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과 두려움

아내는, 서너살 먹은 유치원 아이들이 어울려 놀며 갈등하고 부대끼는 것을 오래 보아 오면서, 그 본질은 성인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지금 그들이 보이는 언행에서 그들의 장래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코헨’ 이라는 서너살 된 사내 아이에게 관심이 많고 자주 그 아이의 이야기를 저녁 시간에 하곤 하였다. 이 아이는,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멋진 사내’ 라고 한다. 아! 그런 넘도 있구나. 그 어린 나이에도 그런 것들이 드러나는구나. 하지만 이 아이는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엄마는 알코올과 약물 중독자였고, 현재도 비록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노력은 하고 있으나 그 상태를 크게 벗어 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아이의 할아버지, 아내의 말에 따르면 한때 한 주먹 했을 법한 무섭게 생긴 노인이, 손자를 유치원에 데리고 오가며 부모 노릇을 대신 한다고 했다. 원장님께는 깍듯이 한다고 🙂

어떤 좋은 유전자를 받아 멋진 면을 가지고 태어난 이 어린 녀석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특히 유년기에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유치원에서 또래 아이들과 또 교사들에게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일으킬때, 아내는 화가 나기 보다는 성장 환경의 영향으로 이 아이의 삶이 서서히 ‘험난한 인생’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기에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기 어렵다고 한다. 아내가 말했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을 내가 지금 보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내가 묻는다. 당신이 이 아이가 그토록 마음에 걸린다면 유치원을 떠나고 난 이후에도 선생님으로 남아 도와 주면 되지 않겠는가? 아내가 덧붙인다. 그럴 수가 없다. 내게는 오늘, 바로 지금 돌봐야 할 수 많은 아이들이 있고 또한 내가 만약 이 아이 주변에 계속 머무른다면 그 아이와 그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나조차 휩쓸려 떠내려 갈 것이다. 아내와 그 멋진 녀석과의 인연은 곧 끝이 날 것이요, 그 아이는 태어난 환경이 짐지워준 숙명의 길을 오래 그리고 힘들게 걷게 될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모국에 머무는 동안, ‘두두두’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두어차례 재미있게 보았다. 한 지방 채널에서 매주 방영하는, 초등학교 대항 발야구 중계방송(?) 이다. 보통 열댓살 된 초등학교 6학년들이 팀을 이루어 발야구 시합을 하는데, 그 준비 과정, 임하는 자세, 응원 그리고 실전과 경기 후일담까지, 흡사 사회생활의 축소판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하다.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대화를 통하여,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은 욕심 때문에 그리고 운동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기가 공을 차는 공격 순서가 왔을때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처구니 없이 그리고 때로 우습게 아웃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전후해서 보이는 그들의 반응을 통하여 그들이 장차 성인이 되었을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내 나름 상상해 보게 된다. 아직 초등학생들이지만 성격의 많은 부분은 이미 형성이 되었으리라.

내 자신을 되돌아 보자면, 주로 두려움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는 우스꽝스럽게 타석을 내려가는 아이였을 가능성이 크겠다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신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나니 이미 나의 발야구는 끝난지가 오래 되어버렸다는 씁쓰래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참 사회 생활을 할 때는, 특히 모국에서는 이런 단체경기에서 주동이 되고 기량을 발휘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 하리라 생각 한다. 하지만 이제 내 나이가 되고 또 개인주의가 발달한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것 이외의 다른 능력들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지위에 있건 얼마나 부유하건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지배하는 이 욕심과 두려움이라는 큰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 나는 차차 깨닫게 된다. 욕심은 노력하면 줄일 수 있고 욕심이 줄면 두려움도 준다는 것을.

