Чем люди живы? 사람은 무었으로 사는가?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입니다. 학창시절 읽어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쉽고 재미있는 (그리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기독교를 가르치려던 톨스토이의 주제가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과 멀리 떨어진, 남반구 한쪽 끝에서 사는 사람들은 ‘무었으로 사는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최근 이곳에서 벌어진 마오리 원주민들의 큰 데모와, 또 그와 관련하여 한 원주민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벌였던 일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에서도 보도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먼저 배경을 좀 알아봅니다. 뉴질랜드와 호주는 옛날에 영국의 지배를 (식민지) 받고 있었어요. 180년쯤 전에 영국왕실과 (Crown이라고 합니다) 뉴질랜드 원주민 대표들이 조약을 체결합니다. ‘영국은 마오리 원주민을 영국 국민으로 인정하고 당신들의 (원주민으로서의 특수한)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겠노라, 그러니 원주민들은 영국 왕실을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앞으로 문제를 더 이상 일으키지 말지라’ 그런 내용입니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The Treaty of Waitangi 라고 합니다), 이미 원주민들과 영국에서 파견한 군대 사이에서 여러차례 무력 충돌이 있었었고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무기가 열세인 원주민들이 더 많이) 죽었습니다. 이제는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신사적인 조약이었어요. 식민지 문서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마오리 원주민들은 그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오랜 세월 차별과 무시를 당하며 살았었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우며, 또 근본적으로는 유럽인들이 주도하는 사회에 원주민들이 쉽게 적응하지도 또 동화되지도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사람들도 더 깨우치고 또 뉴질랜드가 꽤 잘 사는 나라가 되면서, 지난 50여년 기간은 뉴질랜드 정부와 국민들이 원주민 마오리들의 특별한 권리를 잘 보장해주며 (이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주었기에 Tangata Whenua라고 부릅니다. ‘땅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라고 해요),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지속적으로 해주면서 좋은 관계가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는 원주민 마오리들이 (호주 캐나다등 다른 나라의 원주민과는 달리) 매우 강한 자신의 색채와 더불어 자기 주장을 끊임없이 지속해 온 것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뉴질랜드군으로 수없이 많은 마오리 병사들이 참전하여 터키 등지에서 전사했습니다. 나도 옛날에는, 덜 떨어져 보이는 마오리 원주민들을 무시하고 눈 아래로 보는 마음이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몇년 전에 Waitangi 라는 뉴질랜드 최북단 지역을 여행하다가 (위에서 말한 그 조약이 체결된 장소입니다) 우연히 전몰군인기념 건물을 (war memorial)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크고 흰벽에 가득한, 2차대전 그리고 한국전 월남전등에서 전사한 마오리 군인들의 빽빽히 적힌 이름들을 보고선 나는 크게 부끄러웠습니다. 그 당시의 전쟁 상황을 설명하는 문서들과 비데오를 보면서, 오늘날 나와 우리 가족이 편히 살고 있는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그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님을, 내가 편견과 무지에 기인하여 무시하고 비난 했었던 바로 그 사람들의 피 위에 이 나라가 세워졌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어쨋던 이런 와중에 차차 국회의원들도 (세대가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른) 젊은 사람들로 교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진리에는 예외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세대 국회의원들 중에서, 어떤 작은 당을 대표하는 사람이 국회에 새로운 법을 발의하였습니다. 내용은 ‘원주민 이주민 이민자 이런 것은 이제 더 이상 따지지 말고, 이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사는 사람들 모두는 이제부터 하나의 법 아래에서 동일한 책임과 권리를 똑같이 누리자’ 그런 취지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좋아보이지만, 만약 이 법이 국회에서 통과가 된다면 지난 50여년 마오리 원주민들이 누려온 많은 특권들이 차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을 외부에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한가지 예로, 뉴질랜드 남섬 전체의 약 90% 땅이 (남한 전체보다 아마 크지 싶네요), 한 마오리 원주민 부족이 원래 소유자 임을 Crown은 (뉴질랜드 정부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국유지라는 개념에서 볼때 (그 땅은) ‘뉴질랜드 정부와 그 부족이 동시에 소유권이 있다’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개인의 재산권 행사에는 관련이 없으나, 예를 들어 큰 댐을 만들거나 어떤 대규모 개발을 하고자 하면 그 마오리 원주민 부족의 양해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아마 ‘동의’를 받아내야 하지 싶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개발이 지연되고 때로는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부나 민간사업자들의 시각과 (그들의 우선 순위와) 마오리 원주민들의 그것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절차들을 (예를 들자면)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를, 마오리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지위와 권리를 빼았으려는 의도로 보기 때문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 라휘티’ 라는 20대 초반 원주민 여성 마오리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작년에 스무살의 나이로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최연소 뉴질랜드의원 기록입니다. 모든 초선의원은 국회에서 첫 연설을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maiden speech라고 합니다). 이때 자신의 국회의원으로서의 포부와 계획등을 이야기 합니다. 아래의 비데오를 보면, 처음 1-2분간도 다른 나라의 국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지만, 연설이 끝나고 난 12분 20초경 부터는, 그녀가 속한 마오리 부족 사람들이 국회의사당 2층에서 그들의 전통 춤과 노래를 부르며 (멜로디가  마치 ‘연가’처럼 우리 정서에 맞고 모두가 노래를 참 잘 합니다) 그녀를 성원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허락하고 지지하고 또 받아들여주는 국회의원들 (대부분은 영국계 유러피언들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 국민들은 참 훌륭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실제로 법안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할 때는, 다른 어느나라와 마찬가지로 심하게 언쟁하고 (투표등을 통한) 힘으로 견재하고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런 ‘세포 하나하나가 온통 마오리인 사람’을 만나서 상대 한다면 부담스럽고 어려울 것이며, 그들의 일부 시각이나 주장은 동의 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그녀가 열흘쯤 전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뉴질랜드를 넘어 세계로(?) 진출합니다. 아래 비데오에서, 좀 어색하고 뻘쭘하게 앉아 있는 젊은 남자 국회의원 앞에서 추는 그 춤은 (그리고 외치는 함성은) 위에서 본 그녀의 국회의원 첫 연설 때와는 좀 다릅니다. Haka라고 하는 war cry 입니다. 그리고 ‘Ka mate ka mate, ka ora ka ora’ 라며 외치는 말은 영어로 ‘I die I die, I live I live’ 라고 번역됩니다. 그야말로 ‘죽자’는 말입니다. 무슨 장면일까요? 그 젊은 남자 국회의원이 바로 ‘원주민 이주민 이민자 이런 것은 이제 더 이상 따지지 말고, 이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사는 시민들 모두는 이제부터 하나의 법 아래에서 동일한 책임과 권리를 똑같이 누리자’ 라는 법안을 발의한 사람입니다. 그 법안 초안이 인쇄된 종이를 찢으며 그녀와 다른 원주민 국회의원들이 극렬하게 온몸으로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젊은 남자 국회의원은 나중에 ‘이 바뀐 세상에서 다 함께 잘 살아 보자는데, 고작 하카로 나를 협박하는 수준 밖에는 안되나’ 하면서 응수 합니다). 이렇게 국회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수만명의 마오리 원주민들과 또 그들을 지지하는 다양한 인종의 뉴질랜드 사람들이 걸어서 (혹은 말을 타고) 국회의사당에 모여서 엄청난 데모를 그 비슷한 시기에 하였습니다. 이 법안은 국회를 통과할 (입법화 될) 가능성이 전무합니다. 원래부터도 그랬었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더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나라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 할까요? 우리 가족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을까요?

