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무슨 말장난인가 했었지만

매년 국가별 청렴도를 다양한 전문적 정보를 근거로 산출 발표하는 것이 있다. 이 조사가 시작된 1993년 이래 가히 독보적인 1위를 고수하는 나라에 내가 산다. 한국은? 칠레나 대만 폴란드와 유사한 위치에 있더라.

젊은 시절, 괜히 쿨해 보이는 것 같아서 멋모르고 책에서 보고 술자리에서 떠들었던, ‘길을 길이라 하면 더이상 길이 아니다’ 라든가 ‘난세가 충신을 만든다’ 같은 말들이 요새는 더 이상 말장난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 그 옛날에 이런말 했던 사람들 꽤나 똑똑한 사람들이었구나’ 싶다 🙂

한국과 비교해서 이 나라에서만 훨씬 더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 꽤 있는데, 한두가지 예를 들자면, ‘아무도 부정부패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과 ‘몰카로 더러운 촬영 하는 넘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있겠지 여기도 사람사는 곳인데. 그런데 1년에 1번 신문에 날까말까 하는 것과, 매일 신문에 도배를 하는 것이 같나?

모든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질서를 지키는 사회에서는 ‘줄’이나 ‘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이유가 거의 없다. 그래서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또 관심도 없는 것이다. 물론 복받은 곳이라서 사람들이 좀 헐렁하게 살아도 살만하고 또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서도 내 몫이 비교적 보장되는 곳이라는 것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짐작컨데 세상에는 해탈 열반을 성취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본 적도 또 들은 적도 없는 이유는 해탈 열반을 성취하고 나면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잘 살다가 조용히 떠나버렸기 때문이지 싶다. 나도 그렇게 하지 싶은데 🙂 붓다께서도 해탈 열반을 성취하신 후에 가장 먼저 했던 고민이 ‘이것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뭐하나’ 였었다고 한다. 다행히 마음을 바꾸셨지만.

이 나라에서 아무도 질서나 몰카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처럼, 이루고 나면 그 대상은 더 이상 대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룬 사람의 (주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라고 말했었지 싶고, 난세가 충신을 만들어 내긴 하는데 ‘편안한 시절에는 아무도 충신 이야기를 하지 않고 되려고 하는 사람도 또 될 이유도 없다’는 뜻으로 말했지 싶다. 난세를 만나 충신이 되어 이름을 빛내는 것도 좋겠지만 평안한 시절에 평안히 잘 왔다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