골프 샷을 망치는 가장 큰 두가지 이유는 역시 욕심과 두려움이다. 이 둘을 조금이라도 더 컨트롤 하며 라운드를 즐길 수 있기를 나는 바라며 또 노력한다. 골프의 참맛은, 딴 돈의 크기나 카드에 적인 점수보다는 오직 자신만 알 수 있는 바로 이 욕심과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싸움에서 자주 이기면 라운드의 결과는 2차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그래서 썩좋지 않은 스코어카드를 손에 들고서도 몹시 행복해 하는 고수들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클럽에서는, 로컬룰에 따라 겨울 동안에는 페어웨이에서 공을 집어들어 닦고 한 클럽 거리 안에서 더 나은 자리에 놓고 샷을 할 수 있다 (플레이싱). 몇 주 전 라운드중에 세켠샷을 3우드로 칠 때가 왔다. 몸 왼쪽으로 기울어진 좋지 않은 라이. 3우드샷에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문득, 나는 우드샷에 강한데 공을 그대로 두고 내 실력껏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가지고 프리샷 루틴을 따라 욕심과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해 샷을 날렸다. 좋은 샷이었지만, 좀 떨어진 페어웨이 벙크 앞 턱을 맞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아내에게도 말했었다. 나는 그때 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욕심과 두려움 없이 내 실력대로 한방 날려 보았노라고. 그래서 결과야 어떻게 되었건 내 속이 시원하고 내 자신에게 기분이 좋다고. 욕심과 두려움을, 최소한 그 순간에는 나의 역량과 에너지로 제압 했었다. 나에게는, 삶에서도 골프에서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따고 또 좋은 점수가 적힌 스코어 카드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쭐거려도, 그 과정에 욕심에 휩쓸리고 두려움에 시달렸다면 자기 자신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나 나나 떠날때 돈을 좀 덜 땃던 것 혹은 남들에게 좀 못 우쭐거렸던 것을 후회하면서 눈을 감을 것 같은가? 내가 듣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좀 더 해보았었더라면 하고 후회를 한다고 하던데.

욕심을 줄이면 두려움도 줄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내 능력껏 내 기량을 내 속이 시원하게 발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 참 중요하고 또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덧붙이는 이야기 – 어제 라운드 후반에 다시 그자리에 서게 되었다. 200미터 이상 남은 곳에서 3우드로 그린을 공략하는 그곳에. 동반자들에게 종게 양해를 구하고 그린에서 앞팀이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욕심과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프리샷 루틴에 따라 천천히 샷을 날렸다. 공은 똑 바로 날아가 230미터 떨어진 그린 중앙에 안착하였다. 물론 3펏 하고 내려오는 백돌이 수준이지만, 나는 이런 맛도 때로 즐길 줄 안다 🙂

스위스뇬과 라오스넘, 깨달음과 습관

직원중에 라오스계 넘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아마 어렸을때 와서 자란 듯하다. 볼때마다, 내게는, 더럽고 게으르며 어글리한 느낌을 준다. 팀원 중에서 가장 능력이 떨어지지만 최소한의 일 이외는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늘 헤헤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큰 소리로 낸다. 그넘 참… 사무실에서 손톱을 깍으며, 신발을 벗고 왔다 갔다 한다 (자기 이외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짓들을 하면서 자각하지 못한다는 뜻). 그 부모의 영향이며 또 그 부모를 길러준 그 나라의 영향일 것이다.

직원중에 스위스계 뇬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났던지 아주 어릴때 와서 자랐던지. 건데 생김새도 언행도 이곳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 있다. 팔등신 미녀에 똑똑하며 일을 딱 부러지게 한다. 회사 근처 공원에서 가끔 점심시간에 홀로 운동하는 모습을 본다. 그뇬 참… 이뇬은 신발을 벗는데서 한 수 더 떠서 아예 양말까지 벗고 맨발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을 자주 본다. 물론 이뇬 이외에 그 누구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 이 방면에 본좌다.

그 넘을 볼때는 ‘후진국’이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고, 이 뇬을 볼때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생각이 떠오른다. 그 옛날 만화속에서 어쩌면 맨발로 잔디위를 뛰어 다녔을 그 예쁜 하이디가.


내가 일하는 이 대학에는, 인도네시아 영어교사들을 위한 학사학위 특별 과정이 있다. 교육대학을 마쳤거나 졸업반인 인도네시아 영어교사들이 이곳에서 1년 과정을 마치면서 TESOL 영어교육학사 학위를 받는 협력과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출퇴근때 그 건물을 자주 지나니, 소위 말해서 ‘대가리에 보자기 쓴’ 인도네시아 여학생들을 많이 보게 된다. 25년전 그 건물에서 잠시 영어를 배울때, 같은 코스를 공부하던 터키인인가 그 근처 나라에서 왔던 무슬램 여자, 보자기 쓴 그 여자가 전혀 건방지지 않은 태도로 ‘당신들이 이슬람 종교를 모르며 일생을 산다는 것이 나는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좋은 의사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대가리에는…

