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 인간과 폭력 1

베트남에서 수입되는(?) 수많은 신부들, 천문학적인 규모의 한국-베트남간의 경제협력 그리고 우리세대만 하여도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상당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진 경우도 있어서 베트남은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했던 형님뻘 되는 베트남 친구도 있었고 또 직장에서는 매주 탁구를 치는, 보트피플로 이곳에 정착한 베트남인 동료도 있다.

이 훌륭한 도큐멘터리를 보기전까지 나는 내 자신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상당한 그리고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였었다. Ken Burns라는 그야말로 ‘위대한 감독’이 연출한 이 탁월한 베트남전쟁 도큐멘트리를 나는 2년전에 처음 보았었다. 10부작인데 약 15시간에 걸친 대작이다. 이번 여름 좀 한가한 시기에 10부작 전체를 다시 시청하였다. 2주에 결쳐서 보았는데 오늘 오전에야 끝이 났다.

언젠가 베트남을 한번 방문하고 또 기회가 된다면 무언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그런데 한국측에서 베트남정부에 어떤식으로건 사과의사를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표명 하려고 하면, 베트남정부는 ‘경제협력을 강화하면 좋겠다’면서 늘 직접적인 응대를 피하는 태도로 일관해 왔다는 것을 듣고서 의아해 했었다. 지금도 베트남에 수없이 남아있는 ‘우리 부모형제를 학살한 한국군을 대대손손 결코 잊지 않겠다’는 원한 맺힌 비석들과는 대조적인 반응이 아닌가?

얼마전 한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의 유족이 한국정부를 (국방부) 상대로, 자신의 부모도 희생된 구체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일이 있었다. 그 수많은 증거들과 확인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가 그 유족에게 보였던 반응은, 일본 전범들과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의 영령을 분리해 달라는 소송에서 최근 일본정부가 보였던 반응과 매우 유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송결과를 발표한 일본인 판사는 딱 한마디 ‘기각한다’고 했다던가. 한국정부는 그 베트남 유족에게 ‘증거 불충분’ 이라고 말했다더만.

어쨋던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인데, 승전국인 베트남은 말 그대로 전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패배한 나라, 특히 전쟁의 주체도 아니며 용병을 파견했었던 한국측으로 부터의 사과 따위는 좀 웃기는 이야기로 치부한다는 말을 들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승리한 이 전쟁에 관한한, 한국은 왈가왈부할 대상조차 못된다는 태도다. 듣고보면 일리가 있기도 하고 더 쪽팔리는 기분도 든다.

그 도큐멘터리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것을 보기 전에는 나는 나름대로 베트남이라는 나라와 국민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존중 혹은 존경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 2 나라를 상대로 이십년 전쟁을 치루어, 프랑스군대도 또 미국군대도 힘으로 박살내고 자기들의 영토에서 쫓아낸 자존심의 나라요 국민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두번째로 도큐멘터리를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고 또 느끼게 된 것은, 미국과의 십년전쟁은 사실상 ‘미국이 개입했던 베트남 내전’이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끼리 공산주의니 자유민주주의니 하면서 편을 갈라, 백만 이백만 서로를 죽이는 그 미친 내전에, 미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참전했었고 그들 자신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으로 패전하고 쫒겨났던 전쟁이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도큐멘트리 마지막에, 물론 세월이 반세기 가까이 지났기에 할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 당시 참전했었고 또 승리했던 북베트남 군인들과 베트콩들 중에서 이런말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그런 엄청난 희생을 치룰만큼 그 전쟁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무척 공감이 되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또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 되돌아 보는 지난 역사, 특히 이렇게 인간들의 의지가 충돌했던 큰 갈등과 폭력의 기록들은, 내게 와닿는 바가 이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단지 살생이나 폭력을 하지말라는 도덕책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고. 다음편에…

