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산악인 허영호에 대한 오래된 기사를 최근에 보게 되었다. 그가 한국산악회와 원수진(?) 이유에 대한 것들인데, 조선일보가 인터뷰한 내용을 먼저 보았다. 등산인으로서의 성취도 성취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살아온 길들을 읽으면서, 이 사람 도인인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늘 하듯이 크로스첵크를 (비교확인) 해보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산악회 부회장이 월간 ‘산’ 이라는 잡지에 산악회를 대표하여 올린 글이 있었다. 매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세상사가 칼로 무우자르듯 단순하고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 각자의 처지에 따라 동일한 일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해석되는 경우도 흔한 일이니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지만, 내 느낌으로는 한국산악회쪽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다시 허영호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이 사람이 과연 아까 내가 생각했던, 그 도인에 가까운 놀랍고 대단한 사람인지 아니면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부족함으로) 큰 실패를(?) 했던 사람이 화려한 언변으로 내로남불 하면서 일종의 정신승리나(?) 추구하는 것인지 햇갈리게 되었다.
오늘 산을 뛰다가 문득 ‘아! 해탈이란 것이 (득도, 경지등 어떤 표현을 쓰건 상관없다) 정말 어려운 이유가, 반드시 우물안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부대끼고 엮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스스로는 우물안의 개구리를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로구나’ 깨닫게 되었다. 이래서 정말 어려운 것이로구나!
내가 글을 잘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글을 잘 쓰는 것과 인생을 잘 사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가로질러 흐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들을때면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허영호의 인터뷰를 읽고나서 마음이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내가 이 사람처럼 말하거든, 나도 그와 비슷한 태도로 살거든, 그리고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감동할(?) 때도 있었고. 내가 그의 인터뷰를 맨 처음 읽으며 감동했었듯이.
괜찮은 여자 하나 팔자 고쳐주려고 내가 이리저리 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십년도 훨씬 전에 중매를 딱 한번 했었는데 아직 해로하고 있으니 성공율이 100%이긴 한데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첫 상대로 오래전부터 내가 잘 알던 종교인 한 사람을 설득해보았는데, 한이틀 기도를 한 후에 응답이 왔다. 고맙고 좋기는 한데 자기는 그래도 자기가 믿는 신과만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회신을 기다리면서 이 사람의 강연을 유튜브로 몇개 보았는데, 이분이 하는 일의 성격과 퍼스날리티를 알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강한 표현들을 하고 있구나’ 느낌이 들었다. 그의 거절을 더 이상 설득없이 조용히 받아들였다.
‘다른 개구리들과 우물안에서 부대끼고 엮이며 살지만, 그들과는 달리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높은 자리에서 앉아서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면서 떠들어대는 자들을 보면, 자신은 우물안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부대끼지도 않고 엮이지조차 않으면서 어쩌자고 다른 개구리들을 보면서 우물밖으로 나가라고 떠들어 대는지 기가 막힌다. 종교의 한계요 인간의 비극이다.
해탈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위험한 신호들을 생각해 봤다. 첫째로 꼽을 것은 ‘강성’이다. 책을 읽고 머리로 공부해 생겨난 이론들이 강하고, 그것을 강하게 표현하며 또 강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예외없이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 어떤 분야에서건 경지에 오른 사람이 ‘강성’인 경우는 없다. 둘째로, ‘분리’다. 사람이건 그 무었이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나와 남 혹은 우리와 그들처럼 대립구도를 만들어 낸다. 말이나 글이 그런 이분법적 구도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에고다 (ego). 나는 다르다는 거지, 내가 속한 이곳은 네가 속한 그곳과는 다르다는 거지. 아주 위험하다. 셋째로, 미려한 글이나 말로 ‘설득’하려는 태도다. 해탈의 가능성은 스스로 뱉아내는 미사려구와 반비례한다.
언젠가부터 믿음이 들기 시작했는데, 해탈하거나 도 트고 나도 유튜브에서 떠들고 책써서 팔고 안 그러지 싶다. 뭐 딱히 할말도 없고 또 뭐 좀 팔아서 돈벌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다 그런 욕망도 없을테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표가 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스쳐 지나간 해탈 도인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한국 방문 후에 연락이 재개된 한 친구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위에서 말한 위험한 신호들을 드러내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면서 마음이 무겁다.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강하게 말하고 너와 나를 분리하며 자꾸만 설득하려고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무것도 증명할 것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고 또 증명할 대상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것도 배우는 과정이니 발전의 일부 아닐까 싶다.
이번에 한국에 잠시 머무르며 사람들의 언행이 무식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경우가 몇차례 있었다. 내게 ‘마음의 노안’이 와서 세상이 굴절되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면들이 늘 있었는데 문제 삼지 않다가 요새들어 내가 문제 삼기 시작하는지 명확히 알기가 어렵다. 이 친구와도 ‘오랜 친구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시각과 ‘오랜 친구사이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라는 시각이 충돌하는 경험이 이번에도 있었다. 귀국해서 아이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아이가 세대도 사고방식도 다르지만 내가 보기에 소셜 아이큐가 높다. 자기 생각에는, 전자쪽이 더 맞는 것 같고 (오랜 친구사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느낀 부정적 감정을 상대방에게 어떤 식으로건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에 주고받은 팩트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고, 아이는 그보다는 관계 자체에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인생의 대부분을 독고다이로 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한면만 있는 동전이 없고 잘 들면서 손 안베는 칼도 없다. 친구들의 이해와 인내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