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다양한 상황에서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내 자신을 멀찌감치에서 떨어져 바라보는 기회도 더 많아진다.
인간들이 스스로 여기기에, 배웠다고 있다고 그리고 안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힘도 주고 거드럼도 피우며 사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나도 점점 닳아 빠지면서 덜 속게 되니 보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그 배움이, 있음이 그리고 안다는 것이 마치 라텍스 장갑처럼, 끼고 있을때는 안팍 구분이 되긴 하지만, 그 장갑 자체는 너무나 얇고 연약하여 하찮은 변화나 충격에도 쉽께 찢어져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안팎의 구분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만나서 자식 낳고 몇십년을 살다가도, 마치 영원할 듯한 그 사랑이 얇은 라텍스 장갑처럼 찢어져 남남이 되는 경우도 흔해 빠졌고, 아무리 부유하고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욕망에 사로잡히고 오감에 휘둘리는 인간의 본질 앞에서 단 한치도 더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마치 찢어져 속이 훤히 보이는 라텍스 장갑처럼 보게 된다.
그리고 가장 안스럽고 또 내심 걱정되기도 하는 것은,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이런 상황이 나아지거나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마치, 젊은뇬은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보기 좋은데 늙은넘은 아무리 발광을 해도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으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인간들이, 지성이니 사랑이니 철학이니 문화니 종교니 ‘이름붙여 드러내 감동받고 지랄떠는 것들’ 중에서 라텍스 장갑처럼 찢어지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가지 위안이라면 모든 인간들이 점점 ‘level playing field’에 다가 가다가 (강제 평준화 이후에) 종을 치게 된다는 것이랄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어 가는 이야기를 하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 있지만, 반대로 나이를 먹지 않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며 살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이야기 하는 ‘The Age of Adaline’ 라는 영화도 있다. 두 영화의 결론은 ‘둘 다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비로소 깨닫게 되는 ‘라텍스 장갑같은 인간’ 이라는 것을 내가 수십년 전에 깨달았었다면 좋았을까? 혹은 죽는날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생각에는 ‘역시 둘 다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