카르마는 당사자가 죽어도 소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의식과 의도를 가지고 행했던 것들의 결과물인 카르마는 (업 혹은 업식은) 설령 그 당사자가 죽고난 후에도 쉽게 그리고 즉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카르마에 산 사람들이 휘둘리고 그들의 인생이 좌지우지 되는 것을 제 자신과 또한 주변에서 쉽게 그리고 자주 볼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인만 되고 나면 혹은 결혼만 하고나면, 그 부모인 내가 여태껏 만들어 놓은 카르마에서 벗어나 그들이 자유롭게 살게 될것으로 생각하세요? 그 아이들 나이의 두배가 훨씬 넘도록 세상을 산 당신이 바로 어제, 지난달 혹은 작년에, 의식과 의도를 가지고 했던 (그리고 또한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언행들이, 이미 돌아가신지가 오래되었거나 혹은 멀리 사시는 연로한 당신 부모님이 만들었던 어떤 카르마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당신 생각의 버릇, 반응의 방식 그리고 어떤 결정들 속에 그분들의 그림자와 영향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부모자식관계나 부부관계등 밀접한 인간관계는 카르마가 씨줄날줄로 복잡하게 얼키고 설켜 있습니다. 이것을 마치 날카로운 칼로 단칼에 잘라버린다고, 그 많던 카르마가 동시에 단번에 떨어져 나가고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있던 카르마 위에, 더 풀기 어렵고 복잡한 새로운 카르마를 덧붙이는것 뿐입니다. 결코 당신 곁에서 저절로 떠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사랑하는 그 아이들에게서도, 설령 당신이 죽은후에라도, 저절로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씨줄날줄을 한올두올 풀어내야 합니다, 그래도 꼭 해야만 한다면 말이예요. 그래야 당신도 상대방도 또한 당신들이 사랑하는 아이들도 자유롭고 장차 행복하게 살수 있을꺼예요. 아니 최소한 당신이 그들의 삶에, 아무도 원치않고 또 아무런 필요도 없는 부당한 카르마를 평생 짐지우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쉽고 빠른 길은 두고두고 부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선택의 결과를 당신 자신만 감당하게 된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지금 본인도 깨닫듯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부모님들께서 당신께 했던 것들 그리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기억해 보세요. 감사하고 좋았던 것들은 반복하여 당신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인간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좋지 않았던 것들은 당신 자녀들에게 어떤 형태로건 물려주지 않으려고, 당신이 죽는날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부모는 이렇게 힘들고 소리없는 과정을 거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뛰어 올라간 산위에서 나는, 나의 부모들이 내게 남긴 카르마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들의 은혜를 감사함과 동시에, 내가 내 자식에게 어떤 부모로 어떤 카르마를 남기며 살다가 떠나게 될 것인지 생각하며 나 자신의 건투를 빌어 봅니다.

당신도 나도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며 또한 동시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지당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들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때와 장소 그리고 방법을 선택하시길 새해 인사를 갈음하여 기원드립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원인을 모르면 결과라도 따라해본다?

중국의 전설적인 미인이라던 월나라 서씨 이야기를 아세요? 이 미녀가 아파서 찡그린 표정까지도 아름다워서 주변 여자들이 그 표정을 따라했다고 하네요.

사무실 내 뒷쪽편에 앉아서 일하는 젊은이는 한눈에 보아도 선하게 생긴 퉁퉁한 녀석인데요 (동물학을 대학에서 전공하고 동물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꿈이라네요. 지금은 전산일을 하고 있지만서도), 하루종일 양발로 재봉틀을 돌리고 있어요. 한쪽 발을 떠는 넘은 가끔 보았어도 이렇게 양발을 하루 종일 쉼없이 일하면서 떠는 넘은 나도 처음 🙂 그런데 덧붙여서 하루 종일 기지게를 켜요. 아마 나름대로는 어떤 실내체조랍시고 (혹은 마이크로포즈?) 의도적으로 하는것 같아요. 이런말을 하면 듣는 사람들이 기분이 좀 안좋겠지만, 나는 이 젊은이가 세상에 산 기간보다도 더 오랜 기간동안 매일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컴퓨터앞에서 일을 해왔어요. 물론 오래전에 한때 손목이 아팠던 적이 있었고 (아마도 손목수근관증후군 Carpal tunnel syndrome) 또 눈도 불편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꾸준한 운동과 관리로 지금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일하고 또 이 젊은이가 이미 끼고 있는 안경도 쓰지 않아요. 자주 단것과 기름진 것들을 사먹는 이 녀석의 버릇을 보면서 ‘야! 이넘아 나가서 좀 뛰고 운동을 해라. 하루 종일 양다리나 달달 떨고 기지게 켜면서 운동이랍시고 쥐랄하지 말고’ 이런 생각이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요.

