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한가지 부탁하자. 5분만 시간을 할애해서 이 글을 끝까지 좀 읽어봐라.
혈당이 좀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중년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흘려보냈지 싶다. ‘그게 뭐라고… 아무 증세도 없는데… 이 정도 (수치)는 보통 아닌가… 사는게 바빠서…’ 나도 그랬다. 건강검진때 마다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듣고서도 ‘나처럼 병없는 사람이… 걷고 뛰고 매달리고 운동을 얼마나 하는데…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찌는데 무슨…’ 그렇게 생각하며 무시하며 지낸지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뒷골이 댕기면서 계속 찜찜 하더라. 성격이 그러한지라 확실하게 한번 확인을 해보고는 끝장을 내고 싶어서, 그전에 이야기 들었던 연속혈당측정계를 하나 구입하였다. 쓰레기통에 돈을 버리는 기분도(?) 좀 들었지만 마음을 달래며 구입하였다. 한번 팔뚝이나 적절한 곳에 동전만한 기구를 붙이면 약 14일 기간동안 혈당을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즉시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는 참으로 편리한 기구다. 손끝을 찔러서 일일이 피를 묻혀서 재는 방식뿐이었다면 ‘한번 확실히 확인해보고 끝장을 보자’는 생각을 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10만원 내외의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프리스타일 리브레’라는 제품을 사용했는데 (미국의 한 유명회사가 제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물론이려니와 비슷한 가격에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연속혈당측정계’를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얼마든지 쉽게 구입할 수가 있다. 원리는, 동전같은 그 기구에서, 팔뚝등 몸에 붙일때 아주 가느다란 파이버관이 신체에 조금 삽입되어 그것을 통해서 구해진 (혈액으로) 혈당치를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더라. 설치 및 사용시 안아프다. 주변에 약간 욱신한 감이 있는 정도며 샤워 가능하다. 내가 사용한 것은 새로운 버젼인가 하여 14일 내내 자동으로 혈당치를 지속적으로 스마트폰으로 전송하여 (아마도 블루투스를 통해서) 긴기간의 변동까지도 한눈에 확인 할 수가 있었다. 이것 안되도 괜찮고 그저 스마트폰을 갖다대면 그 순간의 혈당을 알려주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스마트폰이 비교적 신형이어야 하니 연속혈당측정계 주문전에 미리 그것이 필요로하는 기능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있는지 확인하라). 그리고 측정한 혈당수치의 오차 범위가 몇 % 된다고 하는데 우리의 사용 목적에는 전혀 상관없다.
나는 14일 혈당 측정이 가능한 그 장치를 3일 만에 떼내고 말았다. 그 사흘동안, 아침에 일어나서는 물론, 밤중에 화장실 갈때도, 식사후나 간식을 먹고 나서도, 운동을 하고 나서도, 건강식이라고 만든 당근사과 주스를 마시고 나서도, 하다못해 평소에 먹지 않는 음식을 실험삼아 먹은 다음에도 수없이 혈당을 측정해 보았다. 결과는 실로 충격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명확한 결과를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되니 사흘이면 충분하여 그 넘의 고마운(?) 기구를 떼내서 버렸던 것이다 (한번 떼내면 재사용 불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 혈당이 널을 뛰더라. 소위 혈당스파이크라고 하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수백시간을 투자하여, 한국과 영어권 전문가들의 수많은 정보를 모아서 분석해 보았다. 10명의 말을 듣고나면 헷갈리게 된다. 100명의 말을 듣고나면 고집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1000명의 말을 듣고나면 헷갈림도 고집도 줄며 그 자리를 ‘단순 명료한 진실’이 차지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사는 것이 힘들고 시간이 없는 당신, 내가 당신 좀 돕자. 그래서 시간 많은 내가, 소위말해서 ‘메타분석’을 한 결과를 당신에게 좀 전해 주고 싶다. 아래에 적었다. 참 메타분석이란, 어떤 분야를 연구한 전문가들의 논문이나 발표 내용을 대거 분석하여 그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어떤 내용을 (가장 중요한 내용일 가능성이 크고, 가장 정확할 가능성도 크며, 때로 새로운 내용일 수도 있다)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더라.
- 1. 연속혈당측정계를 사서 14일간 혈당을 측정하면서 스마트폰이나 노트나 엑셀이나 아무데나 기록하라. 보통 스마트폰 엡을 제공하기 때문에 자동으로 저장이 되지만, 중년들은 노트북 같은데 죽 기록하는 것을 선호할지도 모르겠다. 예를들어, 5월 10일 기상후 000, 아침 식사직후 000, 식후 1시간 지나서 000, 2시간 지나서 000, 3시간 지나서 000 이런식으로.
- 2. 혈당이 높다라는 말을 들은 이유는 아마도 신체검사때, 아침식사를 하지 않은 상태로 피를 뽑아서 잰 ‘공복혈당’을 측정한 결과일 것이다. 이것도 아주 중요한 지표지만, 지난 2-3달 동안 내 ‘평균 혈당’이 (식후혈당을 포함한 수치가 되겠다) 얼마였던가를 알아볼려면 ‘당화혈색소’ 검사를 해야하는데, 가까운 병원에 가면 쉽고 (싸게) 해준다고 하더라. 지금 당장은 안해도 되지만 언젠가는 해보면 좋지 싶다. 일단 연속혈당측정계를 먼저 사용해보라.
