게 부르네.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나? ‘잃어버린 지갑’ 되돌려 받았었나? 그런 실험을 좀 대규모로 해봤는데 결과 도표는 아래에 있고 왕서방들이 좀 광분했다고 하네 🙂

도표를 보는 법은, 각 나라별로 노란색 점과 빨간색 점으로 표시된 것이, 각각 돈이 들어 있지 않았던 지갑과 돈이 들어 있었던 지갑이 회수된 비율일세. 예를 들자면, 맨 위에 보이는 스위스에서는, 돈이 들어 있지 않았던 지갑은 약 75% 그리고 돈이 들었던 지갑은 약 80% 회수 되었다는 것이네. 이 대규모의 실험은 (40개국 355개 도시에서 17,303개의 지갑으로 실험) 단순히 지갑을 길에 떨어트리는 것이 아니었고, 은행, 극장, 박물관, 우체국, 호텔 그리고 경찰서의 리셉션 데스크에 가서, 미리 준비한 ‘진짜로 잃어버린 듯이 정교하게 준비한 지갑을 (연락처가 이매일로 적혀 있는)’ 주면서 ‘방금 모통이에서 주웠는데, 난 지금 바쁘니 대신 좀 주인 찾아 주세요’ 하고는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방법으로 진행했다고 하네. 그리고 아래의 도표는 100일 이후에 이매일 연락이 오는가 하는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고.

이 실험은, 미국의 권위있는 잡지 ‘사이언스’에 게제된, 대학교수 3인이 (미시간대학교, 유타대학교, 쥐리히대학교) 발표한 논문일세. 그냥 재미 삼아 누가 해 본 것이 아니라.

내가 아래 도표를 보고 느낀 바는, 일단 쌀독에서 인심나고 (매우 부유하면 상당히 정직한 경향이 있고 또 반대로도 그런 것 같고), 적당한 부유함과 종교가 잘 공존하는 나라들도 정직하고, 가난한데 종교만으로는 정직하기 어렵고, 가난한데 종교조차도 없으면… 🙂 그리고 어떤 벼락부자들은 (Dawlat al-ʾImārāt al-ʿArabīyyah al-Muttaḥidah) 제 주머니에 잔뜩 들어 있어도 정직이 무었인지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고, 또 다른 가난한데 종교조차 없는 나라에서는 안 돌려주었다가는 혹시 КГБ에 끌려가서 작살날까봐… 🙂

옆길로 새는 이야기 하나

일전에 내가 술이 취해서 정신이 없으면 할것이라던 그 잡담을 할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오늘 회사에서 미팅을 얼마나 열나고 심하게 오래 했던지 취하고 정신이 없는 기분이다.

어제 붓다께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주신 이야기를 했었다. 누구에게 주셨을까? 처음에는 옛 스승을 찾아서 주려고 했었는데 (붓다에게도 스승으로 모시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럼 있었지. 단지 붓다만큼 안 유명할 뿐이지) 그분이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기 때문에, 멀고 먼 길을 걸어서 옛날에 함께 고행하던 옛 동료 다섯명을 찾아가서 첫 가르침을 주셨다.

그 사람들은 과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언젠가 다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붓다께서는 그당시 유행했고 또 본인도 수년을 더불어 시도했던 고행 혹은 만행을 (안먹고 안자며 몸의 욕구를 묵살하여 어떤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고자 시도함) 중지한 이후에 제대로 먹고 마시고 자면서 ‘중도’의 길로 수행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깨달은분, 성불한분, 최고의 진실을 깨우친분) 되셨다. 이런 소문을 그 옛 동료들도 들었는데, 처음에 그들은 자신들이 시도하는, 잘 알려지고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그 구도의 길을 저버리고 제 갈길을 마음대로 가서 잘먹고 잘살았다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득도 성불하여 자기들을 만나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시큰둥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럴리가 없다. 미쳤던지 사기꾼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였다. 한 사람이 말했다 ‘그가 오면 아는체도 하지 말자. 자리를 마련해 주지도 말고 옷도 받아 주지 말자’ 다른 사람들도 동의 했다. 좀 지나서 붓다가 더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다른 사람이 말했다 ‘옷은 안 받아 주더라도 자리는 마련해 줄까보다’. 그리고 붓다가 그들을 만났을때 그들은 일어나 자리를 마련해 주고 옷을 받아 주었다 🙂 나는 이런 구절을 읽을때 그야말로 이 글이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확신이 든다. 쪼잔하고 인간적인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뒤에서는 큰소리 쳤는데 앞에서는 쫄았어요~~~