짧은 비데오를 하나 더 보고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뉴질랜드 럭비국가대표팀은 (All Blacks라고 합니다) 경기전에 바로 이 하카를 (전투 춤을) 춥니다. 20년쯤 전에 Tana Umaga라는 우리 동네 출신의 주장이 이끌었던 All Blacks가, 프랑스와의 경기전에 보여주었던 하카를 나는 좋아합니다. 무시무시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면전에서 맞닥트리고 나서 럭비경기를 하려고 하면 좀 기가 죽고 주눅이 들지 않겠어요? 인간이 의사를 전달할때 (그리고 생각을 할때 조차도) 종종 언어를 넘어서 혹은 건너 뛰면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온 몸으로 표현하는 의사가 훨씬 더 강력하게 전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며칠전에 바로 그 젊은 남자 국회의원이 티비에 나와서, 뉴질랜드 매스컴의  ‘떠오르는 왕 이빨’과 (좋은 의미입니다) 맞짱 토론을 벌이게 됩니다. 우리 내외도 그 방송을 보았어요. 그리고선 아내에게 ‘당신 생각은 어떠한가’ 물어봤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다른 교사들과 더불어, 뉴질랜드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마오리 원주민의 말과 문화를 (비록 숫자로는 전체인구의 17% 정도이지만), 뉴질랜드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영어 영어권 문화와 더불어 ‘양대 문화’로 (Bi-culturalism 이라고 하며 Multi-culturalism 과는 다르다고 하네요) 강력하고 체계적으로 아동들에게 교육하는 이유는, 단지 그 조약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 마오리 원주민들의 특수한 권리와 입장을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들의 문화를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우리 전체의 것으로 함께 발전시킨다고, 다른 뉴질랜드 사람들의 권리가 침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향상 될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더불어 상생하며 모두가 더 잘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젊은 국회의원은 근시안적이며 모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발상에 동의 할 수 없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내에게 말했어요. ‘당신 말이 옳다. 그리고 고맙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20년 경력의 유치원 선생님이 (원장이) 아니었고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이었거나 혹은 장사를 했었더라면, 오늘 내가 당신의 이런 견해를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주민들의 특권을 인정해주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문화로 발전시키는 것이) 짧게 보면, 특혜로 보이고 전체 국민들에게 부담을 초래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길게 보면, 당신의 말대로,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인종과 문화가 상이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잘 살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이주한) 우리 가족의 처지에서 더 이상 무었을 바라겠으며, 어떻게 그 원주민들과 지혜로운 다수의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고마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덧붙였어요. ‘당신이 때로 영어가 충분치 못해서 힘들고, 또 유치원 운영에서 발생하는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오랜 세월 이 나라의 수천명 새싹들에게 심는 사랑과 이해의 씨앗은 장차 꽃 피어나 이 나라를 더욱 조화롭고 (harmonious)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데 한몫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당신의 긍지는, 그 어떤 부나 지위보다 가치가 있으며, 아무도 당신에게서 빼았아 갈 수 없으니 당신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사람은 무었으로 사는가? 어떤 사람은 긍지로 삽니다. 당신은 무었으로 삽니까?