- 3. 의사가 한두번 ‘당신 혈당이 높다’는 경고를 했었다면, 당신은 ‘당뇨전단계’일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은 당신의 몸이, 핏속의 당성분을 효과적으로 조절하지 (핸들링 혹은 컨트롤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며,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당신의 췌장이 기능을 일부 상실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하자면 췌장에서 그 기능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베타세포’라는 것들이 이미 수십 % 죽었다는 뜻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죽은 베타세포는 되살릴 방법이 없다. 소위말해서 비가역적변화가 당신의 췌장에 생기고 있는 것이다. 너무 낙심마라. 더 이상 데미지를 가하는 짓을 중지하고 몸을 잘 돌보면 남은 베타세포로도 무난하게 (더 이상 당뇨병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으며) 살 가능성도 높다고 하더라. (당신 혈당의) 진실을 일단 알게 되고 나면, 바로 이것을 하자는 것이다.
- 4. 이쯤에서 ‘내 몸이 혈당 조절을 좀 잘 못하는게 무슨 대수인가?’ 당연히 궁금하게 될 것이다. 내가 3일만에 혈당계를 떼서 버리고 당장 식단을 바꾸며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시작한 이유를 말할 때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당신 핏속에 당성분이 높은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거나 ‘and / or’ 당성분이 아주 높았다가 확 떨어지는 일이 자주 장기간 반복되면, 당신이 장차 건강장수를 할 가능성은 확실히 그리고 크게 떨어지게 된다. 의사들에게,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노년과 비참한 죽음을 불러오는 최고 나쁜 질환을 꼽으라면 ‘심혈관계 질환’을 꼽을 의사들이 많다고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경제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침몰하게 만드는 무서운 결과를 심혈관계 질환들이 불러 온다고 하더라. 그리고 이 심혈관계 질환들의 근원 혹은 모태가 바로 당뇨병이며, 이 당뇨병의 씨앗과 비료는 당신과 나의 ‘잘못된 생활습관’이기 때문이다.
- 5. 당뇨병,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고지혈증) 이 세가지는 건강장수를 위협하는 최고 최대의 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나이가 들면서 고장이 나기 시작하면, 한 사람이 이 세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 그리고 이 세가지의 시작점이 (출발점이) 많은 경우에 당뇨라고 하더라.
- 6. 어떤 사람들은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먹어서 좋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당신 혈당이 좀 높네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래서 아마 당뇨전단계일 당신은) 그것때문에 의사를 따로 만나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만난다고 하더라도 의사가 처음부터 무턱대고 당뇨병약을 처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루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위험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다. 그 기간에 계속 당뇨병쪽으로 가고 있다 (췌장의 베타세포가 계속 죽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당뇨전단계로 접어든 이유가 당신의 생활습관이기 때문이고 (식습관, 운동습관등) 그 생활습관이란 것이 (충격에 따른) 자각과 각성 없이 저절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 7. ‘당뇨전단계’는 이직도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 당신이 당뇨병환자가 되어 망하기 전에 딱 한번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인 것이다. 놓치면 어떻게 된다고?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동반 침몰’을 훗날 선사한다고 했다. 당신 자신은 그렇다치더라도, 왜 가족들에게 그렇게 하겠나?
- 8. 지난 2주 동안 혈당을 측정하고 무었을 알게 되었나?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이 (당뇨전단계인 당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생활습관에 따라서 혈당이, 좀 컬러풀하게 표현하자면 ‘미친년 널 뛰듯이 오르락 내르락 하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을 것이다. 이것을 줄이고 조절해야 당신이 당뇨병으로 더 진행되는 것을 늦추거나 중지시키며, 장차 건강장수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어떻게? 일단 식단을 좀 향상시켜라. ‘빵 떡 면’ 이 탄수화물 삼총사를 최대한 줄여라. 아무리 줄여도 한국식단에서는 당신 몸이 필요한 만큼은 (탄수화물을) 충분히 먹게 되니 걱정마라. 그렇다고 무슨 저탄고지니 방탄커피니 하는 괴상한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해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이 당연히 모두 필요한데, 단지 그 비율을 조절하라는 말이다. 중년인 당신이니 단백질과 채소의 섭취를, 당신이 감당 가능한 (경제력 식욕등이) 그리고 지속가능한 최대로 올려라. 쉽게쉽게 살고싶어 하는 그대, 입에 탁 털어 넣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약 좋아하는 당신, 꿈 깨라. 다시말해 단백질파우더 그런 것들 물에 타서 마시지 마라. 