아마 한국이었다면, 소위 말하는 꼰대 고참이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No no! 절대 그런말 하면 안되요. 개인적으로 반발할 뿐만 아니라 좀 못된 넘이라면 매니저나 인사부를 통해서 공식항의를 할수도 있어요. 이곳은 그만큼 개인주의가 발달한 곳이랍니다. 며칠전에 말했던 드라마 ‘미생’에서 나오는 그런 끈끈한 직장생활은 (어떨때는 너무 끈적끈적?)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않아요. 일 마치고 한잔? 어쩌다 그런 분위기의 직장도 드물게 있긴 한데요 (젊은이들이 위주인 환경 혹은 매니져가 술꾼인 직장등) 대부분은 ‘일 마치고 문 나서면 남남’이며 인생은 ‘집에서 개인적으로 찾는것’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예요.

한가지 이야기를 더 할까요. 혹시 짐바브웨란 나라의 무가베란 독재자를 기억하세요? 이 넘이 짐바브웨라는 나라에 끼친 해악을 들으면서 (나도 짐바브웨 사람 2명을 친구로 또 직장동료로 옛날에 알고 있었어요. 물론 이 사람들과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서도요) 와! 이넘은 왜 이렇게 죽지 않고 장수를 하는 것인가? 언제 이넘이 죽어서 짐바브웨 사람들이 숨을 쉬고 정상적인 삶을 살수가 있을까 이렇게 늘 저주를(?) 퍼부었어요. 이 나쁜 넘은 100살에서 몇살 빠지는 천수를 누리다가 죽은지가 얼마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 이넘이 죽고 나서부터 짐바브웨에 평화와 번영이 왔을까요? 아니, 오기 시작했을까요? 썩은 이빨을 빼고 나면 건강이 저절로 오는 것일까요? 왜 썩은 이빨이 처음부터 생긴 것일까요? 그 썩은 이빨을 허락했던 구강환경과 생활습관이 발치로 말미암아 저절로 달라질까요? 담배를 끊는다고 저절로 건강해질까요? 대통령을 잘 뽑기만 하면, 아니면 지도층의 잘못을 끊임없이 크게 비난하고 그 사람들을 갈아치우면 세상이 정말 달라질까요?

무가베나, 지금 감옥에 있는 극히 함량미달인 전직 여자 대통령같은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년전에 한국을 방문했을때 친구들 중에서 이 여자를 크게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나는 속으로, 국민의 투표로 뽑은 한 나라의 수장을 이런식으로 막말하고 조롱해도 되는가 반발심이 많이 들었었어요. 이 여자의 실체가 차마 그렇게까지 골때리는 줄은 나도 상상을 못했었던 것이었지요), 내가 생각하건데,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잘하면 70점 못해도 60점’ 정도가 아닐까요? 우리는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똑같은 생물학적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또 비슷한 문화와 환경의 산물입니다. 아무리 날아도 100미터를 보통 사람보다 2배 이상 빠르게 뛸수가 없고 마라톤을 절반보다 더 빨리 완주할 수가 없어요. 그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길고 오래 크게 본다면 말이지요. 자기가 못하는 것을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강요하면서 못살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 이제 본론으로 🙂

현대에 들어와서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 중에서 집단주의나 독재주의가 발달한 나라는 없습니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이전에 블로그에서 말했듯이, 개인주의가 발달해 있습니다. 사무실 뒤에 앉은 젊은이가 직무와 관련된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개인적인 버릇이나 취향 혹은 선택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지 않는것이 ‘보다 더’ 정상이라는 것이지요.

