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운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다

살다보니 채우는 것과 쌓이는 것은 별개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직도 청춘이지만, 더 어렸던(?) 시절에는 그저 남들따라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 얻고 줏고 벌고 빼았아(?) 채우기만 하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준이나 인생의 승패는 그렇게 채우는 능력으로 매겨지는 줄 알았었다.

살다보니 채우는 능력과 쌓이는 결과가 딴판인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채우는 재주야 부모를 잘 만났거나 책상에 오래 앉았던 사람들이 당연히 더 있겠지. 그런데 채운것들이 쌓이려면 그릇이 번듯하게 크기도 좀 있고 또 깨지거나 구멍이 뚫리지 않아야 되는데, 이 그릇의 크기와 온전함은 부모 주머니에서 떨어진 돈이나 공부 머리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말미암아 달라지기도 어려운 것임을 보게 된다.

채우는 재주는 큰데 그릇이 작거나 깨져 있으면 밖으로 흘러 넘치고 줄줄 새게 된다. 흘러 넘치는 것이 돈이면 돈지랄하는 인간말종이 되고, 줄줄 새는 것이 권력이면 사람들 못살게 하는 미친개가 되고, 흘러 넘치는 것이 정력이면(?) 가정파탄 아니면 감옥행. 줄줄 새는 것이 지식이면 사람들이 면전에서 다투지는 못하겠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가까이 하려하지 않는 외로운 늙은이로 종치게 되겠고 또 흘러 넘치는 것이 ego 라면 해탈 열반이나 천국행은 날샛겠지 🙂

인생 초기 대량 실점한 삶을 살아온 내가 대량 득점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그리고 가까이서 또 멀리서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세상 참 공평하다’ 그리고 ‘행복은 얼마나 채우는가 보다는 얼마나 쌓이는가에 있다’.

아는 것 하는 것?

지난번 블로그 글을 읽고 난 아내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훈계조의 글로써 쓴 사람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라는 혹평을 하였어요. 밥상을 뒤엎으며 대판 싸우려다가 (요샌 스스로 차려서 바닥에 놓고 먹기도 하니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고) ‘그렇게 보여질 소지가 있으며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한 내 한계’라고 쿨하게 말을 하고선 내 방으로 꺼져서 혼자 한잔 하면서 울분을 삭였어요. 나이가 들면서 가정의 헤게모니도 생체 호르몬 구성비의 역전과 더불어 반전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요 🙂

오늘은 새해맞이 시리즈로, 지난 글에 이어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지만 훈계조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말투도 좀 덜 건방지게 써보려고 해요. 잠시라도 그대들께 즐거움을 주기를 바래요.

우리가 어릴때 말을 못하는 사람을 벙어리 혹은 버버리라고 불렀어요. 그들은 왜 말을 못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소리를 내는 입이나 성대에 문제가 있어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에 말을 못하게 된 주된 이유는 (청각기능의 문제로)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흉내를 낼 수가 없고 또 소리를 어떻게 낸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들을 수가 없으니 자신이 내는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해요. 마치 태어나면서 장님인 사람이 색깔을 전혀 상상할 방법이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네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부닥치게 되어 생각을 하게 되면, 예를 들면 ‘지금 그녀에게 고백을 할까 말까’ ‘저 떠나려는 버스에 지금 뛰어가면 놓치고 괜히 망신만 당할까 아니면 탈 수 있을까’ ‘앞에 고약한 호수가 공 내놓아라 하면서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는데 다음 샷을 어떻게 칠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머리속으로 생각을 하는데요,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국어로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하게 되지요 (내면의 대화). ‘지금 고백했다가 망신만 당하고 괜히 잘 되고 있는 관계를 망칠지도 몰라 그만 두자’ ‘지난번에 버스 세워서 잘 탓는데 뛰어가 보자’ ‘힘을 빼면 된다던데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말이에요. 나는 물론 한국어로 내면의 말을 하고 꿈도 한국어로 꾸는데요, 드물게 영어로 꿈을 꿀 때도 있어요. 꿈속에서 영어로 말을 술술 잘하고 또 어려운 단어를 쓰는 꿈을 꾸다가 내 자신이 (그것에) 놀라서 이게 왠일 하면서 꿈꾸는 자신을 놀라워하는 꿈을 꾸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는) 일도 있었어요. 자기가 꿈속에서 사용하는 영어단어들을 자기가 이해를 못하는 웃기는 경우지요. 이민와서 힘들게 살다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요 🙂