장을 봐와서 고기 구워서 가족들과 쌈싸서 같이 드시라. 특히 채소의 섭취를 현격하게 증가하라. 어쩌면 아침마다 굵고 씩씩한 똥을 1킬로씩 누면서 당신이 미쳐 몰랐던 자신의 숨은 능력에 매우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병석에 누워 오늘내일하는 어떤 재벌에게 이 똥누는 능력을 얼마에 사겠는가 물으면 몇십억을 주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똥 씩씩하게 규칙적으로 누는 것이 건강에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의미). 그리고 땀을 흘리는 운동을 시작하라. 굳이 돈들이고 꼭 사람들과 어울려야 되는 보여주기 건강쇼는 가능하면 피하고, 참으로 당신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그런 운동을 하라. 운동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들에게, 모든 운동을 통털어 최고로 좋은 운동 딱 하나만 선택 하라고 하면 ‘스퀏’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 딱 2개만 하라고 하면 ‘스퀏과 턱걸이’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더라 (스퀏과 팔굽혀펴기의 조합인들 어떠하리). 만약 달리기를 할 수 있다면 몸과 마음에 최고의 보약이 되겠지만, 중년에 무릎도 불편하신데 굳이 안뛰어도 된다. 대신 팔을 좀 미친넘처럼 크게 휘두르며 보폭을 크게하여 빠르게 걸어라. 얼마나? 3분은 엄청 빠르게 3분은 보통 속도로 번갈아서 총 30분 이상을 그리고 일주일에 서너번 혹은 그 이상을 걸어라. 보폭을 크게하고 상체를 활용하여 빨리 걷는 운동은 극히 좋은 운동이라고 과학적으로 많이 밝혀져 있다. 하지만 식후에 산책삼아 슬슬 걷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착각말고. 조물주가 공평하여, 이 세상에 정말로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은 누구에게나 가능하게 만들어 놓으신 듯 하다. 한가지 개인적인 팁이라면 ‘접근이 쉽게’ ‘진입장벽이 낮게’ 해야 한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예들들면, 이빨 닦으면서 스퀏 10개, 퇴근시 동네운동시설에서 턱걸이 5개씩 2회 (안되면 반대로 2개씩 5회) 이런식으로 작게 쉽게 시작하고, 슬슬 조금씩 발전 시켜라. 마음 한쪽 구석에서 이것을 ‘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지나치게 자신을 족치거나, 쓸데없이 남들과 비교하거나 아니면 무슨 특이한 비방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짓들과는 거리를 두라.
- 9. 이런식으로 나름대로 생활습관 교정을 몇개월 혹은 1-2년 하다가 보면 저절로 더 나은 방법, 더 좋은 방향을 찾아내고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 머리속에 늘 이 생각을 잊지 않고 유지하면서 자주 식사와 운동에 신경을 써오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강조하건데, 늘 잊지않고 자주 기억하며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위말하는 mindfulness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마음이 그런 긍정적인 쪽으로 흘러서 스스로 더 찾아보고 더 알아보며 더 발전하게 되어 있다. 무슨 DASH식단, MIND식단, 지중해 식단, 이런 운동 저런 운동등은 장차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지금 걱정 안해도 된다.
- 10. 차차 식단도 조절되고 몸도 가벼워지거든, 버피나 턱걸이 스퀏 (혹은 웨이트), 중장거리 달리기 산악 달리기등 근력 강화 운동과 심폐지구력 강화 운동을 번갈아 혹은 섞어서 하면 좋단다. 당신이 전당뇨가 되었던 이유는 따지고 보면 ‘균형과 중도’를 상실한 생활습관을 오래 유지했었던 것이 원인이었고 (어쩌면 상실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지도), 당신을 당뇨로부터 구제하고 건강장수의 가능성을 높여줄 유일한 길도 결국은 ‘균형과 중도’를 회복하고 증대하여 자신의 생활습관을 향상하는 것 뿐이다. 다른 어떤 기적, 마법, 마술, 당신만 모르는 무었, 비방, 비법, 특효등은 전혀없으니 꿈도 꾸지말고 그야말로 정도를 걸으며 정공법으로 나아가라. (비유하자면) 씨앗은 싸고 흔하지만 나무는 상대적으로 비싸고 흔치 않다. 싸고 흔한 씨앗이 비싸고 흔치 않은 나무로 탈바꿈 하는 방법은 시간과 정성뿐이다. 대부분 씨앗들이 ‘시간과 정성’ 이라는 기회를 얻지 못해 나무가 되지 못하고, 아무 흔적도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것처럼. 씨앗이건 나무건 결국은 사라지는 것은 맞다. 당신과 나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인연으로 만나,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살다가 갈진데, 그들에게라도 좀 나무가 되어주면 더 좋지 않을까?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는 것은, 당신과 내가 어떤 인연이 되어, 어쩌면 당신에게 좋은 계기가 주어진 것 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인연이 되어 고맙게 받았었다. 당신도 언젠가 자신의 훌륭한 성공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좋지 않겠나. 잘 살아라 당신.
- PS : 아직 나는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마 오랬동안 진행형으로 살지 싶다. 그러면 어떤가?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데. 그리고 혈당 수치가 얼마면 무었이고 어떻고 그런 말은 일부러 적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수치와 설명을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한가지 예외라면, 빠르게 걷기 3분씩 교대로 30분 이상을 제시했는데, 일본의 한 대학에서 발표한 실험결과를 NHK에서 방송한 내용이다.
