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교 (초등학교) 시절 산수를 포기한 원조 수포자중 한사람입니다. 수포자로서의 학창시절은 괴롭고 지루했으며 또한 험난했습니다. 먼 나라로 떠나와 성인이 된 삶의 대부분을 살면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릴때 ‘나는 제도교육의 희생자야’ 가끔 농담을 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제도교육의 덕도 보았다’ 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익숙하고 힘이 들지 않는 것을 하려고 하지, 익숙하지 않고 힘이 드는 것은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마치 라틴어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수학시간이면 나는 ‘저 공식이 우리가 사는데 어떤 관련이 있담?’ ‘지금 배우는 저것들이 정말인지 어떻게 알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시절에는, 필수인 수학과목을 두번 낙제하고선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에 (지금 아내가 된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컨닝을 하는데, 전혀 모르는 기호를 마치 만화 그리듯이 ‘모양을 외워서 그려낸’ 답장으로 동정표를 받아 최하 학점을 받으며 겨우 졸업을 하였습니다. 내가 제출한 시험지를 체점하던 분은 그 괴이한 답안을 보면서 엄청 웃었거나 아니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었을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살며, 또 이민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전산관련 일을 하면서 나는 오랜 세월 수십개 나라에서 온 문화, 언어 그리고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오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과, 내가 지금 사는 나라 그리고 또 내가 떠나온 한국을 비교해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개인의 능력으로 볼때 한국인 개개인의 능력은, 일본인을 포함한 대부분 나라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여기 예외도 있긴 합니다 🙂 스위스나 독일 사람들에게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당당히 대접 받는 지금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왜 최고의 집단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보면 별로인 일본인들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고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한국인들은 개인적으로 너무 똑똑하다 보니 지도자를 인정하고 따르는 습성이 적고 또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잔머리나 편법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 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도 나라도 자기가 잘하는 것을 더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들어낸 것들을 좋은 머리와 감각으로 재빨리 파악해 내고 나아가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고 바쁘게 사는 세상에서는 ‘그것해서 뭐하게?’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들을 최대한 빨리 흡수하고 나서 한발짝이라도 더 빨리 더 위로 올라 가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학벌, 최고의 직장, 최고의 현직에서 일하는 성격좋고 똑똑한 친구를 이번 한국방문 때도 만났습니다. 최고 공부를 많이한 최고 아름다운 부인과 최고 좋은 차에 동승하여 서울을 잠시 둘러볼때, 수포자 부부에게는 ‘떠나버린’ 한국이 마치 ‘잃어버린’ 선경처럼(仙境) 느껴졌습니다 🙂 그 친구는 장차 은퇴하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또 좀 살기도 할 작정인지 어떤 대학 일본(어)학과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다운, 대단한 수준이라 생각하여 감탄하였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그저 재미 삼아서 또 심심해서, 일본 관련 도큐멘트리, 영화, 드라마 시리즈, 교양 프로그램 그리고 하다못해 맛집 방문기까지 (영어자막의 도움으로) 수없이 보았습니다. 일본을 다른 나라들의 시각으로 보는 도큐멘트리들도 이것저것 보았습니다.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어쩌면 대학을 두어번 졸업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일이나 일본 프랑스는 물론 하다못해(?) 러시아나 중국같은 나라들도 영어로 방송하는 (관영) 채널들이 있습니다. 영어를 통하여 접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은, 한국어로만 (번역포함) 접할 수 있는 양과 범위의 수십배 어쩌면 수백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만큼 쉽습니다.