옛날에는 의사 과학자들이 벙어리들에게 (소리내어) 말을 하게 교육을 시킨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좋은 뜻이었겠지요. 자신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목이나 혀의 감각등 만을 (센세이션) 기억하면서 내야하는 어려운 일이었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수화를 (손으로 말하는 사인렝귀지) 덜 배웠거나 안 배웠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의사와 과학자들이 차차 깨닫게 된 것이 있어요. 어떤 이유로던지 수화를 배웠던 사람들보다 이렇게 말을 했던 벙어리들이 지능이 더 낮고 사회생활에 더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요. 왜 그랬을까요?

입으로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벙어리지만 수화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만약에 골프를 치면서 앞에 물이 딱 버티고 있는 고약한 상황에 부딪치면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할까요? (어떤 내면의 말을 할까요) 수화를 통해서, 우리가 음성언어로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내면의 말을 ‘저넘의 물에 안빠지려면 왼쪽으로 힘을 좀 빼고 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할 수가 있다고 해요. 꿈도 수화로 꾸며, 약간 중국어처럼 한 글자에 많은 의미가 주어진 그런 방식으로 꿈을 꾸기도 하고 또 상황극 비슷하게도 꿈을 꾼다고 연구한 사람들이 말하네요. 그런데 수화를 전혀 모르면서 다만 보통 사람의 음성 언어를 흉내낸 사람들은 이렇게 하기가 훨씬 힘들거나 할 수가 없어서 결과적으로 지능발달도 더디고 또 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다고 하네요.

왜 이런 벙어리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나는 전산기술자로 오래 일을 해왔는데요, 내가 전문적으로 일해 온 분야는 ‘utilising management infrastructure such as Microsoft Configuration Manager to centrally manage large scale Standard Operating Environment’ 이렇게 요약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것을 한국어로 잘 옮겨서 한국에 있는 (전산을 전혀 모르는) 나이든 친척분들에게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아주 풀어서 말을 많이 하면서 장시간 설명을 하면 대략 머리속에서 이 비슷한 일을 하는가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학창시절 수학을 아주 못했는데요 물론 머리가 나쁜 것도 큰 이유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습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시작 부분에 나오는 개념들을 (수학적 약속들) 이해하지도 또 외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론들을 점점 발전시켜나가는 중반 이후에 가면 무슨 외국어인 듯 단어의 소리 그 자체는 들리는데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괴이한 상황이 발생하면서, 선생님들로 하여금 낙심한 마음에 주변에 우연히 놓여 있던 몽둥이를 손에 들게 만들었던 나쁜 학생이 되었던 것이지요. 비록 학창시절 수학의 언어를 익히는데는 실패했지만, 나는 부모님께서 주신 능력을 다른쪽에는 사용하여, 예를 들자면 전산의 언어를 스스로 익히는데는 실패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내 자랑 이야기가 아닌 줄 알지요?