술 담배 끊는 법
법륜스님은, 종교와 세대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또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우리시대의 큰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분의 강연이나 활동에 참여하는 분들의 대다수는 (중년) 여성들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년) 남성들로 부터는 좀 외면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어쩌면 법륜스님께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때로 일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왜 법륜스님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 ‘어떻게 하면 술 담배를 (어떤 해로운 중독을) 끓을 수 있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질문에, ‘어떻게 끊긴 그냥 툭 끊으면 되지’ 이런 대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때면, 그 분에 대한 존경심도 크고 그분의 지혜를 높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늘 기분이 상했었습니다. 한때는, ‘천주교 신부가 황혼이혼 상담하는 꼴이고, 스님이 고기요리법 가르치는 꼴’ 이라며 분개도 했었지만, 차차 이분도 완벽할 수가 없는 인간이고 또 사람들을 도우려고 나름대로 애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더 이상 분개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그와 비슷한 투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채널을 돌리게 됩니다. 이분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이유중의 하나는, 자신이 과거에 모자라고 부족해서 저질렀던 어리석었던 일들을 숨기지 않으며 나아가 그런 부끄러운 경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으로 더 크게 더 많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제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험자로서 단언하건데, 술 담배는 절대 그렇게 툭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이 박힐대로 박힌 술 담배는 완전히 100%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마시지 않고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말하면 언제 어떻게 다시 마시고 피우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낙심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합니다. 아직 하나 더 있는데요 🙂 세상에는 하도 살을 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방송을 보면 무슨 인간승리 드라마처럼 체중을 수십킬로 뺏다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아마 방송측에서 좋은 취지로 연출했겠지만) 무슨 대단한 일을 했고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처럼 자랑스레 보여지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보면 즉각적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그들은 과거에 이미 병적으로 비만했었고 미래에 다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큰 고위험군에 속한 ‘아직도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고 또 몇몇 검사 수치가 건강치로 나왔다고, ‘건강을 되찾은 인생’이라고 결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들을 중단한다고 ‘갑자기’ ‘저절로’ 결코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의 심신에 해를 끼치던 짓을 다만 지금 멈춘 것 뿐입니다. 그러니 체중 몇십킬로 줄였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연과 금주는 그 자체로 떠벌이며 자랑할만한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자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계속 읽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저는 담배를 끊는 시도를 아마 수십번 아니 백번은 했었습니다. 이런저런 실패 끝에 나중에는 칼을 담배갑 중앙에 꽂아서 벽에 박아 놓고선, ‘흡연은 내 몸을 저 칼로 찌르는 행위와 같다’면서 다짐하고 또 애를 써보았습니만, 이미 오랜세월 인이 박힌 담배를 원하는대로 끊지 못하였습니다. 사회생활등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심신의 불안정은 자꾸만 저를 담배와 술 같은 손쉬운 찰나적 위안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서, 내 갈망이 적어서, 내가 덜 답답해서 술 담배를 끊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술 담배가 끌어 당기는 힘이 내가 그것을 밀어내는 힘을 능가했었기 때문에 조금 버티다가 늘 꺽여지며 패했었던 것입니다. 그 힘은 잘 줄어들지 않으며 또 이미 만들어진 (밀고당기는) 힘의 균형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술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원하며 마음을 먹었다면, 상대가 결코 만만한 그냥 툭 내려놓으면 되는 그런 호락호락한 대상이 아니라, 무슨 악귀처럼 당신의 심신을 칭칭감고 동여매어, 아무리 발버둥치며 때내려해도 옴싹달싹조차 어려운 정말 무서운 대상이라는 것을 먼저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기전으로 어떻게 해서 해결될 상대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 잘 듣고 저런 묘수가 통하는 그런 말랑한 상대도 아닙니다. 마치 악성바이러스나 암세포와 같이 스스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바꾸며 (숙주인 당신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종의 생명체처럼 두렵게 인식하는 것이 옳습니다.
먼저 이것을 똑똑히 자각하게 되면, 금연 시도가 실패하게 될때 절망과 좌절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할 마음을 먹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됩니다. 우스게 소리처럼 들리지만, 어떤 고대 국가에서는 제사장이 가뭄에 기우제를 지낼때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항상 비가 왔다고 해요. 왜냐하면 ‘비가 올때까지 매일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글을 쓰면서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그 헤아릴 수도 없었던 (금연) 실패와 좌절 그리고 힘겨웠던 자기배반 후 재시도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는, 아니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떤 비법이나 비방 따위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 인터넷에서 찾아 본 것들 그런 것들을 이것저것 계속 시도하는 방법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알려드리는 한가지 핵심은 ‘넘어지고 좌절해도 다음날 다시 담배갑을 쓰레기통에 쳐넣고 (아니면 식칼을 답배갑 중간에 꽃아서 벽에 박고) 다시 일어나서 또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를 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고 또 시도하면, 내게는 담배와 반대의 에너지가 (force 혹은 기운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쌓여가고 내 몸과 마음은 서서히 하지만 분명히 ‘담배에 대해서 변화’하게 됩니다. 어느순간, 오랜 세월 그토록 집요하게 내 심신을 옭아매고 조여대던 그 담배라는 것의 힘이, 그 악한 기운이, 정말 별게 아니라는 것을 참으로 느낄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마치 거짓말처럼 담배는 ‘피워도 그만 안피워도 그만’인 온순한(?) 대상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괴상한 변신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담배가 무슨 바이러스처럼 변신했을까요? 아니오. 당신이 변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 실패와 좌절의 과정속에서 시도하고 또 시도할때, 그때 당신 스스로를 변화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듯 ‘당신이 담배보다 더 쎄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원래 약한지라, 어쩌다 하는 일이 잘 안되거나 가정에 힘든 일이 있거나 하면 다시 담배를 사다 피울지도 모릅니다. ‘아! 역시 실패했구나’가 아닙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아무도 ‘금연에 성공’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하세요. 오늘부터 시작해서 또 유지하면 됩니다. ‘아! 지친다’ 하지말고 그저 ‘방금 원하는데로 피웠으니 이제 다시하자’ 하면서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 이 과정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되고 또 아무도 몰라도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하면 내 심신의 기운이 담배의 기운을 월등히 능가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되며 그때가 되면,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다시 부닥쳤을 때라도 담배가 나를 쉽사리 유혹하여 쓰러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되면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담배로 부터 자유로운 기간을 ‘유지하는 능력’이 더 커지고 더 쎄지게 됩니다. 그때는 ‘담배를 끊었냐 말았냐’ 따위의 질문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얻게된 ‘담배를 상대하는 기운’은 다른 운동능력과는 달리 내가 담배를 피우지만 않으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쎄집니다.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은 금연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한 두가지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담배와 항상 물리적인 거리를 두세요. 집안에 담배를 한개피라도 놓아 두지말고 (칼 꽃은 담배갑은 이미 물에 담궈 피울수 없게 만든 다음에) 불편을 무릎쓰고 상점에 사러가야만 하는 상황을 유지하세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그리고 담배를 피울 상황을 미리 파악하여 표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피하도록 노력하세요. 둘째, 담배와 상극인 무언가를 찾아내어 그것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제게 그 상극은 장거리 달리기였어요. 굳이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실천 가능한 어떤 상극들이 있을 것이니 찾아내어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세요.