한국에서 골프를 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위 싱글’을 치는 사람들 중에서는 레슨을 꼬박꼬박 받아서 그렇게 된 사람보다는 자기 스스로 죽기살기로 연습하고 연구해서 그렇게 된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잘 치는 방법은 한국과 전혀 다릅니다. 물론 아마추어 골퍼를 대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매우’ 잘 치는 평범하고(?) 흔한 방법은 골프를 잘 치거나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는 아마추어로서는 최고 수준의 골퍼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어릴때부터 아빠따라 엄마따라 놀이삼아서 골프장을 들락날락 거렸던 사람들입니다. 어른이 되서 한동안 규칙적으로 골프를 쳤거나 지금도 규칙적으로 치는 사람들인 것은 맞지만 ‘죽기살기로’ 골프를 치거나 ‘미친듯이’ 연습하고 연구하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같은 목표를 이루거나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다른 방법들과 길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같은 길로만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의심할바 없는 권위를 가진 선생들로부터 정리된 방법으로 일본을 배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놀이삼아, 마치 아빠따라 골프장에 와서 퍼터들고 그린에서 장난치듯, 많은 시간을 보낸 일본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듯 ‘나의 생각과 견해’가 생겼습니다. 수많은 일본사람들을, 수많은 상황에서, 수많은 스토리들을 통해서 일종의 교차검증을 하면서 듣고 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권위도 없고 학위도 없지만, 그 어떤 일본 전문가와 토론을 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나의 견해를 표명 할 수 있지 싶습니다. 건방진 말이었지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또 단 하나의 정답이 필요없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왜?’ 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답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밖에는 없지 싶습니다 (‘realise’ 라는 말을 이럴때 쓰지 싶네요).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것들 중에서, 이미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를 잘 고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정답은 주관식 문제의 답처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답뿐만 아니라 문제조차도 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내 삶이 가능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이 시간에 이런 글을 쓰기까지 ‘왜?’를 허락하지 않았던 내가 떠나온 나라 그리고 ‘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가 사는 나라, 둘 다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수포자의 말로가 너무 비참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채운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다
살다보니 채우는 것과 쌓이는 것은 별개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직도 청춘이지만, 더 어렸던(?) 시절에는 그저 남들따라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 얻고 줏고 벌고 빼았아(?) 채우기만 하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준이나 인생의 승패는 그렇게 채우는 능력으로 매겨지는 줄 알았었다.
살다보니 채우는 능력과 쌓이는 결과가 딴판인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채우는 재주야 부모를 잘 만났거나 책상에 오래 앉았던 사람들이 당연히 더 있겠지. 그런데 채운것들이 쌓이려면 그릇이 번듯하게 크기도 좀 있고 또 깨지거나 구멍이 뚫리지 않아야 되는데, 이 그릇의 크기와 온전함은 부모 주머니에서 떨어진 돈이나 공부 머리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말미암아 달라지기도 어려운 것임을 보게 된다.
채우는 재주는 큰데 그릇이 작거나 깨져 있으면 밖으로 흘러 넘치고 줄줄 새게 된다. 흘러 넘치는 것이 돈이면 돈지랄하는 인간말종이 되고, 줄줄 새는 것이 권력이면 사람들 못살게 하는 미친개가 되고, 흘러 넘치는 것이 정력이면(?) 가정파탄 아니면 감옥행. 줄줄 새는 것이 지식이면 사람들이 면전에서 다투지는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가까이 하려하지 않는 외로운 늙은이로 종치게 되겠고 또 흘러 넘치는 것이 ego 라면 해탈 열반이나 천국행은 날샛겠지 🙂
인생 초기 대량 실점한 삶을 살아온 내가 대량 득점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그리고 가까이서 또 멀리서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세상 참 공평하다’ 그리고 ‘행복은 얼마나 채우는가 보다는 얼마나 쌓이는가에 있다’.
인경씨
인경씨는 서른이 넘은 프로골퍼예요. 전에 세계에서 유일한 도마 (뜀틀) 기술인 ‘양1’을 창조했다고 소개했던 체조선수 양학선 선수처럼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인경씨는 키도 작고 얼굴도 평범하며 또 나이도 많은 축에 속하는 골퍼예요. 온갖 스폰서들의 이름이 붙은 옷을 잘 차려입고서 섹시하게 배꼽을 드러내며 스윙을 날리는 상품성(?) 있는 골퍼는 아니랍니다. 인경씨 보면, 다른 골퍼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한복을 잘 차려 입은 북조선 미녀를 보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 인경씨는 언제나 열심히 스스로 훈련을 하는 골퍼였고 또 재능도 있었어요. 그래서 한 5년쯤 전에 미국에서 열린 아주 큰 경기에서 (‘매이저’라고 해요)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있었어요. 얼마나 가까이 두고 있었던가 하면 30센티 앞에 두고 있었어요. 이것을 굴려서 넣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못 넣었답니다. 결과적으로 연장전이 벌어졌고, 그렇게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어떻게 잘 칠 수가 있었겠어요? 졌답니다. 유튜브에, 골프 최악의 순간, 비운의 골퍼 이런 종류의 영상에 나오게 되는 치욕과 수모를 당하게 되었어요. 다시 마음을 추스려 잘 해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다음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우승은 커녕 상위권에도 들지 못하며 점점 잊혀졌답니다. 아래 사진은 그때 그 30센티 퍼팅을 실패한 직후의 모습입니다. 차마 인경씨 얼굴을 보기가 어렵내요.