(이제 옆길로 세기 시작한다) 반대로, 내가 한국불교에서 소위 최대 최고의 경전으로 높이 받들어지는 그 유명한 경전의 시작을 듣는 순간, ‘갠지스강가의 모래 숫자 보다 더 많은 공덕을 쌓고…’ 하는 이 황당무계하고 무리한 표현을 딱 듣는 그 순간에, 이것 붓다께서 직접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런식으로 말씀하실 분이 아니다. 이것 인디라군이나 왕서방이 붓다를 사칭해서 제멋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라는 직감이 순간적으로 왔었다 (현대 학자들이 문헌학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이 경전이 붓다의 저술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국제적으로는 붓다께서 직접하신 말씀을 기록한 불교경전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 그 직감 틀린적도 많고 또 그것 가지고 내 억장 무너지게 했던 적도 많아요’ 🙂 하지만 예를들어, 당신이 사랑하는 어린 아들에게 얼마나 능력이 있는 아빠인지 말해준다고 가정하면, 내가 돈이 하늘의 은하수 만큼 많고 또 어제 촛대뼈 깐 졸개는 사하라 사막의 모래 만큼 많다 이렇게 이야기 하겠나? 당신이 성숙한 어른이 되어 사랑고백을 하는데, 하늘의 별, 온 세상의 모래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의 머릿칼을 곱한 숫자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겠나? (전두환을 포함한 대머리들 때문에 결과는 0이다) 물론 그런 넘들도 있겠지. 하지만 제대로 철들고 성숙한 아빠들이나 lover들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지 싶다.

영어 표현에 ‘You don’t know what you don’t know’ 라는 것이 있다. 그자들이 붓다를 사칭하며 그런 책을 쓰면서 몰랏던 것은 그리고 결코 알 길이 없었고 또 도달할 수도 없었던 것은, 붓다의 크기와 깊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흉내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었던 것이지 (= you don’t know what you don’t know). 정말 사기꾼은 아홉의 진실에 하나의 사기를 결정적인 장소와 시간에 슬쩍 집어 넣는다고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많이 또 자주 보였던 그 아홉만을 기억하고 또 철썩같이 믿고 (특히 자기의 이익과 관련이 되는 경우에는) 그 결정적인 나머지 하나를 보지도 못하고 하다못해 눈 앞에 가져다가 보여 주어도 믿지 않고 또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기꾼보다 더 고수가 내려다 보면, 속는 사람도 또 속이는 사기꾼도 훤히 보이겠지. 양쪽 모두 하수들 아닌가. 그 사기꾼이 진정 최고수였다면, 사기를 치는 대신에 다른 정당하고 존경받는 다른 일을 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좋아서 사기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겠나. 주제넘게 크고 좋은 것을 쉽게 가지려 하다보니 미쳐서 그렇게 된 것이겠지.

‘아니, 그 경전이 좋은 말씀이고 또 90% 붓다의 말씀과 의미가 통하면 되지 않을까요?’ 당신 이렇게 말하고 싶나? 나도 하나 물어보자. ‘당신 진품 에르메스 가방은 그 엄청난 돈을 주고도 사고 싶어 하면서, 그 모양과 품질도 거의 똑 같은 모조품은 왜 100분의 1의 돈을 주고도 사려고 하지 않는가?’ 그 멋진 가방이 만약 ‘진달래 가방’ 같은 진짜 상표를 달고 독자 개발한 디자인으로 정당하게 100분의 1값으로 팔린다면 나도 사겠다 (상표때고 속여서 아내에게 줄 계획). 10%의 가짜건 어떻든 간에 가짜를 섞는 행위는 사기라니까. 그리고 사기 치는데는 숨겨진 저의가 있다니까. 당신의 이익이 아닌 그넘의 이익…

이야기 왕창 옆길로 샛네. 다시 그 다섯명의 옛 동료들과 붓다의 재회 장면으로 되돌아와서, 붓다가 앉아서 이야기를 좀 시작하려고 할때 그들은 한결같이 반발하였다. 그들도 한자락하는 당대 최고수들이었을 것이다. 사정해도 안통하니 붓다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어 그들을 설득하고 붓다의 깨달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Dukkha의 설법을 그들에게 최초로 베푸셨다고 한다. 어떻게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입을 다물고 반발을 중지하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을까?