술 담배가, 당신 자신은 물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극히 위험한 이유는, 나와 당신이 건강하고 긍적적인 삶의 방향으로 조금씩이나마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기운을 도둑질하고 그 실천에 발목을 잡으며, 장차 오~오랜 기간을 당신이 결코 원치 않았을 상황 즉,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짐이 되어 엄청난 괴로움을 안겨 주다가, 아마 작별조차 제대로 하지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만들 가능성을 (술 담배가) 확실히 높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이 단초가 되고 도움이 되어, 성공적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게 되어, 마치 내가 잠든 사이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총탄처럼, 장차 일어날 수도 있었을 폐암등을 피하여 건강장수 한다면 (비록 본인도 저도 그 내막을 결코 알 수는 없겠지만) 저는 정말 기쁘겠습니다. 저도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인연이 되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도와드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술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겠습니다. 중요한 공통점들은 이미 위에서 말하기도 했고, 또 술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며 어느듯 강산이 한차례 변하기도 했지만, 술에 대한 애증과 복잡한 심사는 아직도 제 마음을 흐트려놓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싶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술을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고 더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몬시뇰 그리고 결혼계약
‘몬시뇰’은 우리에게 슈퍼맨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1982년도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리고 ‘결혼계약’은 2016년에 방영된 티비 주말드라마입니다. 보았고 또 어쩌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몬시뇰은 언젠가 한번은 글을 올려보겠노라고 이야기 했던 영화입니다. 세상에는 훌륭하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영화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이 영화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영화로 손색이 없습니다. IMDB에서 서양사람들이 (아마도 미국인들이) 매긴 점수가 10점 만점에 5점 정도로 그야말로 형편없는 어쩌면 중간도 못되는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꼽는 내가 미친 것일까요 🙂 여하튼 내가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것은 부정할 수가 없겠네요.
인터넷 관련 기술의 발달로 옛날에는 가능하지 않았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싸게 가능해진 것들이 있지요? 지나간 티비 드라마를 손쉽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일것 같네요. 일년에 한 두번 한국 드라마를 볼까말까한 우리부부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여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할만큼 감동적으로 보았던 ‘어른들의 동화’ 같은 드라마가 바로 이 드라마 ‘결혼계약’입니다. 물론 ‘묜시뇰’ 보다는 훨씬 한국에 더 알려진, 감수성 있는 어른들이 많이 좋아했다던 통속적인 소재의 티비 드라마 입니다. 이런 통속적인 프리티우먼 백설공주 신데렐라 이야기를, 훌륭한 대본과 연기 그리고 연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내가 본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요.
묜시뇰과 결혼계약은 만들어진 시기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며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다른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화와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개의 어른 동화에서 크나큰 공통점을 봅니다. 이 두개의 족보가 전혀 다른 드라마들이 인간에게 극히 공통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게 됩니다.
1960년대 혹은 1970년대 미국에 유학했던 우리 선대들이 남긴 이야기들 중에서 한두가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학 식당에서 식판 위에 건드리지도 않은 그 크고 맛있는 오렌지가 식사 후에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의 놀람과 더불어 미국 남녀 대학생들이 한 방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만날때면 방문을 열어 두었다던 이야기 입니다. 그때 당시 그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한국 유학생의 시각은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시각과 다르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이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마치 조선시대에나 일어났을 그런 풍습을 유지했던 것은 문화적 시각적 차이를 떠나 사실로 여겨집니다.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신을 숭배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그 당시 미국인들을 지배했던 삶의 방식이었어요. 물론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보고 듣고 알게된 그리스도교와는 다른 면들이 있어요.