인경씨는 순례여행도 홀로 다녀 보고 또 법륜스님이 계시는 정토회에도 나가서 수행도 하고 명상도 하면서 그때 그 고통을 딪고 일어나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칠흑같이 깜깜한 절망의 밤이 아마도 한 3-4년은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포기했지 싶어요. 그렇지만 인경씨는 포기하지 않고, 그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아 볼려고 열심히 노력을 계속 했대요.30센티 퍼팅을 실패했던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났어요. 인경씨는 영국에서 벌어진, 가장 권위있다는 브리티쉬오픈에서 (‘매이저’ 입니다) 우승을 하게 됩니다. 참 잘했어요. 그야말로 골퍼의 해탈 열반이 아니겠어요? 부활한 인경씨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에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훨훨 날고 있군요 🙂
인경씨는 이제 서른이 갓 넘었는데요. 앞으로도 오래 선수생활을 하길 바라지만 또 장차 은퇴를 하더라도 참 행복하게 살지 싶어요. 한 훌륭한 인간으로, 좋은 배우자 좋은 엄마 노릇을 하며, 인생의 많은 행복을 누릴 조건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녀가 벌어들인 돈때문이 물론 아니예요.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또 어떤 사람도 대신 찾아 줄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을, 행복의 열쇄를, 인경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찾은 것 같은 느낌이 그녀를 볼때면 들어요. 그 길고 절망적이었던 어둠을 인내와 노력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빛으로 다시 채운 인경씨. 한 인간이 이런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무르익고 여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참 훌륭하고 또 존경스럽습니다.누가 내게 ‘어떤 프로선수와 한라운드를 함께 해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섹시한 미녀골퍼도 또 300미터 티샷 날리는 괴물골퍼도 아니고, 물론 인경씨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겠지요.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인경씨와 한 라운드를 함께 한다면, 그녀가 부러진 날개로 더 높이 나르게 된 그 힘들고 외로웠던 과정을, 그리고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겸손하게 사는 그녀의 품위 있는 삶을 이야기 듣고 싶어요.
인경씨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지 싶네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 ‘더 로즈’ 베티 미들러가 불러요. 그리고 내 나름대로 번역을 덧붙였어요.
The Rose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And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어떤 이는,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익사 시키는 강물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이 그대의 영혼을 피흘리게 하는 면도날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사랑이 끝없이 아픈 갈망이며 굶주림이라고도 말하는데
나는, 사랑은 꽃이며 당신은 그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하고 싶어요.상처 받기 두려워 하는 마음이 결코 춤을 새로 배우지 못하게 막고
꿈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무언가를 결코 시도하지 못하게 막아요.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은 베풀지 못하는 법이며
죽는것을 두려워 하는 영혼은 정말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요.밤이 너무 외롭고 또 갈 길은 너무 멀 때
사랑이란 운이 좋은 사람들이나 성공한 사람들만의 것인가 당신은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한겨울 차가운 눈 아래 묻혀 있는 그 씨앗이
봄이 오면 따스한 햇님의 사랑으로 장미로 피어나리라는 것을.
Perspective is everything
‘원근법’이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견해 혹은 시각이 극히 중요하다’ 라는 말이 되겠다. 어제 소개한 One Strange Rock에 나오는, 명언중의 명언이다.