언젠가 우연히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영국인 미녀와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어요. 그녀도 나도 스톡홀름 마라톤을 완주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이야기를 몇시간 나누게 되었는데요, 이 멋있는 30대의 여자를 통해서 영국에서 벌어지는 ‘브렉싯’에 대해서 듣게 되었어요. 아니 Brexit이 얼마나 평범한 영국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지 듣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이렇게 정치에 좀 미친 상황도 어쩌다 있지만, 내가 알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개인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따지고 보면 Brexit도, 자기들 일자리에 그리고 삶에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영국사람들이 광분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축구만큼도 영국인들의 관심을 끌지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선진국 사람들이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은 첫째로는, 정치가 사람들의 삶을 현저하게 발전시키거나 크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겠고 둘째로는, 그렇게 자기와는 별로 그리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곳에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과 관련된 곳에 (다른 사람들에게 왈가왈부할) 에너지를 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 싶네요.

무가베가 죽어도 짐바브웨는 당장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아니, 짐바브웨의 발전을 크고 길게 보면 무가베는 그저 일어날만한, 이빨을 오랫동안 닦지 않고 좋지 않은 것을 먹는 버릇을 가진 사람의 이빨이 썩는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그런 종류의 일이었지 무슨 결정적인 일이나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예요. 히틀러가 일차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해서 부상당했을때 우연히 어떤 영국군인이 자비를 베풀어 죽이지 않았다는데요, 그때 히틀러가 죽었다고 그 다음에는 세상이 평화롭고 전쟁이 없었을까요? 어금니가 썩을 상황이 지속된다면, 오른쪽 어금니가 이미 빠져버린 상태에서 왼쪽 어금니가 썩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썩은 이빨 아프게 빼면서, 구강 관리하지 않고 나쁜 버릇을 가졌던 자신을 깨닫고 구강관리의 전기로 활용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또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을테고요. 담배를 힘들게 끊어서 만암의 근원을 멀리했지만, 금연이 다이어트와 운동에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못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꼰대짓을 하는 것이 왜 바보짓인지 너무 길게 이야기 했나요? 왜 지나치게 오지랖 넓은 짓을 하면서 자신의 에너지와 삶을 낭비하는 것이 길고 크게 보면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리석은 짓인지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 했나요? 가진 것이 별로 없고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은 어쩌면 월나라 서씨의 찡그린 얼굴이라도 따라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훨씬 더 이익이 아닐까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

혹시라도 이 글의 의미를 ‘무기력 무책임 무감각’ 이런쪽으로 해석했다면, 이글들을 읽어 보면 좋겠어요. 비행기 타봤지요? 이륙직후 승무원들이 비상착륙 교육할때 뭐라고 합니까? ‘자신이 먼저 산소 마스크를 확실하게 착용을 하고난 이후에 주변의 가족과 다른 승객을 도우라’고 하지요. 내 경험에 따르면, 개인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단지 비상착륙뿐 아니라 일상 사회전반의 모든 일들이 바로 이러한 상식을 근거로 (이러한 상식을 인정하며)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같은 한계와 수준을 공유하는, 어떤 주어진 시간과 공간속에서 잠시 있다가 가는,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역사를 바꾼, 역사에 남을, 시공을 초월한 위대한 영웅이나 성인은 거의 없어요. 내 주변에는 확실히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 주변에도 거의 없을꺼예요. 그러니 그런것 될려고도 하지말고 찾으려고도 하지말고 애먼사람 등떠밀어 그렇게 억지로 만들려고도 하지 마세요.

‘자신이 먼저 산소 마스크를 확실하게 착용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주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며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존 그리고 개인 행복 추구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옛날에 아내가 멋을 좀 부릴때면 ‘월나라 서씨 몸종’ 운운 하면서 야비하게 놀렸던 적이 있었는데요, 어쩌면 아내는, 내가 오늘에서야 깨닫는 이 진실을 이미 그 옛날부터 알고서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지도 모르겠어요 🙂