‘이보게 자네들의 기분을 잘 알겠고 또 나를 의심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정도 이해가 되네. 그런데 한가지만 부탁하세. 내 얼굴을 보아주게. 어떤가?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사실이겠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더욱 ‘내면의 진실이 실재한다면 얼굴과 언행을 통해서 반드시 표출된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 다섯분의 옛 동료들은 붓다의 얼굴을 새삼 자세히 바라보았겠지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이분 얼굴에 무언가가 있다. 우리가 들을만한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니 입을 다물고 들어 보자’. 아! 이분들도 참으로 고수들이셨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선입견을 일순간 과감히 접고 붓다의 말씀을 들어 주었지 않았는가? 이것 쉬워 보여도 ‘나도 일가견이 있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고하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 싶다. 바로 이것 때문에, 잔치상 어떻게 더 잘 차리는가 의논하다가, 상 뒤엎고 칼부림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아닌가? 이 다섯분들 나중에 어떻게 되셨냐고? 붓다의 가르침을 받들고 수행에 정진하여 모두 아라한이 (소위 ‘성불’)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훌륭하시다. 인간적으로도. 언젠가 말했듯이 붓다의 부인과 아들도, 남편 아빠 찾아와서 집에 가자고 조르다가 (요 부분만 내가 지어냄, 찾아 와서 만났던 것은 사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모두 실존했던 사람들이다.

내 직감과 육감이 틀린 적도 많았고 또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들 억장을 무너지게 했던 적도 많았다고 고백했었다. 내친 김에 한가지만 더 하자. 한 십년 혹은 이십년 전에 소위 서울대생 몇명이, 부산인가 어디 지방에서 수행을 많이 했다는 사람을 만나고 그의 영향으로 집단으로(?) 출가했다고 매스컴에서 오르내리며 인간극장 이런데도 나오고 떠들썩 했던 적이 있었다. 나도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찾아 보았던 적이 있었다. 유튜브를 통해서 그 당시 방영 되었던 무슨 인간극장 같은 것을 건너 뛰며 보기도 했었는데, 그 지방에 산다는 수행자가 화면에 막 등장하는 바로 그 순간, 그자의 얼굴에서 ‘싸움닭’ 상판을 직감적으로 보았던 거라. 아! 수행 챔피언쉽 타이틀 쟁탈전 하는 자로구나… 그 젊은 서울대생들, ‘나는 득도 성불하리라’는 건방과, 몸에서는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이 줄줄 흘러 넘치던 이십대 넘들이 얼마나 impressed 됬고 또 감격했었겠나 상상이 된다. 이넘들이 대부분 실제로 승려가 되었고 한둘은 아직도 매스컴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그 중 한넘은 내가 보기에 스승을 뛰어 넘은 것 같다. 훗날 취해서 옆길로 새는 이야기에 다시 등장 할 것이니 기대하시라.

그리고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과 친구들, 혹시 내 글 몇개 읽어 보고 어떤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면, 다음번에 나를 만나서 한잔 할때까지 보류하시라. 이 글 읽고 내 상판이 어떨지 궁금해지지 않았나? 좀 어리버리한 이류 싸움닭 같은 모습이 아직 많긴 한데, 내 과거의 얼굴을 기억하는 그대들이 ‘아!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있네’ 이렇게 느끼게 되길 희망한다 🙂

직장생활의 어려움

그저께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곳에서는 한번 ‘정해진대로 늘 하듯이’ 해보고 안되면 ‘안되는가보다’ 하며 지나가거나, 내버려 두거나 혹은 다른 방법을 나중에 찾아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언젠가 듣고서 나도 상당히 공감했는데, 영국과 일본에서는 무슨 새로운 일이나 혹은 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회의’를 한다고 하더라. 또 일전에 한국군 공병으로 미군 공병들과 작전을 많이 해본 분의 이야기에서, 미군 공병들은 정해진 교본에 따라서, 못 하나 나무 한쪽도 곧이 곧대로 따라서 하기 때문에, 같은 시설을 완공하는데 한국군 공병보다 시간도 더 걸리지만 정말 큰 차이는, 교본에 나오지 않은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더라는 것이 (따라서 문제 해결을 자기 윗선으로 돌린다) 기억이 난다. ‘전혀 모른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지 싶다.

이곳에서 예전에, 많이 배우고 성공한 중국인들과 가끔 일을 같이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방식은, 위에서 묘사한 영국 일본의 회의 문화 (머리를 함께 모아서 새로운 것에 대처하자) 혹은 미국의 교본 따라하기 (자기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만든 것을 따라서 하고 그것을 넘어가는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절차에 따른다)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제기업에서 함께 일했던 어떤 중국인 매니져가 이런 말을 내게 직접 하기도 하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서구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어. 자기가 좀 적당히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저렇게 꾸물거리며 의논을 하고 절차를 밟아야 하니 머리가 좀 모자라는 것 같아’.

