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교 (초등학교) 시절 산수를 포기한 원조 수포자중 한사람입니다. 수포자로서의 학창시절은 괴롭고 지루했으며 또한 험난했습니다. 먼 나라로 떠나와 성인이 된 삶의 대부분을 살면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어울릴때 ‘나는 제도교육의 희생자야’ 가끔 농담을 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제도교육의 덕도 보았다’ 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익숙하고 힘이 들지 않는 것을 하려고 하지, 익숙하지 않고 힘이 드는 것은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마치 라틴어처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수학시간이면 나는 ‘저 공식이 우리가 사는데 어떤 관련이 있담?’ ‘지금 배우는 저것들이 정말인지 어떻게 알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시절에는, 필수인 수학과목을 두번 낙제하고선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에 (지금 아내가 된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컨닝을 하는데, 전혀 모르는 기호를 마치 만화 그리듯이 ‘모양을 외워서 그려낸’ 답장으로 동정표를 받아 최하 학점을 받으며 겨우 졸업을 하였습니다. 내가 제출한 시험지를 체점하던 분은 그 괴이한 답안을 보면서 엄청 웃었거나 아니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했었을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살며, 또 이민자들이 많이 종사하는 전산관련 일을 하면서 나는 오랜 세월 수십개 나라에서 온 문화, 언어 그리고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오가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과, 내가 지금 사는 나라 그리고 또 내가 떠나온 한국을 비교해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개인의 능력으로 볼때 한국인 개개인의 능력은, 일본인을 포함한 대부분 나라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여기 예외도 있긴 합니다 🙂 스위스나 독일 사람들에게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당당히 대접 받는 지금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왜 최고의 집단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보면 별로인 일본인들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고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한국인들은 개인적으로 너무 똑똑하다 보니 지도자를 인정하고 따르는 습성이 적고 또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잔머리나 편법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 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도 나라도 자기가 잘하는 것을 더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들어낸 것들을 좋은 머리와 감각으로 재빨리 파악해 내고 나아가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고 바쁘게 사는 세상에서는 ‘그것해서 뭐하게?’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들을 최대한 빨리 흡수하고 나서 한발짝이라도 더 빨리 더 위로 올라 가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학벌, 최고의 직장, 최고의 현직에서 일하는 성격좋고 똑똑한 친구를 이번 한국방문 때도 만났습니다. 최고 공부를 많이한 최고 아름다운 부인과 최고 좋은 차에 동승하여 서울을 잠시 둘러볼때, 수포자 부부에게는 ‘떠나버린’ 한국이 마치 ‘잃어버린’ 선경처럼(仙境) 느껴졌습니다 🙂 그 친구는 장차 은퇴하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또 좀 살기도 할 작정인지 어떤 대학 일본(어)학과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다운, 대단한 수준이라 생각하여 감탄하였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그저 재미 삼아서 또 심심해서, 일본 관련 도큐멘트리, 영화, 드라마 시리즈, 교양 프로그램 그리고 하다못해 맛집 방문기까지 (영어자막의 도움으로) 수없이 보았습니다. 일본을 다른 나라들의 시각으로 보는 도큐멘트리들도 이것저것 보았습니다.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어쩌면 대학을 두어번 졸업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일이나 일본 프랑스는 물론 하다못해(?) 러시아나 중국같은 나라들도 영어로 방송하는 (관영) 채널들이 있습니다. 영어를 통하여 접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은, 한국어로만 (번역포함) 접할 수 있는 양과 범위의 수십배 어쩌면 수백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만큼 쉽습니다.
한국에서 골프를 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위 싱글’을 치는 사람들 중에서는 레슨을 꼬박꼬박 받아서 그렇게 된 사람보다는 자기 스스로 죽기살기로 연습하고 연구해서 그렇게 된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잘 치는 방법은 한국과 전혀 다릅니다. 물론 아마추어 골퍼를 대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 나라에서 골프를 ‘매우’ 잘 치는 평범하고(?) 흔한 방법은 골프를 잘 치거나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는 아마추어로서는 최고 수준의 골퍼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어릴때부터 아빠따라 엄마따라 놀이삼아서 골프장을 들락날락 거렸던 사람들입니다. 어른이 되서 한동안 규칙적으로 골프를 쳤거나 지금도 규칙적으로 치는 사람들인 것은 맞지만 ‘죽기살기로’ 골프를 치거나 ‘미친듯이’ 연습하고 연구하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같은 목표를 이루거나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다른 방법들과 길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같은 길로만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의심할바 없는 권위를 가진 선생들로부터 정리된 방법으로 일본을 배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놀이삼아, 마치 아빠따라 골프장에 와서 퍼터들고 그린에서 장난치듯, 많은 시간을 보낸 일본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듯 ‘나의 생각과 견해’가 생겼습니다. 수많은 일본사람들을, 수많은 상황에서, 수많은 스토리들을 통해서 일종의 교차검증을 하면서 듣고 보아온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권위도 없고 학위도 없지만, 그 어떤 일본 전문가와 토론을 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나의 견해를 표명 할 수 있지 싶습니다. 건방진 말이었지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또 단 하나의 정답이 필요없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왜?’ 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답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밖에는 없지 싶습니다 (‘realise’ 라는 말을 이럴때 쓰지 싶네요).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것들 중에서, 이미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를 잘 고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정답은 주관식 문제의 답처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답뿐만 아니라 문제조차도 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내 삶이 가능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이 시간에 이런 글을 쓰기까지 ‘왜?’를 허락하지 않았던 내가 떠나온 나라 그리고 ‘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가 사는 나라, 둘 다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수포자의 말로가 너무 비참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