사람이 왜 나이가 들면 수학 영어 말고 다른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명상등을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또 내면의 대화를 자주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내가 조금이나마 배우고 깨달은 것을 여러분들께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내면의 소리에는 두 종류가 있지 싶어요. 사자가 팀웤을 통해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사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냥 로보트처럼 초원에 지나가는 아무 작은 동물이나 앞발로 퍽쳐서 이빨로 물어 띁어 잡아 먹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도 (비록 본능에 기인한 것이지만) ‘일종의’ 생각을 하고 계획을 하며 서로 신호를 보내서 공동의 목표를 협업을 통해서 달성합니다. 이때 사자의 머리속에 어떤 ‘내면의 언어’가 존재하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어쩌면 위에서 말했던 (벙어리 꿈꾸는 예에서) 어떤 상황이나 이미지는 떠오르지 싶어요. 물소때를 혼자 쫒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위험을 감지하면, 어쩌면 지난날 겪었거나 보았던 어떤 상황에 대한 기억으로 말미암아) 몇번 해보다가 뒤돌아 섭니다. 잘못하다가 죽는 줄 알아요.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서 좀 미안한데요 (좀 씹혀도 싸다는 생각도 약간은 있네요) 그 전 서울 시장이 젊은 비서에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냄새를 맡고 싶다’ 이런 종류의 성추행의 말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요? 짐작컨데 아마 사자처럼 ‘본능을 따르는’ (그런쪽으로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그런 생각을 했었을 꺼에요.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접근을 하고 시도를 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가 있을까’ 바로 이러한 사자가 사냥할 때와 유사한 내면의 대화를 자신과 (사자와는 다른 고도의 인간 언어를 이용하여) 했었겠지요. 육신을 가지고 욕망의 지배를 죽는날까지 받는 그대들과 나는 이런 것들에서 결코 (아마 죽는 그날까지)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 ‘수학 영어 말고 어른이 되어서 하는 다른 공부’를 통해서, 그것과는 수준이 좀 다른 ‘내면의 대화를 나눌 능력 또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나요?

전에도 말했지만, 소위 도를 많이 닦으면, 사람 육신으로 말미암은 (정상적인) 욕망이나 욕구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해요. 만약 늙은 승려나 성직자 혹은 철학자가 그런말을 하면 나이가 들어서 밥맛도 좀 없고 또 그곳이 작동이 잘 안되는 것을 어쩌면 득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세상에 알려진 반증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도를 많이 닦는다는 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좀 다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인간과 삶에 대한 연구 / 공부를 하고 (수학 물리등과 마찬가지로 그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또 관련된 내면의 대화를 (reflection) 좀 많이 해 보았다’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이것을 많이 하면 무슨일이 생길까요? 내가 배운 바로는 ‘생각의 기술 그리고 삶의 기술’이 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뭐요?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인간의 육신에 기인한 원초적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요 그런데 뭐가 나아진다는 것일까요? (상대적으로) 그것들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는 있지는 않을까요? 먹고 마시고 그리고 으음… 뭐하고 등등에 ‘덜 집중하고 덜 휘둘리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을 좀 더 지혜롭게 매니지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더 많이 먹고 더 비싼 것들을 마시고 더 많은 이성과… 이런 궁리만 사자처럼 만날천날 하면서 사는 대신에, 자기에게 길게 보아 더 나은 선택들을 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학교때 배웠던, 청각장애를 (아마 시각장애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 극복하고 훌륭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미국인 헬렌 켈러를 기억하세요? 그분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남긴 이야기에 ‘나는 나이들어 수화를 (아마 점자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기 이전에는, 사람으로서 의식은 있었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말해 그 당시에 나는 (사람으로 누구나 가지는) 의식은 있었으되 아무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사자와 같이)’ 라는 말이 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수학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우리가,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것들이 차원을 달리하는 어떤 것으로 진화 발전하여, 자신의 현재 삶을 그리고 다가올 죽음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산중에서 수행을 오래하여 득도했다는 사람에게 시장에 가서 한 두해 생선장사를 하면서 그 득도 수행의 효과를 한번 증명해 보라고 하면 생선장수로서의 성공이 별다른 노력없이 저절로 가능할까요? 수십년 성직자 노릇을 한 사람에게 한 일년 룸싸롱 매니저로 일하면서, 오래 닦은 도를 그 현실에서 한번 직접 적용하고 활용해 보라고 하면 과연 별 어려움이 없이 잘 될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한때 수학에 능했었고, 어떤 시험에 합격했었고 다만 어떤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해왔을 뿐이지 싶어요. 그것들이 우리가 나이들어 자신의 삶을 잘 경영하며 행복한 중년 노년을 누리다가 흙으로 (혹은 천국으로) 잘 되돌아 가는데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도나 수행을 몇십년 해도 삶의 현실에 직면하면 (육체적 욕망 감각 고통, 정신적 고뇌, 관계속에서의 이해의 충돌등)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 싶은데요?