그저께 우연히 독일국영방송 DW에서 만든 ‘미국의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에 관한 도큐맨터리를 잠시 보다가 무척 놀랐어요. 일대일로 대응하는 한국말이 없어보여서 그냥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라고 했는데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신앙’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요? 침례교냐 장로교냐 이런 종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주어 해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전세계에서 에반젤리칼 크리스쳔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도큐맨터리에 어떤 미국 중산층 가정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러한 삶을 진실하게 추구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십대 중반의 두 딸들은 우리가 아는 통속적인 21세기 미국인들과 한참 거리가 멀어 보었어요. 침대옆 서랍에서 오래된 낡은 책을 보여주는데요 아주 어릴때부터 닳토록 읽어 그야말로 닳고 닳은 성경이었어요. 그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하다못해 아빠가 학교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도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매일 새벽기도를 몇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던 사람들이 문득 떠올랐어요. 어떤 특정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근본주의?) 매우 훌륭한 신자일 그런 사람들과 만약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램 관련 사태들이나 혹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을까요? 아까 이야기한 도큐맨터리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많은 어른들과 학생들이 켄터키 어디에 있다는 노아의 방주를 방문해요. 미국답게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 박물관이에요. 그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언제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역사에 언제 어떻게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는지 배우고 또 기억합니다. 참 인간이란 안타까운 존재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진실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결과가 ‘비정상’ (?) 이라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묜시뇰 이야기로 되돌아 갑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미국의 한 젊고 멋진 천주교 사제가 이차대전을 참전한 후에 로마에 남아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며) 카톨릭 최고 권력에 (?) 다가가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희노애락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이 주어진 어떤 상황 혹은 사회적 구조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친구와 적을 만들고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좌절하며 또한 천주교회 재건을 위하여 교황의 암묵적 동의하에 마피아와 손잡고 아슬아슬한 사업을 벌이며 일어나는, 거룩한 천주교 의복 뒤에 감추어진 정말 있을 법한 인간들의 진면목을 담은 영화입니다. 왜 10점만점에 5점일까요? 그것은 흡사 우리가 어릴때, 부모님의 섹스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럽고 부끄럽고 괴로워했던 그런 상황이, 종교와 현실이라는 상황에도 일어난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른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나아가 걸프렌드와 섹스를 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케하는 (?) 자식을 둔 나이가 되고보니,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사랑을 나누셨다는 것에 조금도 거부감이 생기거나 이상하거나 하지 않게 되었어요. 마치 식사를 하셨고 화장실을 가셨었다는 것과 같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와 마주치게 될때 그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신도들’ 그리고 지금도 미국 어디선가 아마도 ‘방문을 열어두고 남녀가 이야기를 나눌 그 에반젤리컬 크리스쳔들’에게는 큰 혼란과 부끄러움 그리고 괴로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상황을, 어릴때는 그냥 괴로워 했겠지만 어른이 되고 힘이 생기고 나면 그냥 괴로워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넘들의 가짜 진리’를 막으려고 하겠지요. 바로 이 결과가 묜시뇰이라는 탁월한 영화가 IMDB에서 10점 만점에 5점을 받은 이유지 싶네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신도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들이 자유로우며 그들이 사랑으로 자신과 타인들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실까요?
묜시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무었을 만들어 어떤 매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명백히 알고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대본을 (혹은 원작 소설을) 쓴 분 그리고 영화를 만든 분들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이야기를 이미 알았었고 생각했었고 또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었던 분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나는 다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40년이 지나서 내 블로그를 통해서 반복하는 것이지 싶네요.
나는 ‘결혼계약’ 드라마를 보고선 그 극본을 쓰신 분의 뒷조사를 (?)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위에서 묜시뇰 영화의 대본을 쓴 분이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분도 전부 알고서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분이 미디어에 인터뷰하는 (결혼계약 드라마에 대해서) 것도 읽어 보았어요. 이분이 크리스쳔인지 아닌지 나는 알길이 없지만, 이분은 인터뷰 끝에, 어떤 철학 혹은 믿음이 결혼계약 극본 바탕에 깔려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하셨어요. 누군가 내게, 이 결혼계약이라는 드라마를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 반복 시청하고선 도대체 무었을 보았던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이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에서 해탈을 얻는 과정을 그린 (붓다의 가르침을 표현한) 위대한 현대판 경전이다’ 🙂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교니 사랑이니 붓다의 가르침이니 해탈이니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어요. 그리스도교도 사랑이라는 의미도 또 붓다의 가르침도 해탈이라는 표현도, 우리 인간의 삶이 먼저 있고 난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들 인간의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사회적인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먼 미래에도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조건들 속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램도, 사랑을 주고 받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도, 그리고 행복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도 변치 않고 늘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임에 분명해요.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붓다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은 인간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시고 내 놓으신 일종의 해결책들이 (?)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본질이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엄마와 둘이 사는 7살 은성이도,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멀리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동시에 엄마를 몹시 사랑하며 그 엄마의 행복을 깊이 바랍니다. 은성이는 결국 이 두가지 커다란 마음의 갈등을 이겨내고 스스로 해결하여 해탈에 도달합니다. 엄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닥쳐온 상황을 더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 냅니다. 그 싫어하던 아저씨를 받아들이며 결국은 새 아빠로 삼고 가장 아름다운 부녀의 관계로 발전시킵니다. 한 인간의 해탈을 이렇게 마음에 와닿도록 훌륭하게 표현한 것을 나는 일찌기 보았던 적이 없어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도대체 (현실 속의) 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연기를 극도로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하고 또 뛰어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스래 느낍니다.