‘다문화 고부열전’이라는 EBS방송의 연재 도큐맨터리를 본 적이 있나?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수많은 외국 문화와 그 결과물인 외국인 아내들이, 한국의 문화와 만나서 부딪치고 갈등하는 가운데, 인간 삶의 어떤 진실 혹은 가치를 보여주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였다. 모든 문화는 (개인들은) 상대적이며 그 환경의 소산이고, 한국문화 (한국인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문득 우리들 자신이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속에서 혹은 알 필요가 없다는 교만속에서 사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무언가 흔들리지 않는 것들,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나는 살아 왔다. 세상에 그런것들이 정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꽤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있다. 무지와 어리석음이 있는 곳에, 그 바탕위에서는, 흔들리지 않거나 바뀌지 않는 것들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다문화 고부열전’을 통하여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또 소위 후진국에서 자랐지만, 나의 수준이나 내공을 월등히 능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처했었던 어떤 상황보다 열악하고 힘든 여건속에서, 내가 해낼 능력이 없고 또 깜양이 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좋은 태도로 힘껏 해내는 그 사람들을 보고 나서, 나는 더 이상 ‘후진국’이니 ‘대가리에 보자기 쓴 뇬들’이니 하는 말들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깨달음을 잠시 맛보았다고 해서, 내가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을 며느리로 삼고 싶거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흡사 그 ‘다문화 고부열전’의 모든 결말이 이해와 화해로 끝은 나지만, 그것이 앞으로 갈등없고 행복하기만한 고부관계나 가족생활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머리로 부터 오는 것이요, 습관은 오랜 삶 속에서 굳어져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때문이다. 습관이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자명하듯, 깨닫음이 저절로 습관을 바꾸지 못하는 것 또한 자명하다.

깨달음은 다만 첫번째 문을 여는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첫번째 문조차도 열지 못한채 흘러 간다. 하지만 첫번째 문 뒤에 첩첩히 닫힌 문들이 습관 혹은 카르마라는 빗장을 걸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 빗장들을 풀며 그 첩첩히 닫힌 문들을 열기 위해서는, 그 머리로 깨달은 바가 가슴으로 흘러 내려가 내 몸의 새로운 습관이 되고 새로운 카르마가 되어야만 한다. 이 과정은, 친구의 급사에 크게 충격받은 배불뚝이 중년이, 새다리처럼 가는 팔로 턱걸이 20개를 목표로 철봉에 매달리는 그 손바닥 찢어지는 고통의 과정이며,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새로 산 신발을 신고 첫 몇 킬로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헉헉 억지로 뛰기 시작하는 그 물리적인 과정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10% 덴트의 법칙’ 이라고 내가 명명한 법칙이 있다. 오래 지속된 습관 카르마를 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이 과거에 지속되었던 기간의 10분의 1 기간이라도 최소한 시도를 해야 덴트(dent) 즉 ‘이빨이라도 약간 먹힌다’는 법칙이다. 운동 안한지 얼마나 되었나? 보자기 쓴 뇬들이라고 싸잡아 무시하며 산지는? 20년? 그러면 최소한 2년은 노력을 해야 이빨이라도 먹힐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 내 일천한 경험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전에는 잠시 반짝한다고 까불다가 훅간다.

팀 미팅을 하면, 뒤쪽에 서 있는 내 눈에 그넘의 검은 양말이 흘낏 보인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앉아 있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맨발을 본다. 그리고 소리없이 웃는다. 내 습관 내 카르마를 생각하면서.

더닝 크루거 효과

‘더닝-크루거 효과’ 라고 들어 보았나? 이곳에 간략한 설명이 있다.

누군가가 좀 과장해서 그린 그래프지만 적나라하다. 경험과 실력이 거의 전무한 사람들이 최고 수준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계속 경험과 실력을 쌓아가면서도 자신감은 점점 낮아지면서 거의 바닥을 치다가, 아주 많은 경험과 실력을 쌓아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될때 비로소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 자신감도 초보자들의 자신감에 비해서는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실제 논문에 사용된 그래프다. 검사결과 최하위에 속하는 사람들은 검사전 자신의 능력이 60번째 정도 백분위수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했었고 (100명 중에서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40명 정도 있을 것으로 예측), 상위 25%에 실제로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70번째 정도 백분위수에, 그리고 실제로 최상위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75번째 정도 백분위수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우리들 인생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대는 어떤 그룹에 속할것으로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