견해나 시각은, 여러개 있는 중에서 (구두나 자동차처럼) 고르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지는 것일까? 당신이 만약 골프를 쳐 본적이 없고 골프에 대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실제로 해본 것이 없다고 치자. 그러면 골프에 대해서 (골프라는 운동 자체) 당신이 견해나 시각이 있을 수 있나? 당연히 없다. 자연훼손이나 농약 그런 이야기들은 골프 ‘관련’이지 골프 ‘자체’가 아니지 않은가? 골프에 관한 견해나 시각은 골프를 치면서 생기고 또 발전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인간에게는 6개의 감각이 있다고 가르치셨다고 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오감에 더해서 ‘마음’을 6번째 감각기관 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이 ‘마음’이 저기서 말하는 ‘perspective’와 아주 관계가 깊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감이 받아들인 것을 뇌가 ‘마음을 통해서’ 해석하듯이, 세상만사 모든 것들과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perspective’에 따라서 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이 ‘견해’ 혹은 ‘시각’이 인간을 규정하고 그의 삶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지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왜 perspective를 그렇게 강조해서 이야기 하는가 하면, 내 생각에는, 첫째로 대기권 위에서 오랫동안 수없이 (하루에 열두번도 더 지구 주위를 돌면서 세상을 본다), 지구의 변화를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과 디테일로 본다는 것이, 그 우주인들에게 어떤 근본적이고 의미심장한 견해 혹은 시각의 변화를, 단지 지구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전체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왔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 주려고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과학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알 수 없었던 (너무 거대한 스케일 이거나 혹은 극히 작은 스케일의) 자연 현상들을 밝혀 내어 우리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견해 혹은 시각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에,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One Strange Rock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써, 아마 우주에서 보았던, 엄청난 규모의 연어 (salmon) 이동과 산란 그리고 죽음 (산란후 자연사). 그 집단적인 죽음 뒤에 실로 엄청난 규모의 질소 (nitrogen) 이동이 있고, 그렇게 이동된 질소가 다시 거대한 규모의 숲을 만들어 내는, 자연의 어마어마하며 또 정교한 ‘rebirth’의 과정을, NASA와 과학의 힘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무덤 위에 심은 사과나무 이야기 기억하지? 바로 그런 의미의 가르침을 붓다께서 주셨던 것이고 또 수천년 지나서 NASA와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Perspective is everything.
레지나 보따리장사, 매리 레인보우
기차 혹은 기차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근래에 ‘인도 국경을 지나는 기차들’ 이라는 3부작 BBC 도큐멘터리를 보다가, ‘레지나’라는 네팔 여자의 삶을 잠시 옅볼 기회가 있었다.
레지나는 네팔과 인도 국경간 몇 십킬로 구간을 오가는 그 완전 고물 기차의 단골 고객이다. 그녀는 네팔 상점들에서 (고객들이) 원하는 물건들을, 인도에서 사다가 기차로 밀반입 해주고 얻는 적은 수수료로 아들 둘과 함께 사는 여자다. 십대 중반에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서는 열아홉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 받고 그때부터 두 아이들을 기르며 홀로 살아 왔다. 최빈국에서도 하층 삶을 산다.
비록 국경은 없으나, 때때로 네팔 군경들이 기차가 도착할 때를 기다렸다가 출입구를 막고 밀수를 단속하여 물건들을 압수한다. 관세를 내야만 되찾을 수 있는데, 하루벌어 하루먹는데 무슨 관세를 어떻게 내나… 도큐멘터리 속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데, 레지나는 죽을 힘을 다해 보따리를 지키려고 하고 다만 하나라도 빼돌려 담장 밖으로 아들과 함께 가지고 나가려고 사력을 다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며 슬퍼한다.
레지나는 ‘unshakable spirit’의 소유자다. 달리 좋은 표현을 잘 모르겠다. ‘불굴의 영혼’? 그녀는 보따리장사지만, 가수요 신앙인이며 또한 달변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하버드 옥스포드 박사들이 쓴 그 어떤 책들 보다도 더 많은 훌륭한 가르침을 나는 레지나에게서 받는다.