지난 글에 골프 이야기를 좀 했었는데요, 그것 골프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줄 알고 있었지요? 그래도 조금만 더 할까봐요 🙂 위 항공사진에 보이는 파5는 내가 회원인 골프장의 소위 시그너쳐 홀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또 사람들이 훌륭하게 설계했다고 생각하는 홀). 드라이버를 200미터 이상 날리면 작은 개천을 건너 점 두개가 찍힌 장소에서 세컨 샷을 하게 됩니다 (점 세개를 향하여) 혹은 아이언으로 짧게 끊어쳐서 점 한개가 찍힌 장소에서 셋컨 샷을 하기도 합니다. 드라이버의 난조와 더불어 전술골프를 시도하는 요새는 주로 아이언으로 티샷을 하여 점이 한개 찍힌 장소에서 (비교적 자신있어 하는) 우드로 세컨샷을 점 세개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개의 점이 찍힌 장소에서 앞 개울까지는 몇십미터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너서 멀리 있는 두번째 벙커와 큰 호수까지는 거리와 방향도 넉넉하여 거의 문제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수차례 그것도 연속적으로 공의 대가리를 까면서 (탑핑) 세컨샷을 개울에 쳐박았습니다. 아무도 내 샷을 방해하지도 않았고 또 라이도 좋았으며 (또 내게는 너무나 놀랍고 또 억울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내가 그자리에서 세켠샷을 어드레스 하면서 100% 모든 상황을 명백히 의식하고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찬찬히 생각하고 나서 (내면의 대화 후에 충분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서) 샷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울로 풍덩 빠지는 꼴을 연속적으로 당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절망했어요. 그리고 무슨 대책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마치 그 작은 개울이 악마처럼 두려워졌습니다. 해답이 없는 기분이었어요. 지난 글에 골프를 잘 치지 못하는 내게도 한가지 강점이 있다고 했지요? 바로 이런샷을 치고도 성을 별로 내지 않는 것이지요. 물론 마음에 (이고에) 상처를 받긴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깨닫게 되었어요. ‘수행자가 생선장사를 잘 하려면 생선을 팔면서 (그와 관련된 희노애락에 시달리면서) 배우는 수 밖에 없지 다른 방법은 없으며, 100% 상황을 의식할 능력이 있고 또 충분한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100% 된다고 기대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때때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라는 내게는 중요한 교훈이었어요. 아무리 정신을 바싹 차리고 최선을 다해서 가진 능력을 전부 발휘해도 (결과적으로는) 생각대로 안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인생이 아닌가 다시금 깨닫게 되었어요. 궁금하지요? 어떻게 끝이 났는지 무슨 발전이 있었는지 🙂

우드클럽을 잘 다루어 160-200미터를 직선으로 쳐내던 ‘어제가’ 항상 지금의 내 실력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마치 수행자가 생선장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초보로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에요. ‘그 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 나의 우드 실력은 50미터 앞 개울에 연속적으로 쳐박는 수준’이라는 것을 아픔과 혼란을 겪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다시 그 자리에 몇차례 서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목표를 바꾸어 마치 초보 생선장수처럼 (이윤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몇 마리 팔고보자는 심정처럼) ‘무조건 공을 띄우기만 하겠다. 저 50미터 앞 개천 주변에 있는 우거진 잡풀을 넘기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공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나는 성공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진심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이것 속이다가는 심하게 혼나게 된다고 지난번에 말했지요?