마치면서 최근 우연히 보았던 ‘칼릴 지브란’ 시의 한구절을 남김니다. 긍지도 또 우리가 이야기 하는 그 어떤 것들도 결국은 시간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거나  꽃씨를 뿌리며 살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아마도 전부가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The Prophet by the poet Kahlil Gibran (About Death)
What is it to die but to stand naked in the wind and to melt into the sun?
And what is it to cease breathing, but to free the breath from its restless tides, that it may rise and expand and seek God unencumbered?
Only when you drink from the river of silence shall you indeed sing.
And when you have reached the mountain top, then you shall begin to climb.
And when the earth shall claim your limbs, then shall you truly dance.

이 시를, 많은 뉴질랜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쓴 자서전에서 읽었을때 (그녀가 자기 부모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컨텍스트) 내 마음에 큰 파장이 일었어요. 시대와 장소를 떠나서 사람의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번역을 첨부 하는 것이 좋은가 생각하다가, 그래도 류시화씨의 책에서 옮겨와 아래에 남김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람 속에 알몸으로 서서 태양 속으로 녹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숨을 멈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쉼 없는 물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높이 솟아올라 아무 방해받지 않고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오직 침묵의 강물을 마셨을 때, 그때만이 그대는 진정으로 노래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때 그대는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리라.
그리하여 대지가 그대의 팔다리를 도로 가져갈 때, 그때 그대는 진정으로 춤추게 되리라.

코라

코라(Kora)는 아프리카 전통 현악기예요. 감비아(Gambia)라는 아프리카대륙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전통악기로 알려져 있어요.

한 십여년 전인데요, 그때 코라와 연주자를 주제로 만든 도큐멘터리를 보기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닥불 주변에서 북이나 치면서 엉덩이나 흔드는 줄 상상했었어요.

그 도큐멘터리에 나왔던 연주자가 Toumani Diabaté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는데요, 무려 70대째 그 집안에서 코라만을 연주하면서 사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오십대 중반이 되서 좀 늙어 보이지만, 그때 도큐멘터리에 나왔을때는 얼마나 젊고 총명하게 생겼던지, 그리고 무었보다 그의 코라 연주를 듣고서는 정말 놀라고 또 충격을 받았었어요. 아! 사람은 다 똑 같구나, 지금 좀 가난하게 산다고 무슨 원시인 수준으로 착각했던 내가 무지하고 무식했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 코라연주들을 녹음해서 가끔 듣게 되었는데요, 심금을 울리는 그런 소리가 아닌가 싶네요. 멋진 코라연주 한번 들어봐요 🙂

교통사고의 어떤 결말

양로원 앞에서 길을 건너던 할머니를 치여 숨지게 한 트럭 운전자가 5천불의 배상금을 물다.

트럭에 치여 숨진 그 할머니의 유가족들은 그 운전자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을 나서서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알프레드 프라이스’라는 그 트럭 운전자는, 어쨋던, 자기 트럭에 치인 마가렛 스튜어트 할머니가 뉴질랜드 해밀턴시의 한 도로에서 사망하던 순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프라이스씨는 트레일러가 달린 큰 트럭을 운전하여 배달장소에 도착한 후에 입구를 찾는 중에 잠시 한눈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91세의 스튜어트 할머니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프라이스씨가 정신을 차려 횡단보도를 보았을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할머니는 트럭에 치인 후였습니다.