남자 주인공 지훈씨의 친모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했던 사람도 아니고 마음이 제대로 밖인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들의 사랑으로 결국은 마음을 비워내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해탈을 성취합니다. 아들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며 기생하고 나아가 자기의 생존을 도모하는 삶의 방식을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참으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해요 (비록 내 몸은 병들어 죽지만) ‘나는 너 덕분에 살게 되었다’. 훌륭한 인간으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보고 또 그의 대사를 들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밤에 이룬 해탈이 아침에 얼마나 힘이 없는지’ 나는 또한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블로그에 골프 이야기를 몇차례 쓴 적이 있었는데요. 골프 자체가 주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골프의 속성이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그것이 주제였던 적이 많았어요. 유튜브 골프 레슨을 보거나, 잠시 연습을 하거나 혹은 새 골프채를 손에 쥐게 되면 골프가 ‘이렇게 하면 되지 싶다’는 일종의 깨달음 혹은 해탈을 (?) 하게 되요. 그런데 그런 해탈이 얼마나 힘이 없고 현실에서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지를 온몸으로 뼈져리게 깨닫는데 필요한 시간을 별로 길지 않아요. 마치 밤에 얻은 깨달음이 다음 날 아침에 (마주치는 현실속에서) 산산조각 나듯이, 다음 라운드를 나가면 그대로 산산조각 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 (현실자각타임) 속에서 더욱 더 괴로워 지게 되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남자 주인공 멋진 지훈씨는 여자 주인공이 (서로 지극히 사랑함에도 시한부 생명의 짐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지 않으려고) 자신을 밀쳐내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네가 나를 살렸으니 이제 너도 한번 살아봐. 내가 살릴께’ 이렇게 말합니다. 제벌 2세로 제멋대로 살아온 지훈씨. 가난하고 평범하지만 정말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심성을 가진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만나 차차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지훈씨는 주변 모두가 놀라자빠질 자신만의 해탈을 이루어 냅니다. 인생에서 무었이 중요하고 그 중요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힘을 주는지 재대로 맛본 다음부터 이 인간말종은 완전히 변화합니다. 한 인간을 참으로 존경하게 되면서 싹튼 사랑은 세상 그 무었도 막을 수가 없고 그 어떤 손해도 감수합니다. 이전에도 수차례 말했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고,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극작가가 배우의 입을 통해 이야기 하듯이) ‘돈으로 막으려면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해탈하고 나면, 그래서 돈을 진심으로 포기하고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보려는 시도를 진정으로 그만두게 되면, 상대방은 신기하게도 저절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결코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 보지 않아요. 우리 삶의 큰 진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주인공 혜수씨. 신데릴라 입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 시한부 생명. 어린 딸을 위해 모든 것 무슨 짓이던 하고선 세상을 뜰 훌륭한 엄마입니다. 난 남자 주인공 지훈씨가 쓰레기짓을 할때 ‘아 저런 것들을 사람들이 쓰레기 짓이라고 하는구나’ 배운 것이 많아요 🙂 그리고 동시에 ‘어 나도 보통 저렇게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적이 (때로 훌륭한 일이라고 조차 생각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렇게 좀 놀라게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미남에 금수저라는 것만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 지훈씨와 내가 닮은 점이 꽤 많았어요. 그래서 정말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이토록 끌렸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동시에 여자 주인공 혜수씨를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훈씨와 닮은 점이 많듯이 아내는 혜수씨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혜수씨가 지훈씨를 ‘살게 해 주었듯이’ 어쩌면 아내도 나를 살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러번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산다는 것이 무었일까요? 지훈씨가 혜수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했고, 또 지훈씨 엄마가 아들 지훈씨 더러 자신을 살게 해주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 했는데요, 도대체 이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까 위에서 비유로 말했던, 매일 새벽 기도를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간다는 그리스도교인과 내가 마주 앉아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 다난한 일들에 대한 견해를 서로 밝히고선, 전 세계에서 뽑은 수 많은 배운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누구의 견해가 보다 균형 잡혀 있는가 묻는다면, 건방진 말이 되겠지만, 나의 견해가 좀 더 균형 잡히게 들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 사람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또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언행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두 개의 상반된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기울이며 여태껏 살아 왔어요. 이미 말했듯이 인간의 안타까움은 (수십년 매일 새벽기도 같은) 그런 노력과 성취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변화하며 나아가 그런 변화의 영향을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있지 않은가 싶어요. 이처럼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 인생이라, 아마 붓다께서는 ‘삶은 두카’ (불완전, 불만족, 괴로움) 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다시 되돌아가서 ‘살게 해주었다’ 혹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몽고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야생 늑대는 경외의 대상이자 또한 최약의 적이기도 하다고 해요. 가축을 해치는 늑대를 추적하여 죽이고 때때로 새끼들을 발견하기도 한다는데요, 태어난지 몇주만 지나도 늑대 새끼들은 절대로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태어난지 며칠이 되지 않은 핏덩이 새끼들을 데려다가 사람들과 가축들 사이에서 기르기도 한다는데요, 한살 정도가 되고 나면 (그동안 그렇게 같이 잘 놀고 좋았던 그 녀석이) 야성을 결코 감출 수가 없어 사람과 가축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가 되어 결국 죽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녀석과의 우정은 (?) 한장의 늑대 가죽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숙명이라네요. 늑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물려받은 DNA가 합쳐서 빚어낸 삶을 살겠지요. 그 드라마에서는 혜수씨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훈씨가 알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그의 형을 그 자리에 대입한다고 똑같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다만 웃음꺼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공평하기도 하지 싶네요. 서론이 길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산다’는 의미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그리고 물려 받은 DNA에 지배되는 그 작은 세계, 좁은 믿음 그리고 굳어진 가치관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세상에 산재하는 다른 환경들 그리고 과거에 살다간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와 믿음 그리고 가치관을 (최소한) ‘볼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무언가 작은 것들이라도 배워서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결과적으로 덜 다투고 더 사랑하고 더 가볍게 왔다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혼계약 드라마에서 그리고 묜시뇰 영화에서도 많은 등장 인물들이 바로 이렇게 ‘살게 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뛰어나게 그리고 있어요.