부치지 않은 편지

링컨대통령의 부치지 않은 편지 이야기를 들어보셨어요? 미국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지휘를 맡았던 최고사령관이, 남군을 요절내고 노예를 해방시키며 전쟁을 끝낼 절호의 기회를 수긍할만한 이유없이 미루고 또 이해할수 없는 이유로 회피하다가 그만 놓치고 난 이후에, 극도로 화가났던 링컨대통령께서 (자신의 지휘를 받던) 그 장군에게 쓴 편지인데요, 대통령께서 사망한 이후에 서재에서 부치지 않은채로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나도 읽어 보았어요. 영미문화권에서는 비록 상하관계가 명백한 경우라 하더라도 심한말로 나무래는 경우를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거의 보지 못했는데요, 상대방의 위치나 권위등을 존중해 주려는 배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욕이나 심한말의 인플레이션이 적은 곳에서는 조금만 억양이나 톤을 바꾸어 말해도 그 의미가 잘 전달되기 때문에 굳이 쌍욕이나 상대방을 모욕하는 나쁜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링컨대통령께서 쓰신 그 편지는 이런 문화적차이를 이해하고 읽기에도, 비록 자제하며 말하고는 있지만 극도의 실망감과 좌절 그리고 분노를 드러내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해요. 대통령께서는 이 편지를 쓰기 전에도 쓸 때에도 그리고 쓰고 나서도 몹시 괴로워했을것임을 저는 짐작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서랍에 넣어 두고 일부러 부치치 않으신것 같다고 해요. 물론 역사속에서 그 장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당시 북군은 이미 무능한 사령관들을 수도 없이 교체하며 어려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 사람도 이전 사령관들이 갔던 길을 따라 갔겠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북군이 승리했고 노예는 해방되었으며 링컨대통령은 미국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남을 훌륭한 위인으로 남게 되신것이지요.

그대도 쓰고 부치지 않은 편지들이 있나요? 나는 있어요. 링컨대통령처럼 종이에 잉크를 묻힌 펜으로 쓴 편지는 아니고, 비록 컴퓨터에 저장된 워드파일로된 편지들이지만 본질은 같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대통령께 배운 면도 있겠지만, 제 자신이 가끔씩 글로 저의 폭발하는 감정을 쓰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지 제가 쓴 부치치 않은 편지들은, 어쩌면 처음부터 부칠 의사가 거의 없던 편지들로서 그 취지가 약간은 변색된 면이 있겠네요.

어쨋던 저는 그 편지들을 시간이 지난후에 다시 읽어봐요. 짧게는 몇주 길게는 몇달 혹은 몇년이 지나서 읽어보는 저의 부치지 않은 편지들은 제게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부끄러움입니다. 놀라셨나요? 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장 많이 느꼈어요. 내가 그 당시 정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수준의 편지를 썼던가? 무었이 나로 하여금 지금 보기에는 내가 쓴 것이라고 차마 믿기 어려운 내용과 수준, 그리고 나아가 그 편지의 발단이 되었을 사건이나 상황을 극히 유치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러한 글들을 쓰게 만들었던가 자문하게 됩니다. 부치지 않았길래 망정이지, 만약 부쳤더라면 내쪽에서 문제를 훨씬 크게 확대하고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았을것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저는 제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내가 격정에 사로잡혀 있을때 얼마나 더 어리석게 되고 눈이 더 멀게 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의 횟수가 거듭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치지 않은 편지를 통한 저의 깨달음은 어쩌면 제 자신에게, 설령 제가 이런 상황속에 빠져 있을때라고 할지라도 바로 이런 기억을 불러와, 저로 하여금 이전에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했었을 그런 언행들에 커다란 의문을 던지며, 저의 잘못된 확신을 무너트리고 제 입을 다물게 하며 저의 사나운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싶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다른사람들을 통해서 배우고, 보통사람은 자기자신을 통해서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것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다고 하지요. 그래도 보통사람들 끝에라도, 이런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좀 끼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괴로운 그대, 오늘밤 부치지 않을 편지를 한번 써보시지 않으렵니까?

개가 당신의 자식?

인연은 소중합니다. 설령 개와 맺은 인연일지라도, 십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다 보면, 특별하고 애틋하고 또 잃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요. 우리와 함께 12년 세월을 살았었던 버둑이 녀석이 죽은지도 이제 2년이 되었어요. 뒷산에 온 가족이 울면서 묻어 주었는데 요새는 자주 가지 않게 되네요. 하지만 출퇴근길에, 버둑이가 다니던 그 가축병원을 지나면 아직도 생각이 많이 납니다. 처음 우리집에 데리고 올때 안고 왔던 사람도 나였었고 또 안락사 시키러 마지막으로 그 가축병원을 함께 걸어 갔던 사람도 나였어요. 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었는데요, 그 어리버리하고 먹을 것만 밝이며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잘 자던 븅신개 (내 나름의 유머러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버둑이는 내게 좋은 교훈도 남겨주고 떠나 갔어요. 지금도 그 븅신개를 생각하니 븅신주인이 눈물 나네요.

