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주제로 한 건강 도큐멘터리를 근래에 본 적이 있다. 나도 오래 장거리달리기를 하고 있기에 흥미롭게 보았다. 그간 강산이 몇번이나 바뀌었으니, 한국에서는 이런 스포츠, 저런 운동이 유행따라 많이도 바뀌었을 것이다. 코비드 전후로는 골프가 대유행이라더니 이젠 달리기로 유행이 바뀐 듯 하다. 그것도 러닝크루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서. 한국에는 달리기 잘하는 사람, 많이 하는 사람, 마라톤 매달을 한자루 모은 사람등등 온갖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도큐멘터리에서, 한 중년 여자가 장거리달리기를 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면서, 현재 준비중인 어떤 마라톤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마라톤에 참여한 베테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지금은 무슨 클럽에 소속되어 무슨 마라톤을 준비하고 있는데, 무릎에 탈이 나서 매일 병원을 다니면서도 훈련을 계속한지가 몇달째라고 자랑스레(?) 말하였다. 순간 내 머리속에는 ‘이 여자 좀 미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곳에서는, 이 여자가 설령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로 올림픽을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정도의 (치료를 요하는) 부상이면 올림픽이고 뭐고 일단 훈련을 중지하고 재활치료를 할 것이다. 설령 나라를 빛낸들 자기 몸이 망가지면 무슨 소용이냐 그런 생각이고 또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인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물결에 휩쓸려서 (유행을 따라, 남들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앞서 말한 장거리달리기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이런 의식과 풍조가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물결 자체를 ‘먼저 스스로’ 판단하기 보다는, 다만 그 물결속에서 주변보다 앞서가기만 하면 ‘으쓱으쓱 만사오케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풍조가, 당연히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의심할 바 없는 것인양 받아들이는것 같다.
에드 휘트록이라는, 장거리달리기를 극히 잘하는 캐나다인 늙은이가 있다. 이사람은 연령별 마라톤 세계기록을 여러개 가지고 있다. 70-74세 그룹에서 세계 최초로 2시간대 마라톤 기록을 세웠다 2:54:48. 이 기록은, 최근에 달리기 많이하고 잘하는 한국사람이 갱신하였다 (역시 대단). 75-79세 그룹 세계기록 3:04:54, 80-84세 그룹 세계기록 3:15:54 그리고 근래에 85-89세 그룹 세계기록을 3:56:38 달성하였다. 그가 팔순에 세운 이 기록은, 내가 30-40대에 마라톤을 힘들게 완주했던 수준이니, 에드 휘트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양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는 그저 혼자서 (무슨 요란한 러닝크루니 전문 트레이너 없이) 집에서 가까운 동네 묘지를 하루에 수백바퀴씩 돌면서 훈련을(?) 했었기 때문이고, 십년 넘은 고물 운동화를 신고도 그런 세계기록들은 냈기 때문이고, ‘러너스하이 (runner’s high)’니 뭐니 장거리달리기 자체가 무슨 대단한 쾌감이나 주는 것처럼 일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나는 한번도 그런 것 느낀 적이 없다’고 솔찍히 말했기 때문이고, 달리는 기분이 어떠냐 질문에 ‘그저 좀 힘이 들고, 크게 즐거움은 없다’고 더욱 솔찍히 말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도 이사람이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프면 무조건 쉬고 다 나아질 때까지 전혀 달리기를 하지 않는다’ 🙂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그런데 (선무당에게) 잡힌 사람들은 수두록 해도 정작 (사람들을) 잡은 선무당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왜냐하면 선무당이 되는 선결필수 요건이 자신이 선무당인줄 꿈에도 몰라야 하기 때문이다. 선무당 시절에도 모르고 또 나중에 꿈에서 깨고 나서도 잘 모른다. 그리고 선무당은 남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기 자신을 먼저 잡는다. 대략 5년 혹은 10년 미만 구간에서 선무당들이 가장 많아 보인다. 나도 뒤돌아 보면, 내가 선무당질 했었던 기억에 모골이 송연하며 심히 쪽팔린다.
에드 휘트록이 그렇게 많은 연령대별 마라톤 세계기록들을 수립할 수 있었던 당연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몇십년을 (40-50년) 꾸준히 장거리달리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당신이 세계기록은 커녕 동네기록 조차도 수립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장거리달리기를 최소한 20년, 나아가 30년 이상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을 에드 휘트록의 반열에 끼워 주겠다.
장거리달리기건 무슨 스포츠건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내가 ‘실질적인 의미에서 최고최대의 수혜자가 되고, 그러한 상태를, 내가 기술과 역량을 발휘해서 오래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드 휘트록이 장거리달리기를 해온 이유일 것이며, 내가 장거리달리기를 30여년 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기록 세우면 좋겠지만, 사실은(?) 별 의미 없다. 내가 그때 들판과 산에서 조이를 (joy) 맛보았고, 나와 또 사랑하는 가족들의 삶이 실질적이고 유의미하게 나아졌으며, 어쩌면 내 팔자였었을지도 모를 어떤 질병이나 불행을 피했거나 늦추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100점’ 아닐까?
나는 우연히 근무여건이 좋은 곳에서 일하는 바람에, 점심시간에 근처 산을 재미삼아 뛴지가 15년 정도 되었다. 아름다운 산, 가파른 산,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산, 정상에선 사바세계가 360도 펼쳐지는 산, 내 땀방울이 떨어지지 않은 곳이 드문 익숙한 트랙이 있는 산, 그리고 내려올때 항상 잠시 멈추는 곳이 있는 산. 나는 그곳에 멈추어 양팔을 높이 올려 하늘을 보며, 죽죽 뻗은 소나무들, 오늘 대지의 향기, 지금 바람의 소리, 이 순간의 태양을 오감으로 음미하며 칼릴 지브란의 시를 읊는다. 그리고 그의 시와 그를 생각한다.
What is it to die but to stand naked in the wind and to melt into the sun?
And what is it to cease breathing, but to free the breath from its restless tides, that it may rise and expand and seek God unencumbered?
Only when you drink from the river of silence shall you indeed sing.
And when you have reached the mountain top, then you shall begin to climb.
And when the earth shall claim your limbs, then shall you truly dance.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람 속에 알몸으로 서서 태양 속으로 녹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숨을 멈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쉼 없는 물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높이 솟아올라 아무 방해받지 않고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오직 침묵의 강물을 마셨을 때, 그때만이 그대는 진정으로 노래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때 그대는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리라.
그리하여 대지가 그대의 팔다리를 도로 가져갈 때, 그때 그대는 진정으로 춤추게 되리라.덧붙임 – 내가 ‘그의 시와 그를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칼릴 지브란은, 이런 훌륭한 시를 남겨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지만 (이 시가 포함된 그의 책 ‘예언자’는 성경 다음으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은 40대 후반에, 과음 과로로 말미암은 지병으로 사망했다. 나는 이 시를 읊으며,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가감없는 실체’를 동시에 기억하며, 나와 내 삶을 한번 더 되돌아 본다.
그가 할 수 있었고 가졌던 것들 중에서, 내가 할 수 없고 가지지 못한 것이 많지만, 또한 내가 할 수 있고 가진 것들 중에서, 그가 할 수 없었고 가지지 못했던 것도 많다. 인생의 이런 측면을 볼 수 있다면, 인생은 한편으로는 공평하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판단은 스스로의 몫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