프라이스씨는 지난 목요일 해밀턴법원에서 과실치사에 대한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케시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에게, 할머니 유족들에게 5천불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언도 했습니다.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의 변호사가 제출한, 운전면허 유지를 위한 청원서를 받아 들여 허가 했습니다. 프라이스씨는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에 일어났던 이 사고는 그 트럭 전방에 설치된 카메라에 녹화되었습니다. 그 영상에 따르면 프라이스씨는 시속 약 30킬로미터로 서행하고 있었으며, 또한 경찰도 밝히기를, 초록색 신호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트럭을 운전했었던 것으로 영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라이스씨와 그의 부인은, 지난 5월, 법무부가 마련한 만남의 장소에서,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의 가족들과 만났습니다. 그는 유가족들에게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주저없이 돌아가신 분과 나의 자리를 바꾸겠다’고 하며 사죄하였습니다. 프라이스씨가 써 온 편지를 돌아가신 할머니의 조카딸이, 할머니의 오빠, 즉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 읽어 주었습니다.

경찰은 운전면허취소를 하지 않겠다면 징역형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법원에 권고하였지만, 윌슨판사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윌슨판사는, 운전자 프라이스씨의 무과실 운전경력, 사람들이 증언하는 그의 인간됨, 그가 처음부터 유죄를 주저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지난 5월에 있었던 스튜어트 할머니 유가족과의 만남의 결과를 모두 고려하였습니다. 윌슨판사는, ‘프라이스씨는 면허정지 처벌을 받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사고로 크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가족은 물론 유가족까지도 당신을 돕고 싶어 합니다. 어쩔수 없는 사고였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사고는 그 62세의 트럭운전자에게 처음있는 사고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 가족들과 프라이스씨 가족이 서로 알게 되고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두 가족들은 법정에 나란히 앉아서 판사의 선고를 기다렸습니다. 유가족들은 (할머니의 오빠, 시누이 그리고 두 조카) 판사에게 운전자 프라이스씨가 운전면허를 정지 당하거나 감옥에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법정을 빠져 나오니, 프라이스씨가 밖에 주차해 둔 자신의 차에서 가족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유가족들도 기꺼이 동의했다고 합니다.

‘우린 그를 용서했어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한 조카가 말합니다. ‘그가 잘못했던 것이 아니예요. 내가 바로 지금 차를 주차하다가도 이런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또 다른 조카의 말입니다. ‘할머니는 체구가 조그만, 우리에게는 소중한 분이었어요.’

돌아가신 스튜어트 할머니는 미혼에 자식도 없었다고 합니다. 늙은 부친을 돌아가실 때까지 뒷바라지 했었던 딸이었다고 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을 가지고도, 그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했었고 또한 그들은, 돌아가신 할머니도 기꺼이 받아 들이실 훌륭한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그런식으로 일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물론 않으셨겠지만, 어쩌면 사랑하는 남은 가족들과 또한 다른 한 가족의 가장이기도 할 그 가해자가,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받아들이고 잘 마무리 하기를 바라셨으리라 짐작해요.

그 할머니의 바램을, 남은 사람들이 (피해자, 가해자, 그 가족들, 법원 그리고 경찰까지도) 훌륭한 방식으로 실행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었더라면 무슨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두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이미 지나버린 그리고 아무도 되돌릴 수 없는 그 과거의 일에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의 무덤을 찾을때마다 사람들은 원망과 비통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겠지요. 자주 찾기도 어려워질 것이고요. 그리고 감옥을 나온 그 운전자는 더 이상 직장을 구할 수도 없고, 어쩌면 흠뻑 뒤집어 썻던 그 차가운 원망과 비난의 소나기 속에서 술이나 마시다가 뒤늦게 이혼 당하고 쓸쓸히 병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할머니가 기뻐했을까요?

그 벌금으로 유가족들은 아마도 할머니의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드렸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자주 찾아가서 꽃을 놓으며 할머니의 예뻣던 과거의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떠올리며 ‘아! 그 운전자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싶어요. 이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또 조금만 지나면 까맣게 잊혀질 이 사람들이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있지 싶어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이 우리가 익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도, 어쩌면 지난 과거에 어떤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있지 않겠어요?

오늘 그대와 나는 어떤 선택의 상황에 놓여질까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 운전자가 그리고 유가족들이, 그 사고 전에, 아무렇게나 트럭을 몰며 또 서로 함부로 다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왔던 사람들이었었다면, 그 할머니의 바램을, 듣지도 또 실행할 힘도 능력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오늘,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 선택을 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이미 쌓여 있는 과거의 카르마를 조금이라도 줄일 선택을 하세요. 그래야 가볍게 왔다가 가볍게 갈 수가 있을꺼예요. 길가에 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