그때부터 작은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 세켠샷이 개울에 빠지지 않고 멀리 멀리 하염없이 날아가는 모습을 요새는 자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아요. 내가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프의 여신은 뒤돌아서 나를 보게 될 것이며, 내 공은 (마치 마술과 같이) 다시 그 개천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요. 이 웃기는 골프가 나를 겸손하게 하네요. 탁구나 마라톤을 빌어 이야기 했었어도 전달하려는 내용은 다를 바가 없었을꺼예요. 혹시 골프 이야기를 자꾸 한다고 기분이 언짢았었다면 미안합니다. 이곳에선 누구나 하는 평범한 스포츠일 뿐이에요. 다른사람 말의 본질을 잘 이해 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며, 이때 발생하는 자신의 반응을 자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은 기술이라는 생각인데요 🙂

아는 것과 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과 또 우리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오늘은 이만 줄여요. 또 만나요.

굳어지면 죽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소위 말하는 클리세인가?

시작하기전에 일단 한마디 하자면, 어떤 사람이 말했다더만 ‘If common sense is that common, why is it so hard to see it?’ ‘상식이 정말 상식이라면 왜 그렇게 상식을 보기가 어려우냐?’.

요즘 드는 생각이, 세상 사람들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아는 것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런식으로 좀 객관적으로 단순하고 명확히 구분된다면 얼마나 인생이 더 쉽고 덜 복잡하겠는가 싶다.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섞여 있고, 자신도 남들도 얼마나 아는지 모르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절대적으로 틀리거나 잘못된 생각이나 주장은 드물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속에서 ‘얼마만큼 맞고 얼마만큼은 잘 모르겠고 (혹은 틀리고)’를 좀 객관적으로 심사숙고하기 보다는 (이것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 ‘자신이 지금하는 생각이나 주장속에서 오직 자기가 보기에 맞는 부분만을 내세우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틀린 생각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딱 때어내서 말하면. 잘못된 주장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딱 때어낸 주장만을 보자면… 이러니 세상이 쉽지 않고 복잡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러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하는 생각이나 주장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덧붙이는 두가지 가르침은, (지금 나의) ‘생각이나 주장은 변한다는 것’과 또 ‘자기 자신이라고 (자아, ego) 그렇게 움켜지고 주장할 그것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정말?

다시 굳어지면 죽는다는 말로 되돌아 가보자. 최근 신문에서 읽은 내용중에 ‘나이가 들면 늘어나는 것은 고집과 불만이고, 줄어드는 것은 웃음과 인사’라는 말이 있었다. 고집과 불만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자기 주장’을 적당한 상황에 적절히 하는 센스를 점점 잃음과 동시에, 그것의 절대적인 양이 많아지니 배우자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똥고집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자신의 2차적인 반응이 불만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자기생각 자기주장은 나이가 들면 점점 많아지게 되어 있다. 마치 주름살이나 뱃살처럼. 가만히 두면 저절로 쌓이고 강화되는 것이 바로 ‘자아, ego’ 아닌가? 그것의 표출이 고집이고 불만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어렴풋이 깨달아도 그것과는 상반 힘이 (세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별 소용없이 무너지며 ‘속절없이 늙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머리만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heart & soul이 (영혼이) 동시에 굳어지는 모습이, 고집과 불만이라는 것을 우리들 모두가 자각하기를 바란다.