두가지 짧은 이야기를 덧붙이며 오늘 이 길었던 두 편의 드라마 이야기, 내가 생각컨데 가히 최고의 드라마의 이야기를 마칠까해요. 먼저, 위에서 비유로 들었던 매일 새벽기도를 수십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 드라마를 보고선 아내에게 비유로 말했어요. 평생 권투를 한 사람의 주먹은 부드러울 수가 없다. 샌드백을 때린 정권과 손에 베인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도 심신도 다르지 않다. 권투선수에게 부드러운 손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새벽기도 평생한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고 부드럽기를 기대하기 어려움과 같다. 그리고 두번째는, 밤에 얻은 해탈이 아침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나면, 다시 말해 비록 다음날 아침에 산산조각 나는 해탈이나마 하고 또 하면서 시간이 지나노라면, 언젠가는 산산조각이 덜 나든지, 산산조각이 나도 덜 괴롭든지 아니면 산산조각 자체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되든지 하면서 우리도 한 걸음 한 걸음 해탈에 가깝게 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에베레스트 산을 목숨을 걸고 오르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웃기는 존재 입니다. 그 등반을 이 세상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목숨걸고 그 힘들고 위험한 짓을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론 그래도 할 사람이 소수는 있겠지요). 어떤 면에서는 해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우리 모두 각자 각자 어떤 시간이 오면 홀로 세상과 작별해야 합니다. 해탈? 그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좋아하는 당신이나 가지세요 🙂
그래도
처음엔 그저 마음이 그리로 흘러 갔었다
마음을 쏟아 우정을 사랑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을 쫒았다다음엔 그저 마음이 그렇게 멀어 졌었다
마음을 쏟을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없었다나중엔 다시 마음이 어쩌면 돌아 오리라
마음을 비워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어쩌면지금은 그저 조용히 내버려 두자 바란다
나중에 찾을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변치않을 그 무었들도 그대로그대로 남겨 두고파 혹시나 알아 언젠가
사람의 마음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무었으로 홱 변할런지 뉘아나하지만 지금 멀어진 내맘을 난들 어쩌리
세상이 모두 그런줄 이꼴이 우리들 수준인줄 왜 모를까만 그래도
라텍스 장갑 같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다양한 상황에서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내 자신을 멀찌감치에서 떨어져 바라보는 기회도 더 많아진다.
인간들이 스스로 여기기에, 배웠다고 있다고 그리고 안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힘도 주고 거드럼도 피우며 사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나도 점점 닳아 빠지면서 덜 속게 되니 보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그 배움이, 있음이 그리고 안다는 것이 마치 라텍스 장갑처럼, 끼고 있을때는 안팍 구분이 되긴 하지만, 그 장갑 자체는 너무나 얇고 연약하여 하찮은 변화나 충격에도 쉽께 찢어져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안팎의 구분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만나서 자식 낳고 몇십년을 살다가도, 마치 영원할 듯한 그 사랑이 얇은 라텍스 장갑처럼 찢어져 남남이 되는 경우도 흔해 빠졌고, 아무리 부유하고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욕망에 사로잡히고 오감에 휘둘리는 인간의 본질 앞에서 단 한치도 더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마치 찢어져 속이 훤히 보이는 라텍스 장갑처럼 보게 된다.
그리고 가장 안스럽고 또 내심 걱정되기도 하는 것은,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이런 상황이 나아지거나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마치, 젊은뇬은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보기 좋은데 늙은넘은 아무리 발광을 해도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으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인간들이, 지성이니 사랑이니 철학이니 문화니 종교니 ‘이름붙여 드러내 감동받고 지랄떠는 것들’ 중에서 라텍스 장갑처럼 찢어지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가지 위안이라면 모든 인간들이 점점 ‘level playing field’에 다가 가다가 (강제 평준화 이후에) 종을 치게 된다는 것이랄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어 가는 이야기를 하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 있지만, 반대로 나이를 먹지 않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며 살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이야기 하는 ‘The Age of Adaline’ 라는 영화도 있다. 두 영화의 결론은 ‘둘 다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비로소 깨닫게 되는 ‘라텍스 장갑같은 인간’ 이라는 것을 내가 수십년 전에 깨달았었다면 좋았을까? 혹은 죽는날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생각에는 ‘역시 둘 다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