몇년전에 호주에서 인도네시아로 수출한 도축용 소를 (어떤 이유로 소고기를 수입하는 대신에, 살아 있는 소를 수입하여 자기들이 직접 도축. 호주 북부와 인도네시아는 가까운 거리) 인도네시아인들이 비인도적으로 다루는 장면을, 아마도 호주동물보호단체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도축장에서 몰래 찍어서 호주 전체에 방송을 하면서 크게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던 적이 있었어요. 혹시 여러분도 봤을지도 모르는 ’60 Minutes’라는 프로그램에, 이 내용이 방영되는 것을 나도 보았어요.

그 나라의 수준을 보려면, 사람들이 장애인들과 동물들을 어떻게 대접하는가를 보라는 말이 있어요. 지당한 말이지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수준에 맞게 도축하려는 소들을 대접합디다. 그 사람들이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대접할 것 같아요? 가난하고 무식하면, 더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당연하고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인도네시아도 차차 호주처럼 부유해지고 또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면 도축장 환경도 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방식도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민주화되고 더 선진화되겠지요. 지금 선진국인 나라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겠지요.

그런데 방송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돈받고 판 소들이 인도네시아 도축장에서 얻어 맞는 것을 보는 호주인들이 그만 흥분하여 그 소들과 자신들을 동일시 하기 시작했어요. 동물애호협회나 그런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이지 싶은데요, 몰래 찍은 필름에 등장하는, 얻어 맞고 나쁘게 대접 받는 호주소들을 설명하면서 사람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저 앞줄에서 맞고 있는 소는 ‘John’ 그 뒤에 쓰러져 있는 암소는 ‘Jenny’ 이런 식으로 말이예요. 그 장면을 보면서 그런 이름을 듣는 호주 사람들은 기분이 어땟을까요? 마치 내 친구 ‘John’을 혹은 내 이웃 ‘Jenny’를 야만한 동양인 새끼들이 마구 팬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단번에 생기지 않았을까요? 이것을 노렸겠지요, 그리고 성공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소수출 금지).

그때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딱 들었어요. 그 ‘John’과 ‘Jenny’를 호주에서도 죽여서 스테이크로 만들어서 방송전에 당신도 먹고 왔잖아요? 아니 채식하라는 말이 아니고, 식용으로 길러서 판 소가 비록 도축되는 과정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마치 사람처럼 감정이입을 할 수가 있나요? 그리고 그 일부 호주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인) 목적은 달성했을지 몰라도, 이런 발상 자체가,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극히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도 무시했을 꺼예요.

작년에 버디와 오선이 이야기 하면서 ‘개는 개로 대접하는 것이 좋다. 주변에 있는, 개 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사는 동족 인간들에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 개라고) 나오는데로 지껄이고 하고 싶은데로 하면, 당신 자신에게도 그리고 개에게도 좋지 않다’고 말했었어요.

이번주에 우연히 개와 관련된 몇개의 기사를 읽으면서, 기사를 쓴 개인도 단체도 개를 ‘아이들’ ‘우리아들’ 같은 말로 공식적인 매체에서조차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참 왜 이러나 싶네요. 일전에 말했던 ‘out of proportion’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와 인연이 있다고 개를 아이니 아들이니 부르면서 마치 사람처럼 대접하면서, 나와 인연이 아직 없거나 혹은 내가 그 인연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개보다 못한 상태로 살고 있는 것에 털끗만큼의 관심도 없이 살면, 삶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까요? 사람이 사람의 도리가 있듯이, 개나 짐승도 (특히 사람들과 비교할때면) 그들의 위치와 받아 마땅한 대접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호주넘들이, 잡아 먹으려고 키워서 돈 받고 판 소를 ‘John’이니 ‘Jenny’니 부르는 꼴이나, 어떤 자들이 자기 개를 ‘아이’니 ‘아들’이니 부르는 꼴이나 참 가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에 내가 호주인들이 어떤 특징이 있다고 했었지요? 두 나라가 닮아가나요? 점점 선진국이 되어가는 모습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