몸이 굳어지는 것도 막기 어렵고 또한 위험한 일이지만, 머리와 영혼이 굳어지는 것은 더욱 막기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남들도 얼마나 굳어지고 있는지 또 이미 얼마나 굳어졌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고, 종종 굳어지지 않은 자신의 단편적인 모습에 집중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하면 위험하다. ‘이래도 되는가?’ ‘이것이 맞는가?’ 늘 좀 불안해하면서 궁금해하고 또 자연스레 비교도 하고 검증도 하면서 사는 것이 ‘내게’ 더 낫다. 그러면 굳어지기 어렵다.

그런데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불안한 부드러움 보다는 덜 불안한 굳어짐쪽으로 자꾸 가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래도 저래도 좀 안되는 것 처럼 보이지 않나? 그래서 붓다께서는 만족스럽고 여한없이 살기가 어렵다고 하신것이지 싶다. 그래도 생각하며 살아라고 가르치셨지 아마…

삽질의 기록 – 드라이버 장타 (6)

훗날의 장타

장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가 되겠다. 지난번 글을 골프여신께서 우연히 보셨나보나. 좀 마음이 편치 않은 동반자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가운데 주말 아침 라운드를 함께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 하지 않는 3종 세트가 딱 구비되어 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자처한 라운드였다. 누구를 원망하리오 🙂

뿌리가 깊지 못하고 기초가 부실한데도 여기저기 뻗은 가지들이 있다 보니 강풍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딱하고 기가 막힌 것은, 우리 인생의 다른 비극적인 상황들과 마찬가지로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 무너지는 한가운데 있게되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를 써도 그런 상황을 바꾸거나 혹은 그곳에서 빠져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 제발 좀 이런 상황을 앞으로는 처음부터 만들지를 말고 애초에 피해주세요~~~

한번의 4펏을 포함 여덟번의 3펏을 하고서 완전한 백돌이로 환생하고 말았다. 동반자 부부는, 친절하지만 까칠한 남편은 (?? 특이한 조합) 아무렇치도 않다는 듯이 싱글스코어 기록 그리고 실제 싱글핸디캡 골퍼임에도 10미터 떨어진 개울에 공을 3회 연속 빠트리는등 백돌이처럼 한참을 철퍼덕거리던 부인은 갑자기 부활하여 후반 파3에서 홀인원을 치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였다. 겉으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듯 보였지만, 내 마음에는 ‘such is golf’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골프’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저녁에 함께 티비를 보던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밤 늦게 내가 혼자서 무슨짓을 할지 정확히 한마디로 알아 맞추면 용돈을 두둑히 주겠어요.’ 나를 알고 골프를 아는 아내는 ‘차고에 내려간다’면서 반은 맞추었지만 100% 정답을 말하지는 못했다. 정답은 ‘차고에 내려가 고물 골프채를 닦으며 혼자서 조용히 운다’ 🙂 한국은 주택의 절반이 아파트라지만 이곳은 아직도 90%는 단독주택이니 ‘차고에 내려간다’는 것에 다른 뜻은 없다.

인간의 의지가 카르마를 만들며 흔히 비극의 씨앗이 된다고 말했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의지 – 몸부림 – 좌절 – 성취’의 반복되는 과정을 (붓다께서 ‘윤회’라고 표현하셨다) 거치지 않고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을, 다시말해서 장타니 스코어니 동반자가 어떠니 하는 것들을 초월하여 자신만의 잔잔한 즐거움을 골프에서도 또한 인생에서도 찾아서 만끽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르려니와 이런 뼈저런 (?) 경험을 하고나면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쩌면 이렇게 돌고도는 윤회를 피할 길은 정녕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게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또한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훗날의 장타? ‘장타를 노력하지만 전혀 연연하지 않는것’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비거리가 아닐까 🙂

삽질의 기록 – 드라이버 장타 (5)

지금의 장타

1만명에 가까운 골퍼들과 2천회 이상의 라운드 경험이 있다는 어떤 캐디의 말에 따르면, 평지에서 드라이버를 치면 남자들은 평균 180미터 여자들은 140미터 정도 그리고 규칙대로 점수를 매길 경우 스코어는 평균 100타 정도라고 한다. 평지에서 200미터 이상 드라이버를 치면 꽤 멀리 친다고 볼수 있다고 하며 진짜로 90정도의 스코어를 기록하는 보기플레이어들과 함께 라운드를 하면 캐디노릇 하기가 무척 쉽다고 한다.