그때는 나도 공감했었고 또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우를 경험했던 일도 많았고 또 지금도 경험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세상의 다양한 면들을, 흡사 양파의 껍질처럼 여러 겹의 그리고 여러 수준의 진실들을 차차 보게 되니 생각이 달라지더라.

그렇게 개인적으로 똑똑한 중국인들 그리고 인도인들의 역량을, 적재적소에서 잘 발휘하게 해서 결국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강대국을 건설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그 영국 일본 미국인들이고,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그사람들이 머리를 모아 만들어내고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절차와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차차 깨닫게 되었다. 개인 차원에서 동일한 시간에 벽돌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데는 이 사람들이 아마 그 중국인 매니져 같은 사람들보다 뛰어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 벽돌의 질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벽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오랜 기간에 걸쳐서 큰 건물들을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짓는데는 이 사람들이 더 뛰어 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머리를 모아서 함께 계획을 하고 합의를 하고, 그 합의된 절차와 방법을 시스템을 만들어서 적용시키고 또 적절한 자원을 분배하는 그런 능력에는, 개인의 뛰어남 보다는, 개미처럼 조직의 일부로 개인이 따르는 그런 능력이 좀 더 필요하지 싶고, 내가 만났던 그 중국인들 그리고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만든 어떤 시스템이나 절차와 방법을 자연스레 받아들여 따르는 것이 어렵지 않은가 싶다. 이것이 모이고 쌓이고 지속되면 한 나라의 국민성 그리고 어떤 집단의 특성이 되는 것이리라.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것이 얼마나 뿌리가 깊고 또 직장생활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 아내와 내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오랫동안 이곳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느꼈고 또 지금도 느끼고 있다. 이것 자각하기도 어렵고 또 자각하더라도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이 붓다께서 가르치신 아상과 (我相 ‘스스로가 가지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 –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실체가 없는 허구라고 한다. 중요한 가르침이다)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다.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로 알고 나서도 자기 생각의 습관 그리고 마음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다.

요새도 헬조선이니 하면서 이민이니 무슨 스칸디나비아 라이프스타일 이야기를 하던데, 이렇게 잘 살게 된 한국 사람들이 옛날처럼 먹을 것이 부족해서 혹은 배울 기회가 없어서 그렇게 떠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위 ‘자아실현’ 그리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찾아서 가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꿈꾸는데로 그곳에 가서 살게 되더라도 바로 위에서 말한 이런 차이 때문에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곳에서 직장도 다니며 상당한 정착을 이룬 후의 이야기다. 다시말해 세탁소나 구멍가게 하며 사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고, 퍼런 눈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이야기하는 그 사람들과, 이해관계 속에서 다투고 따지고 조정하면서 매니지를 하기도 하고 매니지를 받기도 하며 사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데, 당신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오늘날의 당신을 만들어 준, 그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보편적인 언행들이, 그곳에서는 특이하거나 혹은 괴이한, 다시 말해 문제성 언행으로 보여질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데, 이것 깨닫기도 어렵고 또 깨닫고 나서도 바꾸기는 더 어렵다. 우리의 DNA에 ingrained 되어 있다. 세포에 각인되어 있고 또 그것이 대를 잇는다. 그래서 머리 좋은 이민 2세 3세 중에서 의사나 공학박사는 많지만 성공한 변호사는 찾기가 좀 더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좀 사는 곳에서 인간들이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인간과 인간의 이해 관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충돌’이고 (혹은 인간들이 만든 집단끼리의 충돌) 그 해결책이 미분적분이나 화학구성의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도둑을 잡으려면 경찰이 더 세야 하듯이, 그런 충돌을 해결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할려면, 그들보다 그 방면에서 한 두 수 더 높아야 되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우리 아이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은 거라. 돈을 많이 벌게 되서가 아니라, 엄마 아빠가 이민와서 어려워 하는 그 게임을, 부모를 대신해서 종결 짓고 한을 풀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물론 아이는, 내가 하는 이런 생각을 상상해 본적조차 없겠지. 어제 밤에 이 이야기를 한번 시도해 보았는데, 무슨 클라이언트 대하듯이, 예의바른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지키더라 🙂 지금 생각하니,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이런 것인가 상상하며 쓴웃음이 지어진다. 해탈이 무었인지도 모르고 해탈에 대한 생각조차 아예 없는, 그래서 얻을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또 그 주체도 없고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