밀수품 보따리를 잔뜩 실고 가는 고물 기차에서 노래하던 레지나. 무슬렘이면서도 힌두교 큰 축제때 염소 한 마리를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도 바치던 레지나. 그녀가 말한다 ‘그들의 신과 나의 신이 다르지 않다. 오직 인간의 마음이 분별할 뿐이다’. 다음날 떠날 기차를 기다리며 허름한 곳에서 고단한 몸을 누이면서 ‘비록 거적때기지만 (어떤 사람들처럼 몸을 팔지 않고) 내 손으로 벌어서 산 내 것 위에 눕는다’고 말하던 레지나. 자라나는 아들들이 엄마를 위해주고 또 밖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여 작은 돈이라도 벌어 오는데 감동해서 기뻐하던 엄마 레지나. 그때 레지나가 말하더라. ‘내 삶이 하도 힘이 들어서, 하늘이 사라지고 땅이 꺼졌다는 생각에 죽고 싶었던 적도 많았었다’고.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이리 잘 해주니 내 영혼이 충만하고 기쁘다’고 (Now my soul is content). 죽기 살기로 보따리 장사를 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 하루벌어 하루먹으니. 그 고물 기차가 자기에게는 삶의 터전이요 기쁨이요 신 (god)이라고 하던 레지나.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이 훌륭한 인간을, 그 불굴의 의지를, 그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고 싶다.
이제 그 고물 기차는 영원히 멈추었고, 협괘는 부서졌으며, 낡은 역건물은 허물어졌다. 중국과 인도의 자본을 들여와, 세 나라를 연결하는 최신식 기차를 네팔 정부가 건설하고 있다고 한다. 아! 레지나. 잘 살고 있기를…
아내가 만든 새로운 음식을 ‘레인보우 매리’라고 명명하였다. 여러가지의 채소를 오븐에 구운 다음에, 한 두가지 소스를 위에 뿌린 것이다. 맛있겠나 🙂 ‘매리 베리’라는 우리 내외가 좋아하는 요리사로부터 티비를 보며 배운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내가 음식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매리의 무지개’.
매리는 84살 할머니 요리사인데, 지금도 현역으로 티비에서 요리를 가르치고 또 책도 쓰고 한다. 영어권에서 가장 알려진 요리사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왼손이, 아마도 류머티스 때문에, 손가락들이 기형이 되어 제 구실을 못한다. 얼굴은 화장을 하지만 목 아래로는 쪼글쪼글한 상할머니다. 그 연세에 그 손으로, 보통 사람들이 만들기 쉽고 또 좋아할 음식들을 소개하고 또 쉽게 배우도록 도와 준다. 은근한 진짜 유머도 있고 또 멋도 잘 부린다. 우리 내외가 좋아하기도 하고 또한 존경한다. 이 분은 끝까지 자신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지켜내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태워 촛불을 밝혀 자신에게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빛을 그리고 기쁨을 주는 삶을 산다. ‘래인보우 매리’를 함께 먹으면서 아내에게 ‘당신도 아마 저 분처럼 살게 될 것이오’ 덕담을 건넨다. 어떤 사람들은 흡사 그런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똑같이 힘들고 아무것도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는 레지나 보다 어쩌면 수 백배 더 부유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매리 베리 할머니 보다 월등히 젊고 좋은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환경이 인간을 좌우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또 인간의 행복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노력해서 홀로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계단,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스스로 알아내어 스스로 올라야 하는, 그 계단이 인간의 품격을 결정짓고, 행과 불행을 좌우하며 또한 해탈 열반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기차에 사람들이 매달리고 지붕에 잔뜩 앉고 또 동물들과 사람들이 섞여 있는 그런 사진을 보면, ‘아! 어떻게 저렇게 사나’ 생각했었다. 마치 그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동물들과 비슷한 수준인 것처럼. 레지나를 알게 된 나는 이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와 똑 같은 삶이 그곳에도 있다는, 어쩌면 어처구니 없도록 명백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품격은, 그가 무었을 먹고 입고 어떤 차를 타고 집에 사는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되기에.
레지나 그리고 매리 베리. 두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