빈약한 신체로 조금이라도 더 멀리 쳐보겠다고 이전에는 몸을 많이 쓰는 드라이버 스윙을 했었다. 요새 인터넷 골프채널에 자주 등장하는 김국진씨 같은 스윙, 몸과 팔을 휘리릭 돌리며 드라이버 스윙 스피드를 높여 보려는 그런 종류의 스윙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자라 이전에 언급했듯이 드로우샷을 (탁구 드라이버와 유사한, 그래서 땅에 떨어지면 굴러서 더 전진하는) 구사하려고 했었다.

평범한 아마추어 골퍼가 (연습량은 적고 신체 능력은 별로며 뒤늦게 골프를 시작한 사람들이) 이렇게 온몸을 쓰면서 스윙을 하고 또 특정 구질의 드라이버를 만들겠다고 시도하는 행위는, 심신의 끝없는 고통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나는 꽤 시간이 걸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식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무시했고 또 생각조차 않았었던지 모르겠다. 아마 욕심에 눈이 멀고 이상한 고집에 좀 미쳐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은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보장도 없으니 단정하기도 어렵다 🙂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보다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활을 쏘는 것이 훨씬 명중율이 높을 것이고, (이상한 발상으로) 포물선을 구태여 크게 그리면서 궤도를 변화시키며 쏘는 것보다 최대한 직선에 가깝게 화살을 쏘는 것이 명중율이 높을 것이며 또한 전반적인 운동능력이 향상되면 구태여 반동을 가하거나 끙끙대며 용을 쓰지 않고서도 활시위를 천천히 조용히 당길 수가 있을 것이다.

요샌 말도 안타고 포물선도 중지하고 또 휘리릭 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신 발과 하체를 최대한 고정한 채로 복근 (코어) 동력으로 드라이버 클럽이 일정한 궤도를 따라서 오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탁구에서 내가 경험으로 명백하게 깨달은 ‘10% 가벼운 채가 상상보다 훨씬 큰 샷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골프에도 적용하여, 서구인들 체격을 기준으로 만든 내게는 무거운 드라이버 대신에 10% 이상 가벼운 아시안 스펙의 드라이버와 더 부드러운 샤프트를 사용한다.

최근 라운드에서 드라이버샷이 80% 페어웨이를 지키며 적절한 거리를 내는 바람에 좋은 스코어를 두어번 기록하였다. 보기플레이어들은 드라이버가 안정된 라운드에서는 어렵지 않게 80대를 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틀린말은 아닌 듯하다. 좋은 스코어를 함께 유지하던 동반자와 라운드 후반 무렵, 가장 어려운 스트로크 1홀에서 티샷을 하게 되었다. 396미터 파4 홀인데 전체적으로 오르막 경사다. 내가 먼저 친 드라이버가 운좋게 잘맞아 160미터 내외의 세컨샷을 남기게 되었다. 평소에 나보다 20미터는 더 보내는 내 동반자는 이것을 보고서 너무 감동(?)했던지 2번의 연속 드라이버 오비를 내면서 그만…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요. 그냥 어쩌다 한번 잘 맞았어요. 골프의 여신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

아까 위에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식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당시에는 왜…’ 이런 말을 했는데 어쩌면 그 해답이 ‘몸과 마음은 동시에 변화되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유흥준 선생이 조선시대 어떤 글에서 인용하여 유명하게 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내 미천한 경험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몸이 변화하면 마음도 따라 변화하리니, 그때 마음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몸과 마음은 동전의 앞뒷면이며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가지의 표현일 뿐임을 잊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